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을 계기로 조선의 17세기가 새삼 조명을 받고 있다. 그 바탕엔 조선이 사대(事大)했던 명나라의 국력이 쇠하고 여진족의 후금(청나라)이 동북아 패권국으로 부상한 당시 정세가 중국의 굴기(堀起)로 미국의 동북아 패권이 도전받고 있는 작금의 상황과 유사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동북아 패권 지형도가 새로 그려질 때마다 우리가 생존의 기로에 서는 것은 대륙·해양 세력 사이에 낀 한반도의 지정학적 숙명이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의 저자인 명지대 한명기 교수가 서문에서 “병자호란은 ‘과거’가 아니다. 어쩌면 지금도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일 수 있으며, 결코 오래된 미래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반추해야 할 ‘G2(미·중) 시대의 비망록’이다”라고 쓴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역사가 기록하고 있듯이, 17세기 조선의 국왕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후금은 '떠오르는 태양', 명나라는 '지는 해'로 봤기 때문이다. 반면 사대사상에 매몰된 조선 신료들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며 광해군에 맞섰다.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인조반정·1623년)한 조선은 친명 노선을 고수하다 끝내 대청(大淸)제국으로 강성해진 여진의 침략(병자호란·1636년)을 자초했다. 인조는 송파의 삼전도에서 오랑캐 수장이라고 멸시했던 청 태종 홍타이지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이다. 조선 백성은 인조나 조정 신료보다 더 참혹한 수난을 당했다. 청군은 철수할 때 조선 백성 수십만명을 끌고갔다.

                                                                                                     <삼배구고두례>


병자호란으로 능욕당한 조선의 원혼들은 21세기 한반도에 “자강(自强)만이 살길”이라고 통곡한다. 광해군은 말했다. “중원의 형세가 참으로 위급하다. 이런 때에는 안으로 자강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가 했던 것처럼 한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았다. 광해군은 성곽을 쌓고 장병을 기르는 데 써야 할 소중한 재원을 궁궐을 짓는 데 탕진했다. 신료들은 틈만 나면 광해군을 흔들었고 광해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정적(政敵)을 내치는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후금군에게 격파된 이후에도 조선은 단결하지 않았다. 쿠데타로 광해군을 내쫓은 서인(西人) 정권도 입으로만 전쟁을 외쳤다. 전쟁은 준비하지 않고 화친(和親)만을 반대했다. 후금이 쳐들어오자 임금(인조)은 수도를 버렸고 장졸은 창을 버렸다. 군 최고통수권자와 지도층이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자 조선은 유린됐다. 임진왜란 때도 그랬고 6·25전쟁 때도 그랬다. 17세기 조선의 집권 세력은 임진왜란의 교훈을 잊었고 6·25전쟁 당시 이승만정부는 병자호란의 교훈을 잊었다.

17세기 조선이 취한 대외 전략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광해군 집권(1608년) 당시 조선과 명나라는 동맹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함께 치른 혈맹 관계였다.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침략에 맞서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은혜(再造之恩·재조지은)를 저버려선 안 된다는 여론도 팽배했다. 아직 후금은 요동 지역도 평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금나라가 강성해질 때까지 화친조약을 거부하며 항전했던 고려의 전례를 따르는 것이 더 실리적이지 않았을까. 물론 이런 가정은 부질없다. 인조반정을 전후한 시점에 여진은 더 이상 명나라와 조선이 맞설 수 없을 만큼 강한 제국이 돼 있었다. 그렇다면 인조와 서인 정권은 현실을 직시하고 광해군의 실용주의 노선을 계승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이 또한 부질없는 가정이다.

조선은 시대착오의 대명사인 돈키호테처럼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모험주의로 치달았다. 정작 싸워야 할 때는 싸우지 않고, 더 이상 싸움이 무의미할 정도로 대세가 기울었을 때는 허상의 명분에 사로잡혀 치욕의 역사, 수난의 역사를 기록해 간 17세기 조선은 격동의 동북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선명한 반면교사로 다가온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아래 글은 삼전도비 현장을 찾은 중앙일보 장세정 논설위원의 글. 중앙일보 2020년 6월8일자.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555m 롯데월드타워 옆 3.95m 삼전도비 '패권 싸움 흑역사'

 

지정학이 초래하는 구조적 비극은 언제든 되풀이될 위험이 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은 예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 미·중 패권 경쟁이 과열되는 지금, 대륙 패권을 놓고 명·청이 다투던 400년 전 17세기 조선에 눈길이 쏠리는 이유다.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에서 교훈을 얻자는 '다크 히스토리(흑역사) 투어' 차원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관련된 두 유적지를 답사했다. 하나는 임진왜란(1592~1598) 당시 군대를 보내준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보답하겠다며 친명 사대주의 의리를 다짐한 만동묘(萬東廟)다. 다른 하나는 병자호란(1636~1637) 때 남한산성의 굴욕을 생생하게 기록한 삼전도비(三田渡碑)다.   

양난(兩亂)으로 불리는 두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 왕조는 건국 200년 만에 뿌리부터 크게 흔들려 당장 망해도 이상할 게 없는 지경이었다. 왜군과 오랑캐의 말발굽에 짓밟힌 백성은 어육(魚肉)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명·청 교체기에 대외 전략 오판이 자초한 삼전도비와 만동묘는 동전의 양면이다.
  
 ①만동묘, 조선시대 친명 사대주의 상징
 지난 3일 충북 괴산의 만동묘를 찾아 나섰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로 2시간, 다시 차로 30분을 달렸더니 조선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은거하던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당도했다. 

