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동독과 체결한 협정을 존중하고 진행 중인 협상도 계속 추진하겠다.”

13년 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했던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는 1982년 취임 연설을 통해 이같이 천명했다.

기민·자민당 연립 정부는 직전 사민당 정부가 69년부터 추진했던 ‘동방정책’(Ostpolitik)을 계승, 현실에 맞게 발전시켰다. 1990년 10월 독일은 전격적으로 통일됐고 콜 총리는 ‘통일 재상’으로 역사에 남았다.

독일 통일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대표되는 냉전 종식의 흐름 속에서 우연한 계기에 이뤄진 기적 같은 사건이었다. 독일 국민들의 통일 열망과 서독 정부, 서독 정치권의 꾸준한 통일 노력이 기적을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 서독 정치권은 동독 정책에 관한 초당적 합의를 이끌어 내며 내부 갈등으로 통일 에너지가 고갈되는 것을 막았다.

 

 

 

◆정쟁 접고 통일 합의 이끌어낸 서독

서독 하원이 84년 채택한 ‘독일정책 공동 결의안’은 독일 통일사에서 기념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결의안의 취지는 정권 향배에 따라 동독 정책이 춤을 추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정치권의 합의는 일관된 통일 정책 추진을 가능케 했다.

서독 정치권도 오랫동안 동독 정책을 둘러싸고 갈등했다. 사민·자민당 연립정부 총리로 취임한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69년 기존의 동독 정책을 전면 수정, 동독과의 관계개선에 나서자 기민당을 비롯한 야당은 거세게 반발했다. 브란트 정권이 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야당은 “동독을 국제법적 주체로 인정한 기본조약은 독일 분단을 고착화하는 위헌조약”이라면서 연방헌법재판소에 제소했다.

하지만 기민당은 사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자 ‘동방정책’, ‘동·서독 기본조약’에 반대 기조를 누그러뜨리기 시작했다. 사민당 정권도 정책 추진 과정에서 야당의 입장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치며 동독 정책을 둘러싼 간격을 좁히려 애썼다. 각론에선 치열한 토론을 벌이면서도 합의된 정책에 대해선 초당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여야는 상생의 관계였다. 사민당 브란트 총리의 과감한 동방정책은 기민당의 콘라트 아데나워 전 총리가 미국과 프랑스, 영국 등과의 관계를 개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민당은 친미 정권이라는 비판을 무릅쓰면서 대소련 전초기지 역할을 자임했다. 통일 과정에서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사민당의 동방정책은 소련과 동유럽을 변화시키고 종국엔 동독인들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게 했다.

◆정치권, ‘통일 대협약’ 마련해야

우리 정치권은 그간 정권에 따라 대북 정책이 냉탕·온탕을 오가는 바람에 남북한 신뢰구축은 고사하고 남남갈등만 키워왔다.

국회가 나름의 대북 정책 관련 합의를 이끌어낸 사례가 없지는 않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여야는 공동으로 남북관계발전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 법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문화했다. 이명박 정부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을 승계하지 않자 정치권의 합의도 물거품이 된 셈이다.

남북관계발전법은 정부와 민간 위원으로 남북관계발전위원회를 구성, 5년 단위로 남북관계발전 기본 계획을 심의하도록 했으나 위원회는 2006년 설치된 이래 단 한차례 소집되고 개점휴업 상태가 됐다.

18대 국회에서도 대북정책에 관한 ‘국민대협약’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2009년 한나라당 진영 의원과 민주당 송민순 의원은 초당적 통일 노력을 위한 공동 토론회를 개최했다.

진 의원(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은 서면 인터뷰에서 “당시 토론회 취지는 여야, 정부,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대북정책협의체를 만들어 정책 수립단계에서부터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북측과 대화를 하자는 것이었다”며 “협의체를 통한 정책적 공감대 형성만이 남남갈등이 남북관계 악화로 비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송 전 의원은 “‘국민대협약’이 이뤄진다면 대통령 5년 단임제에 의한 정책의 단절없이 남북관계를 우리가 이끌어갈 수 있게 되고 미국, 중국 등 관련국과의 협상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송 전 의원은 국민대협약의 내용과 관련, 냉전 종식 이래 남북 간에 이룬 3대 합의(92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공동선언, 2007년 10·4합의)를 국민대협약의 근간으로 삼자는 주장이다.

