대담=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올해는 6·25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6·25전쟁은 신생 대한민국에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의 지원 아래 한반도 공산화 계획을 진행시켰고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대책 없이 전쟁을 맞았다. 바람 앞의 촛불 같았던 대한민국은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했지만 국민은 참담한 고통을 당했다. 전쟁을 이끌었던 건국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극명히 엇갈린다. 한편에선 ‘분단의 원흉’이자 ‘무능력한 전시 지도자’로 매도하고 다른 한편에선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에서 자유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으로 칭송한다. 최근 ‘이승만의 삶과 국가’를 저술한 오인환(74) 전 장관을 3일 서울 서초동 자택에서 만나 이승만의 공과(功過)를 따져봤다. 언론인 출신으로 김영삼정부에서 공보처 장관을 지낸 그는 “공과 과에 대한 평가에서 사실을 가감하거나 평가를 왜곡 또는 미화함이 없이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균형시각을 유지하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진보·좌파 진영은 1946년 6월3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시사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근거로 그를 ‘분단의 원흉’으로 몰아세운다.

“소련 스탈린은 이승만의 정읍 발언보다 9개월 전에 북한에 단독 인민정부를 수립하라고 지령을 내렸다. 그에 따라 소련 군정은 김일성을 임시정부 격인 인민위원회 의장으로 앉히고 사실상 단독정부를 수립해갔다.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은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접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판단 하에, 일단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세우고 다음 단계로 통일정부를 추구해야 한다는 구상 속에서 나온 것이다. 우파의 관점에서는 냉전체제가 형성되는 당시로서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주장이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가장 큰 분단 책임은 소련 스탈린에게 있다.”

―전쟁 직전 한반도 주둔 미군은 대책 없이 철수했고 미국은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국을 배제, 김일성과 소련의 오판을 불렀다. 미국의 잘못된 판단이 전쟁을 초래한 것 아닌가.

“2차대전 이후 미국의 대소련 전략에서 주(主)전장은 서유럽이고 태평양 지역에선 일본이 방어의 축이 됐다. 미국의 한반도 경시론의 속내가 드러난 것이 50년 1월12일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연설이었다. 그는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을 거쳐 필리핀으로 이어진다’면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해 소련과 중국, 북한이 남침을 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미국이 충분한 시간차를 두고 점진적으로 미군을 철수하고 한국군의 전투력을 증강시켰다면 전쟁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 통일론’을 주창한 1949년, 한국의 전력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왜 그런 무모한 주장이 나왔나. 이승만의 실속 없는 ‘북진 통일론’이 북한의 도발을 자극한 측면은 없었는가. 맥아더 미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 이후엔 이승만의 무모한 북진론이 중공군의 개입을 불러 보다 유리한 환경에서 전쟁을 끝낼 기회를 놓쳐버린 것은 아닌가.

“그런 비판이 있다. 하지만 이승만의 북진론은 국익에 도움이 되는 다목적 카드였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북진론은 남한을 적화통일하겠다는 김일성의 ‘국토완정론’에 맞서기 위한 대응 논리였다. 반공노선을 함께 내걸면서 국론을 결집시키고 권력을 강화하려는 국내정치적 요인이 있었고 미국의 군사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외교적 목적도 있었다. 중공군이 개입하는 빌미를 제공한 제1원인자는 의도적으로 중공군의 참전을 부정적으로 본 맥아더 사령관이었다. 그는 미 합참이 준 ‘39도 가이드라인’(미군의 북진에 대한 중공의 경고가 격렬해지자 미 합참이 정한 북진 상한선)을 어기고 계속 쾌속으로 북진했다. 이승만은 맥아더를 맹목적으로 신뢰했다. 그것은 한 광주리에 모든 투자액을 쏟아부었다가 파산하는 경우처럼 위험률이 높은 도박이기도 했다. 중공은 한국군의 단독 북진에 대해서는 내전으로 간주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미군은 39도선에서 멈추고 한국군만 북진했다면 전쟁의 판도는 크게 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엔 안보리의 6·25참전 결의가 이뤄질 때 상임이사국인 소련이 불참한 것은 한국으로선 행운이었다. ‘역사의 신’이 있다면 그 시점에 한국 편에 서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미국의 조기참전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련측 대표가 유엔 안보리 이사회에 불참함으로써 거부권 행사 기회를 놓쳤다. 미국이나 한국에는 역사적인 행운이었다.”

―이승만은 전쟁 발발 이틀째인 1950년 6월27일 새벽, 서울을 몰래 탈출하고 그릇된 전황 방송을 내보내 서울시민의 피란 기회를 박탈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승만은 서울 탈출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비겁자의 오명을 벗기 위해 필사적으로 전쟁지휘에 나섰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대통령의 탈출이 서울시민을 포함한 전국민의 항전 의지를 꺾게 한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회고하고 후회와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군은 1950년 6월28일 새벽 2시30분 예고 없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 수백명의 피란민이 희생됐다. 수많은 서울 시민이 피란을 가지 못해 인민군 치하에서 고통을 겪었다.

“인도교 폭파는 이승만의 심야탈출과 맞물려 잘못된 전쟁 지휘의 대표적 사례가 됐다. 하지만 군 전략의 관점에서 보면 인도교가 폭파되지 않았다면 서울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이 다음날로 한강 방어선을 뚫고 남진했을 것이다. 패주하던 한국군은 재편성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재기불능의 붕괴 사태를 맞을 수도 있었다.”

―이승만은 전시 대통령에 걸맞은 리더십을 발휘했나. 거창 양민학살 사건이나 국민방위군 부정사건 등의 책임 논란에서 그는 자유로운가.

“전쟁 초기 군 수뇌들이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이승만은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하고 장면 주미대사를 호출해 미국의 무기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남침 문제를 워싱턴과 유엔의 대응 현안으로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대통령 개인의 위기 관리는 합격점이었으나 정부를 통솔해 전시 체제를 운영하는 관리능력에서는 허점을 보였다. 심복이던 신성모 국방장관의 잘못으로 국민방위군 부정사건이 일어나고 양민을 대량학살한 거창 양민학살 사건이 실패 사례에 속한다.”

 

 

―전쟁 지도자로서 이승만의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인가.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이다. 한국전 참전국 모두가 휴전을 원하고 있을 때 이승만은 홀로 휴전에 반대하며 상대국이 침략을 당하면 미국이 즉각 참전하는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미국에 요구했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뜻하지 않은 전쟁에 끌려들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휴전협정 회담이 한창이던 1953년 6월18일 새벽 미국과 중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전격적으로 반공포로 석방 명령을 내렸다. 칼을 물고 널뛰는 식의 ‘벼랑 끝 전술’로 미국을 압박한 것이다. 결국 이승만은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2억달러의 원조공여, 한국군 증강 요구를 관철시켰다. 이후 한반도에는 60년 동안 평화시대가 열렸다. 미국의 안보 보장 속에서 한국은 2차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 중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이승만은 조약이 가조인되던 53년 8월8일,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그 조약 때문에) 번영을 누릴 것이며…우리의 안보를 확보하게 될 것’이라고 중견국가로 성장한 지금의 대한민국을 예언했다.”