사실 송시열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이 발탁한 인재였다. 하지만 최명길의 대척점에 있던 척화파 김상헌처럼 숭명배청(崇明排清) 노선을 걸었다.  
 병자호란 이후 1644년 명나라가 멸망했는데도 송시열은 화양구곡( 華陽九曲)의 명당자리에 만동묘를 짓도록 했다. 선조 때 터진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 만력제와 마지막 황제인 의종 숭정제의 위패를 송시열 사후인 1704년 만동묘에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경기도 가평 조종암(朝宗巖)에 선조가 남긴 만절필동(萬折必東) 네 글자를 송시열이 화양구곡의 첨성대 바위 절벽에 새겼고,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따서 만동묘라고 이름 붙였다. 만절필동은 황하 흐름이 수없이 꺾여도 결국 동쪽으로 간다는 뜻뿐 아니라 충신의 절개로 의미가 확장됐다.  
 만동묘로 올라가는 계단은 균형을 잡고 걷기 힘들 정도로 위태로웠다. 아래로부터 위를 향해 계단을 3칸, 5칸, 3칸, 5칸을 오른 뒤 맨 위에 황제를 상징하는 9칸 계단을 오르도록 배치했다. 임진왜란으로 망할 위기에 처했던 조선을 살려줬으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명나라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라는 의도가 숨어 있다. 
만동묘 유적을 몇 년 전에 답사한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전 한국정치사학회장)는 "계단 경사가 70도를 넘을 정도로 가파르고 계단 폭도 매우 좁다"며 "황제를 모신 사당이니 개처럼 기어서 올라가서 개처럼 기어서 내려오라는 무언의 압력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허영란 괴산군 문화해설사는 "계단이 하도 가팔라서 흥선대원군이 하인의 부축을 받고 올라가자 옆에 있던 문지기가 밀어버렸다는 일화가 있다"고 전했다. 봉변당한 분풀이 차원인지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령을 내리면서 1865년 만동묘를 가장 먼저 철거했는데 이에 반발한 유림이 1875년 다시 세웠다.  
 명나라의 임진왜란 개입에 반감을 가졌던 일제는 1942년 만동묘를 불태우고 비석 건립 유래를 새긴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 글자를 정으로 모두 훼손하고 땅에 묻었다. 하지만 1983년 대홍수 때 비석이 다시 드러났고, 2004년 괴산 지역 유지에 의해 만동묘와 만동묘정비가 복원됐다.
 공교롭게도 만동묘의 존재를 널리 알린 것은 '친중 정권'이란 지적을 받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다. 2017년 12월 5일 당시 노영민 주중대사(현 대통령 비서실장)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인민대회당 방명록에 '만절필동(萬折必東) 공창미래(共創未來)'라는 글을 남겼다. 그의 본뜻은 우호 강조였겠지만 사대주의를 상징하는 용어 사용은 부적절했다. 더군다나 대사 부임 불과 8개월 전인 2017년 4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시진핑은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망언하지 않았던가.  
  
 ②삼전도비, 청나라에 항복한 굴욕 상징
지난 2일에는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와 함께 삼전도비를 찾아 나섰다. 김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남한산성'의 여운이 강렬했던 이유도 있지만, 굴욕의 역사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석촌호수가 넓어 비석을 찾으려면 애를 좀 먹겠거니 생각했는데 뜻밖에 너무 쉽게 찾아냈다. 잠실 광역환승센터 2번 출구에서 석촌호수 공원 안으로 불과 20여m 걸어 들어가니 대한민국 사적 101호 '서울 삼전도비'가 눈앞에 들어왔다.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 새겨진 이 거대한 비석은 귀부(龜趺, 거북 모양의 받침)를 뺀 몸체 높이만 3.95m다. 32t 화강석을 충북 충주에서 캐낸 뒤 한강을 통해 배로 실어 날랐고 인부 400여명이 육지로 끌어서 옮겼다고 한다.
 명·청 교체기에 실리외교를 폈던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 세력들은 아무런 대비 없이 기울어가던 명나라를 섬기다 신흥 세력 후금(청)의 눈 밖에 난다. 김상헌의 척화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치열하게 대립했지만, 묘수를 찾지 못했고 끝내 굴욕적 군신 관계를 받아들여야 했다.  
 삼전도비 주변을 둘러보는 심정은 여러모로 불편했다. 병자호란이 터진 1636년 겨울 남한산성에서 약 50일간 농성하던 인조가 오랑캐로 여겼던 청 태종 앞에서 항복했다. 세 번 무릎 꿇고 아홉번 이마를 땅에 조아린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행한 굴욕의 역사가 지금도 생생해 속이 불편했다.   

사실 삼전도비는 건립 과정과 건립 이후에도 수차례 수난을 겪었다. 청 태종은 비문을 조선이 직접 작성하도록 강요했고, 비석 크기를 문제 삼아 중간에 다시 제작하도록 했다.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의 관리들은 청나라에 머리 숙인 굴욕적 비문을 쓰지 않으려고 서로 떠넘겼다. 결국 문신 이경석이 쓴 비문에서 인조는 "내가 어리석고 미혹되어 하늘의 벌하심을 자초해 만백성이 어육이 됐으니 죄가 내 한 몸에 있다"고 했다.  
 청·일 전쟁에서 판세가 일본으로 기울자 고종은 사대주의를 상징해온 삼전도비를 아예 뽑아버리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1917년 일제가 다시 세웠고 해방 10주년이던 1955년 이승만 정부가 땅에 묻기도 했다. 
 이런 절절한 역사를 있는 그대로 설명해주는 유적 안내가 너무 부실했다. 부끄러운 역사라 감추고 싶었다면 근시안적 '역사맹(盲)'이다. 석촌호수에 놀러 나온 20대 젊은이들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배웠는데 유적 설명이 너무 부족하다. 어두운 역사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삼전도비 현장을 촬영하다 카메라 앵글에 삼전도비(3.95m)와 롯데월드타워(123층, 555m)가 동시에 들어와 깜짝 놀랐다. 무력으로 조선을 짓밟은 청나라의 강압으로 세운 삼전도비, 신중화주의로 무장한 중국에 의해 사드 보복을 당한 롯데가 세운 대한민국 최고층 빌딩. 인연인지 악연인지 그 둘이 지금 불과 100여m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서 있으니 이런 역사적 아이러니가 있을까.  
 삼전도비는 고증을 거쳐 2010년 4월 현재의 위치에 옮겨졌다. 2016년 7월 주한 미군의 사드 배치 방침이 발표되면서 중국의 사드 보복이 시작됐다. 롯데월드타워는 그해 12월 완공됐지만, 중국은 사드 기지 부지를 제공한 롯데를 부당하게 괴롭혔다. 군사 주권과 기업의 자율을 무시한 중국의 폭거였지만 한국 정부는 저자세다. 이 판국에 대통령은 "중국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 "한·중은 운명공동체"를 역설했으니 갸우뚱해진다.

신복룡 전 석좌교수는 "대한민국 최고층 빌딩을 배경으로 삼전도비를 바라보니 정보기술(IT) 최강의 나라가 아직도 소(小) 중화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갈라파고스 (거북) 증후군'에 빠져 있는 듯해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장은 "미·중 패권 경쟁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외교·안보가 까막눈이면 자칫 인조의 길로 갈 수도 있다.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해양세력과 연대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만동묘와 삼전도비가 우여곡절을 겪은 것처럼 한반도는 국제 질서 재편 때마다 시련과 능욕을 경험했다.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 능력을 갖춘 나라가 됐다"(이수혁 주미대사)는 발언은 성급한 자만이다. 주요 11개국(G11) 가입을 거론하며 김칫국부터 마시지만, 망국의 그림자는 자만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태종과 세종 치세를 논하기에 앞서 선조·인조·고종의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역사의 거울에 지금의 우리를 차분하게 비춰봐야 한다.  