진 의원은 “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출발, 단계적이고 평화적 통일에 대한 의지 확인, 북핵 문제 해결, 남북교류 강화와 투명한 인도적 지원 방안, 이산가족 및 국군포로 문제 등 다양한 논의를 국민들의 합의를 통해 차분히 정해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편차가 있지만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토론한다면 충분히 절충점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올 12월 대선을 앞두고 여야 유력 대선 주자들이 저마다 통일 대통령을 꿈꾸며 남북정상회담 정례화 등 온갖 장밋빛 공약들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훌륭한 통일 정책도 국민적 합의와 초당적 지원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독일 통일의 교훈이다.

조남규 기자

 

 

 

송민순(사진)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통일 과정에서 여야는 동지인데 방법이 다르다고 원수처럼 싸운다”면서 “북한이나 주변국들이 이용해먹기 좋은 상황”이라고 개탄했다.

송 전 장관은 대북정책을 둘러싼 정치권의 다툼과 관련, “진보든 보수든 위정자나 집권 엘리트들이 북한 문제를 정리적으로 이용하면 안 된다”며 “북한을 악으로 보는 도덕적 강경론자도, 북한이 지고지선이라는 맹목적 타협론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송 전 장관은 노무현 정부 시절 외교부 장관을 지내고 민주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18대 국회에 입성, 4년 동안 정치권을 지켜봤다. 민주당 소속이었지만 외교·안보 현안에 관한 초당적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애썼다는 평가를 받았다. 송 전 장관을 지난 13일 시내 한 호텔에서 만나 정치권의 초당적 통일 논의 방안 등에 대한 의견을 들어봤다.

―18대 국회에서 대북 정책과 관련된 ‘국민 대협약’을 만들자고 주창했다. 어떤 문제 의식에서였나.

“그동안 남북관계를 볼 때, 새 정부가 취임하면 북한은 으레 남북관계 업적을 만들어 내고픈 남측 지도자의 욕구를 이용해 칼자루를 쥐고 필요한 것을 요구한다. 이에 응하면 국내에선 ‘북한 퍼주기’ 논란 등 국민 저항이 심해진다. 집권 말기에도 대북정책에서 업적을 남기려 한다. 또 북한이 칼자루를 쥔다. 악순환이다. 누가 정권을 잡든 집권 기간에 할 수 있는 부분만 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국민 대협약이 필요하다.”

―국회의원으로서 정치권의 통일 논의를 지켜본 소감이 어떤가.

“여야 모두 통일하자고 한다. 북한을 변화시키자고 한다. 체제 경쟁에서 승리한 대한민국 방식으로 변화시키자고 한다. 그런데 북한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놓고 적군처럼 싸운다.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능선을 타고 가는 방법도 있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도 있다. 우리는 방법을 놓고 싸우느라 힘을 다 소진하고 쓰러진다. 국론 분열된다. 정말 안타깝다.”

―왜 싸우는 것 같나.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니깐. 그걸 넘어서야 한다.”

―정치권이 당파성만 극복하면 되나.

“그렇다고 본다. 진보 진영은 북한이 잘못하는 것, 예컨대 북한 인권 문제를 지적해야 한다. 인간의 보편적 가치 차원에서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 진영은 대북정책을 탄력적으로 해야 한다. 미국과 일본에게 북한은 제3국이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에게 북한은 변화시켜서 끌고 가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국민대타협하자는 것이다. 말없는 다수는 북한의 잘못된 것은 지적하면서도 기본적으로 북한과의 교류·접촉를 통해 북한을 변화시키면서 한반도 정세를 안정시키고 그 위에서 통일이라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올 12월 대선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한다. 조언을 한다면.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독일 정치권이 우리처럼 싸웠다면 독일 통일은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독일 주변의 그 어느 나라도 독일의 통일을 바라지 않았다. 유럽 전체가 분단된 독일을 선호했다. 하지만 국론이 통합돼 있었기 때문에 통일이 가능했다. 우리 주변 상황은 독일보다 더 험난하다. 주변국 어느 나라도 한반도 통일을 원치 않는다. 서독은 힘이라도 컸다. 우리는 중국, 일본과 비교해서 힘이 작다. 독일보다 더 국론이 뭉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분열돼 있다. 이런 상황에선 그 어떤 정책을 써도 성공할 수 없다. 33년 동안 현장에서 체득한 내 나름의 결론이다.”

조남규 기자

국회의원은 대단한 자리다.

사회 각 분야에서 성공한 많은 사람들이 정상에서 국회의원을 꿈꾼다. 당선된 다음에는 재선, 3선 의원이 되기 위해 전력투구한다. 최근엔 대한민국을 부인하는 종북주의자들까지 이 대열에 가세한 느낌이다.

