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지위 높아지고 소득 늘어…전통적 역할 뒤바뀐 가정 많아


 칼리 피오리나가 1999년 여성으론 처음으로 휴렛팩커드(HP)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올랐을 때 피오리나의 남편은 아내를 ‘내조’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뒀다.

피오리나 남편 프랭크의 사직은 컴퓨터 업계 첫 CEO 탄생 뉴스와 함께 장안의 화제가 됐다. 앞서 1994년 투자회사 찰스 슈워브에서 첫 여성 CEO로 돈 르포어가 임명되고 같은 회사에 근무하던 그의 남편 켄 글래든이 회사 측의 사직 권고를 받아 직장을 그만둔 사실도 세간의 화제가 됐다.



하지만 요즘 미국에선 잘나가는 아내를 위해 사직서를 제출하고 집안에 들어앉는 남편들의 얘기는 더 이상 뉴스거리가 되지 못한다.

미 경제전문지 포춘이 선정한 500대 기업 여성 CEO 18명 중에서 제록스 CEO인 우르술라 번스와 펩시코 회장 겸 CEO인 인드라 누이, 웰포인트 CEO인 안젤라 브랠리 등 7명이 ‘전업주부’ 역할을 하고 있는 남편을 두고 있다고 블룸버그비즈니스위크가 보도했다.


남편과 아내의 전통적 역할이 뒤바뀐 세태는 사회 각 부문에서 목도되는 여성들의 약진 때문이다.

블룸버그비즈니스위크에 따르면 포춘 선정 500대 기업의 여성 CEO는 1970년 단 한 명도 없었으나 2012년 1월 현재 18명으로 늘었다.



아내의 소득이 가계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같은 기간 27%에서 36%로 커졌다.

대도시 지역에 거주하는 30살 이하의 여성들은 같은 연령대 남성들보다 소득이 높은 것으로 조사돼 여성의 소득 우위 현상은 갈수록 뚜렷해질 전망이다.

내조 남편의 증가를 가져온 또 다른 원인은 금융위기 과정에서 남성들의 실직률이 여성 실직률보다 더 높았기 때문이다. 명실상부한 여성 파워 시대가 도래하면서 내조 남편들의 수도 대폭 늘었다. 아내 대신 5살 이하 자녀를 정기적으로 돌보는 남편의 수는 1988년 19%에서 2010년 32%로 증가한 것으로 미 인구센서스국은 집계했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독려해온 린다 히르슈만 변호사는 “가정 내에서 남편과 아내의 전통적인 역할 분담이 역전되면서 남자들은 갑자기 오랜 역사 속에서 여성들이 담당해온 가사 업무를 자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슈퍼 엄마의 탄생은 자녀들의 인성 교육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르포어는 가끔 자녀들이 자신의 영향을 받아서 너무 소극적이지 않을까 걱정한다. 힘든 업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직장 생활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집에 남은 아빠와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면서 전통적인 남녀 역할에 대한 인식도 정반대로 하게된다. 르포어의 회상이다.
 "하루는 딸 친구가 집에 놀러와서 '아빠는 매일 회사에 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딸이 이렇게 말하더라. '바보같은 소리말아, 아빠는 집에 있는 사람이잖아"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이단 취급 몰몬교 극복한 롬니의 질주
신앙보다 리더십 중시하는 성숙한 민도


1928년 미국 대선은 후보의 종교가 본격적으로 쟁점이 된 최초의 선거였다.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앨 스미스 뉴욕 주지사가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미 선거사상  가톨릭 신자가 주요 정당의 대선 후보로 나선 것은 이때 선거가 처음이었다. 그러자 허버트 후버 공화당 후보 지지자들은 “가톨릭 대통령은 교황의 하수인이 될 것”이라는 논리를 펴며 종교를 쟁점화했다. 후버는 “정교 분립이 헌법에 명문화된 상황에서 선출직 후보의 종교를 문제 삼는 것은 편협한 태도”라면서 거리를 뒀지만, 스미스는 종교 문제로 선거 기간 내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예상대로 결과는 후버의 압승으로 끝났다. 스미스는 프로테스탄트(신교도)가 많은 남부에서 대패했다. 종교 문제는 스미스의 주요 패인 중 하나로 분석됐다.