―북한은 휴전 이후 60년 동안 고슴도치처럼 핵무기라는 가시를 기르며 호전성을 키워가고 있다. 한반도 분단의 원인 제공자인 일본은 지도자들의 과거사 역주행이 도를 넘고 있다. 이승만이 살아 있다면 한국의 대북, 대일 정책과 관련해 무슨 조언을 할 것 같은가.

“아마도 ‘퍼주기’ 같은 대북지원은 어림도 없고 외교적으로 강하게 북한을 조이려 했을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믿을 수 없는 상대로 봤으며 협상하면 속임수 때문에 손해를 보게 된다는 깊은 불신감을 갖고 있었다. 일본에 대해서도 팽팽한 외교전을 펴려 했을 것이다. 그는 ‘일본은 주위의 나무들을 고사시키는 아카시아 같다’고 평가하며 믿을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미국의 건국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국민의 존경을 받는 워싱턴의 얼굴 위로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망명지에서 숨을 거둔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이 오버랩됐다.

“언젠가는 이승만도 건국대통령으로 평가받고 대우받는 시대가 올 것이다. 종신 대통령을 꿈꾼 권력욕이 워싱턴과 이승만을 갈랐다. 그렇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있게 된 근본이 모두 이승만과 관계 있는데 어찌 부정할 수 있나. 김구를 정통으로 보는 좌파식 현대사 인식은 황당한 것이다.” 

사진=김범준 기자

 

+아래 글은 6.25전쟁에 대해 오인환 전 장관과 다른 시각을 갖고 있는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의 인터뷰.

<중앙일보 2013년 8월31일자>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은 2013년 현재 6·25전쟁은 형식을 달리하며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이념분쟁은 대개 ‘역사 전쟁’의 모습으로 전개된다. 한국사 교과서의 현대사 서술을 둘러싼 좌·우파 분쟁이 몇 해째 벌어지고 있다. 6·25전쟁의 원인 규명은 6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갈등의 핵이다. 그런 분쟁의 한가운데 있는 인물이 브루스 커밍스(70)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다. 1943년생인 그가 30대 후반이던 81년 펴낸 『한국전쟁의 기원』이 진원지다. 최근엔 진보 성향 매체에 주로 소개되고 있지만 80년대 그의 영향력은 광범위했다. 6·25전쟁 관련 토론회에서 그는 30년 넘게 주요 연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정전60주년 한반도평화대회 국제포럼’ 참석차 28일 방한한 그를 아산정책연구원(원장 함재봉) 비공개 라운드테이블에서 만나 전격 인터뷰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한국학의 연구 수준을 높였다는 소리를 듣는다. 다른 한편으론 고질적 이념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국 지식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1950년 6월 25일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는 신화는 그로부터 출발한다. 남한에서만 2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며 ‘제3차 세계대전’이라고까지 불리는 전쟁의 발발 원인을 모호하게 만들어 놓았다. 80년대 반미 구호를 내건 급진 이념운동에 학술적 근거를 제공한 이도 그였다.

 냉전이 끝나고 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며 6·25전쟁 연구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면서 ‘커밍스 신화’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소련의 스탈린과 북한 김일성의 긴밀한 협의 아래 전쟁이 일어났음이 확인된 것이다. 하지만 냉전시대에 형성된 그의 신화의 힘은 탈냉전 시대에도 깨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이날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전쟁의 기원』은 소련 비밀문서가 나오기 이전의 저술임을 인정하면서 북한의 남침 사실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남한에선 한국전쟁에 대해 ‘진짜 역사’를 연구할 수 있지만 북한에선 그게 불가능하다”며 “북한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억압적인 국가”라는 말도 했다. “누군가 내 책이 친북한 성향이라고 주장한다면 내 유일한 대답은 나는 친북한적으로 쓰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고 나는 단지 참혹한 전쟁에 대한 진실을 전달하려 했을 뿐”이란 말도 주목할 만하다.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이다. 하지만 ‘6월 25일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본래 입장까지 바꾸지는 않았다.

  - 2000년대 이후 커밍스 교수는 주로 진보 성향 매체에 소개되고 있는데, 그 배경이 뭘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예컨대 경향신문이 나보고 기고문을 써달라고 하고 도쿄의 아사히신문도 써달라고 한다. 이런 신문에 글을 쓰는 이유는 기고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할 이유가 없다. 다만 요청을 받아서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 한다. 미국은 8년간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경험했다. 나는 때로 워싱턴의 브루킹스연구소나 카네기연구소 등에 가서 특강을 하는데 부시 정부 시절에는 아무도 나를 초대하지 않았다. 부시를 비판하려는 의도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단순화하자면 누군가 기고를 요청하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젊을 때는 요청을 받기 전에도 신문에 기고문을 보냈다가 거절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 중앙일보에서 요청을 한다면.

 “기꺼이 하겠다(I will be happy to).”

 - 한국사회에서 6·25전쟁을 둘러싼 이념 갈등이 있고 그것은 ‘역사 전쟁’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사 교과서의 6·25 서술을 놓고 좌·우파 갈등이 벌어진다. 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인데 오히려 북한에 대해 따뜻한 시선으로, 한국에 대해선 차가운 시선으로 서술하는 경향이 문제가 되고 있다. 역사 전쟁에 커밍스 교수도 책임이 있다고 보는데, 이런 글쓰기의 출발이 커밍스 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아닌가.

 “내가 『한국전쟁의 기원』을 쓸 때 북한 사람들은 물론 자유롭게 역사의 진실에 대해 쓸 수 없었고 북한은 지금도 그렇다. 당시엔 남한에서도 마찬가지로 내가 쓴 것처럼 인민위원회나 노동당 등에 대한 내용을 전혀 쓸 수 없었다. 만일 쓴다면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역사연구와 한국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여는, 가능한 한 많은 역사적 진실을 밝혀내서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진실이 어떤 경우에는 북한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남한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다. 그런 점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이 일본에서 지난해 번역 출간됐는데 조총련에선 자기네 매체에 그 책의 사진을 실었다. 나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한국은 분단 국가고 만일 한쪽에서 내 책이 도움이 되고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온정적이라고 한다면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 책이 친북한 성향이라고 주장한다면 내 유일한 대답은 나는 친북한적으로 쓰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고 나는 단지 참혹한 전쟁에 대한 진실을 전달하려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남한은 이제 북한에 비해 훨씬 강력한(much stronger) 나라가 됐다. 그렇다면 북한에 대해 온정적 시선도 감당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북한은 고립됐고 두려워하고 생존에 급급한 실정이다. 분명한 사실은 남한에선 한국전쟁에 대해 ‘진짜 역사’를 연구할 수 있지만 북한에선 그게 불가능하다.”

 - 81년 나온 『한국전쟁의 기원』은 충격적이었다. 50년 6월 25일에 ‘누가 먼저 사격했는가’를 찾지 말라고 썼다. 6·25 당일 북한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전면전을 일으켰는데 마치 단순한 사격전인 것처럼 묘사한 것은 대규모 전쟁 발발의 의미를 지나치게 작게 표현한 것 아닌가.