그런 속에서 별종이 나왔다. 정장선(54) 전 의원이다. 당선이 확실시됐던 상황에서 돌연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싸우는 국회가 부끄러웠다”면서 떠났다. 그는 부끄럽다고 했지만, 국회는 여전히 싸우고 있다. 대선이 임박하면 더 사납게 싸울 것이다. 이런 국회를, 이런 정치를 떠난, 정 전 의원은 뭐라 할까. 그를 18일 국회 의원회관 앞 야외 벤치에서 만났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나.

“평택에서 고속터미널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왔다. 터미널에서 국회까지는 지하철(9호선)이 바로 연결돼서 편하게 왔다.”

 그는 야인이 되고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한다. 최근엔 후불제 교통카드도 만들었다. 차량은 승합차인 카니발을 갖고 있다. 직접 기름을 넣어보니 비싼 기름값에 가슴이 철렁하더란 얘기도 했다.

―바깥에서 보니 국회가 어떻게 보이던가.

“국회는 늘 짧은 시간에 쫓기다 보니 큰 그림을 못 보는 수가 많다. 의원들은 국민의 입장보다는 소속 정당의 시각, 지지층의 시각에서 현안을 바라본다. 그 시각에 매몰된다. 그래서 국회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보면 국민, 특히 어려운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수 있다.”

―19대 국회가 노력하는 부분도 있다. 요즘엔 의원 특권 중 일부를 개혁해나가고 있다.

“권위주의 차원에서 부여된 특권은 해소해야 한다. 그렇지만 특권 해소는 부차적 문제다. 보다 중요한 것은 국회의 신뢰 회복이다. 국회와 정당은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지금 경제의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위기를 걱정하는데 정치는 더 심각한 퍼펙트 스톰을 맞고 있다. 민주당은 지난 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도 못 냈다. 올 대선에서도 안철수(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만 바라보고 있다. 통합진보당 부정 경선 사태로 민주주의의 토대 자체가 무너져내리고 있다.”

―왜 정치권은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렸나.

“여야가 논쟁은 치열하게 하되 궁극적으로는 합의에 이르러야 하는데, 그걸 전혀 못하고 있다. 그 와중에 고질적인 지역 갈등과 계층 갈등은 심화하고 있다. 이런 갈등들을 국회나 정당이 해소하기는커녕 대리전을 펴며 오히려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각자 자기 진영의 논리는 충실히 대변하지만, 날이 갈수록 국회는 국민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 여야 지도부는 맞아죽어도 합의를 도출해낸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일부 대선 주자들이 ‘정치 교체’를 주창하고 있는데 비슷한 취지인 것 같다.

“그런 구호는 누구든 외칠 수 있다. 앞선 정치 지도자들도 같은 구호를 수없이 외쳐왔지만 여지껏 고쳐지지 않았다. 정치 지도자들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청와대는 초월자 입장에서 법이나 예산 통과만 지시해 왔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미국 대통령처럼 국회를 존중하는 마음가짐으로 직접 나서서 의원들을 설득해야 한다. 여당도 청와대의 거수기 역할에 머무르지 않았는지, 그리고 야당은 대안정당으로서의 소임을 다했는지 깊이 반성해야 한다.”

―18대 국회 임기 말에 통과된 이른바 ‘몸싸움 방지법’이 정치권의 타협 문화 조성에 기여하지 않겠나. (몸싸움 방지법은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이 동의하면 신속처리법안으로 지정하고,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권한을 제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국회법 개정안이다.)

“과거엔 여당의 날치기 관행 때문에 야당이 법안 상정 자체를 죽기살기로 막았다. 18대 국회에서도 사학법 개정안이나 방송법 개정안, 4대강 예산 등과 같은 쟁점 법안이 계류된 상임위는 예산이고 법안이고 전체가 파행됐다. 몸싸움방지법은 법안 상정을 자유롭게 하고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허용해 충분히 토론하도록 했다. 일부에선 법안 처리가 늦어질 것이라고 걱정하지만 더 빨라질 수 있다.”

정 전 의원과는 2000년 16대 총선 직후 초선 의원과 초짜 국회 출입기자로 처음 만났다. 그는 1995년 경기도 의회 의원으로 정치권에 입문해 국회 지식경제위원장, 당 사무총장 자리까지 올랐다. 명망가 중심의 한국 정치권에선 흔치 않은 성공담이다. 그런 그가 4선 고지 앞에서 훌훌 털고 여의도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적잖이 놀랐다.