당시만 해도 미국민들은 ‘프로테스탄트인 백인 남성’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고정 관념이 강했다. 언론도 이런 ‘조건’에서 벗어난 대선 후보들에 대해선 예외성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일반인들의 ‘상식’을 따랐다. 존 F 케네디는 이런 ‘비상식의 상식’을 깨뜨린 최초의 대통령이다. 그 벽을 뛰어넘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1960년 대선에 나선 그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부터 신교도인 휴버트 험프리의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케네디는 종교 문제를 ‘관용’의 문제로 바꾸는 전략을 구사했다. 현실적으로 가톨릭 신자가 미국 사회의 비주류인 상황에서 종교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는 힘들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캐슬린 H 재미슨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저서인 ‘대통령 만들기’(Packaging the presidency)에서 “60년 당시 미국의 가톨릭 신자 비율은 20∼30%로 추정됐으나 프로테스탄트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유권자 집단이었다”면서 “하지만 일단 문제가 관용 또는 편협의 문제로 되자 험프리는 교살당해 버렸다”고 썼다. 국민들은 더 이상 가톨릭 대통령을 꺼리지 않게 됐다. 이런 기류를 읽은 리처드 닉슨 공화당 후보 진영은 케네디와의 본선 대결에서 종교 문제를 쟁점화하지 않았다.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는 재임 기간 교황청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후 가톨릭은 미 정치인의 약점으로 작용하지 않게 됐다.

 

 

케네디 

롬니

                                                                                                    

2008년 대선에선 몰몬교가 도마에 올랐다. 몰몬교 신자인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면서 ‘몰몬교도가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는 논쟁이 전개됐다. 롬니의 증조부는 몰몬교도들이 19세기 신교도의 핍박을 피해 서부로 이동, 유타주에 정착할 당시 교인들을 이끈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롬니는 몰몬교 재단의 브리검영대학을 졸업한 뒤 해외 선교 활동을 벌이고 매사추세츠주에서 교구장을 지낸 독실한 몰몬교도다. 롬니는 끝내 몰몬교 벽을 넘지 못하고 중도하차했다. 미국 내에서 몰몬교도는 약 600만명에 불과한 소수파다. 일부 신교도들은 몰몬교를 ‘이단’으로 간주한다. 롬니가 넘어야 할 벽은 케네디가 뛰어넘었던 벽보다 더 높은 것처럼 보였다.

그 롬니가 2012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아이오와, 뉴햄프셔 경선에서 연승을 기록하며 ‘대세론’을 굳혀가고 있다. 그 배경엔 과거보다 확대된 미국민의 관용 정신이 깔려 있다. 퓨리서치센터의 지난해 7월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8%가 몰몬교 신앙은 대선 후보의 결격 사유가 아니라고 응답했다. 올 초 열린 공화당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에서 복음주의 신교도들은 같은 신교도인 릭 페리 텍사스 주지사(12%)나 미셸 바크먼 하원의원(11%)보다 롬니(15%)를 더 많이 지지했다. 신교도들의 이런 선택은 일부 복음주의 목사들이 “몰몬교는 이단이며 롬니도 진짜 기독교인이 아니므로 복음주의 교인들은 그에게 투표해서는 안 된다”고 목청을 높이는 가운데 이뤄진 것이다. 2012년 미 대선은 그 결과에 관계없이 미국민들의 종교적 관용 정신이 또 한번 빛을 발한 선거로 기록될 것이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2012년, 세계의 눈이 동북아시아를 향하고 있다. 아시아 중시 전략으로 선회한 미국과 21세기 패권국으로 도약하는 중국이 태평양 주도권 다툼을 본격화하는 가운데 북한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동북아 정세의 유동성이 더 커졌다. 미국 내 대표적 아시아 전문가인 데이비드 스타인버그 조지타운대 교수 겸 아시아연구소장은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미 동맹은 동북아 지역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역내 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주요한 지렛대”라고 강조했다. 스타인버그 교수를 지난 달 워싱턴DC 조지타운대 연구실에서 만나 동북아 정세 등을 주제로 대담했다.

                                      스타인버그 교수와 필자


-미국이 버락 오바마 행정부 들어 외교·안보 정책의 중심축을 중동·유럽 지역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미국의 아시아 중시 행보를 어떻게 평가하나.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은 150년 전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동아시아에서 그 어느 나라도 패권국으로 부상해선 안 된다는 일관된 기조다. 19세기에 미국은 유럽의 아시아 제패를 막기 위해 중국을 개방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1922년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체결된 ‘해군군축조약’(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등 5대 해군국이 군함의 총량을 제한하기로 합의)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 맹주로 떠오르던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잘 알다시피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은 아시아로 세력권을 넓히려는 공산주의를 막아내는 전쟁이었다. 이제 중국이 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한·미 동맹은 역내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어느 한 나라가 너무 강력해지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한국은 큰 나라가 아니지만 미국엔 매우 중요한 나라다.”