 “분명한 사실은 남한에선 한국전쟁에 대해 ‘진짜 역사’를 연구할 수 있지만 북한에선 그게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

 “당시 북한은 소련에서 구입한 탱크가 있었다. 소련은 북한에 탱크 구입을 승인했다. 미국은 남한에 탱크 판매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유는 미 국무부가 이승만 정부와 국군 장성들에게 탱크가 있다면 북한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탱크와 비행기를 팔지 않는다는 방침에 대해선 비밀문서에서 확인이 됐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이슈다. 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탱크 공격에 남한은 방어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남한의 방어력 상실에 대해 책임이 있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의 생각은 남한의 국군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격용 무기로 무장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한이 도발하지 않았는데도 북한이 공격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는 논리적인 함축이 담겨 있다. 그런 경우 미국이 남한을 방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탱크에 대해 얘기했지만 나는 지뢰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미국은 남한이 북한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공격용 탱크를 주지 않고 방어용 지뢰를 제공했다. 그러나 국군은 지뢰를 설치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뭘까. 공격용 진출로 확보를 위해서다. 이 모든 것들은 매우 복잡한 문제다. 나는 이런 사실들을 밝혀냈다. 그것은 소련 측 문서가 나오기 전까지 상황이다. 연구를 마치고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을 출간한 것은 90년이다. 그때는 소련이 붕괴하기 전이었고 소련 측 문서를 이용할 수 없었다. 이것이 당신의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당신이 말한 부분에 대해 나는 내 생각을 전혀 바꾼 적이 없다(I haven’t changed my mind at all). 전쟁의 시작은 전쟁의 기원에 비해 여전히 덜 중요하다(The start of the war is still less important than the origins of the war). 48년 5월부터 50년 6월까지 옹진반도나 개성의 상황을 살펴본다면 거기에 6·25 전쟁의 기원이 있었다.”

 - 소련 비밀문서를 통해 6·25전쟁의 원인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소련 측 문서는 전쟁이 어떻게 발발했는지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물론 내 책에는 소련 측 문서가 포함되지 않았다. 내 책과 소련 측 문서는 약간 차이는 있지만 서로 상충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전쟁이 6월 25일 시작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6월 25일 시작됐다고 하면 모든 다른 이슈가 사라져버리고 만다. 사람들은 단지 ‘악(evil)의 북한’이 침공했고 우리는 이런 비극을 당할 이유가 없으며 미국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정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전쟁의 시작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역사학적 질문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질문이다.”

 -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이른바 ‘남침유도설’이 한국의 지식사회에 끼친 영향이 큰데, 남침유도설의 진원지가 커밍스 교수 아닌가.

 “나로선 솔직히 웃기는 얘기다. 『한국전쟁의 기원』 1권은 81년에 출간됐는데 47년까지의 역사만 다루고 있다. 그 책에선 6·25전쟁의 시작에 대해선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커밍스가 남한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전두환 정권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이 중상모략을 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다. 그리고 2권이 90년에 출간될 때는 타이밍이 별로 좋지 않았다. 1년 뒤에 소련 측 문서가 나왔다. 거기엔 스탈린과 김일성이 남침을 공모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시 나는 다른 책을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비난받는다는 것에 대해선 우습다고 생각한다. 1권과 2권은 모두 33장으로 돼 있는데 그중 하나가 전쟁의 시작에 대한 것이다. 거기에는 불충분한 정보(imperfect information)를 토대로 모자이크한 3가지 전쟁 발발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다. 그 장의 전체적인 요점은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는지 더 이상 묻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신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규명하려고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누가 전쟁을 시작했느냐’는 질문 자체를 해체하려고 했다. 그것은 좀 전에 언급한 대로 이데올로기적 질문이기 때문이다.”

 - 소련과 북한의 긴밀한 협의 아래 전쟁이 발발했다고 정리해도 되겠나.

 “50년 1~2월이 되자 스탈린이 마음을 바꿨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공격 계획에 동의했다. 그러면 전쟁이 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소련 측 문서에서 이런 얘기들이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그래. 커밍스가 틀렸다. 트루먼과 애치슨이 맞았다. 스탈린이 시작 버튼을 눌러서 전쟁이 시작됐다’고 했다. 그 후 시간이 흘렀다. 소련 측 문서가 추가로 나왔다. 이제 더욱 전체적인 그림을 얻을 수 있게 됐다. 많지는 않지만 중국 측 문서도 일부 나왔다. 시간이 갈수록 전쟁에 대해 더욱더 전체적인 그림을 얻을 수 있게 됐다.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역사는 변한다(History changes). 역사는 결코 같은 곳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It never stays as same). 새로운 문서가 추가로 공개되면 역사적 관점이 달라진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해선 전쟁 전에 미국 정보기관이 수집한 북한 측 첩보 관련 문서가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 미국은 6·25 전쟁 전에 남한에서 최소한 14곳의 감청 기지(listening station)를 운영했다. 미국은 해안선을 따라 정찰기를 띄워 북한을 정찰하면서 정보를 수집했다. 이런 항공정찰이나 첩보 관련 문서들이 아직까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전쟁 직전 수만 명의 북한 군대가 38선을 향해 이동 중이었다면 미국이 그것을 보지 못했을까?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기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까. 북한과 관련한 대형 문서저장고 한 곳이 여전히 완전히 차단돼 있다. 언젠가 북한이 민주화되거나 붕괴되거나 한다면 이곳의 문서도 공개될 것이다. 이런 모든 관점이 종합되면 한국전쟁 당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더욱 전체적인 역사적 그림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 『한국전쟁의 기원』 1권에서 당신은 “정치적 위기에는 아무도 중립을 지킬 수 없으며 순수한 객관은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남한과 북한에서 각기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지던 시기의 혼란과 6·25전쟁보다 더 격렬한 정치적 위기는 없을 것이다. 그 시기에 대해 쓰는 역사가의 자세, 서술의 방식에서 중립이나 객관이 가능한가.

 “대답하기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책에서 말한 것은 위기 상황에선 이쪽도 보고 저쪽도 보는 객관적인 입장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술의 데칼코마니처럼 남한과 북한을 정확히 절반씩 나눠서 남한은 어떻고 북한은 어떻고라고 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냉전으로 인한 왜곡이 심했다. 미국에서도 50년대 초반에 매카시즘이 유행했고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한국에서도 70년대, 80년대는 비슷한 상황이었다. 더 어려운 문제가 있다. 북한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북한은 강제수용소에 수많은 사람들을 가둬놓고 있는가. 그렇다. 김정은을 앞에 나오도록 해서 인민들이 찬성과 반대를 놓고 투표를 하는가. 아니다. 북한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억압적인 국가다. 하지만 북한에 대해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북한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 북한이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지만 미국도 마틴 루서 킹이 활동하던 60년대까지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다. 당시엔 심각한 폭력을 써서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종을 탄압했다. 60년대 미국 앨라배마였다면 (지금 인터뷰를 하는) 이 방에 있는 사람들 중 나를 제외하고 유색인종용 음수대에서 물을 마셔야 했을 것이다. 피터 노빅(Peter Novick)은 『That Noble Dream: The ‘Objectivity Question’ and the American Historical Profession』이란 책을 썼다. 객관성에 대해 지금까지 내가 읽어본 최고의 저술이다. 인간은 객관적이고 싶어 하는 ‘고상한 꿈(noble dream)’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것이 내 대답이다.”