 



―앞으로 뭘 할 건가.

“다문화와 협동조합 운동을 시작해 보려한다. 지금 다문화 가정들을 위한 사단법인을 만들고 있다. ‘함께하는 세상’이란 이름도 지었다. 약칭 ‘함세’다. 다문화 현장을 찾아서 애로 사항도 듣고 이들을 위한 간행물도 발행할 계획이다. 평택에는 공장들이 많아서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우리 사회의 이민자는 전체 국민의 1% 정도인데 앞으로 더 늘 것이다. 사회는 다원화하고 있는데 우리 국민은 외국인들에 배타적이고 우리 사회는 이들을 수용할 태세가 안 돼 있다. 협동조합 운동은 국회 지식경제위원장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다. 사회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 재벌들은 무차별적으로 소상공업 영역까지 침투해 지역에서 자영업자들의 고통이 심하다. 직접 협동조합과 연계해서 그들의 생존을 모색해 보고 싶다.”

그는 의원 재직 시절에도 다문화 가정을 돌보는 일에 헌신적이었다. 평택의 다문화가정협회로부터 행복한 다문화가정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 일들을 국회에 남아서 하면 더 효과가 크지 않겠나. 굳이 의원직을 던질 이유가 있었나.

“그런 일들을 하기 위해 국회를 나온 건 아니다. 지방의원부터 20년 가깝게 의원 생활했는데 솔직히 정치에 회의가 들었다. 정치권이 사회 갈등을 해결 못하고 더 증폭시키는 현실이 자괴스러웠다. 서민 위하는 정치를 한다고 했지만 형식적으로 한 부분도 많았다. 현장과 부딪치면서 정말 정치를 계속하는 게 좋은지, 아니면 다른 보람된 일이 있는지 근본적으로 생각해보고 싶었다.”

―재산이 동료 의원들에 비해 적은 편이더라. (2011년 3월 공직자위원회가 공개한 그의 재산은 3억9800만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저하고 집사람하고 지하 전세방에서 시작했다. 이사를 9차례나 했다. 도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는데 당시 지방의원은 사실상 명예직으로 급여 자체가 없었다. (중학교) 교사인 집사람 봉급으로 생활했다.”

―국회의원 3선하지 않았나.

“세비 통장에 들어온 돈 중 절반은 집사람 생활비로 주고 절반은 내가 썼다. (그는 노모를 모시고 산다. 노모가 최근 암 수술을 했다. 아들 둘을 두고 있다.) 평택에 아파트 마련하면서 대출 받은 돈을 지난해 겨우 갚았다. 그때 집사람이 보내온 메일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그가 보여준 메일엔 ‘우리는 이제 빚이 없어요’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의원 재직 시절 출판기념회를 단 한 번도 개최하지 않았다. 출판기념회를 통해 모금한 돈은 선관위 보고 의무도 없고 상한도 없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후원금 모금 수단이다.

―왜 출판기념회를 하지 않았나.

“싸우기만 하는 국회와 그 일원인 내 모습을 담은 책을 내기가 부끄러웠다. 다른 의원들이 출판기념회를 하는 것을 비난하는 얘기가 아니다. 내 마음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런 정 전 의원이 지금 책을 쓰고 있다. 몽골을 알리는 책이다. 그는 17·18대 국회에서 한·몽골의원친선협회 회장을 맡았다. 몽골대에 ‘북극성 장학회’를 만드는 등 양국 간 교류·협력을 위해 애쓴 공로로 몽골 정부로부터 북극성 훈장을 받았다. 몽골 친구들은 그에게 ‘알탄 가다스(북극성)’란 이름을 헌사했다. 그는 집필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24일 몽골로 떠났다. 그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알탄 가다스’가 떠난 국회의사당은 19대 국회 개원 축하 플래카드를 내건 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서 있었다.

대담=조남규 정치부 차장, 사진=김범준 기자

■ 정장선 前 의원은

 ●경기 평택(54) ●성균관대, 연세대 행정대학원 ●경기도의원 ●16, 17, 18대 의원 ●열린우리당 제4정조위원장 ●열린우리당 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 및 정책위 수석부의장 ●국회 지식경제위원장 ●민주당 사무총장



 

1868년 5월16일 미국 상원 본회의장.