대담=조남규 외교안보부장

독일 통일은 ‘도둑처럼’ 오지 않았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수십년 전부터 서독은 동독 주민들의 마음을 사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 통일의 문이 열렸을 때 동독 주민들은 서독이 되길 원했다. 동독 주민은 자유선거로 의회와 정부를 구성한 뒤 의회에서 서독 기본법 아래 통일하기로 결단했다. 동독이 서독에 ‘합류(合流)’한 것이다. 독일은 통일 16년 만에 동독 출신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배출했다. 탈북민은 우리에게 ‘먼저 온 통일’이다. 통일을 앞당기고 북한 주민을 우리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이들이 탈북민이다. 탈북민 지원이 이들의 남한 정착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이유다. 올해로 설립 5년째를 맞은 ‘남북하나재단’(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은 탈북민 지원 정책의 중심 축이다. 정옥임 이사장 취임을 계기로 기존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에서 ‘남북하나재단’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정 이사장을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남북하나재단 이사장 집무실에서 만나 탈북민 얘기를 나눴다.



―지난달 말 기준 탈북민 숫자는 약 2만7000명에 이르렀다.

“과거 귀순용사가 넘어왔던 시절과 비교하면 많은 수이지만 통일되기 전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인 규모와 비교하면 굉장히 적은 숫자다. 아직 ‘유의미한’ 수치로 보기 어렵다. 그 것도 북한의 국경 통제가 강화되면서 2009년을 기점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다.”

―‘유의미한’ 수치라는 건 통일 과정을 촉발할 만한 숫자라는 것인가. 그런 의미의 ‘임계점’이라면 얼마만한 규모가 돼야 하나.

“재단의 법적 설립 근거에 보면 ‘통일 환경 조성’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이런 차원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추정하는 전략적 임계점 규모는 약 10만명이다. 지금은 함경북도 출신 탈북민이 70% 이상을 차지한다. 북한 심장부인 평양 출신 탈북민 수가 늘어나야 한다. 탈북민들이 남한에서 안착하고 그런 소식이 북한으로 흘러 들어가 북한 주민들에게 동기가 부여돼야 한다. 그 파장이 소위 평양특별시에 거주하는 250만명에게까지 전달되는 그 순간이 임계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내 탈북민의 생활은 안착됐나고 보나.

“아니다. 아직 시행착오가 많다. 탈북민 정착 지원 정책의 성패를 단언하기는 어려운 시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현실에 정직해져야 할 때다. 탈북민 다수가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되고 기본적 의식주를 보장받지만 탈북민의 월평균 소득은 141만원에 불과하다. 우리 국민 월평균 소득은 221만원이다. 탈북민의 근속연수는 19개월인 데 비해 일반 국민은 67개월이다. 본인이 더 열심히 오랫동안 직장에 다녀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북한에서의 삶보다는 낫지 않겠나.

“최근에 만난 탈북여성들이 중국에서 (불법체류하다) 붙잡히지만 않으면 한국보다 거기서 사는 게 더 편하다고 하더라. 여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거다. 탈북민은 그게 우리 사회의 탈북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 탓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번에 한번 제대로 살아보갔어’라는 마음으로 한국에 온 ‘장마당 아줌마’들도 많다. 눈빛이 반짝반짝거린다. 우리 민족은 6·25전쟁 통에도 열심히 노력해서 잘사는 유전자를 갖고 있다. 북한 사람들에게도 이 유전자가 있고, 이 유전자를 되찾아 주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자본주의 방식으로 차등지원해야 한다는 말인가.

“잘하는 사람에게 더 많이 주는 차등 지원을 해야 한다. 그리고 탈북민이 북한 체제에 반대해서 오는 사람들이라는 정형화된 환상도 버려야 한다. 아직도 길 가다가 미군 보면 주먹 쥐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경제적 이유가 많다. 탈북민 대다수는 북한에 있는 가족과 일가 친척들에게 중국 브로커를 통해 송금을 한다. 사실 그 돈이 북한 장마당(시장) 활성화에 기여하는 부분이 크다. ”

―탈북민이 정착하면서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은 뭔가.

“탈북민 다수는 고등중학교 정도의 학력이 대부분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존하기 위한 자생력을 키우고 취업까지 해야 되는데 잘 안 된다. 대학교육까지는 특례 제도가 있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 취업과 창업에도 소수자 우대 정책이 있지만 여러 가지 변수가 많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국가가 100% 다 해줄 수가 없다. 그래서 탈북자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아주 크다.”

―재단에서 역점을 두고 있는 탈북민 지원 대책은 어떤 것들이 있나.

“현재 공공기관과 법률회사 등 10곳과 탈북민 정착을 돕기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착한(着韓) 협업’ 사업이다. 중견기업협회와는 ‘1사(社)1통(統)’ 사업을 펼치고 있다. 회사당 한 명의 탈북민을 채용해 통일에 대비한 전문기능인으로 양성하자는 취지다. 중견기업협회 소속 300개 기업에 300명을 취업시키는 것이 목표다.”

―탈북민 채용과 관련한 업체 반응은.

“우여곡절 끝에 3명이 취업했다. 처음엔 기업들이 실익이 없다는 얘기를 하더라. 사회적 공헌 의지가 강한 기업들이 있고, 통일에 기여한다는 측면이 공감대를 산 것 같다. 통일 과정에서 반드시 북한 재건이라는 큰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왕이면 먼저 여기 온 북한 주민들이 능력을 갖추면 역할을 수행하기가 낫지 않겠나.”

―겨우 3명밖에 못했나.

“겨우 3명이 아니라 정말 사연이 많았다. 공단인데도 연봉이 낮다면서 안 가겠다는 탈북민도 있고 은행 채용 면접에 아예 나타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게 불편한 진실이다. 우리의 잘못된 정착 지원 정책 탓도 있고 탈북민이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이 덜된 측면도 있다. 한 가지 희망은 나이가 어려서 한국에 올수록 가능성이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탈북 대학생의 학업지원과 멘토링 프로그램을 통해 통일 엘리트를 육성하는 ‘메르켈 프로젝트’(북한 출신 지도자 육성 계획)가 중요하다. 법무법인 ‘율촌’의 성적 우수 장학금을 받은 한국 대학생들이 탈북민 자녀의 학업을 지도하도록 하는 봉사 프로그램이 좋은 사례다. 남과 북의 젊은이가 만나 서로의 성장을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다. 이들은 벌써 작은 통일을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탈북민의 다수가 여성이다.