―한국이 통일되면 아시아의 또 다른 ‘호랑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미국은 통일된 한국이 나쁘지 않다고 본다. 통일 한국은 ‘중립적 호랑이’가 될 수 있다. 분명 미국은 중국과 가까운 통일 한국을 원치 않는다. 그런 상황은 미국과 일본 모두에게 악몽이 될 것이다. 반면 중국은 미국의 영향력이 압록강까지 확대되길 원치 않는다. 현실적으로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는 중국의 인정이 필요하다. 중립적인 통일 한국은 역내 이해 관계국 모두에게 이익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 참석하고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고위 당국자로는 50여년 만에 처음으로 미얀마를 방문했다. 미국은 지금 중국을 포위하는 외교·안보 전략을 구사하는가.

“그렇다. 중국 ‘봉쇄 정책’(containment policy)이다. 미국은 50년 대부터 소련을 상대로 그런 정책을 취했고 지금은 그 대상이 중국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오바마 정부 들어 한·미, 미·일 동맹을 더욱 강화하고 호주 군사기지에 미 해병대를 주둔시키도록 했다. 중국은 미국의 이런 행보를 우려스러운 눈길로 지켜보고 있다. 그에 대한 두려움도 갖고 있다. 친분이 있는 수많은 중국 소식통들이 내게 전한 중국 지도부 내부 기류다. 클린턴 장관의 미얀마 방문은 남중국해를 하나로 묶겠다는 미국 정책의 결정판이다. 미얀마는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종속적이지는 않다. 독립 이후 중립 외교 정책을 표방했고 지금은 균형 외교를 하고있다.”

―미얀마와 관련해선 미 상원 군사위의 리처드 루거 의원 등이 북한과의 핵 커넥션 의혹을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미얀마 권위자인 당신의 견해를 듣고 싶다.

“과거 미얀마 군부 실력자(1992∼2011년 국가평화발전평의회 의장)였던 탄 슈웨가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의혹 수준일 뿐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2012년 동북아 정세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사안은 무엇인가.

“북한의 핵 개발이다. 북한이 핵 능력을 키워나가면 일본 등 주변국의 국수주의를 자극할 수 있다. 한국도 70년대에 자체적으로 핵 개발을 시도한 전력이 있지 않느냐. 일본 내에는 한반도가 일본 열도의 옆구리를 겨누는 ‘단도’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북한의 핵 능력이 지속된다면 일본도 언젠가는 핵무기 개발에 나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동북아에서 ‘핵 도미노’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북한은 김정일 사후에도 핵 능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나의 전망이 어긋났으면 좋겠다.”

―북한 김정일 사망 이후 북한의 3대 권력 세습이 연착륙할 수 있다고 보나.

“현재로선 확실치 않다.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권력을 이양할 당시에도 몇 년이 걸렸다. 젊은 김정은에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김정일이 몇 년 더 살았다면 군부를 통제하면서 김정은의 권력 기반 강화를 도울 수 있었을 것이다. 북한 정권 붕괴의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이는 모두에게 좋지 않다. 중국도 바라지 않고 한국도 갑작스러운 북한 붕괴에 따른 통일 비용 부담을 원치 않을 것이다. 미국도 동북아의 불안정 국면은 가급적 피하고 싶어 한다. 미국은 북한이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시장 개방에 나선 중국 모델로 나아가길 바란다. 북한이 핵을 가진 상태로 붕괴하면 심각한 상황이 초래될 것이다. 김정일 사후 북한의 새 지도부가 어떤 형태를 띠든 한·미는 북한이 개혁, 개방의 길을 택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 공화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면 미국의 아시아·북한 정책이 변화할 것으로 보나.

“그렇게 많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화당은 일반적으로 중국, 북한을 민주당보다 더 의심한다. 공화당은 지금 중국, 북한에 대해 매우 강경한 입장이지만 막상 정권을 잡게 되면 복잡한 외교·안보 현실을 도외시한 채 기존 정책을 변경하기는 힘들 것이다.”

