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 출범 직후인 2009년 초 미국 패권의 위기를 진단한 적이 있다.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노선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감과 신흥 강대국의 부상, 미국 주도 경제 질서에 충격을 가한 금융위기 등이 미국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취지의 기획물이었다.
 
기자는 1991년 걸프전쟁 승리로 세계적인 군사 패권을 증명한 미국이지만 2001년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패권이 도전받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또한 경제침체 와중에 천문학적인 규모로 불어나는 재정 적자가 미국의 경제 패권도 약화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기자는 그런 전망들이 현실화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목도하고 있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 대출) 사태가 촉발한 미국 경제 패권의 위기는 오바마 정부 들어 더욱 심화됐다. 잇따른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식 금융모델, 경제모델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미국 주도의 경제질서가 도전받기 시작했다.
 
그동안 2조달러가 넘는 천문학적 규모의 경기부양 자금이 투입됐지만 미국 경제는 여전히 더블딥(이중침체) 전망에 시달리고 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들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한 미 재정적자는 2009 회계연도(2008년 10월∼2009년 9월)에 사상 최고치인 1조4000억달러, 2010 회계연도에는 1조2900억달러를 기록했다. 미 의회예산국(CBO)은 2011 회계연도 재정적자가 1조28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올 들어 8월까지 누적 적자액만도 1조2340억달러에 달해 CBO의 재정적자 추산치를 무색하게 했다.

 



미 재정적자는 경제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정치권의 지형도를 바꿔놓고 있다.

재정적자 변수는 보수 성향 정치운동인 ‘티 파티’ 세력을 성장시킨 일등공신이었다.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는 과정에서도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내년 11월 치러지는 미 대선도 재정적자 변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런 재정적자가 올 들어 미국의 군사력에 직접적 타격을 가하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백악관과 공화당이 지난 8월 초 국가부도(디폴트) 사태 직전에 합의한 재정적자 감축안에 따라 국방비는 향후 10년 동안 3500억달러가 줄어들게 됐다. 미 의회의 재정적자 감축 특별위원회가 올 추수감사절 전날(11월23일)까지 최대 1조5000억달러 규모의 재정적자 감축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미 국방비는 기존의 3500억달러 외에 추가로 6000억달러가 자동 삭감된다. 오바마 정부가 2012 회계연도에 책정한 국방예산이 6710억달러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군 수뇌부에서 터져나오는 탄성을 이해할 만하다.

미 국방비 삭감은 당장 2012 회계연도 예산 심의 과정에서부터 현실화하고 있다.
우리의 관심은 미국의 국방비 감축이 한·미 동맹에 미칠 파급 효과다.

리언 패네타 미 국방장관은 얼마 전 미 상원 군사위 청문회에서 예산 감축에 따른 미군 전력의 공동화(空洞化)를 걱정하면서 “지속되는 북한, 이란의 핵 개발 보유 위협에도 대비해야 하며 중국의 군사 능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주미 대사관을 비롯한 정부 당국자들은 현재까지 미국의 국방비 감축 기조가 주한미군 복무 정상화 계획 예산 등 한반도 방위 예산까지는 적용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로버트 윌러드 미 태평양사령관도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아·태 지역은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예산에서 우대받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런 한·미 당국자들의 희망과는 별개로 미 의회 내에서는 재정적자 감축을 위해 비용이 많이 드는 미군의 해외주둔 정책을 대폭 손질해야 한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면서 한·미 동맹도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미국인들에게 9·11 테러는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다. 9·11 테러는 초강대국 미국호의 항로와 미국인들의 삶을 변화시켰으며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에선 9·11 테러 10주년을 맞아 ‘9·11 이후 10년’에 대한 각 분야의 평가 작업이 한창이다. 향후 미국의 세계 전략과 국내 정책은 이런 평가 작업을 토대로 재조정될 것이다. 세계일보는 미국의 안보 분야 싱크탱크인 헨리 L 스팀슨 연구소의 링컨 블룸필드 회장에게 ‘9·11 이후 10년’을 물었다. 블룸필드 회장은 2001년 9·11 테러 당시 미 국무부 정치·군사 담당 차관보로 재직했다.







-9·11테러 이후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지난 10년의 세월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남겼는가.

“21세기의 안보 위협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국제적 위험이 미국의 본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미국의 안보는 다른 지역의 안보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미국은 21세기의 위협을 국제적 차원에서 대처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됐다.”