“가임기 여성이 대부분이고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많다.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데 아이 때문에 취업도 못한다. 직업훈련을 받으려고 해도 아이를 맡길 곳이 없다. 한국 여성처럼 애를 봐줄 친정엄마나 일가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어려운 거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서·심리적 치료인데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다. 대부분 중국 등 제3국을 경유해 들어오는데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인권 유린의 희생자들이다. 탈북여성 인권에 대해 우리 정부나 시민단체, 정치권에서 이제는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한다. 여성 문제이기 이전에 우리 민족의 문제이며, 모자보건의 문제이다. 중국에서 고생하다 만신창이가 돼서 대한민국에 들어오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 너무 커진다.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우리가 북한과의 관계, 중국과의 마찰을 우려해 계속 눈 감고 귀 막아야 하는지, 같은 여성으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기관장으로서 굉장히 고뇌하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에선 ‘조용한 외교’가 우리 정부의 기조다.

“중국을 경유해서 한국으로 온 탈북여성은 중국에서 태어난 아이를 데려온다. 탈북할 때는 혼자였지만 살아남기 위해 중국 남자를 만난 경우가 태반이다. 중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비보호 청소년으로 분류돼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 탈북 여성이 아이를 키워야 하는데 (정신적·물질적으로) 아이를 보살필 여력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 이 아이들은 대한민국에서 자랄 텐데, 커서 이 아이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미래와 관련된 굉장히 심각한 문제다.”

정리=김민서 기자, 사진=이재문 기자

■정옥임 이사장은… 

▲서울 출생(54) ▲고려대 정경대, 대학원 석·박사 ▲미국 스탠퍼드대 박사후과정 객원연구원 ▲미국 후버연구소 객원 연구위원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선문대 국제학부 교수 ▲18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북한이탈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 ▲한양대 특임교수 ▲남북하나재단(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이사장



 


 

 

20093월부터 20122월까지 워싱턴 특파원으로 미 의회와 백악관, 국무부 등을 취재했다. 뒤로 미국 연방의회 의사당이 보인다.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의사당에서 취임식을 마친 뒤 사진에 보이는 대로(펜실베이니아 애비뉴)를 걸어 백악관으로 이동한다. 워싱턴의 상징 도로이기도하거니와 개인적으로도 미 의회 취재가 있는 날마다 걸어다녔던 추억의 길이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한미 정상회담 취재 중. 왼쪽 세번째가 필자. 필자 왼쪽은 KBS 최규식 특파원.

 

 

워싱턴 특파원 시절 미 연방 상원에서 개최된 청문회 취재를 마치고 의사당 앞에서.

 

 

  

블레어하우스는 외국 정상을 위한 미국 정부의 공식 영빈관으로, 박정희, 노무현,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등이 이 곳에서 묵었다. 블레어하우스는 백악관 인근인 워싱턴DC의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에 위치해 있다. 블레어 하우스 본관은 1824년 미국의 첫 공중위생국 장관이었던 조지프 로벨의 개인주택으로 건립됐으며 1836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자문역이자 신문편집인이던 프란시스 프레스턴 블레어에게 팔린 뒤 블레어 하우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외국 귀빈들의 방문 때 공식 영빈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11년 이명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당시 공식 행사가 시작되기 전 브리핑룸에서 포즈를 취해봤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대선 경선 과정의 숙적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을 국무장관에 임명했다. 클린턴 장관의 연설을 듣기 위해 국무부 청사를 찾았다.

 

 

 

 

200910월 일리애나 로스-레티넌 미국 하원 외교위 간사(공화)가 주최한 후원금 모금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쿠바 난민 출신인 레티넌 의원은 북한 인권문제에 관심이 많은 지한파 의원. 2010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 지위에 오른 뒤 하원 외교위원장이 됐다.

 

 

북한 외무성 리근 미국국장이 200910월 뉴욕에서 미국 국무부의 성 김 북핵특사와 만났다. 기자들은 빌딩 앞 인도에서 리근 국장 등이 나올 때까지 하염없이 '뻗치기'를 하곤 했다. 

 

200912월 주미대사 관저에서 파견 공무원과 특파원들이 조촐한 송년 모임을 가졌다. 이날 나는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 한 자락을 멋들어지게 불러 젖혔다.

 

 

미국 남북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던 미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이 곳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는 연설을 했다. 272단어로 구성된 짧은 연설이었지만 시대를 넘어 세계인의 가슴에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미국의 보수성향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 에드윈 퓰너 이사장. 201212월 워싱턴 D.C. 헤리티지 재단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한 뒤 기념촬영.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연방하원의 찰스 랑겔 의원(민주.뉴욕)을 인터뷰하고 있다. 김치를 즐겨먹는다는 그는 미 연방의회의 대표적인 지한파 의원이다.

 

 

201110월 애플의 공동 창업주 스티브 잡스가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잡스는 사망 직전 그의 전기를 오랫동안 알고지내던 타임지 기자 출신의 월터 아이작슨에게 부탁했다. 잡스의 전기가 발간된 직후인 201111월 월터 아이작슨을 워싱턴DC 애스펀 연구소에서 인터뷰했다.

 

 

워싱턴 특파원단이 20116월 황준국(앞줄 왼쪽 네번째) 주미 한국대사관 정무공사 집에서 성김(앞줄 왼쪽 두번째) 미국 6자회담 수석대표(성김은 며칠 뒤 주미 한국대사에 지명된다)를 초청해 저녁을 함께 하며 우의를 다졌다. 성김 대사는 주한 미국 대사시절에도 당시 인연을 맺은 특파원들을 관저인 '하비스 하우스'로 초대해 한미 현안을 주제로 담소를 나누곤 했다. 뒷줄 오른쪽 두번째가 필자.

2009년 초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인 크리스토퍼 힐(앞줄 왼쪽 다섯번째)이 주 이라크 미국 대사로 지명됐다. 그해 4월 이라크 대사로 부임하기에 앞서 워싱턴 특파원단과 환송 만찬을 가졌다. 힐 차관보 오른쪽은 성 김. 필자는 뒷줄 오른쪽 다섯번째.

 

버지니아주 Falls Church에 위치해 있는 회사 관사.

 

 

 

 

 

 

 

미 국무부 출입기자증

미 상원,하원 출입기자증

 

*워싱턴 특파원 시절 미국 정치 관련 기사를 쓸 때 여러차례 인용했던 뉴트 깅리치 전 미국 하원의장이 2022년 2월 세계일보 초청으로 방한한 계기에 인터뷰를 갖게됐다. 

         

2000년부터 정치부 정당 출입기자로 활동한 필자는 새천년민주당에 배치됐다. 2002년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다. 노무현정부가 열렸지만 대선 기간 노 후보를 맡았던 동료 기자가 노무현 청와대에 먼저 출입기자로 들어갔다. 필자는 노무현정부 후반기(2005~2007년)에 청와대 출입기자로 활동했다.

