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회’ 기치를 내걸고 19대 국회가 문을 연 지 3개월을 넘겼다. 지난 4·11 총선에서 유권자들의 거센 정치 불신을 절감하며 여의도 국회에 입성한 이들은 한목소리로 ‘특권 없는 국회’ ‘정치개혁’을 약속했다. 소리만 요란했을 뿐 달라진 건 없다. 이런 국회를 향해 끊임없이 ‘자성’을 촉구하는 이가 있다. 고향인 전남 강진에서 군수를 지내고 환갑의 나이에 첫 국회의원 배지를 단 늦깎이 황주홍 의원(민주통합당)이다.

 

 

 

그는 의정활동의 단상을 담은 ‘초선일기’를 쓰고 있다. 이를 통해 늑장 개원하고, 동료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키고, 무슨 벼슬이나 한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여의도 정치판을 향해 “공복(公僕)답게 행동하라”고 외치고 있다. 당 지도부나 동료 의원들에겐 그의 존재가 편치 않을지 몰라도 국민들은 속이 후련하다. 모난 돌이 정 맞는 정치판이라서 그의 존재가 더욱 돋보인다. 정치학 교수 출신인 황 의원을 만나 한국정치가 가야 할 길을 물었다.

―강진군수를 세 차례나 지내며 지방자치 현장을 지켰다. 국회의원이 돼서 지난 3개월 동안 중앙정치를 체험해 본 소감은.

“크게 다른 건 준법의식이다. 시장, 군수들은 일하면서 과민하다 싶을 정도로 실정법을 준수하기 위해 애를 쓰는데 국회는 그렇지 않더라. 법을 만드는 국회가 더 준법적이어야 할 것 같은데 의외로 대범하게 법을 어긴다. 헌법조차 손쉽게 무시해 버린다. 국회 개원은 국회법에 규정돼 있는 강제조항인데 그런 것 정도는 아랑곳않고 무시한다. 19대 국회에 쇄신특위가 만들어졌는데 국회 쇄신 거창할 것 없다. 자신들이 만든 법을 준수하면 된다.”

―정치권이 왜 그런다고 생각하는가.

“잘못된 문화와 관행 탓이다. 의원들은 언필칭 헌법기관이란 말을 즐겨 쓴다. 잘못됐다. 최상위 헌법기관은 국민이다. 의원들이 자신들만 헌법기관인 양 행동하면서 법령을 무겁게 생각하지 않고, 법령 위반 정도는 국익이란 관점에서 양해될 수 있다는 최면에 걸려 있는 것 같다.”

―지난 7월에 새누리당 정두언 의원 체포동의안이 부결됐다. 그것도 국회의원들이 특별하다는 자의식에 비롯된 결과인가.

“그런 것 같다. 의원은 벼슬아치가 아니다. 봉사기관의 공익요원이어야 한다. 국민들이 의원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해 주고 있다. 그런 만큼 직무수행과 연관된 권한 외의 특권, 기득권은 싹 내려놓는 것이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옳다. 요즘 유행하는 경제민주화의 관점에서도 그렇다. 그걸 안 하니깐 국민 입장에선 분통이 터진다.”

―국회의원들이 어떤 특권들을 내려놔야 한다고 보나.

“국회의원의 겸직은 말이 안 된다. 여기서 돈 받고 저기서 돈 받고, 이게 가능한가. 월급이나 적은가? 인턴까지 9명이 의원 한 명을 보좌한다. 9명을 붙여줄 정도로 일이 많다는 것이다. 무슨 겨를이 있어 겸직한다는 건가. 다른 공직은 못한다. 왜 의원만 겸직하나. 사회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주민소환제도 마찬가지다. 국회가 만든 법인데 소환 대상에 의원은 빠져 있다. 그래서 지난 7월에 동료의원들과 함께 국회의원 국민소환에 관한 법률을 대표 발의했다. 이런 것들이 시대착오적인 특권들이다.”

―의원 배지 착용도 반대하고 있는데 그건 사소한 문제 아닌가.

“그렇지 않다. 정치 쇄신과 국회 개혁의 출발선이다. 거기에 특권의식이 담겨 있다. 국회 대정부 질의 때도 국무총리를 상대로 국무위원들 배지 달지 마라고 촉구했다. 국회 쇄신특위가 제도권 의식의 상징인 배지 안 달기만 이뤄내도 큰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여야 할 것 없이 공천헌금 의혹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공천헌금을 근절시킬 방안은 없는가?