―미국인들은 9·11 테러의 충격에서 회복됐다고 보는가.

“9·11의 상흔은 아직 아물지 않았다. 특히 테러 희생자 유족들과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서 숨진 병사들의 유족들은 여전히 상실감에 빠져 있다. 하지만 미국 사회와 정부는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에 맞서 놀라운 회복력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 9·11과 같은 충격과 놀라움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9·11를 겪었고 9·11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미국은 슬픔을 딛고 더 현명해졌다.”

―9·11이 낳은 ‘테러와의 전쟁’은 지난 10년 동안 어떻게 변화했는가.

“대테러 전쟁은 미국을 공격한 테러리스트들을 반격하는 군사 작전의 형태로 시작됐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전개된 대테러 전쟁이 그것이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은 아랍 정부·시민 사회와 손잡고 무슬림 젊은이들의 분노를 완화시키는 노력에 초점을 맞추게 됐다. 무슬림 젊은이들의 분노는 테러리즘에 양분을 제공한 테러리즘의 뿌리이다. 우리는 그동안 아랍권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외교와 개발 지원, 미디어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무슬림 세계에서 테러리즘의 구심력은 현격히 약화됐다.”

―미국은 2001년 당시 보다 더 안전해졌는가.

“그렇다. 미국은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테러 대비 태세에서 이전보다 더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했다. 미 정부는 9·11 이후 국토안보부를 창설하고 정보 기관들을 재편, 대테러 역량을 강화했다. 이에 따라 9·11과 같은 테러가 미 본토에서 성공하기는 이전보다 훨씬 더 힘들어졌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9·11 이후 국가정보국(DNI)을 신설, 미 중앙정보국(CIA) 등 16개 정보 기관을 총괄하도록 했다. 이런 정보 기관 재편이 제2의 9·11 테러를 막는 데 기여했다고 보나.

“정보 기관 개편은 원래 부시 행정부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부시 행정부는 9·11 테러 조사위원회와 미 의회의 권고에 따라 정보 기관 개편을 실행에 옮겼다. 정보 기관 개편과 관련해선 일각에서 집행 기관 없이 총괄 기능만 갖고 있는 DNI를 창설한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내놓고 있다. 합당한 비판이라고 본다. 하지만 정보 기관 개편 과정의 일부 하자에도 현재 미 정보기관들의 업무 수행은 매우 전문적이고 효율적이다.”

―알 카에다 수장으로 9·11 테러를 자행한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됐다. 머리를 잃은 알 카에다의 미래는 어떻게 전망하나.

“빈 라덴이 알 카에다의 정신적 리더였고 그의 수족들이 9·11 테러를 계획했지만 알 카에다는 지금까지 일사불란하게 통제되는 조직이 아니었다.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빈 라덴의 후계자로 부상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예멘과 소말리아 등지에 근거지를 둔 아라비아 반도의 알 카에다 그룹들은 알 카에다 지도부의 통제권 밖에 있다.”

-올 초부터 불기 시작한 아랍의 민주화 바람이 테러와의 전쟁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나. ‘아랍의 봄’이 아랍권의 반미, 반서방 경향을 심화시킬 가능성은 없는가.

“아랍의 봄은 수 많은 아랍 젊은이들을 좌절시키고, 끝내 테러리즘으로 내몬 상황에 대한 합당한 응답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아랍의 젊은이들은 테러리스트들이 보내는 부정적인 메시지에 현혹되지 않게 됐다. 테러리스트들의 메시지는 ‘지하드’(성전·聖戰)라는 미명 하에 죽음을 부추기는 어둠의 메시지였다. 테러 구실로 악용됐던 독재 정권이 무너진 이후, 새로운 메시지가 젊은이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좋은 정부와 열린 정치 참여, 인권 보장에 대한 열망을 담은 메시지들이다. 새로운 세대를 향한 미국의 영향력은 긍정적이다. 관건은 미국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아랍 국가들의 (민주국가로의) 전환에 기여할 수 있는지 여부다.”

―9·11 이후 부시 행정부 내에서는 ‘네오콘’(신보수주의)으로 불린 강경파들이 득세했다. 9·11은 미국의 대북정책을 더 강경하게 만들었다고 보는가.