 

 

필자 오른쪽은 천호선 당시 청와대 대변인

청와대 기자실인 춘추관 브리핑은 동선이 제한된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최대 취재 소스다. 미국 백악관 출입기자들도 매일 정오에 이뤄지는 Noon Briefing에서 궁금증을 해소한다. 

 

 

2007년 5월 청와대 행사 풀 취재

 

2007년 10월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 마그레테 2세 덴마크 여왕 공식 환영행사 풀 취재

 

노무현 대통령 왼쪽이&nbsp;마그레테&nbsp;2세 덴마크 여왕

 

 

 

여수에서 개최된 EXPO 관련 행사 풀 취재. 국내 행사는 대통령과 함께 공군 1호기를 타고 이동한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공간인 춘추관. 점심 식사 후 춘추관 직원들과. 가운데는 한형민 춘추관 행정관.

 

청와대 출입을 마치고 다른 부서로 이동하는 국민일보 오종석 기자에게 필자가 출입기자 일동 명의의 송별 문구를 대표로 써서 감사패에 새긴 뒤 전달해주고 있다.

 

 

 

2008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직후 경남 김해 봉하마을로 낙향. 낙향 취재를 마치고 사저를 배경으로.

 

필자 옆은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백원우 의원.

 

 

이탈리아 로마 순방 당시 트레비 분수 옆 맥주집에서 망중한. 왼쪽부터 매일경제 서양원, 조선일보 신정록 기자, 필자.

 

2007년&nbsp;10월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함께 북악산 산행. 당시는 이 등반로가 일반에 개방되지 않았다.

 

청와대 출입기자단 북악산 산행.

 

 

 

 

 

 

 

 

                                                                                                                       

 

 

 

 

2007 남북정상회담 방북단은 수행원 150명, 기자단 50명, 지원인원 100여명으로 구성됐다. 대표단은 2007년 10월2일 아침 서울을 출발, 경의선 CIQ(남북출입사무소)를 경유,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평양에 도착했다. 2박3일의 일정이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1차 남북정상회담 때 우리 대표단은 서해 직항로를 통해 항공편으로 방북했다. 이번에는 육로 방북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10월 2일 오전 9시쯤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남북분단의 상징인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통과했다. 노 대통령은 군사분계선 앞에서 "이 자리에 선 심경이 착잡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이 선이 우리 민족을 갈라 놓은 장벽이다. 이 장벽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아왔고 또 발전이 정지되어 왔다"는 심경을 피력했다. 그런 뒤 "다행히 그동안 여러 사람들이 수고를 많이 해서 이 선을 넘어가고 넘어왔다.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간다. 제가 다녀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은 지워지고 장벽은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도라산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개성, 평양으로 이어진 길

분단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군사분계선 앞에 표지석이 설치됐다. '평화를 다지는 길, 번영으로 가는 길. 2007년 10월 2일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의 문구는 노 대통령이 직접 친필로 작성한 것이다.

정부 공식 행사에서 우리 측 인사들이 육로로 평양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특히 한국 기자들에게 육로를 개방한 것은 북측의 폐쇄성을 고려할 때 주목할만한 일이었다. 북한의 실상을 그대로 공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개성에서 평양까지 가는 고속도로는 노면 상태가 고르지 못했다. 오가는 차량도 거의 없었다. 고속도로 옆의 일반 도로는 비포장 흙길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도 보였고 소달구지를 끌고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북측의 가파른 산세는 남한과는 다른 나라같았다. 

 

 

 

 

 

2007년 10월2일 남북정상회담 취재단 일원으로 버스를 타고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이용해 평양으로 가던 도중, 임시로 설치된 휴게소에서 북측이 제공하는 음료수를 마시고 있다.

 

 

개성에서 한 시간쯤 달리자 대동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동강을 가로지르는 '충성의 다리'를 건너자 길가 인도에 평양 시민들이 분홍색 조화를 들고 앉아 있었다. 스피커를 단 차량에서 구령을 외치자 평양 시민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만세"를 반복하며 함성을 질렀다. 환영 행렬은 노무현 대통령의 환영 식장인 4.25문화회관 앞 광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2007년 10월2일 평양 시내 모란봉 구역에 위치한 4.25문화회관 앞 광장. 왼쪽이 필자이고 오른쪽은 대학 동기인 CBS 김재덕 기자.

 

2007 남북정상회담을 하기위해 평양에 도착한 노무현 대통령을 맞이하는 북측의 공식 환영식이 열리고 있다. 당초 공식 환영식은 평양 입구인 승리동의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한 시간 전쯤 장소가 갑자기 이곳으로 바뀌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전 9시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은 뒤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2시간30분 정도 달려 평양에 도착한 뒤 인민문화궁전에서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영접을 받았다. 그리고 무개차를 타고 4.25문화회관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다. 필자는 미리 이 곳으로 와서 노 대통령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기 직전 현장에서 대기하는 남북측 인사들. 김종민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오른쪽 두번째)과 유민명 대변인실 행정관(왼쪽 네번째) 모습이 보인다.

 

 

 

2007년 10월2일 낮 12시쯤 갑자기 문화회관 광장 환영 인파에서 함성이 터졌다. 일부 시민들은 울기도 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어 5분 뒤 노 대통령과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함께 탄 무개차가 광장으로 들어서고 의장대의 군악 연주가 울려퍼졌다. 김 위원장은 노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악수를 교환하고 북한 인민군 의장대 사열을 받았다. 노 대통령은 영접 나온 북한 당,정,군의 고위층 인사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이어 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4.25문화회관 앞 중앙단상에 나란히 올라 북한 인민군의 분열을 받았다. 환영식이 끝난 뒤 노 대통령은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로 갔고 김 위원장은 잠시 더 광장에 머물며 환영 인파에게 손을 흔들었다. 김 위원장이 떠날 때 박수와 환호성은 더 커졌다. 2007 남북정상회담은 다음날인 3일 백화원 초대소 영빈관에서 이뤄졌다.

노 대통령은 평양 도착 직후 서면을 통해 북한 동포와 평양 시민에게 전하는 도착 성명을 발표했다. 노 대통령은 성명에서 "여러분의 따뜻한 환영에 마음 속 깊이 뜨거운 감동을 느낀다. 남북은 지금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보면서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이 간절할수록, 우리의 의지가 확고할수록 그 길은 더욱 넓고 탄탄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10월 2일 노 대통령과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면담이 있었다. 노 대통령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본회의장을 참관한 후 방명록에 '인민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이라고 서명했다. 면담 이후 평양 시내 목란관에서 김 상임위원장 주최 만찬이 열렸다. 필자는 이 만찬의 풀기자였다. 목란관은 평양 중구역에 자리 잡은 연회장으로 북한의 국화인 '목란'에서 이름을 땄다. 만찬장에 들어서자 헤드 테이블 맞은 편 벽에 걸린 대형 '해 그림'과 반대편 벽에 걸린 '파도 그림'이 눈길을 사로 잡았다.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해 사진'을 가리키며 김대중 대통령 일행에게 "저게 해 뜨는 장면 같소, 아니면 지는 장면 같소?"라고 물은 뒤 "아침에 들어와서 보면 해 뜰 때, 술 마시다 저녁에 해 질 때 보면 또 저 장면"이라고 자문자답했다는 일화가 생각났다. 그래서 '해 사진'을 유심히 관찰했으나 어느 시점의 해인지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그 사진이 냉온탕을 반복했던 남북관계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 입맛이 썼다.