 - 북한의 친일파 청산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최근 연구를 보면 북한 김일성 정권의 초대 내각에 친일파가 많이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나도 그 부분에 대해 글을 썼다. 당시에도 알려져 있었다. 북한은 40년대 후반에 일제에 협력한 기술자(technician)들을 활용했다. 그들을 기술자라고 봐야지 친일파라고 할 순 없다. 북한은 특히 경찰 출신 친일파들을 청산했다. 일제 지배 기간에 가장 미움을 받은 사람들이다. 북한은 그 가족들에 대해서도 친일 경찰 가족이란 낙인을 찍었다. 따라서 친일 경찰의 자손들도 차별을 받았다. 김정일이 90년대 후반에 결국 폐지하기 전까지 차별이 지속됐다. 나는 그것(친일 경찰 가족에 대한 차별)에 동의할 순 없지만 이해할 순 있다. 어쨌든 북한은 방법론에서 잘못되기는 했지만 그것을 실행했다. 북한 정권을 친일 정권이라고 표현할 순 없다. 북한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스탈린이 반일 정권을 원하고 친일파 청산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 남한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 미 군정 통치에는 실책과 어리석음이 대단히 많았다. 군대와 경찰을 보면 전부는 아니라 해도 일제의 군대·경찰 출신이 대부분 등용됐다. 예전에 레너드 버치(Leonard Bertsch, 미 군정청 정치고문)에게 친일파를 어떻게 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우리는 원래 자리로 복귀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대단히 미국적인 사고방식이다. 크림은 맨 위로 올라오게 마련이란 식이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제 치하에서나 미군정에서나 위로 올라온다는 얘기다. 남한은 반일적인 수사(rhetoric)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문제를 미해결인 채로 끌고 가게 됐다. 그리고 사실 친일파라는 낙인은 지나치게 광범위하다. 만일 일제 시대 법원에서 판사로 일했지만 한국인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친일 부역자라고 말할 수 없다. 남한에선 누구를 친일파로 볼 것이냐에 대한 논의가 지나치게 광범위하다.”

 - 90년대 이후엔 토지개혁에 대한 연구도 새롭게 나와서 남한의 토지개혁이 굉장히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6·25 전쟁 당시 밑으로부터의 민중 봉기를 억제하는 힘이었고 박정희 대통령 이후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됐다는 얘기다.

 “토지개혁이 전쟁 후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 것은 확실하다. 일본, 남한, 대만에서 토지개혁은 50~60년대 농업 생산성 향상에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질문의 앞부분에 대해선 반대 입장이다. 전쟁 이전에 토지개혁이 이뤄져서 남한 농부들이 북한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전쟁 이전 남한에선 진정한 의미의 토지개혁이 없었다. 하지만 전쟁 후에는 남한과 월남을 비교한다면 남한에선 토지개혁이 이뤄져서 농민들이 더 이상 좌익에 동조하지 않고 수확에만 관심을 가졌다. 월남에선 토지개혁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이것이 75년 월남 패망의 원인이 됐다.”

 - 『한국전쟁의 기원』이 출간되던 81년 북한을 방문했다. 당시 북한과 오늘의 북한을 어떻게 보나.

 “81년 8월에 북한에 갔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보니 내가 쓴 책이 집 앞에 놓여 있었다. 우편으로 도착한 것이었다. 나는 북한에 가기 전에는 책의 완성본을 보지 못했다. 내가 북한에 있는 동안 출판사에서 일을 진행했다. 당시 북한의 경제는 상대적으로 좋았다. 북한을 2주간 방문하기 전에 중국을 1주간 방문했었다. 당시 중국은 북한에 비해 훨씬 가난한 나라였다. CIA 보고서에 따르면 70년대 후반까지 남한과 북한의 국민소득은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 내가 보기에 적어도 농촌 지역에선 그것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80년대 중반 이후 남한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 후엔 남한과 북한은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북한 경제는 80년대 후반부터 정체된 상태였고 90년대 들어 위기를 맞았다. 90년대엔 소련이 무너졌고 중국의 도움도 줄었고 대홍수가 발생했고 김일성이 죽었다. 이 모든 것이 북한 경제위기의 원인이 됐다. 하지만 80년대 후반에 북한 경제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했던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나는 한국 전문가를 자처하지만 어떻게 남한이 그렇게 잘했는지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삼성이 소니를 추월해서 애플의 강력한 경쟁자가 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놀랍다.”

 - 박근혜정부 들어 북한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인다. 개성공단 재가동,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대화에서 조금씩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 박근혜 대통령은 전임 이명박 대통령에 비해 상당히 잘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 북한은 박근혜 대통령이 전임 이명박 대통령보다는 나을 것이란 기대가 있는 것 같다. 물론 김대중이나 노무현 대통령 시절과는 다르겠지만. 올봄 북한의 도발적인 언사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일종의 테스트였다고 본다. 최근 남북대화는 좋은 신호다.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오바마 정부가 북한에 대해 전혀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전략적 인내인데 좋은 전략이 아니다. 북한이 핵 보유국이 되고 미사일을 발사한다고 해도 행동을 취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한다. 남북관계에 따뜻한 분위기가 생기면 오바마 정부도 북한에 대해 뭔가 행동을 취할 것으로 기대한다.”

글=배영대·주정완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아래 글은 오인환 전 장관과 유사한 입장을 갖고 있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의 중앙일보 인터뷰. 

진보-보수 진영 사이에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역사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1970~80년대 진보 이론가였던 안병직(77 ·국민통합시민운동 공동대표) 서울대 명예교수는 온통 음해 수준의 ‘밥그릇 싸움’이라고 비판했다. 서로 물고뜯으니 언뜻 크게 다른 것 같지만 8종의 교과서 모두 민주화운동사 체계로 쓰였다는 점에선 동일하다고 분석했다. 교과서에서 사상의 자유는 종북주의만 아니면 모두 보장돼야 한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현재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은 온통 음해 수준입니다. 정상적인 학술토론이 아니에요.”

 10일 오전 10시 서울 청진동 국민통합시민운동 사무실. 1960년대부터 진보 진영의 주요 이론가로 활약하다 만 50세가 되던 86년 이후 시각을 180도 바꾼 그의 목소리는 두 시간 내내 열정적으로 이어졌다. 국민통합시민운동 공동대표 안병직(77·한국경제사) 서울대 명예교수의 이야기다.

 대학가 운동권이 극성했던 80년대의 대표적 좌파 이론인 ‘식민지 반(半)봉건론(식반론)’을 남한에 확산시킨 출발점이 그였다. 엄밀히 말해 창작이라기보다는 중국 마오쩌둥(毛澤東)의 농민혁명 이론을 모방한 것이었다. 식반론은 한국이 여전히 식민지 상태며 아직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은 봉건적 상태로 파악했다. 안 교수가 전향했던 86년은 대학가 운동권의 헤게모니가 ‘NL(민족해방) 주체사상파(주사파)’로 넘어가는 시점과 겹친다. 안 교수에 따르면 마오쩌둥의 농민혁명론, 식반론, 남미의 종속이론, 주사파 등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다. 모두 ‘내재적 발전론’이란 분모를 공유한다.