“미국은 지난 10년 동안 9·11 테러가 야기한 혹독한 위협들을 견뎌내면서 북한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억지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웠다.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는 북한의 도발은 9·11 이후 강건해진 미국의 억지력에 의해 봉쇄될 것이다. 미국은 또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동맹국과의 안보 협력 체제를 공고하게 만들었다. 아프가니스탄과 리비아에서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공조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9·11 테러 초기엔 미국의 관심이 온통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대테러 전쟁과 국내 방위에 집중되는 바람에 북한에 대한 관심이 다소 약화되기도 했다.”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국방예산을 감축하고 있다. 국방예산 감축이 대테러 전략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

“부시 행정부와 의회는 9·11 테러 직후 추가 테러를 막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강구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초과 지출되거나 낭비된 예산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국방부는 예산 절감 압력 속에서 대테러 조치의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더 이상 안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각적인 조치를 병행하는 사치를 부릴 수 없게 됐다. 고위 정책 결정자들의 판단이 이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9·11이 미국 재정건전성을 악화시킨 주 요인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런 견해에 동의하는가.

“미국의 재정적자를 초래한 요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9·11 이후 대응 조치들이 재정적자를 불린 주범이라는 견해엔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 기업들은 많은 일자리를 해외로 아웃소싱했고 의회 역시 이익 집단의 요구에 영합, 세입보다 세출이 더 큰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9·11은 미국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이나 미국인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공항에 설치된 ‘전신 스캐너’(알몸 투시기)처럼 일부 대테러 조치들은 인권 침해 논란을 낳기도 했다.

“교육이나 사업, 관광 목적으로 미국에 입국하는 사람들은 9·11 이후 큰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특별한 대테러 조치에 따라 정부가 민간인의 활동을 감시하거나 특정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는 사생활 침해 우려를 낳고 있다. 이러한 안전 조치들은 미국인들의 삶을 과도하게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집행될 수 있다고 본다. 시민들도 안전 문제를 전적으로 정부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 시민 모두가 테러를 감시하는 자경단이 되어야 한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헨리 L 스팀슨 연구소 링컨 블룸필드 회장

하버드 대학, 프레처 스쿨 법학·국제관계학 석사. 1988년 미 국무부 국제안보분야 수석 부차관보. 1991년 댄 퀘일 미 부통령 안보분야 보좌관(부차관보). 1992년 국무부 극동 담당 부차관보. 2001년 국무부 정치·군사 담당 차관보. 2008년 부시 대통령 특사. 2010년 스팀슨 연구소 회장



 9·11테러가 촉발시킨 미국의 대테러 전쟁이 막을 내리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이라크전쟁 종식을 공시 선언했다. 9·11테러 직후인 2001년 10월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끝나가고 있다. 오바마 정부는 지난달부터 아프간 주둔 미군 철수에 들어가 2014년까지 마무리하고 군사 지휘권 및 치안 유지권을 아프간 정부에 이양할 계획이다.

전쟁은 끝나가지만 대테러 전쟁이 남긴 후유증은 깊다.
 
10년에 걸친 전쟁기간에 6000명이 넘는 미군이 전사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사상자도 수십만명에 달한다. 두 전쟁에 투입된 천문학적 규모의 전비는 미국의 위상을 약화시키는 변수로 작용했다. 미 브라운 대학의 왓슨 국제관계연구소 최근 발표한 ‘전쟁 비용 보고서’에서 미국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4조4000억달러를 썼다고 밝혔다. 이는 미국의 2012 회계연도 총예산을 웃도는 금액이다.

백악관은 올 초 공개한 아프간전쟁 평가 전략보고서에서 “극단주의 테러 위협의 싹을 잘랐다”고 자평했지만, 9·11테러가 낳은 두 전쟁은 또 다른 테러를 부르면서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알카에다의 뒤를 이어 제2, 제3의 반미 테러조직이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테러 전쟁을 언급하면서 단 한 차례도 ‘승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피가 피를 부르는 보복의 악순환,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 남긴 수렁 속에서 좀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는 9·11테러를 계기로 새로 씌어졌다.

 미 본토가 사상 처음으로 공격당한 9·11테러 이후 미국은 달라졌다. 미국은 더 이상 국제적 현안에 개입하길 꺼리는 ‘고립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변화는 전면적이고 심층적이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최근 인터뷰에서 “9·11이 확실하게 나의 대통령직 수행 항로를 변경시켰다”고 토로했다. 부시 행정부는 미 본토 방위를 국방전략의 최우선 과제로 제시하면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는 부시 행정부의 정책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공격받은 미국은 거대한 병참기지로 변했다. 모든 자원은 대테러 전쟁에 집중됐다.