이날은 미 역사상 처음으로 탄핵소추된 앤드루 존슨 대통령(17대)의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재선 당시 부통령으로,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한 직후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의회 다수당인 공화당은 존슨 대통령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존슨 대통령은 의회가 남북전쟁 패전 주(州)에 대한 가혹한 조치나 행정부에 대한 과도한 간섭을 담은 법률안을 제안하면 거부권으로 맞섰다. 존슨 탄핵안은 양측의 갈등이 쌓이고 쌓인 끝에 과격한 공화당 의원들이 뽑아든 극약 처방이었다.

탄핵안의 핵심은 존슨 대통령의 에드윈 스탠턴 국방장관 해임이 공무원 임기법을 위반하고 의회를 모독했다는 것이었다.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의 퓰리처상 수상 저서인 ‘용기 있는 사람들’(Profiles in courage·범우사)은 현직 대통령 탄핵위기 속에서 빛을 발한 한 의원을 기리고 있는데, 바로 캔자스주 상원의원인 에드먼드 로스다.

당시 연방에 가입된 27개 주의 상원의원은 54명으로, 탄핵안 가결 정족수는 재적의원 3분의 2인 36표였다. 의석 수 42석인 공화당은 탄핵안 통과를 자신했다. 그런데 공화당 의원 6명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탄핵 반대 입장을 밝히는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민주당 의원 12명은 반대표가 확실한 만큼 공화당으로선 남은 소속의원 36명 전원의 찬성표가 필요했다. 이들 중 로스를 제외한 의원들은 모두 찬성 입장이었다.

 


마침내 로스가 투표할 차례가 됐다. 이미 24명의 의원들이 탄핵에 찬성한 뒤였다. 로스만 찬성하면 존슨 탄핵안이 가결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상원의 탄핵 표결을 주재한 연방 대법원장이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로스 의원, 피고 앤드루 존슨은 유죄입니까, 무죄입니까?”

본회의장을 가득 메운 의원들과 방청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캔자스 출신의 젊은 초선 상원의원에게 쏠렸다. 그는 분명한 어조로 “무죄요!”라고 외쳤다.

35 대 19, 단 한 표 차이로 공화당 과격파의 대통령 탄핵 기도는 무산됐고 대통령은 살아났다. 대신 로스의 정치 인생은 막을 내렸다. 동료 의원들은 ‘반역자 로스’(무죄라고 외친 이후 로스가 얻은 별명)를 저주했다.

존슨 대통령은 퇴임 후 상원의원으로 다시 의회에 입성했으나 그를 지지했던 로스 등 7명의 공화당 의원은 단 한 명도 재선되지 못했다. 캔자스로 돌아온 로스 의원은 냉대와 질병,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로스 의원은 왜 반대표를 던졌을까. 그는 탄핵 소동이 있은 지 몇 년 후에 그 이유를 털어놨다.

“만약 대통령이 당파적 이유로 축출된다면 대통령직의 권위는 크게 실추될 것이며, 행정부는 입법부의 종속적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존슨 탄핵안은 당파 독재정치를 초래하고 국가조차 위험에 빠뜨렸을 것이다.”

로스는 탄핵 표결 직후 부인에게 “오늘 나를 저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내일이 오면 나를 축복할 것이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나의 가치 있는 투쟁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나는 이미 가장 큰 위험으로부터 이 나라를 구해냈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그의 예언대로, 역사는 그를 국익을 지키다 정치적 순교를 당한 영웅으로 재평가했다.

국익을 위해선 당 지도부와 지역구민의 비난을 기꺼이 감수하는 의원. 온갖 편견과 오도된 분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물거품 같은 인기를 경멸하고, 전라도나 경상도, 다른 어느 지역의 의원이 아닌 대한민국 의원으로서, 당 내의 반역자라는 오명은 기꺼이 감수하는 의원.

 자신의 정치적 무덤을 들여다보면서도 진실과 거짓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진실의 길을 걸어가는 의원.

19대 국회에선 이런 의원들을 보고 싶다.

조남규 정치부 차장

미국 서부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찾았을 때가

2005년 8월이니, 벌써 7년 전 입니다.

그런데도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워낙 기묘한 곳이어서 그랬을까요.

 

느닷없이 지하에서 뜨거운 물줄기가 하늘로 솟구치는 곳이니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이나 서부 개척에 나섰던 미국인들에게는

경외와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위 사진은 옐로스톤의 유명 간헐천 중 하나인

Giant Geyser가 분출하는 모습입니다.

물론 누구나 이런 장관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갔던 2005년엔 11번, 2006, 2007년엔 각각 47, 54번 분출했습니다.

하지만 2008년 들어선 분출 횟수가 13 차례에 그쳤고

2009년엔 아예 문을 닫았습니다.