―미 의회조사국(CRS)이 12월 한국 대선에서 진보 진영이 승리하면 한·미 관계가 시험대에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약간의 긴장 관계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문제는 아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스타인버그 교수 프·로·필

▲미국 조지타운대 국제정치학 교수 겸 아시아연구소장 ▲맨스필드 태평양문제센터 소장 ▲국무부 국제개발처 아시아·중동 담당 책임자 ▲아시아재단 한국 사무소장 ▲미국 다트머스대·하버드대, 영국 런던대 수학


"스티브 잡스를 분발시킨 가장 중요한 동기는 인생이 짧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죽기 전에 인류에게 기여할 수 있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아이작슨과 필자

애플의 공동 창업주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쓴 월터 아이작슨은 8일(현지시간) 워싱턴DC 애스펀 연구소에서 세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잡스의 전기를 쓰며 그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그는 잡스의 삶과 뒷얘기를 털어놓았다.

아이작슨은 1984년 시사주간 타임의 기자 시절 잡스와 인연을 맺었으며 타임 편집장, CNN 최고경영자를 거쳐 현재 애스펀연구소 회장 겸 최고경영자로 일하고 있다.

잡스의 요청으로 그의 전기를 쓰게 된 아이작슨은 잡스를 약 50차례 인터뷰했다고 한다. 100명이 넘는 주변 인물도 취재했다. 아이작슨은 “그의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전기에 쓰고 있는 내용을 말해줬다”며 “그는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많은 내용이 담겨 있긴 하지만 괜찮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잡스가 유일하게 관여한 부분은 책 표지였다. 그는 단순하고 세련된 표지를 원했다고 한다.

잡스는 죽음 앞에서 담담했다고 한다. 아이작슨은 “그는 암에 걸리기 전에도 죽음에 관한 얘기를 자주 했으며, 우리는 태어나고 죽으며 아주 짧은 삶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열정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또 “선불교 수련을 쌓은 때문인지 잡스는 윤회를 믿었으며,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그 무엇이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아이작슨은 잡스에 대해 강점과 약점을 모두 지닌 까다로운 인간이었다고 평가했다. 

잡스는 반문화적 인간이었다. 나는 그런 잡스의 성향이 애플이나 IT 세계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했다.

"그의 반사회적 성향은 잡스를 매우 흥미롭게 하는 한 요소이다. 잡스는 히피 이기도 했다. 잡스는 1960년대 말의 반체제 운동, 히피 운동과 실리콘밸리의 공학, 기술 운동을 하나로 합치려 했고, 그것이 바로 애플 조직의 정수(essence)라고 할 수 있다."

자서전을 읽다보니 잡스는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학생으로서, 특히 조직의 보스로서 통상적인 모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작슨은 "그는 보스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모델은 아니다. 모든 이는 모든 다른 유형의 인간들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동의했다. 

하지만 잡스에게는 그런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장점이 있었다. 아이작슨의 설명이다.

 “그는 누구보다 ‘창조적인 인간’이었으며, 잡스의 창조성은 다른 생각을 하는 능력, 가장 아름다운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왔다. 잡스는 위대한 제품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는 컴퓨터를 발명하지 않았지만 컴퓨터 업계를 변화시켰고, 뮤직 플레이어와 휴대 전화를 발명하지 않았지만 음악 산업과 휴대 전화산업을 변화시켰다. 나아가  디지털 북과 디지털 무비로 영역을 넓힌 그는 출판 산업과 영화 산업 전반을 변모시켰다. 그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그랬듯이 애플의 유명한 광고 카피처럼 ‘다른 것을 생각(Think Different)’한 천재였다”
 
전기를 쓰는 과정에서 잡스에게 경도된 것은 아닐까.

그는 “감정적으로 그에게 끌린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에 근거해 최대한 정직하려고 노력했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잡스 전기에는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잡스를 입양한 양부모와 애플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 선불교 스승인 스즈키 순류, 그리고 잡스와 인연을 맺은 여러 여인들….
아이작슨은 잡스의 현재 부인인 로런 파월이 잡스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말했다. 20여년 동안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그의 낭만적이면서도 통념을 거스르는 성향과 과학적이고 사무적인 성향을 통합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이유에서다. "그녀는 잡스의 낭만적이고 반사회적이며, 감각적이고 과학적인 세계관, 비즈니스적 성향을 뒷받침했고,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내는 데 역할을 한 사람이다."

 아이작슨은 잡스와 빌 게이츠의 관계를 '연성계'(連星系)라는 개념을 빌어 표현했다. 연성계는 두 별이 중력의 상호작용 때문에 궤도가 서로 얽히는 현상을 가리키는 천문학 용어이다. 잡스와 게이츠 두 사람은 IT 기술과 비즈니스가 합류하는 영역에서 등장한 두 거성이었다. 20세기 물리학 세계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 초기 미국 정계의 토머스 제퍼슨과 알렉산더 해밀턴의 관계처럼.