“첫째로는 시장·군수·구청장 등 기초단위 자치단체장들에 대한 정당 공천제도가 폐지돼야 한다. 그래야 지자체가 자기 논리와 자기 필요성에 따라 자율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일본은 정당공천제가 없다. 미국도 정당공천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의원들이 이 특권을 놓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천권을 무기로 지역구 시장이나 군수를 수하처럼 부린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고 믿고 있지만 공천헌금도 오간다.”(황 의원은 강진군수 시절 정당공천 폐지운동을 주도했다. 2010년엔 정당공천 폐지 소신을 지키기 위해 민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 모두 비례대표 의원 공천과정에서 공천헌금 의혹 사건이 터졌다.

“비례대표제도라는 것이 상위 순번만 차지하면 저절로 의원이 된다. 당 지도부의 한두 사람이 각별히 챙기면 의원을 만들어낼 수 있는 구조다. 마치 왕이 너는 영의정해라 하듯이, 당 대표나 당 실권자가 너는 4년 동안 의원하라고 점지하는 것이다. 이런 제도가 21세기 현대민주주의에 부합한가. 직능, 직업적 비례를 반영한다는 본래의 취지는 지역구 의원들이 다 감당해 낼 수 있다. 개별 의원 지역구에 장애인, 택시, 노동자 문제들이 다 녹아들어 있다.”

―한국 정치의 후진성이 중앙당의 과도한 권력 집중에 기인한다는 지적이 많다.

“우리는 50석 넘는 비례대표 의원을 중앙당이 다 결정한다. 어마어마한 권력이다. 중앙당의 권력 집중은 국회의 순조로운 의정활동을 사실상 제어, 방해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당론이 수시로 발급돼서 개별 의원들의 독자적인 입법, 의정활동을 제약한다. 중앙당이 비례뿐 아니라 지역구 의원 공천권까지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 의회에서 흔히 이뤄지는 크로스 보팅(교차투표)이 우리 국회에선 사실상 불가능하다.”

―중앙당 공천권이 문제라면 공천제도 자체를 상향식으로 바꿔야 하지 않나.

“그렇다. 공천 위원 열댓 명이 무슨 수로 전국적으로 수천 명에 이르는 후보자를 평가할 수 있느냐. 이번엔 (민주당 4·11 총선 공천과정에서) 후보자 면접 5분씩 했는데 옛날에는 면접도 없었다. 공천권을 주민들에게 돌려주면 된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어 놓은 것이 민주주의다. 그런데 지금은 영향력 있는 몇 명이 정당을 움직여가고 있다. 과두제나 다를 바 없다.”

 

―상향식 공천이 성공하려면 민도가 더 높아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국민이 문제라면 문제 아닌 게 뭐가 있겠나. 개인적으로 정치의 유일 척도가 국민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비록 틀렸을지라도 옳다고, 소설가인 알베르 카뮈가 말했다. 마찬가지로 민심은 비록 틀렸을지라도 옳다고 생각한다. 민심을 능가하고 제압할 수 있는 기관이나 사람은 민주제에서 존재할 수 없다. 그게 존재하면 민주제는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더욱이 지금 국민은 넘치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다. 민심이 보다 정교해졌다. 국민이 지시하는 대로 정치가 가면, 그 길이 바로 한국 정치를 개선하는 지름길이라고 본다.”

―정당정치가 위기라고 한다. 올 대선에선 정치인이 아닌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뜨고 있다. 이른바 ‘안철수 현상’이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염증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 본다. 안 교수가 난세의 영웅이라서가 아니다. 기성 정치권에서는 국민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후보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안 교수에게 국민의 지지가 쏠리는 게 아닌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마당인 정당의 위기도 정상은 아니다.

“정당정치가 문제라면 정당 밖에서 대안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 선거 때마다 외부에서 수혈한 사례가 많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표나 조순 서울시장, 박원순 서울시장이 그런 경우다. 미국에서도 아이젠하워 장군이 공화당 대선후보로 수혈돼 대통령이 됐고, 비록 실패했지만 사업가인 로스 페로가 민주·공화 양당체제에 반기를 들고 대선에 나서 무소속 돌풍을 일으켰다. 안철수 현상은 정치권을 향한 국민의 경종이다.”

―소신 발언으로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칭을 얻었다. 하지만 모난 돌이 정 맞는 게 작금의 정치 현실이다.

“당사자에게는 뼈아픈 소리이고 그의 지지자들에겐 불쾌한 소리일 수 있다. 하지만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론이다. 여론 무시가 정치 불신을 낳는다. 여론을 대변하는 과정에서 비용을 치러야 한다면 기꺼이 치르겠다.”

<약력>
전남 강진(1952년생) 광주일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미국 미주리대 정치학 박사 아·태평화재단 부총장 건국대 교수 강진군수(3선) 19대 국회의원

대담=조남규 정치부 차장

사진=김범준 기자

하퍼스 페리(Harpers Ferry)는 미국의 양수리.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되는 양수리처럼

이 곳에서도 포토맥강과 쉐난도어강이 만납니다.