왜 이렇게 불규칙적인지는 미스테리입니다.

현재의 과학 수준으론 분출 시점도 예상할 수 없다는 군요.

터질 때마다 100m 가깝게 솟아올랐습니다.

저희 가족은

거인의 잠자는 모습을 지켜보다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인근의 Steamboat Geyser도 과거

힘찬 물줄기를 창공으로 뿜어올린 적이 있었지만,

 

 

 

 제가 갔을 땐 새근 새근 잠들어 있었습니다.

 

 

                                                                                                  <깨어나라 간헐천아!>

 

Excelsior Geyser는 1890년 이후 분출 활동이 멈췄다가

1985년 9월14일, 오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분출은 무려 47시간 동안 지속됐다고 합니다.

그리곤 지금껏 쉬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간헐천들이 잠들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옐로스톤 공원 남서쪽에 위치한 Old faithful Geyser는

약 90분 만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분출하고 있습니다.

 

 

 

Old faithful Geyser는 그 활동성 덕분에

옐로스톤 간헐천 중 가장 먼저 지금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믿음이 가는 오랜 친구같죠?

이 친구 말고도 여기 저기서 "나도 있다"고 손짓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제각각 생긴대로 이름들이 있는데

아래 간헐천은 Castle Geyser.

정말 성(城)처럼 생겼죠?

 

 

 

 

볼거리가 많은 곳이지만

사실 옐로스톤은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옐로스톤 지역은 지표 근처까지 올라온 뜨거운 마그마(용암) 위에

얹혀있는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땅이 용암 위에서 출렁거린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관광할 때도 지정된 길로만 다녀야지

만용을 부리다간 참사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땅이 쑥 꺼지면서 뜨거운 팥죽 속으로. ++;;

독가스를 품어내는 간헐천도 있습니다.

어지러운 증세가 느껴지면 즉시 탈출해야 합니다.

 

                               <안전한 길만 따라서 조심 조심>

 

 

    

 

옐로스톤의 또 다른 명물은 협곡.

화산, 침식 활동이 만들어낸 자연의 명작으로

옐로스톤 강과 협곡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협곡 트레일을 따라서 걷다보면

Upper Falls가 나타납니다.

 

 

Upper Falls까지는 트레일이 잘 닦여있어

폭포를 코 앞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계속 걷다보면

협곡의 전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Artist Point에 도달하게됩니다.

그 곳에서 볼 수 있는 옐로스톤 협곡의 모습은

정말 장관입니다.

 

 

 

 

멀리 보이는 폭포가 Lower Falls.

분당 850만 리터 가량의 물을 쏟아낸다고 합니다.

 

 

옐로스톤 인증샷 명소라는 명성은

역시 허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한 컷.

 

 

최근 유타대 로버트 스미스 교수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옐로스톤 지하에 있는 용암의 양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 보다

20% 가량 많은 것으로 드러나 화제가 됐습니다.

옐로스톤 지역은 약 200만 년 전과 130만 년 전, 64만2000년 전에

3차례 대폭발을 일으킨 전력이 있습니다.

사방 수 십 마일에 이르는 옐로스톤 공원의 중심 분지 지역은

마지막 대폭발의 결과물입니다.

아래는 약 50만 전에 용암이 식으면서 만들어진 암석.

마치 누군가 돌을 깍아서 차곡 차곡 쌓아올린 성벽 같지요.

 

 

 

옐로스톤은 1872년 3월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래

생태계의 보고가 됐습니다.

하지만 1988년 자연 발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

공원 절반 가량이 소실됐습니다.

 

 

 

아래는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2005년의 모습,

 자연은 놀라운 복원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옐로스톤은 간헐천과 호수, 협곡 등이 어우러진

종합선물세트 같은 관광지입니다.

 

옐로스톤 호수는 둘레가 160km에 달합니다.

보기만 해도 서늘해지는 청록색 호수 주위 곁에서

간헐천이 수증기를 내뿜고 있는 풍광은 

기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겨울 온천의 느낌.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곳은

호수와 인접한 곳에서 펄펄 끓고 있는 '천연 냄비'.

그 곳에서 인디언들은

호수에서 잡은 고기를 삶아 먹었다고 합니다.

천연 냄비 가에 빙 둘러앉아서

갓 잡아 올린 송어를 즉석에서 요리하고 있는

인디언들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협곡을 둘러본 뒤

마지막으로 찾은 Mammoth Country 지역.