9·11이 낳은 ‘부시 독트린’은 미국의 달라진 외교·안보 정책을 웅변한다.

미국은 2002년 안보정책 기조를 ‘억제와 봉쇄’에서 ‘선제공격’으로 전환했다. 선제공격 전략은 말 그대로 적이 공격하기 전에 먼저 무력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은 선제공격 전략의 첫 타깃이 됐다. 부시 정부는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을 빌미로 국제사회의 동의 없이 독단적으로 이라크전쟁을 개시했다. 미국의 동맹관계도 재조정됐다. 미국의 편에 서지 않는 국가는 ‘미국의 적’으로 규정됐다. 9·11은 미국민들의 의식도 변화시켰다. 최근 미 브루킹스 연구소가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31.6%가 미래의 가장 큰 위협으로 테러리즘을 첫손에 꼽았다. 청소년기에 9·11를 경험한 이른바 ‘9·11세대’는 미 적십자사가 행한 조사에서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고문 등 어떤 수단도 활용할 수 있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미국인들은 9·11 이후 테러의 공포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게 됐다.
 
대다수 미국인들이 최근 미 동북부를 강타했던 지진을 테러로 오해했을 정도다. 9·11테러 현장인 뉴욕에서는 최소 1만명의 시민, 경찰, 소방관 등이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와 우울증 등에 시달리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테러 경고 방송과 검색대 통과는 미국인들에게 일상사가 됐다. 지난 5월 미국에서 가나로 향하던 유나이티드 항공 소속 보잉 767 여객기 내에서 두 승객의 사소한 다툼으로 소동이 벌어지자 F-16 전투기가 출격했다. 미국 사회의 테러 공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화다.

이슬람에 대한 적대감도 커졌다.
 
9·11 이후 이슬람교도에겐 테러주의자의 낙인이 찍혔다. 여론조사기관인 퓨 리서치 센터가 9·11테러 10년을 맞아 미국 내 이슬람교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52%는 미 정부가 이슬람교도들을 감시, 경계의 대상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답했다. 43%는 지난 1년간 이슬람교도라는 이유로 갖은 조롱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때론 여행지 보다 사람이 추억될 때가 있다.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한 참을 잊고 지내다
불현듯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이 생각날 때가 있다.
사진을 정리하다 만난 북구의 소녀가 그런 경우다.

에스토니아로 향하던 페리 선상에서
에스토니아의 슬픈 역사를 들었다.


 

그들의 나라는 강대국들에 여러 차례 유린됐다.
러시아와 독일, 소련이 그들의 나라를 차례로 복속시켰다.
그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이후에야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그들의 지정학적 조건이
강대국의 식욕을 자극했으리라.
발트해를 달리는 페리 위에서 나는,
조금씩 다가오는 에스토니아 땅을 바라보며
동병상련의 심정이 됐다.

                                                                                  <페리에서 바라본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발트해에서 바라본 풍경이 다가갈수록 환해졌다.
짙은 오렌지색 지붕들이 독특하다.



 


소녀를 만난 곳은 광장이었다.
탈린 한 복판에 자리잡은 광장은 관광객들도 인산인해를 이뤘다.
관광객을 유인하려는 식당들의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내가 찾은 식당은 아름다운 소녀와 아코디언 연주자를 전면에 내세웠다.



 


  
 레스토랑 사장님의 고명 딸일까,
 아니면 동생 학비를 벌기위해 생업 전선에 나선 가난한 집의 착한 누나일까.
 나그네의 궁금증은 아랑곳 없이
 이국의 소녀는 쉴 새 없이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에스토니아 소녀를 보며
시인 백석이 노래한 '나타샤'를 떠올렸다.

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백석이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고,
읊었던 바로 그 나타샤.

나타샤는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 여주인공 이름이지만
백석은 북구의 소녀를 통칭하는 보통명사로 나타샤를 사용했다는 것이,
시인 신경림의 해석이다.