 안 교수 자신은 식반론에 대한 생각을 바꿨지만 그가 뿌린 씨앗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최근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진보와 보수 진영 사이 ‘역사 전쟁’도 그런 연장선에 놓여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보수적 관점에서 진보를 향한 ‘사상 운동’을 전개하는 이유다.

 - 내재적 발전론이란.

 “한국 현대사를 보는 두 개의 관점 가운데 하나다. 내재적 발전론은 한국의 발전동력이 안으로부터 나온다고 본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은 전부 침략적이다. 대외 침략에 대한 저항적 민족주의가 기조를 이룬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한국 근현대사는 저항운동사가 된다. 일제시대는 독립운동, 해방 이후는 민주화운동이다. 북한에서 자력경제하는 것도 다 그거다. 조선 후기의 자본주의 맹아론과 관련된다.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 맹아가 있어서 만약 제국주의 침략이 없었다면 저절로 근대화가 됐을 거라고 보는 시각이다.”

 - 내재적 발전론이 왜 문제인가.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 맹아가 사실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른다. 일종의 이념이다. 또 일제시대 민족자본을 내재적 발전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일제시대 조선인 자본 중 가장 유명한 게 고무와 메리야스 공업이다. 고무와 메리야스가 조선 후기부터 발전할 수 있겠는가, 밖으로부터 온 거다. 조선 후기부터 발전해 일제시대까지 연결되는 것은 동(구리)광산업의 덕대 제도다. 덕대는 광산에서 하는 하청업이다. 광산업자가 모든 굴을 자기가 다 개발하지 못하니까 일부는 덕대에게 줘서 개발토록 했다. 그리고 도기 산업, 옹기 만드는 정도였다. 내재적 발전론은 마오쩌둥의 ‘중국 혁명과 중국 공산당’(37년)에서부터 나온 가설이다. 이에 기반해 남쪽이든, 북쪽이든 지배적인 사상은 저항적 민족주의다. 한국이 미국 식민지라고 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반대하는 게 전부 그렇다. 내재적 발전론이 주류 이념이다. 올해 검정 통과된 8종의 한국사 교과서가 전부 다 운동사 체계로 쓴 배경이다.”

 - 한국 현대사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관점은 무엇인가.

 “캐치업(catch- up) 이론이다. 한국 근대를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민족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 국가를 만드는 과정이었다는 얘기다. 그런 가설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성공했기 때문이다. 한국만 그런 게 아니다. 제3세계 신흥공업국에 나타나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중국도 개혁, 개방을 해 저만큼 발전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먼저 이승만 시대에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했다. 이승만이 독재도 하고 권위주의도 했지만 제도를 그때 만들었고, 반공주의와 53년 한·미 방위조약으로 지켜냈다. 그 다음에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 지향 공업화 정책으로 경제발전에 성공했다. 내재적 발전이 아니고 외국에서 새로운 자본, 기술, 산업을 도입해 한국 산업을 발전시켰다.”

 - 87년의 민주화는 어떻게 설명하나.

 “민주화 역량에서 중요한 게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지식인운동이다. 민주화운동의 주체도 서양과 교류하는 캐치업 과정에서 자라났다. 이승만은 재정이 그렇게 어려운데 엄청난 교육 투자를 했다. 고교생, 대학생을 양산해 그들이 4·19혁명의 주체가 됐다. 이승만은 자기가 민주주의한다고 가르쳐놓고, 자기가 민주주의를 하지 않으니까 자기가 육성한 세력에 의해 쫓겨난 거다. 왜 북쪽에는 4·19가 없나. 그런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 87년 이후 민주화도 사실상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민주주의가 본래 우리나라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 8종 교과서가 모두 운동사 체계로 씌어 있다고 했는데, 유독 교학사 교과서를 놓고 말이 많은 이유는.

 “그것은 밥그릇 싸움이다. 내 눈으로 보면 교학사 교과서를 포함해 8종이 모두 다 같은 운동사 체계다. 다만 교학사는 대한민국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점이 다르긴 하다. 그러나 서술 체계는 운동사 체계다. 그럼에도 교학사 한 종에 대해 데모까지 해가면서 눈을 부릅뜨고 하는 것은 국사학을 하는 사람들이 교과서를 자신들 영역이라고 보는 것이다. 국사학계는 전부 좌파가 잡고 있고, 그 좌파의 이념이 저항적 민족주의다. 그런 상황에서 왜 너희들 자유주의자들이 들어오느냐 하면서 들어오지 말라는 밥그릇 싸움이다. 교학사 교과서를 놓고 이론 싸움을 하는 것을 봤는가? 전부 음해고 그렇다. 숫자가 틀렸다거나 맞춤법 오류 같은 것은 다른 교과서에도 많다. 그렇게 틀린 것들은 고치면 되는 것이다.”

 - 8종 교과서가 모두 운동사로 되어 있는 이유는.

 “검정에 통과하려면 집필기준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집필기준의 민주주의 발전 항목을 보면 한국 민주주의가 민주화운동에 의해 발전한 것으로 돼 있다. 집필기준에 이승만 시대의 권위주의, 박정희 시대의 유신, 전두환 시대의 군부독재를 부정적 요인으로 넣어놨다.”

 - 독재가 있었고 그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이 있었지 않나.

 “일례로 이승만 시대의 권위주의가 과연 자유민주주의 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었나? 공산주의가 워낙 득세하니까 어떻게 하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느냐, 그 목적으로 만든 것 아닌가? 60여 년 전의 권위주의를 오늘날 입장에선 비판할 측면도 있지만 평가할 측면도 있는 것이다. 또 박정희 시대의 유신체제도 민주주의를 두드려 잡기 위해서만 한 것인가? 그것도 하나의 사실이지만 중화학 공업화를 성공시키기 위해 한 것도 사실이다. 전두환 정권 때 3저 호황으로 한국 경제가 크게 발전하며 무역흑자로 바뀌었다. 물가를 한 자릿수로 잡았다. 한국 경제사에서 아주 중요한 거다. 그런 기술은 교과서의 어느 곳에도 없고 전두환이 5·18 민주화운동 두드려 잡기 위해서만 독재했다고 하는 식이다. 교과서의 종합적 평가가 안 되는 이유는 집필기준이 운동사 체계라서다.”

 - 교과서 집필기준에 보완할 점은.

 “집필기준에 ‘권위주의 정치체제론’이 하나 들어가야 한다. 저개발국이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일 때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실행할 객관적 조건 없이 제도만 받아들였다. 농민, 빈민이 대부분인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어떻게 하겠나. 자유민주주의는 두꺼운 중산층이 성립돼야 한다. 예전엔 단순히 독재라고 했다. 그런데 저개발국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보니까 선진적인 정치, 경제체제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독재를 했다. 단순히 권력욕, 장기 집권만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개발독재란 말이 그것이다. 그게 이론적으로 발전해 권위주의 정치체제론이 된 거다. 권위주의 정치체제론은 캐치업 이론의 일부다. 민주화운동만 갖고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다 설명하지 못한다.”

 - 안 교수는 진보 진영의 주요 이론가였으니까 진보적 역사인식을 이해해줄 법도 한데….