그렇게 합쳐진 뒤

동쪽으로 내달려 대서양으로 흘러갑니다.

워싱턴DC를 가로지르는 바로 그 강입니다.

비가 추적 추적 내리던 2005년 어느 주말,

하퍼스 페리를 찾았습니다.

 

 

 

 

하퍼스 페리는

일천한 미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입니다.

 

1859년 10월16일.

노예폐지론자인 존 브라운이 추종자 15명을 이끌고

하퍼스 페리에 있던 연방 무기고를 습격합니다.

연방 무기고에는 10만 정의 총기와 엄청난 분량의 탄약이 있었지요.

브라운은 무기고를 점령한 뒤 흑인 노예들과 함께

애팔래치아 산맥에 흑인 공화국을 세운 뒤

남부 흑인 노예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야심찬 구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를 따르던 수하들이 수 십 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매우 무모한 구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시나 현실은 브라운의 구상과는 달랐습니다.

흑인 노예들은 동조하지 않았고

민병대들은 브라운이 점령한 무기고를 봉쇄했습니다.

제임스 뷰캐년 미 대통령이 파병한 미 해병대가

브라운 반란을 진압하는데는 채 3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브라운은 신속한 재판을 거쳐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브라운의 교수형을 지켜보던 인파 속에

후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암살하게되는

존 윌크스 부스가 끼어있었던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입니다.

 

하지만 브라운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브라운이 뿌린 노예제 폐지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나는 이 죄 많은 나라의 범죄는 오직 피로써만 씻길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브라운이 사형 직전 남긴 이 말은 예언이었습니다.

5년 뒤 노예제를 둘러싼 내분이 증폭된 끝에 남북전쟁이 발발,

미국의 대지는 피로 물들게 됩니다.

남,북군 병사들만 무려 60만 명 이상이 전사하게됩니다.

당시 남부군을 이끌었던 로버트 리가

남북전쟁의 예고편이었던 브라운 반란을 진압했던 장군이었다는 사실은

역사 앞의 인간을 한 없이 겸손하게 만듭니다.

저는 이런 사실(史實)을 대할 때마다

'역사의 신'이 내뿜는 숨결을 느낍니다. 

 

신생 미국의 병기창 역할을 하며 잘 나갔던 하퍼스 페리는

남북전쟁 기간 시쳇말로 작살이 났습니다.

웨스트 버지니아와 메릴랜드, 버지니아 등 3개주의 접경이고

미 동부를 종단하는 애팔래치안 산맥 속에 자리잡은 지리적 환경 때문에

남군과 북군이 사활을 건 쟁탈전을 벌였기 때문이죠.

남북전쟁 당시 이 곳의 주인은 여덟번이나 바뀌었습니다.

하퍼스 페리 전투 중 남부군의 토머스 잭슨 장군이

일거에 북군 1만2500명을 포로로 만든 작전은

오래도록 전사(戰史)에 남았습니다.

단일 작전에서 가장 많은 포로를 획득한 이 기록은

2차대전의 바탕, 코레지도르 전투 전까지는 깨지지 않았습니다.

토머스 잭슨은 'Stonewall'(돌벽)이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어

스톤월 잭슨으로도 불렸는데,

몇 개월 뒤 부하가 쏜 오발탄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그도 브라운 반란 진압에 참가했던 병사로

하퍼스 페리와는 인연이 깊은 인물입니다.

 

하퍼스 페리는

남북전쟁으로 폐허가 된 뒤 한 세기 만에

남북전쟁을 상품화한 역사 관광 도시로 부활합니다.

 

 

 

 

 동네 주민들은 당시 민병대 복장을 입고

 관광객들을 맞이합니다.

 


 

 

 

한 때 신생 미국의 산업 중심지였던 시절,

초기 식민자들의 생활 모습도 느껴볼 수 있구요,

 

 

전체적인 도시 분위기도 한 나절 산책 코스론 제격입니다. 

 

 

 

 

 

 

 

 

 

 

 

 

하퍼스 페리는 애팔래치안 트레일러들에겐 각별한 곳입니다.

이 곳에 애팔래치안 트레일 콘퍼런스(ATC) 본부가 있기 때문이죠.

애팔래치안 트레일러들은 본부 앞에서 인증 샷을 찍기도 합니다.

 

 

 

애팔래치안 트레일은,

미 동부 해안을 따라 솟아있는 애팔래치안 산맥 위로

남부 조지아주에서 북부 메인주까지 14개주를 관통하며

무려 3360km에 걸쳐있는 길입니다.