 

목란관에 걸린 해 그림

 

기자의 옆에 앉은 북측 인사는 조선중앙통신사 간부였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뒤 중앙통신사에 입사한 20년차 기자로, ㅈ로 정치 보도 부문을 담당해왔다고 했다. 신변잡기식 대화를 이어 가던 와중에 우리는 생각하지도 못한 지점에서 분단의 벽을 실감하게 됐다. 대화 도중 '게사니 구이' 요리가 나왔을 때였다.

"게사니가 뭡니까?" 필자가 물었다.

 "게사니가 게사니지 뭐겠습니까?"

"남측('남한'이라고 하면 항의를 받는다. 여러 차례 지적을 받은 끝에 필자도 '남측'이라는 표현에 익숙해졌다)에서는 게사니라는 말이 없습니다."

"오리 비슷한 조류인데 몸집이 좀 더 큽니다. 꽥꽥하는 소리를 냅니다."

"그럼 거위군요."

"거위가 뭡네까?"

음식을 내오는 안내원을 불러 물어도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거위려니 짐작하고 대화를 끝내야 했다. 서울로 돌아온 후 북한어 사전을 찾아보니 짐작대로 '게사니'는 거위의 북한어였다.

 

평양 방문 당시 취재단을 안내했던 북측 인사. 

 

 

 


2007년 10월3일 낮 12시에 평양 시내 대동강변에 자리 잡은 옥류관 식당에서 노무현 대통령 초청 형식으로 공식 수행원, 특별 수행원, 공동취재단이 참여하는 오찬 행사가 열렸다. 필자도 냉면을 먹은 뒤 대동강변으로 나와 망중한을 즐겼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백화원 초대소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옥류관에서 점심을 먹은 뒤 오후에 백화원 초대소 영빈관에서 다시 김 위원장과 회담을 했다. 2007 남북정상회담의 전환점이 된 노 대통령의 오찬 발언이 이 곳에서 나왔다.

 노 대통령은 오전에 진행된 첫 정상회담과 관련,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숨김없이 진솔하게 얘기를 나눴습니다. 한 가지 쉽지 않은 벽을 느끼기도 했다. 남측이 신뢰를 가지고 있더라도 북측은 아직도 남측에 여러 가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 불신의 벽을 허물기 위해선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예를 들면 개혁과 개방이라는 용어에 대한 불신감과 거부감을 어제 김영남 상임위원과의 면담에서도, 또 오늘 김 위원장과의 회담에서 느꼈다. 우리는 개성공단을 아주 만족스러운 성공적인 사업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북측이 속도의 문제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개성공단을 개혁과 개방의 표본이라고 많이 얘기했는데, 우리의 관점에서 편한 대로 얘기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북측이 보기에는 역지사지하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개성공단의 성과를 얘기할 때 북측의 체제를 존중하는 용의주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북측의 입장과 북측이 생각하는 방향도 존중해서 불신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노력을 함께해 나가면 좋겠다고 제안 드린다"

사실상 노 대통령의 오찬 발언은 김 위원장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이 발언은 즉각 김 위원장에게 보고됐을 것이다.

평양 주민들에 대한 덕담도 이어졌다.

"어제도 평양 주민이, 연도에 많은 사람이 나와 따뜻하고 열렬히 환영해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와 같이 배려해 주신 북측 당국에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연도에 계신 분들을 가까이에서 보니 표정이 그렇게 간절할 수 없었다. 남북의 국민이 나뉘어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이를 해소해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을 그분들의 표정에서 생생하게 보았다. 그동안 수십개 나라를 다녔지만 북측 땅만큼 먼 나라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까 음식도 똑같고 잠자리도 똑같고 통역도 필요없고 정말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훨신 더 좋은 체험이 될 것 같다. 여러분이 역사적 현장에 함께하고 계시다. 양국 간의 평화 정착, 공동의 번영, 마침내 화해와 통일로 가는 과제가 순탄하게 이뤄지길 바란다. 모든 부분에 인식을 같이하진 못했지만, 김 위원장이 평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갖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에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화해와 통일에 대해서는 논쟁이 따로 없었다. 김 위원장과 북측 인민들의 건강과 행운을 함께 기원한다."

노 대통령의 오찬 발언은 경색됐던 이날 오전 남북 정상회담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오후 회담에서는 김 위원장의 태도가 한결 누그러져 2박3일의 공식 일정을 연기해서 하룻밤 더 묵고 가라는 김 위원장의 권유까지 나올 정도로 회담 분위기가 좋아졌다고 청와대 관계자가 전했다.

 

 

평양시 중구역 창전동 대동강 변에 자리잡은 옥류관은 1960년 8월 문을 열었다. 대동강 옥류교 옆에 위치해 있어 옥류관이란 이름이 붙었다.  순메밀 국수로 만든 평양냉면과 고기쟁반 국수, 평양온면, 대동강 숭어국, 송어회 등이 옥류관의 대표 메뉴다. 물냉면은 100% 메밀로 면을 만들고 쟁반냉면은 메밀과 전분을 섞어 만든다고 한다.