 “나도 한때는 좌익이었다. 한국 사회에 맞는 이론을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르크스와 레닌과 마오쩌둥 이론을 공부했다. 마오쩌둥 이론이 한국 사회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 같더라. 식반론은 그렇게 나왔다.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이론이다. 내가 접한 것은 북쪽에서 수용한 마오쩌둥 이론이었다. 당시 북쪽의 사회과학이란 잡지를 다 복사해 볼 수 있었다. 나는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한용운과 신채호를 연구해 30대 초반에 이미 학계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얻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식반론을 이야기하니까 선배들도 내가 독자적인 이론을 개발했다며 감히 못 달려들었다. 그러다 보니 피가 나도록 박정희 정권과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왜 생각을 바꿨나.

 “내가 주장한 식반론에 의하면 70년대 말 한국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해야 한다. 그런데 80년대 초 전두환 정권 등장 후 한국 자본주의가 계속 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을 전부 노동운동에 밀어넣었는데 내 이론이 틀렸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85년 도쿄대에 1년간 전임교수로 갔다. 도쿄에서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스트레스로 윗니 2개가 빠졌다. 그때 북쪽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다.”

 - 북한 사람을 만나면 감옥에 갈 때가 아닌가.

 "내가 감옥에 가는 게 문제가 아니고, 민족 운명이 문제니까. 조총련이니 뭐니 다 다가왔다. 칙사 대접이었다. 만나 보니까 완전히 저승사자를 대하는 것 같았다. 인간의 유형이 너무나 음험했다. 독재국가에서 자란 내가 제일 후진 인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나보다 훨씬 후졌다. 소련, 중국, 동독 등 공산권에서 온 유학생들이 당시 도쿄에 바글바글했다. 그들이 나보다 훨씬 선진적인 사회에서 사는 줄 알았는데 만나 보니 완전 후진국이었다. 마침 85년에 이미 사회주의 세기가 끝나고 지금부터 자본주의 세기가 전개된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연구자들이 있었다. 교토(京都)대 경제학과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 교수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 세계사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이 엄청나게 동태적인 사회이며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후 내 제자들부터 사상 전향을 시켰다. 노동운동을 했던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대표적이다. 처음엔 말로 하다 잘 안 돼서 사상투쟁을 전개했다. 80년대 후반을 그렇게 보냈다. 내가 죄를 많이 지었다. 제자들을 사지에 몰아넣었는데 나 몰라라 하고 팽개칠 수 없었다.”

 - 식반론은 이제 다 폐기됐나.

 “세계적으로 폐기됐다. 중국도 폐기해서 개혁·개방에 나선 것이다. 개혁·개방은 캐치업의 전형이다. 국내 시장경제 체제를 만들고 대외 자유무역을 하고 그래서 선진국에서 수백 년간 축적한 제도와 기술을 계속 받아들인다. 그것을 안 받아들인 게 쿠바와 북한, 일부 아랍 국가다. 북한은 아직도 남한을 미국의 신식민지라고 한다.”

 - 식민지 근대화론을 교학사 교과서가 수용한다는 비판이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진보 진영이 보수 진영에 뒤집어씌운 거다. 식민지 시대에도 근대적 변화가 있었다. 1905년 재정, 화폐개혁, 1910년대 토지조사 사업을 통해 근대적 화폐, 은행, 소유 제도를 도입한 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유효하게 식민지를 착취할 수 없다. 조선 후기의 재정은 마이너스, 저축률도 마이너스였다. 착취할 것도 없다. 착취하려면 개발을 해야 한다. 철도, 항만, 도시도 건설하고, 자금 투자도 하고. 안 그러면 일본에서 보충금이라고 해서 재정보조를 해야 한다. 예컨대 아프리카에 가서 뭐를 착취할 거냐. 땅을 차지한다든지 그 정도지, 아무 생산도 없는데 뭐를 착취할 거냐. 착취하려면 개혁도 하고 투자도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식민지민의 자기계발도 있다. 식민지민도 근대적으로 살아남으려면 근대적 교육도 받고 근대적 경영도 해야 한다. 일제시대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근대적 학교도 만들고 산업도 일으키고 한 것을 무엇으로 설명하나. 식민지 시대라도 식민지적 개발과 식민지민의 자기계발이 다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설명한다고 해서 공격해 오는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 교과서에서 사상의 자유는 어느 정도까지 용인될 수 있는가.

 “종북주의만 아니면 모두 보장돼야 한다. 그것은 자유주의의 본질이다. 자유가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되 내 자유가 지고의 가치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자유주의다. 다만 종북은 대한민국 체제를 부정하니까. 인류사 차원이 아니고 국민사회 차원에서 그렇다.”

글=배영대·주정완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북한은 자신들을 고슴도치에 비유하곤 한다.

북한의 ‘고슴도치 동화’에서 미국은 호랑이로 그려진다. 호랑이가 제아무리 최상위 포식자라 해도 가시털을 곧추세운 고슴도치는 어쩔 도리가 없다. ‘핵과 미사일’(가시털)로 시도 때도 없이 한국과 미국을 협박하는 북한이고 보면 제법 그럴싸한 비유다.

기원전 8∼7세기에 활동했던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는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안다”고 읊었다. 이 시구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후대의 우화들은 꾀 많은 여우가 번번이 고슴도치와 싸워 낭패를 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화에서 여우는 갖은 꾀로 고슴도치를 처치하려 하지만 고슴도치가 가시털을 세운 채 몸을 웅숭그리면 여우는 번번이 제풀에 나가떨어진다.

국제사회의 설득과 압박에도, 주민들의 굶주림에도 아랑곳없이 핵과 미사일을 신주단지 모시듯 해온 북한은 영락없이 고슴도치를 닮았다. 북한이 최근 3차 핵실험에 대응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에 맞서 하루가 멀다하고 한반도 위기를 고조시키는 행태도 온몸의 가시를 세워올린 고슴도치를 연상시킨다. 북한이 고슴도치라면 북한과 씨름해온 한·미는 여우의 처지다. 여우는 이 고슴도치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대북 강경론자들은 고슴도치를 제거해버리자고 한다. 수단을 놓고는 군사적 조치에서 대북 심리전에 이르기까지 편차가 다양하지만 3대 세습의 김정은 정권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지점에선 일치한다.