 

울릉도에 집 짓고 사는

'한 잔의 추억'의 가수 이장희씨도

애팔래치안 트레일에 도전했다고 해서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올 여름 휴가 때

미국 작가인 빌 브라이슨이 직접 애팔래치안 트레일을 걸어보고

그 경험에 바탕해 쓴 '나를 부르는 숲'(A walk in the woods, 홍은택 번역)을 읽으며

간접 경험을 해봤습니다.

휴가지로 떠나는 기차에 올라타자마자 읽기 시작해서

고향인 정읍역에 도착할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산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강추합니다.

 

하퍼스 페리는

이 유명한 애팔래치안 트레일의 중간 쯤에 위치해있습니다.

역자인 기자 출신의 홍은택씨는 '옮긴이 후기'에서,

애팔래치안 트레일 종주 등반객(Thru-Hiker)과 조우했던 경험을 전하면서

"이들은 우리로 치면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있는 셈이었다.

 백두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는 대략 1400km 정도인데

 애팔래치안 트레일은 두 배가 넘는다"고 썼습니다.

제가 이 블로그 '여행 에세이' 편에서 소개했던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이나 쉐난도어 공원, 블루리지 파크웨이 등이

애팔래치안 트레일을 숲 속 깊이 감춰두고 있었더군요.

저는 자동차로 달리기도 힘이 들었던 그 먼 거리를

애팔래치안 트레일러들은

쌀 반가마 정도 무게인 베낭을 메고

곰과 방울뱀, 독충, 독초, 불개미, 질병,

때론 살인마의 위협을 무릅쓰고 걸어간다고 하니,

절로 존경심이 우러납니다.

 

참 얘깃거리가 많은 하퍼스 페리입니다.

 

 

 

 


민주통합당의 올 대선 목표는 ‘어게인 2002’다.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연출했던 역전 드라마를 이번에도 재연하겠다는 것이다. 올 대선은 겉모양만 보면 2002년 대선과 많이 닮았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경선 후보는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처럼 독보적 지위를 점하고 있다.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은 사실상 ‘박근혜 추대식’이나 다를 바 없게 됐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어냈던 친노(친노무현) 세력은 올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중심으로 다시 뭉쳤다. 정당 밖의 제3후보가 기존 정치권에 염증을 느낀 여론을 등에 업고 대선 변수로 부상한 것도 판박이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안철수(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바람은 2002년 월드컵 열기 속에 만들어진 정몽준 바람보다 더 강하게 불고 있다.

대선을 5개월 앞둔 시점에 이회창은 노무현, 정몽준보다 지지율(갤럽 조사)이 15%포인트가량 높았다. 민주당 후보에게 불리한 1강2중 구도였다. 이번엔 같은 시점에 박근혜, 안철수가 2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문 후보는 노무현보다 훨씬 힘든 조건 속에 놓여 있는 셈이다. 노무현은 정몽준과의 단일화라는 승부수로 난관을 돌파하고 마침내 대선에서 승리했다. 문재인도 그런 식으로 대통령이 되려 한다.

그런데 노무현 방식을 답습하겠다는 문 후보는 왠지 노무현답지가 않다. 문 후보는 오래전부터 안 원장에게 목을 매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가 안 원장을 향해 공동정부를 운영하자고 제안한 것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기도 전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민주당은 졸지에 ‘불임(不姙)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안 원장은 “문 고문이 굳이 저를 거론해서 말한 게 아니라 앞으로 분열이 아닌 화합의 정치가 필요하다는 자신의 철학을 보여 주신 게 아닌가…”라고 언급, 문 후보의 제안이 무색하게 됐다. 그런데도 문 후보는 “안 원장이 대선 참여 뜻을 밝힌 것을 환영한다”느니 “이제는 안 원장을 견제할 때가 아니고 단일화 경쟁 상대로 생각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안철수에게 매달리고 있다. 안 원장은 단일화의 ‘단’자도 입에 올리지 않고 있는데 그는 그렇다. 지독한 짝사랑이다. 심하게 말하면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는 격이다.