지구상에서 가장 큰 지열(地熱) 지대라고 합니다.

 

 

 

 

 

 

 오며 가며 만나는 동물들도 반갑습니다.

 

 

 

 

 

 

 

 

                                   Via Flckr:yellowstonenps

구름과 수증기가 범벅이 된 옐로스톤 상공에

돌연 먹구름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콩알 만한 우박비에 얼굴이 얼얼해질 정도였습니다.

 

 

 

한여름에 우박이라니,

사방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관광객들 속에서

괴성과 환호성이 터져나왔습니다.

대피소를 찾기 위해 방향도 모른채 뛰는 저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상쾌한 경험이었습니다.

  


이공계 분야 고급 인재들 “美는 연구천국 최대 장점”
독보적 기술·美특허 취득
매년 수백명씩 현지 정착

한국인 최초로 미국 하버드 대학 종신교수가 된 박홍근(45) 교수는 한국인 노벨과학상에 근접한 과학자들 중 한 명이다. 박 교수는 서울대 화학과를 수석 입학한 뒤 서울대를 전체 수석으로 졸업한 과학 영재다. 서울대 졸업 이후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4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99년 하버드대 교수로 임용됐다. 박 교수는 자신이 개척한 분자전자과학 분야의 최고 권위자이며 화학과 물리학, 의학을 넘나드는 ‘통섭’의 학문 연구로 하버드에서도 초고속 승진을 거듭, 교수로 임용된 지 5년 만에 종신교수가 됐다.

그는 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남았을까. 박 교수는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미국 유학을 떠날 때만 해도 한국 대학으로 돌아가는 것이 꿈이었다”면서 “하지만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의 연구 투자 여건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국이 박 교수를 붙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무기는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천재들에게 아낌없이 주는 미국

세계적인 과학 잡지 네이처가 “2010년 노벨물리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어야 마땅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던 김필립(44)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나 생물물리학(Biophysics) 분야의 선두 주자인 하택집(44) 미 일리노이대 교수도 미국에 남아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과학 인재들이다. 김 교수는 서울대(물리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컬럼비아대 교수로 임용됐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버클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하 교수는 2005년 미국 과학계 최대 규모 연구비인 ‘하워드 휴즈 그랜트’ 대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조건 없는 연구비 덕에 실용화 가능성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적인 연구를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코네티컷대의 주경선(49) 교수는 올해로 미국 생활 26년째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유학길에 올라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핵물리학 분야의 권위자인 주 교수는 미국 과학재단(NSF)에서 정부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주 교수는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정착 이유를 묻는 질문에 “유학생 대부분은 특별한 계획 없이 미국에 와서 공부한다”면서 “개인적으로도 한국에 일자리가 생기면 갈 생각이었으나 코네티컷대 교수 기회가 먼저 주어져 미국에 정착하게 됐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자녀들의 교육 문제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 주 교수의 설명이다.


서울대에서 전자공학 석사를 받고 유학길에 오른 K씨(49)는 현재 미국 서부의 실리콘 밸리 인근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K씨는 박사 후 연구원 기간에 유수의 한국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아들의 교육 문제를 고민하다 미국 정착을 결심한 케이스다. 그는 “한국 유학생들 상당수가 자녀의 교육 문제를 걱정하다가 한국행을 포기하고 있다”면서 “해외 인재들을 끌어들이려면 대학뿐 아니라 입시 제도를 비롯한 교육 시스템 전반의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지체부자유 자녀를 둔 부모들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뒤 열이면 열 모두 미국에서 먼저 일자리를 찾는다고 그는 전했다.

◆매년 수백 명의 천재를 빼앗기는 한국

한국에서 박사 과정을 마친 L씨(34)는 최근 취업 이민 1순위 자격으로 미국에 이민했다.