그들에게 북핵 1차 위기는 절호의 기회였다. 미국이 1994년 초여름에 계획한 영변 핵시설 ‘족집게 폭격(surgical strike)’이 이뤄졌다면 북핵의 싹을 잘라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북한 정권이 무너지는 급변사태가 현실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의 영변 폭격에 제동을 건 것은 김영삼정부였다. 빌 클린턴 미 행정부가 영변 폭격을 검토하면서 주한미군과 미 대사관 가족 등을 서울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을 때 김영삼 대통령은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 대사를 불러 “미국이 우리 땅을 빌려서 전쟁을 할 수 없다”면서 결사 반대했다. 보수정권의 대통령이 반대했을 정도로 고슴도치 제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명쾌한 해법처럼 보이지만 여우도 치명상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슴도치를 살살 달래서 가시를 세우지 않도록 진화시켜야 한다는 대북 유화론자들은 한·미의 보수정권인 이명박정부와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의 대북 정책 전환을 못내 아쉬워한다. 김대중·노무현 진보정권의 대북 유화책과 클린턴 정부가 북·미 제네바 합의 이후 취한 대북 개입(engagement) 정책을 이명박, 부시 정부가 계승했더라면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혁·개방의 길로 나섰을 것이란 전망에서다. 이런 주장의 치명적 약점은 칼자루를 북측에 넘겨준 채 핵 포기든 미사일 발사 유예든 북한의 선의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북핵 6자회담은 미국의 대표적 대북 강경파인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마저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6자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앉은 ‘혁명적인 대화틀’”이라고 극찬해 마지않은 협상이었다. 6자는 진통 끝에 북한이 원하는 평화협정 체결을 포함한 포괄적 합의(2005년 9·19공동성명)를 도출해냈지만 북측의 선의가 작동되지 않는 순간 합의문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한때 한·미 정부가 활용했던 ‘선의의 무시(benign neglect) 전략’에 따라 제멋대로 날뛰는 고슴도치를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박근혜정부는 고슴도치를 우리 안에 가두고(제재) 먹이를 조절하면서(단계적 지원) 길들이는 능동적 압박정책을 채택한 듯하다. 김영삼, 이명박 정부는 ‘북한 붕괴론’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에 빠져 고슴도치를 고사시키려 했으나 고슴도치의 화를 돋웠을 뿐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북한의 진정성’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에 빠져 고슴도치를 진화시키려 했으나 고슴도치는 받아먹은 먹이로 가시만 키웠을 뿐이다. 박근혜정부의 고슴도치 길들이기는 북한 붕괴론이나 북한의 진정성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천안함 폭침 3주기를 맞는 노병의 심경은 참담했다. 이상의 전 합참의장은 2010년 3월26일 북한의 어뢰 공격을 받은 천안함이 서해 바다에서 수장되던 당시를 회고하면서 “유족에게 죄인의 심정”이라고 말했다. 해마다 천안함 순직 용사들의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는 그는 “유족에게 아무리 사과한들 생때같은 아들들이 살아 돌아오겠느냐”면서 “당시 군의 수장으로서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북한의 3차 핵실험 강행으로 한반도 안보위기가 고조되는 지금, 천안함 폭침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도원빌딩 강한대한민국범국민운동본부 사무실에서 이 전 의장을 만나 천안함 사건이 남긴 교훈을 되새겨봤다. 그는 “북한의 도발 위기에 맞서 군과 정치권, 국민 모두가 천안함 폭침 사건의 교훈을 뼈에 새겨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천안함 폭침 당시 합참의장으로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천안함은 많은 교훈을 남겼다. 군의 입장에서는 북한의 악랄한 도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회한을 남겼다. 북한이 간첩 침투나 비무장지대 도발 등 간접 도발을 자행한 적은 있으나 우리 영해에 있는 초계함을 직접 타격해 피해를 준 사례는 처음이었다. 이런 도발을 군이 간과한 것은 반성해야 할 점이다. 국가적으로는 천안함 폭침 사건을 계기로 남남갈등이 조장되고 아직도 국제사회 전문가들이 모여 작성한 내용(미국·영국·호주·스웨덴 4개국 전문가들이 참여한 국제 합동조사단은 2010년 5월 “천안함이 북한 어뢰에 피격돼 침몰했다”고 공식 발표했다)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고 한편으론 황당한 일이기도 하다. 자기 입장만 주장하고 다른 사람을 믿지 않으려는 현 세태는 국가적으로 엄청난 에너지 낭비다.”

―한반도의 군사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천안함 사건과 같은 북한의 도발 위기에 충실히 대비하고 있는가.

“완전하지는 않다. 천안함 사건 직후 함정의 초계 속도를 높이고 대잠 헬리콥터를 수시로 출격시키는 등 추가 비용이 소요되지 않는 임시조치는 모두 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전력증강을 하려면 예산이 필요하다. 그런데 올 1월 국회는 국방예산을 4000억원 삭감했다. 그러고선 북한 핵실험(2월12일)이 터지자 국방비를 증액하겠다고 나서는데 국가가 이렇게 일관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 최근 군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고, 경계 실패는 1차적으로 군의 책임이다. 그러나 군의 무수한 전력증강 요구에도 우선순위로 제일 먼저 깎이는 게 국방예산이다. 눈에 띄는 것은 복지예산하고 국회의원 본인들의 지역구 예산이다. 국회가 국방예산을 처삼촌 묘 벌초하듯 잘라낼 때 어떤 정치인이 그래선 안 된다는 목소리를 냈나.”

―북한의 핵실험을 계기로 우리 국민의 안보불감증도 도마 위에 올랐다.

“공감한다. 우리 국민들은 북한이 설마 우리에게 핵 미사일을 쏘겠느냐고 생각하는데 안일하고 위험한 사고 방식이다. 미국을 향해서는 못 쏘지만 우리에게는 쏠 수 있는 게 북한이다. 우리는 북핵의 인질이다. 북한은 무력 시위용으로 핵을 사용할 수 있는 집단이다.”

―천안함 도발은 그야말로 허를 찌른 것이었다. 당시 우리 군은 무방비 상태로 당한 건가.

“천안함 사건 4개월 전에 ‘대청해전’이 있었다. 기동력이 약한 북한은 수상전에서 대패했다. 북한은 반드시 보복할 것이라고 봤다. 그 방법은 질 게 뻔한 해상도발이 아니라 수중도발일 것으로 예상했다. 이 문제로 2009년 말에 전술토의를 벌였다. 이때 참모들은 서해는 조류가 빠르고 혼탁한 데다 수심이 낮기 때문에 잠수함 도발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적이 서해 수중도발을 꾀할 수 있다고 봤다. 6·25전쟁 당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도 인천은 유속이 빠르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상륙작전이 어렵다는 참모의 조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인천으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전술토의에서 ‘키 리졸브’(한·미 연합훈련)가 끝난 직후 서해 수중 도발과 관련한 대비태세 검열을 벌이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천안함 피격 사건이 발생한 3월26일이 대비태세 검열을 위한 예비 회의를 가진 날이었다. 그 회의를 조금만 앞당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미리 대비했다면 피격 직후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도 포착할 수 있었나.

“그것은 어렵다. 적에 대한 정보 판단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100% 북한 잠수함이 공격할 수 있다고 확신해도 몇 월 며칠에 온다고는 절대 예측하지 못한다. 그런 딜레마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쨌든 예측을 하고 조금만 일찍 서둘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폭침 사건 초기 군은 우왕좌왕했고 대통령도 허둥댔다.

“초기에 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기습당하는 사람은 상황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위기 시에 군사작전 지휘관은 절대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다음에 일어날 상황을 예측하고 그걸 대비하고 전투력을 할당하고 현재 상황에 대해 조치하는 게 지휘관의 역할이다. 소방관의 임무는 불 끄고 인명 구조하는 것이다.”

―결국 미리 예상은 했지만 준비가 제대로 안 돼서 당했다는 것인가.

“예상을 정확하게 했다기보다는 그런 식의 도발에 대비한 준비는 해야 된다는 판단을 했는데, 보다 적극적인 대비를 못했다는 게 솔직한 평가일 것이다.”

―천안함 폭침 이후 이명박정부가 안일한 대북 대응으로 일관하다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도발을 불렀다는 지적이 있다.