 

                                                                                              문재인(왼쪽)과 안철수

안 원장이 뜨고 있다고 해도 그는 대선 출마 여부도 결단하지 않은 상태다. 문 후보는 한국 정당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제1야당의 유력 대선 주자다. 얼마 전엔 민주당 지지자들이 안 원장보다 문 후보를 더 선호하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10년 전 문 후보의 자리에 있었던 노무현은 달랐다. 노무현은 정몽준에 기댄 적이 없다. 결기가 있었고 배포가 느껴졌다. 누구보다 문 후보가 잘 알 것이다. 정권교체가 최우선 목표라고 해도, 일에는 순서가 있고 공당의 유력 후보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 우선 민주당 후보로 우뚝 서고 그 토대 위에서 연대를 모색해도 모색할 일이다. 문 후보는 내심 안 원장이 독자 후보로 완주, 대선 필패의 상황이 초래되는 것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온다 해도 민주당의 깃발 아래 옥쇄(玉碎)하겠다는 각오로 임할 일이다. 그런 각오라야 안 원장과 오롯이 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안 원장 문제에 관한 한, 손학규 후보의 태도가 반듯해 보인다. 손 후보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국민이 (지난 총선에서) 127석을 줬을 때는 이걸 갖고 정권을 만들어 보라는 뜻”이라며 “‘우리가 다시 잘하겠다’고 해야지 해보지도 않고 ‘손만 잡자’, 그래선 안 된다. 그런 지도자에게 누가 정권을 맡기겠나. 국민은 자신 있는 지도자를 원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사실을 ‘주홍글씨’처럼 안고 사는 손 후보가 ‘친노 적자(嫡子)’를 자처하는 문 후보보다 더 노무현다운 것은 아이러니다.

조남규 정치부 차장 

"지금까지 동독과 체결한 협정을 존중하고 진행 중인 협상도 계속 추진하겠다.”

13년 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했던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는 1982년 취임 연설을 통해 이같이 천명했다.

기민·자민당 연립 정부는 직전 사민당 정부가 69년부터 추진했던 ‘동방정책’(Ostpolitik)을 계승, 현실에 맞게 발전시켰다. 1990년 10월 독일은 전격적으로 통일됐고 콜 총리는 ‘통일 재상’으로 역사에 남았다.

독일 통일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대표되는 냉전 종식의 흐름 속에서 우연한 계기에 이뤄진 기적 같은 사건이었다. 독일 국민들의 통일 열망과 서독 정부, 서독 정치권의 꾸준한 통일 노력이 기적을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 서독 정치권은 동독 정책에 관한 초당적 합의를 이끌어 내며 내부 갈등으로 통일 에너지가 고갈되는 것을 막았다.

 

 

 

◆정쟁 접고 통일 합의 이끌어낸 서독

서독 하원이 84년 채택한 ‘독일정책 공동 결의안’은 독일 통일사에서 기념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결의안의 취지는 정권 향배에 따라 동독 정책이 춤을 추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정치권의 합의는 일관된 통일 정책 추진을 가능케 했다.

서독 정치권도 오랫동안 동독 정책을 둘러싸고 갈등했다. 사민·자민당 연립정부 총리로 취임한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69년 기존의 동독 정책을 전면 수정, 동독과의 관계개선에 나서자 기민당을 비롯한 야당은 거세게 반발했다. 브란트 정권이 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야당은 “동독을 국제법적 주체로 인정한 기본조약은 독일 분단을 고착화하는 위헌조약”이라면서 연방헌법재판소에 제소했다.

하지만 기민당은 사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자 ‘동방정책’, ‘동·서독 기본조약’에 반대 기조를 누그러뜨리기 시작했다. 사민당 정권도 정책 추진 과정에서 야당의 입장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치며 동독 정책을 둘러싼 간격을 좁히려 애썼다. 각론에선 치열한 토론을 벌이면서도 합의된 정책에 대해선 초당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여야는 상생의 관계였다. 사민당 브란트 총리의 과감한 동방정책은 기민당의 콘라트 아데나워 전 총리가 미국과 프랑스, 영국 등과의 관계를 개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민당은 친미 정권이라는 비판을 무릅쓰면서 대소련 전초기지 역할을 자임했다. 통일 과정에서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사민당의 동방정책은 소련과 동유럽을 변화시키고 종국엔 동독인들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게 했다.

◆정치권, ‘통일 대협약’ 마련해야

우리 정치권은 그간 정권에 따라 대북 정책이 냉탕·온탕을 오가는 바람에 남북한 신뢰구축은 고사하고 남남갈등만 키워왔다.

국회가 나름의 대북 정책 관련 합의를 이끌어낸 사례가 없지는 않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여야는 공동으로 남북관계발전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 법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문화했다. 이명박 정부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을 승계하지 않자 정치권의 합의도 물거품이 된 셈이다.

남북관계발전법은 정부와 민간 위원으로 남북관계발전위원회를 구성, 5년 단위로 남북관계발전 기본 계획을 심의하도록 했으나 위원회는 2006년 설치된 이래 단 한차례 소집되고 개점휴업 상태가 됐다.

18대 국회에서도 대북정책에 관한 ‘국민대협약’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2009년 한나라당 진영 의원과 민주당 송민순 의원은 초당적 통일 노력을 위한 공동 토론회를 개최했다.