"잡스와 게이츠는 아주 강한 친분 관계를 유지해왔다. 경쟁하는 사이인 동시에 존경하는 사이였다. 1970년대 중반에 만나 35년 이상 지속했다. 둘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잡스가 죽기 2개월 전이다. 게이츠가 잡스를 찾았다.
잡스가 더욱 예술적이고 열정적이며 미학적 취향을 가졌다면, 게이츠는 비즈니스 지향적 인물이었다. 잡스는 게이츠를 존경했다."

아이작슨은 잡스 없는 애플의 미래를 “향후 5년에서 10년은 번성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낙관했다. 잡스는 생전에 삼성과 치열한 지식재산권 전투를 벌였다. 그럼에도 잡스의 전기에는 삼성 관련 언급이 없다. 아이작슨은 “잡스는 삼성을 애플의 훌륭한 동반자로 생각했지만, 삼성과 대만 기업 HTC 등이 사용한 안드로이드가 애플의 운영체제를 도용했다는 점에서 매우 분개했다”면서 “하지만 자서전 집필 과정에서는 잡스가 삼성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이작슨은 전기에서 “잡스가 너무 긴장해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적은 가수 밥 딜런을 만났을 때 뿐”이라고 썼다. 잡스는 왜 밥 딜런에게 열광했을까. 아이작슨은 “잡스는 밥 딜런이 자신의 세대를 대변한 반항아이자 시인이었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밥 딜런이 계속 변화했다는 점을 좋아했다”고 설명했다.

잡스의 죽음은 그가 비틀스 멤버 중 가장 좋아했던 존 레넌의 죽음을 연상시킨다. 한 기업인의 죽음이 이토록 큰 파문을 세상에 일으킨 전례가 드물기 때문이다.
 아이작슨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잡스는 아주 감성적인 사람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과 감성적 연결 고리를 갖고 있다. 전 세계인들은 그가 만든 아이폰, 아이팟을 사랑하고 즐기면서 그토록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제품들을 만들어낸 주인공과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존 레넌이 세상을 떠났을 때와 같은 분위기이다. 내가 존 레넌이 죽었을 때 정서적인 유대감을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이작슨은 잡스가 자신을 전기작가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내가 언론인이라는 점 때문에 부탁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내가 벤저민 프랭클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헨리 키신저 등에 대한 전기를 쓴 적이 있고, 다른 사람들게 질문을 하고, 또 그들로부터 얘기를 이끌어내는데 능하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했다. 그는 또 자신의 전기가 객관적인 책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하는지도 듣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의 전기를 순수 역사학자에게 맡기지 않은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잡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오 와우'(Oh Wow)라고 세 번 외쳤다고 한다.
 아이작슨은 "그 의미는 누구도 추정할 수 없다. 잡스는 종종 '삶은 거대한 미스터리'라고 말하곤 했다. 잡스의 삶 중 일부도 거대한 미스터리이다."

 잡스는 젊은 시절부터 영적인 인간이었다. 인도로 자아 찾기 순례를 떠나기도 하고 단식과 금식을 통해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려 애썼다. 채식주의를 고집한 이면엔 이런 영적 성향이 깔려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믿었을까. 아이작슨의 대답이다. "그는 선불교 수련을 쌓은 때문인지 윤회를 믿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그 무엇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인생이 전원 스위치처럼 꺼지면 공(空)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기도 했다. 신을 믿었느냐고 묻는다면 '50 대 50'이었다. ”

 잡스 전기의 마지막 대목은 잔상이 오래 남는다.
 
 "죽은 후에도 나의 무언가는 살아남는다고 생각하고 싶군요. 그렇게 많은 경험을 쌓았는데, 어쩌면 약간의 지혜까지 쌓았는데 그 모든 게 그냥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집니다. 그래서 뭔가는 살아남는다고, 어쩌면 나의 의식은 영속하는 거라고 믿고 싶은 겁니다."
그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냥 전원 스위치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딸깍!' 누르면 그냥 꺼져 버리는 거지요."
 그는 또 한 번 멈췄다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 그래서 내가 애플 기기에 스위치를 넣는 걸 그렇게 싫어했나 봅니다." (민음사, 안진환 옮김)