 북한의 당.정 간부 연회 및 외국인 접대 장소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북한 주민들도 즐겨 찾는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 곳에서 오찬을 했고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 곳에서 오찬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8년 9월19일 옥류관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 부부와 오찬을 했고 특별 수행원으로 평양에 온 여야 3당 대표와 재계 총수들도 옥류관에서 식사를 했다. 그 때 리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재계 총수들에게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고 말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18년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은 "옥류관 행사에서 대기업 총수들이 냉면을 먹는 자리에 리선권이 불쑥 나타나 정색하고 '아니,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니까'라고 했다, 보고 받았느냐"고 하자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고 답변했다. 정 의원이 "왜 그런 핀잔을 준 것이냐"고 묻자 조 장관은 "북측에서는 남북 관계 속도를 냈으면 하는 게 있다"고 했다. 그 자리에는 김능오 평양시 노동당 위원장을 비롯해 손경식 경총 회장,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최태원 SK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광모 LG회장이 동석했다. 옥류관은 2020년 6월에도 다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북한이 6.12 미북 정상회담 2주년을 맞아 대미, 대남 비방전을 시작했을 때 북한의 대외선전매체인 '조선의 오늘'에 오수봉 옥류관 주방장의 발언이 소개됐다. '조선의 오늘'은 2020년 6월13일 오수봉 주방장이 “평양에 와서 우리의 이름난 옥류관국수를 처먹을 때는 그 무슨 큰일이나 칠 것처럼 요사를 떨고 돌아가서는 지금까지 전혀 한 일도 없는 주제에 오늘은 또 우리의 심장에 대못을 박았다”며 “몽땅 잡아다가 우리 주방의 구이로에 처넣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필자는 2007년 남북 정상회담 취재단의 일원으로 노 전 대통령이 수행원과 오찬을 할 때 다른 테이블에서 냉면 맛을 봤다.

아래는 그 때 필자가 먹은 냉면 사진.

 

 

냉면을 먹은 뒤에는 '에스키모'가 나온다. 디저트 아이스크림을 북측에선 이렇게 불렀다. '얼음 보숭이'를 현대적으로 고친 이름이었다.

 

 

2007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평양에 온 도올 김용옥(위), 소설가 조정래씨.

 

 

 옥류관에서 바라본 대동강 풍경

 

 

'아리랑' 공연이 열리고 있는 대동강 능라도 경기장(일명 5.1경기장)


노 대통령의 아리랑 공연 관람은 남북정상회담 준비 단계부터 '뜨거운 감자'였다. "대통령이 김일성의 혁명 생애와 선군정치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집단체조를 보는 것은 말이 안되다"는 반대 여론이 일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아리랑 관람은 북측에서 하자는 대로 맡기라"고 지침을 내렸다. 상호 체제를 존중하는 대승적 차원에서 정상회담을 풀어가고 손님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남측 협상단은 노 대통령의 아리랑 공연 관람이 친북 논란 등 불필요한 이념 논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공연 내용 일부를 수정하기로 하고 북측과 사전 교섭을 벌였다. 북측은 남측의 이같은 우려를 받아들여 공연 내용을 수정하겠다는 태도를 보여 사전 교섭은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이에따라 청와대는 노 대통령의 아리랑 공연 관람 계획을 확정 발표했고 남측 선발대는 북측이 수정한 아리랑 공연을 사전 관람한 뒤 문제될만한 부분은 없다는 평가를 내렸다. 공연 관람 시간은 2007년 10월3일 오후 7시30분. 하지만 오전부터 비가 내린탓에 공연은 예정보다 늦은 오후 8시에 시작됐다. 필자를 비롯한 공동 취재단은 능라도경기장의 주석단 인근에 마련된 특별 좌석에 배치됐다. 북측의 10만여 관객이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오후 8시쯤 김영남 위원장과 경기장에 들어섰다. 아리랑 공연은 공연자만 10만명이 등장하는 세계 최대의 공연이다. 북측은 약속대로 공연에서 이념성 짙은 내용을 삭제, 수정했다. 원래 아리랑 공연은 서장과 본장 1,2,3,4장, 종장으로 구성됐는데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칭송하는 내용의 서장을 없애고 대신 출연진들이 노 대통령을 향해 모란과 진달래 등을 형상화한 종이꽃을 흔들며 환호하는 대목을 넣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수난사로 시작하는 1장 공연으로 들어갔다. 아리랑 공연은 종장에서도 '영광스런 조선로동당', '영원히 번영하라 조선로동당', '위대한 우리 당에 영광을' 같은 카드섹션은 제외했고 2장에서도 북한 인민군의 위력을 과시하는 총검술 장면을 삭제하고 태권도 시범을 보이는 장면으로 대체했다. 김정일 위원장을 형상화한 카드 섹션도 없앴다. 그럼에도 '한 세대 두 제국주의 타승하신 강철의 명장, 어버이 사랑으로 강군을 키우신 대원수', '무궁 번영하라 김일성 조선이여'라는 카드섹션은 바꾸지 않았다. 

아리랑 공연은 별 문제없이 끝났는데 논란은 의전 과정에서 불거졌다. 노 대통령과 함께 공연을 관람한 인사가 김정일 위원장이 아닌 김영남 최고인민회의위원장이라는 격식 논란이었다. 또 다른 논란은 노 대통령이 관람 도중 두 차례 기립박수를 친 것이었다. 공연 말미에 관중들이 함성을 지르며 노 대통령을 향해 환호하자 노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출연자들과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 대목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에 앞서 이뤄진 첫번째 기립박수는 논란의 소지가 있었다. 이 때 공연 중인 어린 아동들이 "아버지 장군님 고맙습니다"라고 소리치며 달려나오면서 노 대통령이 앉아있는 무대 뒤편으로 '아버지 장군님 고맙습니다'라는 카드섹션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김영남 위원장이 일어서자 노 대통령도 따라서 일어선 것이다. 

기립 박수를 할 것인지 여부는 방북 전에 청와대 내에서 논의됐던 사안이었다. 공연을 관람하면서 일어서서 박수를 쳐야할 상황이 생겼을 때 손님으로서 그냥 앉아있기도 그렇고 기립박수를 치자니 남측 국민의 정서에 배치될 수도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청와대 참모들은 '일어서기는 하되, 박수는 치지 않는다'는 절충안으로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무슨 소리요. 가서 전부 박수 치는 걸로 해!"라면서 참모들의 결정을 질책했다. 그러나 수행했던 각료들이 우려를 표명해서 원래대로 '일어서되 박수는 치지 않는다'로 최종 확정됐다. 노 대통령은 "그럼 나 혼자만 치지"라고 말하고 공연장으로 떠났다고 한다. 노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 사이에서도 이 문제는 고심거리였다. 권 여사가 "나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노 대통령은 "나와 우리는 다르니 당신은 치지 마시오"라고 정리했다. 관람을 마친 뒤 권 여사는 노 대통령에게 불평을 토로했다고 한다. "나는 이제 이 사람들한테 인심 다 잃었다. 나는 북쪽에 오면 매 맞게 생겼고, 당신은 남쪽에 내려가면 매 맞게 생겼으니까. 이제 우리는 북에 가도 욕먹고 남에 가도 욕먹게됐다"

노 대통령은 나중에 기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나도 고민을 많이 했는데, 북쪽의 인심을 얻어야 되는가, 남쪽의 인심을 얻어야 되는가. 우리 여론의 인심을 얻어야 하나 북쪽의 호감을 사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내가 여기 온 걸음이 얼마나 어려운 걸음인데, 그래도 와서 마지막까지 하나라도 더 본전 찾고 가자면 북쪽의 호감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 싶었다. 그래서 제가 박수를 쳤습니다."  