진 의원(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은 서면 인터뷰에서 “당시 토론회 취지는 여야, 정부,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대북정책협의체를 만들어 정책 수립단계에서부터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북측과 대화를 하자는 것이었다”며 “협의체를 통한 정책적 공감대 형성만이 남남갈등이 남북관계 악화로 비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송 전 의원은 “‘국민대협약’이 이뤄진다면 대통령 5년 단임제에 의한 정책의 단절없이 남북관계를 우리가 이끌어갈 수 있게 되고 미국, 중국 등 관련국과의 협상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송 전 의원은 국민대협약의 내용과 관련, 냉전 종식 이래 남북 간에 이룬 3대 합의(92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공동선언, 2007년 10·4합의)를 국민대협약의 근간으로 삼자는 주장이다.

진 의원은 “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출발, 단계적이고 평화적 통일에 대한 의지 확인, 북핵 문제 해결, 남북교류 강화와 투명한 인도적 지원 방안, 이산가족 및 국군포로 문제 등 다양한 논의를 국민들의 합의를 통해 차분히 정해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편차가 있지만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토론한다면 충분히 절충점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올 12월 대선을 앞두고 여야 유력 대선 주자들이 저마다 통일 대통령을 꿈꾸며 남북정상회담 정례화 등 온갖 장밋빛 공약들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훌륭한 통일 정책도 국민적 합의와 초당적 지원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독일 통일의 교훈이다.

조남규 기자

 

 

 

송민순(사진)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통일 과정에서 여야는 동지인데 방법이 다르다고 원수처럼 싸운다”면서 “북한이나 주변국들이 이용해먹기 좋은 상황”이라고 개탄했다.

송 전 장관은 대북정책을 둘러싼 정치권의 다툼과 관련, “진보든 보수든 위정자나 집권 엘리트들이 북한 문제를 정리적으로 이용하면 안 된다”며 “북한을 악으로 보는 도덕적 강경론자도, 북한이 지고지선이라는 맹목적 타협론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송 전 장관은 노무현 정부 시절 외교부 장관을 지내고 민주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18대 국회에 입성, 4년 동안 정치권을 지켜봤다. 민주당 소속이었지만 외교·안보 현안에 관한 초당적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애썼다는 평가를 받았다. 송 전 장관을 지난 13일 시내 한 호텔에서 만나 정치권의 초당적 통일 논의 방안 등에 대한 의견을 들어봤다.

―18대 국회에서 대북 정책과 관련된 ‘국민 대협약’을 만들자고 주창했다. 어떤 문제 의식에서였나.

“그동안 남북관계를 볼 때, 새 정부가 취임하면 북한은 으레 남북관계 업적을 만들어 내고픈 남측 지도자의 욕구를 이용해 칼자루를 쥐고 필요한 것을 요구한다. 이에 응하면 국내에선 ‘북한 퍼주기’ 논란 등 국민 저항이 심해진다. 집권 말기에도 대북정책에서 업적을 남기려 한다. 또 북한이 칼자루를 쥔다. 악순환이다. 누가 정권을 잡든 집권 기간에 할 수 있는 부분만 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국민 대협약이 필요하다.”

―국회의원으로서 정치권의 통일 논의를 지켜본 소감이 어떤가.

“여야 모두 통일하자고 한다. 북한을 변화시키자고 한다. 체제 경쟁에서 승리한 대한민국 방식으로 변화시키자고 한다. 그런데 북한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놓고 적군처럼 싸운다.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능선을 타고 가는 방법도 있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도 있다. 우리는 방법을 놓고 싸우느라 힘을 다 소진하고 쓰러진다. 국론 분열된다. 정말 안타깝다.”

―왜 싸우는 것 같나.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니깐. 그걸 넘어서야 한다.”

―정치권이 당파성만 극복하면 되나.

“그렇다고 본다. 진보 진영은 북한이 잘못하는 것, 예컨대 북한 인권 문제를 지적해야 한다. 인간의 보편적 가치 차원에서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 진영은 대북정책을 탄력적으로 해야 한다. 미국과 일본에게 북한은 제3국이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에게 북한은 변화시켜서 끌고 가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국민대타협하자는 것이다. 말없는 다수는 북한의 잘못된 것은 지적하면서도 기본적으로 북한과의 교류·접촉를 통해 북한을 변화시키면서 한반도 정세를 안정시키고 그 위에서 통일이라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올 12월 대선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한다. 조언을 한다면.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독일 정치권이 우리처럼 싸웠다면 독일 통일은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독일 주변의 그 어느 나라도 독일의 통일을 바라지 않았다. 유럽 전체가 분단된 독일을 선호했다. 하지만 국론이 통합돼 있었기 때문에 통일이 가능했다. 우리 주변 상황은 독일보다 더 험난하다. 주변국 어느 나라도 한반도 통일을 원치 않는다. 서독은 힘이라도 컸다. 우리는 중국, 일본과 비교해서 힘이 작다. 독일보다 더 국론이 뭉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분열돼 있다. 이런 상황에선 그 어떤 정책을 써도 성공할 수 없다. 33년 동안 현장에서 체득한 내 나름의 결론이다.”