‘골수 보수’ 美버지니아주서 재선 확정
비결은 지역민 대변하는 의정활동

 미국 버지니아주 의회는 미국보다 역사가 깊다.
영국의 첫 미국 식민 거류지인 제임스타운 주민들이 1619년 선거로 뽑은 ‘식민지 의회’(House of Burgesses)가 그 기원이다. 4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민의의 전당이다. 버지니아의 주도(州都)이자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방군의 수도였던 리치몬드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버지니아주 의회는 보수주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됐다. 남부가 공화당 텃밭으로 변했을 때 버지니아주 의회는 공화당의 아성이 됐다. 정치 성향만 보수적인 게 아니다. 백인을 제외한 소수 인종은 오랫동안 버지니아주 의회 문턱을 넘기 힘들었다.

 버지니아주는 캘리포니아와 뉴욕에 이어 한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한국계의 버지니아주 의회 입성은 2009년 11월에야 실현됐다. 마크 김 하원의원(민주)이 그 주인공이다.

 

                                                                                                           마크 김

김 의원은 공화당세가 강한 버지니아주 35선거구에서 당선됐다. 8만여 유권자 중에서 한인은 몇천명에 불과했다. 한인들이 힘껏 도왔지만 김 의원 본인이 일궈낸 정치적 승리였다. 그는 딕 더빈 미 연방 상원의원(민주·일리노이) 보좌관 출신이다. 당시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이던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가깝게 지냈다. 오바마 대통령이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돼 워싱턴DC로 이사할 때는 함께 짐꾸러미를 날랐다. 그런 인연으로 오바마 대선 캠프에 초창기부터 참여했다. 오바마 당선 직후 미 언론은 그를 ‘오바마 사람’으로 분류했다. 지난 대선 때는 버지니아에도 ‘오바마 바람’이 불었다. 그런 만큼 김 의원의 당선에는 오바마 변수도 작용했을 것이다.

 버지니아의 정치 풍토는 오바마 집권 1주년이 되기도 전에 과거로 회귀했다. 2010년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참패했다. 당시 기자는 내심 김 의원의 재선을 걱정했으나 기우였다. 김 의원은 재선 선거(다음달 8일)가 치러지기도 전에 재선을 확정지었다. 공화당이 김 의원에게 도전장을 내민 자당 후보를 다른 지역구로 돌리면서
 단독 입후보 국면이 됐다. 오랫동안 국내 선거를 취재해본 기자로서는 이런 상황이 선뜻 납득되지 않았다. 어떻게 공화당이 민주당 후보를 밀어줄 수 있을까. 김 의원은 무슨 수로 민주당과 공화당의 지지를 동시에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얼마 전 김 의원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이런 의문들은 눈 녹듯 사라졌다. 해답은 김 의원의 ‘초당 정치’였다. 김 의원은 의정 활동 과정에서 민주당이 아니라 지역구 주민을 바라보며 뛰었다. 버지니아주 하원은 전체 100명 의원 중 공화당 소속이 61명이다. ‘승자 독식’ 룰에 따라 상·하원의장과 상임위원장 등 리더십 전부가 공화당 차지다. 현실적으로 공화당 도움 없이는 민주당 의원은 단 한 건의 법안도 통과시킬 수 없는 구조다.

 이런 정치 환경에서 김 의원은 지역구민을 위한 법안을 들고 공화당 지도부와 의원들을 부지런히 설득하러 다녔다. 이런 그를 민주당 일각에서 ‘배신자’로 몰아붙이는 분위기도 생겨났다. 그는 “나는 민주당 소속이지만 민주당을 대표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을 대표해서 일하고 있다”면서 “민주당, 공화당 따지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지역구에 민주당 성향 주민이 55%면 민주당만 가지고도 이길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나머지 45% 주민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지난해 민주당 지도부는 그를 ‘떠오르는 정치인’ 10명에 포함시켰다. 공화당은 지역구민의 지지세가 강한 김 의원의 능력을 인정, 선거구 획정 과정에서 공화당 후보를 다른 지역구로 돌렸다.

 당보다 지역구민을 앞세우고 주민들을 위해서라면 ‘배신자’ 소리도 감수하는 의원. 그런 의원을 내치지 않고 포용한 민주당 지도부. 더 역량있는 상대당 의원을 위해 자당 후보를 내지 않은 공화당 지도부. 그리고 김 의원이 초당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밀어준 지역구민들. 이들 모두가 400년 전통에 걸맞은 버지니아주 의회의 고품격 정치를 가능케 한 주인공들이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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