 

북한 최고의 명문대인 김책공대 컴퓨터실에서 학생들이 컴퓨터를 다루고 있다.


북한도 취업난이 심각했다. 엘리트들이 갈 곳이 없어 국정원 직원 격인 안내원들도 김일성종합대학 출신들이 많았다. 기업체가 활발히 생겨나지 않으니 공무원으로 몰리는 셈이다. 그렇다보니 북한 주민들도 자녀 교육이 큰 관심사였다. 신분 변화가 활발하지 않다보니 자녀 교육에 더 매달리는 것이다.

 

 

 

 

 

 2007 남북정상회담 취재진 숙소인 평양 고려호텔 내부. 숙소는 1인1실로 주어졌고 방은 트윈룸이었다. 세탁 서비스, 미니바 서비스는 모두 무료였다. 호텔 서비스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호텔 방의 라디오 스위치는 떨어져 나간 채였고 시계는 고장 나 있었다. 방문은 아귀가 맞지 않아 여닫을 때마다 힘을 줘야 했다. 금방 고칠 수 있는 사안인데도 그대로 둔채 운영되고 있었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는 2층 식당에서 코스 요리 형태로 제공됐다.

 

 

 

 

 

 

고려호텔 44층 스카이라운지에서 바라본 평양 전경.  

고려호텔 스카이라운지는 회전 장치로 되어 있어 시내 전경을 사방에서 볼 수 있는 구조였다. 대동강맥주, 사이다, 들쭉 단물, 커피 등이 제공됐다. 남성 직원 한 명에 여성 카운터 한 명, 여성 봉사원 두 명이 근무했다. 호텔 지하의 '화면노래반주실'은 홀의 형태로 되어 있었다. 호텔에서는 이 곳에서만 양담배(던힐)를 팔았다. 노래는 북측 혁명가요, 일제강점기 때의 대중가요(북에서는 '계몽기 가요'라고 함), 서양 팝송 등이 있었다.  1층 로비에 마련된 매점에서는 농산품, 보약류, 주류, 버섯류 등이 구비돼 있었다. 카운터에 가서 전표를 구입한 뒤 매장에서 물품으로 교환하는 형식이었다. 카운터 옆에는 환율표가 붙어 있었다.

 

 

 

 

 

 

평양 건물 외벽이나 옥상에는 붉은 글씨로 쓴 선전 구호가 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선군정치의 위대한 승리 만세', '혁명의 수뇌부 결사옹위', '자주 자립 자위', '미제는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하자', '영광스러운 조선노동당 만세', '수령님은 만인의 태양', '김정일 원수님 고맙습니다' 같은 글귀였다.

 

 

 

 

 

 

평양의 거리는 도시계획이 제법 잘돼 있었다. 왕복 6차로가 대부분이었고 고층 건물 외벽도 회색 일변도가 아닌 다채로운 색깔로 단장돼있었다. 인도와 차도는 깨끗했다. 젊은 여성들은 대부분 양장 차림이었고 미니에 가까운 치마에 부츠를 신은 멋쟁이들도 보였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눈에 띄었다. 취재진은 외국인 관광객처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기념 촬영도 제지당하기 일쑤였다. 몰래 촬영하다 적발되면 곧바로 디지털 카메라를 빼앗아 해당 사진을 지웠다. 거리에는 곳곳에 공중전화 박스가 비치돼 있었다.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교차로에는 수신호를 하는 여성 교통보안원이 신호등을 대신했다. 출퇴근 시간대에 근무를 섰는데 통행 차량이 많지 않아 교통은 원활하게 이뤄졌다. 건널목에는 대부분 지하도가 연결돼 있어 보행자들은 지하도로 다녔다. 차량들은 오래된 일본 자동차들이 대부분이었다. 도요타, 닛산 등이었고 일본에서 바로 건너온 것이라서 오른쪽에 핸들이 달린 승용차도 많았다. 벤츠, 폭스바겐, BMW 같은 유럽 자동차도 많았다. 한국차와 미국차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연식이 오래된 탓인지 매연을 내뿜는 차량들이 많았다. 택시 캡을 단 흰색 택시도 드물게 보였다. 택시는 주로 외국인들이 이용했고 평양 시민들은 대부분 전기로 움직이는 전차식 버스를 이용했다.

북한의 밤은 칠흙이었다. 밤 10시 이후 평양은 상점과 음식점에서 전등을 한두개 켜놓고 손님을 기다릴뿐 다른 곳은 불이 꺼져 있었다. 밤 11시가 넘으면 거리의 차량은 통행조차 끊겼다. 가로수는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불을 밝힌 전구들로 장식돼있었지만 정상회담을 의식해 켜놓은 것으로 추정됐다. 그도 그럴 것이 고층 아파트에서도 불 꺼진 집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2007 남북정상회담 프레스센터는 평양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고려호텔 2층에 마련됐다. 고려호텔의 프레스센터는 통신, 통화, 통행의 '3통'이 단절된 장소였다. 남북측의 사전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 인터넷도 되지 않아 취재진이 들고간 노트북은 워드프로세서 기능으로만 사용됐다. 기자들의 호텔 밖 출입도 엄격히 통제됐다. 기사 송고는 서울 프레스센터와 연결된 '인포넷' 라인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 때와 달리 적어도 호텔 안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했다. 2000년 정상회담 때는 북측 안내원들이 취재 기자들을 철저히 통제했다. 2007년에는 호텔 지하 사우나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했고 헬스클럽과 탁구장도 개방했다. 원래는 유료 시설이지만 정상회담 취재진에게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했다. 하지만 호텔 밖 이동은 통제됐다. 김정일 위원장 관련 행사에서는 기자들의 접근 취재가 원천 봉쇄됐다.  

 

 

 

2007 남북정상회담 취재단 구성은 시작부터 경합이 치열했다. 청와대 출입 언론사 수와 기자들은 늘어났으나 취재단은 여전히 50명으로 한정됐기 때문이다. 남과 북의 협의와 청와대 기자실 내부의 협의 절차를 통해 최종적으로 정상회담 취재단 구성이 확정됐다. 중앙기자실에서 통신사 기자 1명(연합뉴스), TV방송사 기자 6명(KBS 1명, MBC 1명, SBS 2명, MBN 1명, YTN 1명), 종합지 기자 10명(경향, 국민, 내일, 동아, 서울, 세계, 조선, 중앙, 한겨레, 한국), 경제지 기자 5명(매일경제, 머니투데이, 서울경제, 이데일리, 한국경제), 라디오방송 기자 1명(CBS), 영문지 1명(코리아타임스), 인터넷 신문 1명(프레시안)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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