조남규 기자

국회의원은 대단한 자리다.

사회 각 분야에서 성공한 많은 사람들이 정상에서 국회의원을 꿈꾼다. 당선된 다음에는 재선, 3선 의원이 되기 위해 전력투구한다. 최근엔 대한민국을 부인하는 종북주의자들까지 이 대열에 가세한 느낌이다.

그런 속에서 별종이 나왔다. 정장선(54) 전 의원이다. 당선이 확실시됐던 상황에서 돌연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싸우는 국회가 부끄러웠다”면서 떠났다. 그는 부끄럽다고 했지만, 국회는 여전히 싸우고 있다. 대선이 임박하면 더 사납게 싸울 것이다. 이런 국회를, 이런 정치를 떠난, 정 전 의원은 뭐라 할까. 그를 18일 국회 의원회관 앞 야외 벤치에서 만났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나.

“평택에서 고속터미널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왔다. 터미널에서 국회까지는 지하철(9호선)이 바로 연결돼서 편하게 왔다.”

 그는 야인이 되고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한다. 최근엔 후불제 교통카드도 만들었다. 차량은 승합차인 카니발을 갖고 있다. 직접 기름을 넣어보니 비싼 기름값에 가슴이 철렁하더란 얘기도 했다.

―바깥에서 보니 국회가 어떻게 보이던가.

“국회는 늘 짧은 시간에 쫓기다 보니 큰 그림을 못 보는 수가 많다. 의원들은 국민의 입장보다는 소속 정당의 시각, 지지층의 시각에서 현안을 바라본다. 그 시각에 매몰된다. 그래서 국회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보면 국민, 특히 어려운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수 있다.”

―19대 국회가 노력하는 부분도 있다. 요즘엔 의원 특권 중 일부를 개혁해나가고 있다.

“권위주의 차원에서 부여된 특권은 해소해야 한다. 그렇지만 특권 해소는 부차적 문제다. 보다 중요한 것은 국회의 신뢰 회복이다. 국회와 정당은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지금 경제의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위기를 걱정하는데 정치는 더 심각한 퍼펙트 스톰을 맞고 있다. 민주당은 지난 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도 못 냈다. 올 대선에서도 안철수(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만 바라보고 있다. 통합진보당 부정 경선 사태로 민주주의의 토대 자체가 무너져내리고 있다.”

―왜 정치권은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렸나.

“여야가 논쟁은 치열하게 하되 궁극적으로는 합의에 이르러야 하는데, 그걸 전혀 못하고 있다. 그 와중에 고질적인 지역 갈등과 계층 갈등은 심화하고 있다. 이런 갈등들을 국회나 정당이 해소하기는커녕 대리전을 펴며 오히려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각자 자기 진영의 논리는 충실히 대변하지만, 날이 갈수록 국회는 국민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 여야 지도부는 맞아죽어도 합의를 도출해낸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일부 대선 주자들이 ‘정치 교체’를 주창하고 있는데 비슷한 취지인 것 같다.

“그런 구호는 누구든 외칠 수 있다. 앞선 정치 지도자들도 같은 구호를 수없이 외쳐왔지만 여지껏 고쳐지지 않았다. 정치 지도자들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청와대는 초월자 입장에서 법이나 예산 통과만 지시해 왔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미국 대통령처럼 국회를 존중하는 마음가짐으로 직접 나서서 의원들을 설득해야 한다. 여당도 청와대의 거수기 역할에 머무르지 않았는지, 그리고 야당은 대안정당으로서의 소임을 다했는지 깊이 반성해야 한다.”

―18대 국회 임기 말에 통과된 이른바 ‘몸싸움 방지법’이 정치권의 타협 문화 조성에 기여하지 않겠나. (몸싸움 방지법은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이 동의하면 신속처리법안으로 지정하고,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권한을 제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국회법 개정안이다.)

“과거엔 여당의 날치기 관행 때문에 야당이 법안 상정 자체를 죽기살기로 막았다. 18대 국회에서도 사학법 개정안이나 방송법 개정안, 4대강 예산 등과 같은 쟁점 법안이 계류된 상임위는 예산이고 법안이고 전체가 파행됐다. 몸싸움방지법은 법안 상정을 자유롭게 하고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허용해 충분히 토론하도록 했다. 일부에선 법안 처리가 늦어질 것이라고 걱정하지만 더 빨라질 수 있다.”