“천안함 사태 이후에 ‘5·24 (대북 제재) 조치’를 취할 때 확성기 등을 이용한 대북 심리전이 포함돼 있었다. 북한은 대북 심리전 방송을 핵무기보다 더 무서워한다. (합참의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이건 진짜 기가 막힌 카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군은 대북심리전 준비를 다 끝냈다. 북한은 겁이 나니까 계속 협박을 했다. 나는 ‘잘 됐다. 너희들이 타격을 하면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각오 아래 만반의 준비를 다 갖췄다. 부하들도 일전불사의 각오였다. 그런데 정부는 심리전 방송을 미뤘다. 결국 승인이 안 됐다. 그때 국민의 자존심이 상했다. ‘북한이 협박하니까 심리전도 못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국민이 자존심을 상했을 때 군인들은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나. 그러면 군인들이 무엇을 학습했겠나. ‘이 정부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구나. 일전 불사의 결연한 의지가 없다’는 것을 학습하는 거 아니냐.”

―박근혜정부가 반드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반드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군 통수권이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는 꼬리표가 붙고, 주가 떨어지는 문제부터 생각하는 정권이라는 인식이 퍼지면 그 다음부터 군 수뇌부는 가능하면 시끄러운 일을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군 통수권자의 결연한 의지가 없으면 절대 북한의 버릇은 못 고친다. 각오를 해야 한다. 국민들도 주권국가로서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대가를 치러야 하고,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용기와 성숙한 애국심을 가져야 한다. 통수권자의 결연한 의지와 국민의 용기, 애국심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어떤 능동적 선제공격도 할 수 없다. 계속 북한에 끌려가게 된다. 북한의 지도자보다 더 결연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북한은 실질적 핵보유국이 되어가는데 우리는 대응 수단이 마땅치 않다. 핵을 가진 북한과 어떻게 맞서야 하나.

“자존심은 상하지만 북한은 핵실험을 통해 핵의 경량화·소형화에 성공하고 운반수단도 갖춘 군사강국이 됐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북한은 이미 핵 강국이 돼버렸는데 우리만 비핵화하자는 얘기는 현실성이 없다. 이런 차원에서 미국의 전술핵을 남한에 재배치하는 방안은 고려해볼 만하다. 우리 땅에 핵이 있는 것과 하와이나 미국 본토에 있는 것은 북한이 받아들이는 위협강도에서 천지차이다.”

<약력>
1951년 경남 사천 진주고 육군사관학교(30기) 39사단장 1군 사령부 참모장 8군단장 건군60주년 기념사업단장 3군 사령관 35대 합참의장 국제대 석좌교수 강한대한민국 추진운동본부 고문

대담 =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정리=안두원 기자, 사진=이재문 기자

野雪(야설)

穿雪野中去(천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今朝我行跡(금조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李亮淵(이양연)(1771~1853)

 

눈을 뚫고 들판 길을 걸어가노니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를 말자.

오늘 내가 밟고 간 이 발자국이

뒷사람이 밟고 갈 길이 될 테니.

 

*조선 정조, 순조 시대를 살아간 시인 이양연의 시.

오랫동안 서산대사의 작품으로 알고 있었는데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논란의 여지 없이

이양연의 작품이라고 했다.

누구의 작품이든,

50을 바라보는 내 나이엔

예사롭게 읽히지 않는다.

뒤돌아 보면 '호란행'까지는 아니어도

갈짓자로 비틀거린 흔적이 보인다.

남은 인생엔

좀 더 반듯이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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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통합당 내에서 대선 패배 이후 “질 수 없는 선거를 졌다”는 자탄이 흘러나왔다.

그런 말이 나올 만하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대선 기간 내내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따른 ‘이명박 디스카운트’에 시달렸다. 야권 대선후보 단일화가 성사된 직후엔 여론 지지율 1위 자리를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에게 내주며 코너에 몰리기도 했다. 이번 대선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이 총결집한 대격돌이었다. 산업화 세력의 상징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은 보수 진영의 대표주자로 나섰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야권후보 단일화만 이뤄지면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의 박빙 경합 끝에 약 57만표 차로 신승을 거뒀던 2002년 대선의 판박이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야권의 바람대로 투표율도 높았지만 결과는 박 당선인의 108만여표 차 승리였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개인적으로 ‘야권이 질 수 없는 선거였다’는 명제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민주당은 오랫동안 질 수밖에 없는 길을 걸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선 패배는 그 결과물일 뿐이다.

그동안 우리는 이념 과잉의 시대를 살았다.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 공과를 놓고, 해방 이후 대미 종속 여부를 놓고, 또 무엇을 놓고 두 패로 갈려 서양의 보수·진보 개념을 빌려쓰며 좌파니 우파니 하는 이념 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진보 진영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선명성 경쟁이라도 하듯이 좌클릭을 거듭했다. 2004년 열린우리당 시절부터였다고 기억된다.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이 만들어낸 비정상적 분위기 속에서 원내 과반인 152석을 얻었는데도 총선 결과를 민심으로 오독(誤讀), 민생과 무관한 개혁 담론에 매몰됐다. 국가보안법 폐지 등 ‘4대 개혁법안’에 올인했다. 그러는 사이 당 지지율은 곤두박질쳤고 ‘100년 정당’을 꿈꿨던 열린우리당은 창당 4년 만에 공중분해됐다.
민주통합당은 지난해 4·11 총선 공천 과정에서도 열린우리당의 전철을 밟았다. 중도·실용파 의원들을 대거 낙천시키고 그 자리를 진보 진영 인사들로 메웠다. 문재인 대선 후보는 진보 진영의 주문대로 자신이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 추진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제주해군기지 건설 사업에 제동을 걸고 나서는 자가당착의 태도를 보였다. 민주당이 왼쪽으로 치닫는 동안 새누리당은 ‘경제 민주화’, ‘복지’ 같은 진보의 어젠다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수구 보수의 이미지를 탈색시켰다. 민주당은 새누리당의 경제 민주화, 복지 공약을 ‘짝퉁’으로 몰아붙이며 관련 공약을 더 좌파적으로 만들어갔다.

하지만 세상을 흑백으로 가르는 시대는 오래전에 저물기 시작했다. 좌파 정당인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민당은 1990년대부터 성장과 복지를 조화시킨 ‘제3의 길’을 제시하며 변신을 모색했다. 영국 노동당은 사회주의 성향을 완화한 ‘신노동당’ 기치로 바꿔든 이후에야 만년 야당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뼛속까지 보수주의자였던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공화당)도 2000년 대선 당시 중도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정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정권교체에 성공한 부시 대통령이 집권 8년 동안 보수 본색을 드러내며 ‘신보수주의’로 질주하자 미국인들은 2008년 대선에서 공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우파든 좌파든 빛바랜 강령 속에 갇혀 있던 정당과 정부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국민들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정당과 정부를 원한다.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간파했듯이, 상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번 대선의 화두가 됐던 복지를 말한다면, 복지를 하려면 재원이 필요하고, 재원 마련을 위해선 기업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게 상식이다. 글로벌 시대의 경제 첨병인 기업이야말로 복지 재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경쟁력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국가 주도의 복지정책에는 한계가 있다는 게 상식이다. 복지만의 문제가 아니다. 열린우리당 이전의 민주당은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을 표방하며 국민과 함께 호흡했다. 민주당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조남규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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