L씨는 독보적인 폐수 처리 방식을 개발, 외국 저널에 논문을 발표하고 미국 특허를 따냈다. 미국은 L씨를 ‘특수한 능력 소유자’로 인정, 영주권을 줬다. 미국은 취업 이민 1순위(EB-1)에 해당하는 사람을 ‘우선 취업인’(priority workers)으로 분류한다. 자격 조건이 엄격하지만 조건을 갖춘다면 이민 신청이 신속하게 처리된다. 미국이 2010년 한 해 동안 EB-1 자격으로 영주권을 부여한 외국인 인재는 4만1055명에 달한다. 이 중엔 한국인도 수백 명에 달하는 것으로 재미 과학계는 추산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 인재들을 흡수하는 또 다른 제도는 ‘노동허가 면제’(NIW) 제도다. 이는 공적인 분야에서 국가적 규모의 일을 수행하면서 미국의 국가 이익에 중대한 기여를 한 외국인을 영주권 신청 과정에서 특별히 배려하는 제도이다. 주로 미국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마친 뒤 미 정부 연구기관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유학생들이 수혜 대상이다. 이민 변호사 업계에 따르면 최근엔 MIT에서 유학한 뒤 미 공군연구소에서 탄도 미사일 궤도 추적 프로그램을 개발한 Y씨와 쥐를 이용한 암세포 연구 분야에서 획기적 업적을 세운 K씨 등이 이 제도를 통해 영주권을 받았다. 이들은 필수 서류인 미 연방공무원 3명 이상의 추천서를 받아냈다. 미 정부가 반드시 필요한 인재라고 판단되면 주저없이 추천서를 발급하는 것이다.

◆한국, 인재 유치전략 없다

대학과 민간 기업의 해외 인재 유치 노력 등에 힘입어 해외 인재들이 일부 한국으로 복귀하고 있으나 가뭄에 콩 나듯 한 실정이다.

김필립 컬럼비아대 교수는 올 3월부터 2년간 모교인 서울대 초빙 석좌교수로 활동하며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물리학과 교수들과 공동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다. 얼마 전엔 이길여 가천대 총장이 샌프란시스코와 보스턴, 워싱턴을 순회하며 미국의 한국 인재들을 선발했다. 주경선 교수는 “한국 대학의 연구 여건이 과거에 비해 많이 향상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미국 대학이나 연구소의 지원 규모에는 미치지 못한다”면서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인재 유치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람이 국부다] 전종준 美 이민전문 변호사 인터뷰




“꼭 필요한 인재 이민법 걸렸다면 한사람 위한 영주권 법안 내기도”


“미국은 반드시 필요한 인재라면 세계 누구라도 영입해 미국인으로 만든다.”

전종준(사진) 미국 이민전문 변호사는 4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가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이민법이 만들어진 1960년대부터 해외 인재들의 미국 이민 창구인 취업 이민 1, 2순위 쿼터(할당 숫자)를 줄이지 않았다”면서 “매년 수만 명씩 유입되는 해외 인재들이 미국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어떤 방법으로 해외 인재들을 견인하나.

“이민 정책이다. 취업 이민하기 위해선 고용주가 필요하다. 하지만 해외 인재를 대상으로 한 1순위 이민은 고용주가 없어도 된다. 과학이나 예술, 교육, 경영, 체육 분야에서 국제적 명성을 가진 사람이 그 대상이다. 노벨상 수상자를 떠올리면 된다. 1순위 수준은 아니어도 특출한 능력을 보유한 사람은 2순위에 해당된다. 1, 2순위는 심사가 엄격하기 때문에 매년 쿼터가 남아돈다.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어도 독보적이지 않으면 선택되지 않는다. 수많은 박사들 중 한 명이어선 안 된다. 미국에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그 누구여야 한다.”

―미국은 이민 정책 외에 어떤 인재 충원 정책을 활용하고 있나.

“정말 필요한 인재인데 이민법상 부적격자인 때에는 연방 의원이 그 인재를 위해 영주권 신청 법안을 발의한다. 흔하지는 않지만 왕왕 그런 사례가 있다. 유능한 인재들은 비공식적으로 영주권을 주기도 한다.”

-미국 대학에서 과학이나 기술, 공학, 수학 분야에서 석사학위 이상을 취득한 사람에게 영주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의회에서 논의되고 있다.

“아이디어 차원이다. 과학 분야 해외 인재들을 미국에 남게 하자는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으나 불법 체류자 구제를 포함한 포괄적인 이민 개혁 법안의 일부이기 때문에 실제 그런 법안이 발의될지는 미지수다. 의회에서는 미국이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세계의 인재를 적극적으로 유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미국의 영주권 정책은 매년 바뀌나.

“상황에 따라 의회에서 정한다. 한 나라에서 전체 7%를 초과하면 더 이상 영주권을 신청할 수 없다. 인도와 중국은 매년 쿼터를 채울 정도로 미국 이민이 활발하다.”

―미국이 여전히 세계 초일류 국가 지위를 유지할 것으로 보나.

“로마 제국은 1000년이 지속됐다. 미국의 역사는 300년이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세계 중심 국가로서 역할을 할 것이다. 교육과 환경 등 많은 분야에서 메리트(장점)가 많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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