정 전 의원과는 2000년 16대 총선 직후 초선 의원과 초짜 국회 출입기자로 처음 만났다. 그는 1995년 경기도 의회 의원으로 정치권에 입문해 국회 지식경제위원장, 당 사무총장 자리까지 올랐다. 명망가 중심의 한국 정치권에선 흔치 않은 성공담이다. 그런 그가 4선 고지 앞에서 훌훌 털고 여의도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적잖이 놀랐다.

 



―앞으로 뭘 할 건가.

“다문화와 협동조합 운동을 시작해 보려한다. 지금 다문화 가정들을 위한 사단법인을 만들고 있다. ‘함께하는 세상’이란 이름도 지었다. 약칭 ‘함세’다. 다문화 현장을 찾아서 애로 사항도 듣고 이들을 위한 간행물도 발행할 계획이다. 평택에는 공장들이 많아서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우리 사회의 이민자는 전체 국민의 1% 정도인데 앞으로 더 늘 것이다. 사회는 다원화하고 있는데 우리 국민은 외국인들에 배타적이고 우리 사회는 이들을 수용할 태세가 안 돼 있다. 협동조합 운동은 국회 지식경제위원장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다. 사회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 재벌들은 무차별적으로 소상공업 영역까지 침투해 지역에서 자영업자들의 고통이 심하다. 직접 협동조합과 연계해서 그들의 생존을 모색해 보고 싶다.”

그는 의원 재직 시절에도 다문화 가정을 돌보는 일에 헌신적이었다. 평택의 다문화가정협회로부터 행복한 다문화가정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 일들을 국회에 남아서 하면 더 효과가 크지 않겠나. 굳이 의원직을 던질 이유가 있었나.

“그런 일들을 하기 위해 국회를 나온 건 아니다. 지방의원부터 20년 가깝게 의원 생활했는데 솔직히 정치에 회의가 들었다. 정치권이 사회 갈등을 해결 못하고 더 증폭시키는 현실이 자괴스러웠다. 서민 위하는 정치를 한다고 했지만 형식적으로 한 부분도 많았다. 현장과 부딪치면서 정말 정치를 계속하는 게 좋은지, 아니면 다른 보람된 일이 있는지 근본적으로 생각해보고 싶었다.”

―재산이 동료 의원들에 비해 적은 편이더라. (2011년 3월 공직자위원회가 공개한 그의 재산은 3억9800만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저하고 집사람하고 지하 전세방에서 시작했다. 이사를 9차례나 했다. 도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는데 당시 지방의원은 사실상 명예직으로 급여 자체가 없었다. (중학교) 교사인 집사람 봉급으로 생활했다.”

―국회의원 3선하지 않았나.

“세비 통장에 들어온 돈 중 절반은 집사람 생활비로 주고 절반은 내가 썼다. (그는 노모를 모시고 산다. 노모가 최근 암 수술을 했다. 아들 둘을 두고 있다.) 평택에 아파트 마련하면서 대출 받은 돈을 지난해 겨우 갚았다. 그때 집사람이 보내온 메일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그가 보여준 메일엔 ‘우리는 이제 빚이 없어요’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의원 재직 시절 출판기념회를 단 한 번도 개최하지 않았다. 출판기념회를 통해 모금한 돈은 선관위 보고 의무도 없고 상한도 없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후원금 모금 수단이다.

―왜 출판기념회를 하지 않았나.

“싸우기만 하는 국회와 그 일원인 내 모습을 담은 책을 내기가 부끄러웠다. 다른 의원들이 출판기념회를 하는 것을 비난하는 얘기가 아니다. 내 마음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런 정 전 의원이 지금 책을 쓰고 있다. 몽골을 알리는 책이다. 그는 17·18대 국회에서 한·몽골의원친선협회 회장을 맡았다. 몽골대에 ‘북극성 장학회’를 만드는 등 양국 간 교류·협력을 위해 애쓴 공로로 몽골 정부로부터 북극성 훈장을 받았다. 몽골 친구들은 그에게 ‘알탄 가다스(북극성)’란 이름을 헌사했다. 그는 집필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24일 몽골로 떠났다. 그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알탄 가다스’가 떠난 국회의사당은 19대 국회 개원 축하 플래카드를 내건 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서 있었다.

대담=조남규 정치부 차장, 사진=김범준 기자

■ 정장선 前 의원은

 ●경기 평택(54) ●성균관대, 연세대 행정대학원 ●경기도의원 ●16, 17, 18대 의원 ●열린우리당 제4정조위원장 ●열린우리당 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 및 정책위 수석부의장 ●국회 지식경제위원장 ●민주당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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