이름도 모르는 소녀 만큼이나
탈린의 풍광은 정갈한 이미지로 남았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출출이: 뱁새
*마가리: 오막살이


한국 민심 외면한 중재안에 큰 실망
‘안하무인’ 日외교 美에 부담될 것

미국이 동해(East Sea) 표기 문제와 관련, ‘일본해(Sea of Japan) 단독 표기’ 입장을 국제수로기구(IHO)에 전달한 것으로 확인된 이후 국내의 대미 여론이 악화되고 있다.

미 국무부는 지난 8일(현지 시간) 정례 브리핑에서 “미국은 연방정부 기관인 지명위원회(BGN) 표기 방침에 따라 일본해를 사용한다”면서 일본해 단독 표기 방침을 공식 확인했다.


하지만 취재 과정에서 확인된 미국의 입장은 미국이 지난 수십 년 동안 견지한 일본해 단독표기 정책과는 차이가 있었다.

IHO에 미국 입장을 전달한 미 군사지리정보국(NOA) 소속의 크리스 앤더슨은 미국이 일본해 단독표기 입장을 IHO에 전달한 배경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일본해 단독 표기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런 뒤 “미국은 기존 수로 책자(세계 해도 작성의 지침서인 ‘해양과 바다의 경계’)를 개정하는 과정에 동해를 포함시키려 한다”면서 “일본해의 대안 명칭으로 동해가 사용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부록에 참고 자료 형식으로 동해라는 명칭을 넣는 전향적 방안을 마련했다”고 부연했다.
 
 국립해양대기청(NOAA) 연안조사국 공보관인 돈 포시더는 한 발 더 나아가 ‘해양과 바다의 경계’ 개정판의 한반도 해역 지도 본문에 각주(footnote)를 달아 동해를 표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은 NOA와 NOAA 소속 당국자 두 명을 IHO 미국 대표로 파견하고 있다. 앤더슨은 IHO 내에서 분쟁 지역 표기 갈등을 조율하는 임시 기구인 해양경계 실무그룹 부의장도 맡고 있다.

두 사람과의 인터뷰 내용을 종합하면, 미국은 일본이 한국의 동해·일본해 병기안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동해가 ‘해양과 바다의 경계’ 개정판에 표기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앤더슨은 “우리가 제시한 중재안이 수용되면 동해는 처음으로 IHO 책자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면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미국의 ‘일본해 단독 표기’ 정책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상황이 안타깝다는 속내도 내비쳤다.

하지만 미국의 중재안은 한국에서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네티즌들은 미국의 중재안을 다룬 본지 보도와 관련, “미국은 일제 시대부터 우리의 뒤통수를 때린 나라다”, “미국이 일본의 로비에 넘어갔다”는 등의 댓글을 달며 미국의 일본 편향 정책을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한 네티즌은 “일본이 조선을 강제합병한 이후 동해는 일본해로 바뀌었으나 일본은 패전 이후에도 한국의 바다와 섬을 장악하려는 야욕을 그치지 않고 있다”면서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벌써 잊었느냐”고 질타했다.

미국은 법과 제도, 관행을 중시하는 나라다.

미국의 일본해 단독 표기 관행도 한 지명에 한 명칭만 사용한다는 ‘단일 명칭 정책’에 따른 것이다. 미 당국자는 “해양 표기 명칭이 여러 개면 해난 사고가 발생했을 때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면서 “미국은 IHO가 1929년 ‘해양과 바다의 경계’에서 공식 명칭으로 채택하고 그 이후 널리 쓰인 일본해를 단일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미국의 태도는 결정적 결함을 안고 있다. 바로 일제의 침략으로 왜곡된 동북아 근대사를 고려하지 않은 판단이라는 점이다.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없었다면 일본해 표기가 관행으로 굳어지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대 미 행정부는 한·일 역사 갈등에 관한 한 수수방관적 행태를 보였다. 한국과 일본의 싸움에 끼어들어야 득될 게 없다는 계산속이다. 이런 태도는 ‘태평양 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이 취할 태도는 아니다. 궁극적으로 미국에도 득될 게 없다. 34년 동안 일본 외교관으로 봉직했던 도고 가즈히코(東鄕和彦)의 충고를 다시 소개한다.

“일본의 안하무인 격인 처신은 미국의 침묵에 의해 조장된 측면이 있다. 일본이 한, 중 관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미국이 떠안을 것이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세상 읽기, 한겨레] 일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

                                  박명림 연세대 교수


2011년은 전후 동아시아 지역질서와 기억을 정초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60돌을 맞는 해이다. 조약 체결 60주년을 맞아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넘어설 것인가 차분히 돌아볼 때이다. 특히 일본 대지진 구호성금 제공(한국·동아시아)과 독도·교과서 문제 야기(일본)가 엇물린 상황을 맞아 더욱더 그러하다.

무엇보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로 인해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가 거의 무임승차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조약은 일본을 인류 최악의 전범국가로부터 합법적인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게 해주었다. 게다가 조약에 바탕한 미-일 안보동맹은 일본을 동북아 지역에서 미국 안보전략의 요충국가가 되도록 해주었다. 역내 최악의 전쟁 대상이 최고의 동맹 대상으로 변전된 것이다.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핵심 피해국이 조약에 불참함으로 인해 전쟁 배상과 보상 문제 역시 철저히 왜곡되었다. 그 유산은 지금까지 역내 질서 및 동북아인들의 기억을 지배하고 있다.

원인은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특수’로 인한 급속한 경제회복과 함께, 국제사회로의 복귀 역시 한국전쟁 때문이었음을 고려할 때 전후 일본의 경제와 안보를 정초한 기축 요인은 한국 문제였던 것이다. 게다가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전체 동북아 지역을 다자주의와 집단안보기구가 부재한 세계 유일지역으로 만들고 말았다. 한국, 필리핀, 대만, 그리고 미국이 잠시 추구했던 역내 다자기구 구축 노력은 일본과 영국의 완강한 반대 속에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일 양자동맹으로 귀결되며 사산하였다. 탈냉전 시기까지 지속되는 동북아 다자주의·집단안보기구 결여는 미-일 동맹체제 구축, 일본 안보 확보와의 역사적 교환물이었던 것이다.

말을 바꾸면 전후 동북아에서 2차 세계대전의 유산·기억·질서는 단기간에 혁명적으로 전변되었다. 그것은 한국전쟁이 놓은 유산·기억·질서에 의해 대체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후 일본 사회를 규정해온 두 집단의식의 허위구조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냉전 초기의 ‘침략자·가해자 의식’이 후기로 오면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대표되는) ‘희생자·패전 의식’으로 변모되어, 이제 전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고 후자만 두드러지고 있다. 일본의 영토, 교과서, 참배, 과거 사과, 배상의 문제는 이 알레고리를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침략과 희생의 이분법에 기초한 후자로의 변모는, 한국전쟁에 의해 이미 실제 내용이 증류된 허위의식에 불과하다. 교과서, 영토, 과거 악행 사과, 배상 문제 등에서 일본을 보편문명국가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는 이 허위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선, 현대 일본을 주조한 한국전쟁으로 인한 ‘은혜와 혜택의 의식’이 일본 국민정신의 하나로 추가되어야 한다. 인접 국가의 비극에 대해, 자국의 경제와 안보를 정초한 데 대한 ‘은혜와 혜택의 의식’을 갖지 못한다면 일본의 보편문명국가로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제 동아시아와 국제사회의 논의의 핵심은 동아시아에서의 2차 세계대전의 유산·기억·질서가 아니라 한국전쟁의 그것들이어야 할 것이다. 즉 세계, 아시아, 일본에서의 일반적 담론구조인 ‘2차 세계대전의 유산과 기억’은 ‘한국전쟁의 유산과 기억’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것은 작게는 한-일 관계 개선과 동아시아 다자주의 건설을 위해, 크게는 동아시아 상호박애와 영구평화를 위해 반드시 점검되고 실현되어야 할 ‘현실’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두 번의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치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놓은 미국이 양대 강국(G2) 시대의 동아시아와 균형있게 만나는 방법이기도 하다. 첫 번째 아시아·태평양전쟁(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일본과 싸웠고, 두 번째 아시아·태평양전쟁(한국전쟁)에서는 중국과 싸웠다. G2 체제(미·중)와 중첩된 샌프란시스코 체제(미·일) 60주년의 시점에, 지진 성금과 독도 문제가 맞물린 상황에 함께 21세기를 건설해야 할 일본의 오늘을 묻는 연유이다. 그를 위해 우리 자신은 민족주의를 넘어 보편주의로 나아갈 준비가 얼마나 되어있는가? 21세기의 일본을 묻는 것은 곧 21세기의 세계, 동아시아, 한국을 묻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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