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를 분발시킨 가장 중요한 동기는 인생이 짧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죽기 전에 인류에게 기여할 수 있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아이작슨과 필자

애플의 공동 창업주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쓴 월터 아이작슨은 8일(현지시간) 워싱턴DC 애스펀 연구소에서 세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잡스의 전기를 쓰며 그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그는 잡스의 삶과 뒷얘기를 털어놓았다.

아이작슨은 1984년 시사주간 타임의 기자 시절 잡스와 인연을 맺었으며 타임 편집장, CNN 최고경영자를 거쳐 현재 애스펀연구소 회장 겸 최고경영자로 일하고 있다.

잡스의 요청으로 그의 전기를 쓰게 된 아이작슨은 잡스를 약 50차례 인터뷰했다고 한다. 100명이 넘는 주변 인물도 취재했다. 아이작슨은 “그의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전기에 쓰고 있는 내용을 말해줬다”며 “그는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많은 내용이 담겨 있긴 하지만 괜찮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잡스가 유일하게 관여한 부분은 책 표지였다. 그는 단순하고 세련된 표지를 원했다고 한다.

잡스는 죽음 앞에서 담담했다고 한다. 아이작슨은 “그는 암에 걸리기 전에도 죽음에 관한 얘기를 자주 했으며, 우리는 태어나고 죽으며 아주 짧은 삶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열정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또 “선불교 수련을 쌓은 때문인지 잡스는 윤회를 믿었으며,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그 무엇이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아이작슨은 잡스에 대해 강점과 약점을 모두 지닌 까다로운 인간이었다고 평가했다. 

잡스는 반문화적 인간이었다. 나는 그런 잡스의 성향이 애플이나 IT 세계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했다.

"그의 반사회적 성향은 잡스를 매우 흥미롭게 하는 한 요소이다. 잡스는 히피 이기도 했다. 잡스는 1960년대 말의 반체제 운동, 히피 운동과 실리콘밸리의 공학, 기술 운동을 하나로 합치려 했고, 그것이 바로 애플 조직의 정수(essence)라고 할 수 있다."

자서전을 읽다보니 잡스는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학생으로서, 특히 조직의 보스로서 통상적인 모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작슨은 "그는 보스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모델은 아니다. 모든 이는 모든 다른 유형의 인간들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동의했다. 

하지만 잡스에게는 그런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장점이 있었다. 아이작슨의 설명이다.

 “그는 누구보다 ‘창조적인 인간’이었으며, 잡스의 창조성은 다른 생각을 하는 능력, 가장 아름다운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왔다. 잡스는 위대한 제품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는 컴퓨터를 발명하지 않았지만 컴퓨터 업계를 변화시켰고, 뮤직 플레이어와 휴대 전화를 발명하지 않았지만 음악 산업과 휴대 전화산업을 변화시켰다. 나아가  디지털 북과 디지털 무비로 영역을 넓힌 그는 출판 산업과 영화 산업 전반을 변모시켰다. 그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그랬듯이 애플의 유명한 광고 카피처럼 ‘다른 것을 생각(Think Different)’한 천재였다”
 
전기를 쓰는 과정에서 잡스에게 경도된 것은 아닐까.

그는 “감정적으로 그에게 끌린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에 근거해 최대한 정직하려고 노력했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잡스 전기에는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잡스를 입양한 양부모와 애플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 선불교 스승인 스즈키 순류, 그리고 잡스와 인연을 맺은 여러 여인들….
아이작슨은 잡스의 현재 부인인 로런 파월이 잡스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말했다. 20여년 동안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그의 낭만적이면서도 통념을 거스르는 성향과 과학적이고 사무적인 성향을 통합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이유에서다. "그녀는 잡스의 낭만적이고 반사회적이며, 감각적이고 과학적인 세계관, 비즈니스적 성향을 뒷받침했고,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내는 데 역할을 한 사람이다."

 아이작슨은 잡스와 빌 게이츠의 관계를 '연성계'(連星系)라는 개념을 빌어 표현했다. 연성계는 두 별이 중력의 상호작용 때문에 궤도가 서로 얽히는 현상을 가리키는 천문학 용어이다. 잡스와 게이츠 두 사람은 IT 기술과 비즈니스가 합류하는 영역에서 등장한 두 거성이었다. 20세기 물리학 세계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 초기 미국 정계의 토머스 제퍼슨과 알렉산더 해밀턴의 관계처럼.

"잡스와 게이츠는 아주 강한 친분 관계를 유지해왔다. 경쟁하는 사이인 동시에 존경하는 사이였다. 1970년대 중반에 만나 35년 이상 지속했다. 둘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잡스가 죽기 2개월 전이다. 게이츠가 잡스를 찾았다.
잡스가 더욱 예술적이고 열정적이며 미학적 취향을 가졌다면, 게이츠는 비즈니스 지향적 인물이었다. 잡스는 게이츠를 존경했다."

아이작슨은 잡스 없는 애플의 미래를 “향후 5년에서 10년은 번성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낙관했다. 잡스는 생전에 삼성과 치열한 지식재산권 전투를 벌였다. 그럼에도 잡스의 전기에는 삼성 관련 언급이 없다. 아이작슨은 “잡스는 삼성을 애플의 훌륭한 동반자로 생각했지만, 삼성과 대만 기업 HTC 등이 사용한 안드로이드가 애플의 운영체제를 도용했다는 점에서 매우 분개했다”면서 “하지만 자서전 집필 과정에서는 잡스가 삼성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이작슨은 전기에서 “잡스가 너무 긴장해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적은 가수 밥 딜런을 만났을 때 뿐”이라고 썼다. 잡스는 왜 밥 딜런에게 열광했을까. 아이작슨은 “잡스는 밥 딜런이 자신의 세대를 대변한 반항아이자 시인이었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밥 딜런이 계속 변화했다는 점을 좋아했다”고 설명했다.

잡스의 죽음은 그가 비틀스 멤버 중 가장 좋아했던 존 레넌의 죽음을 연상시킨다. 한 기업인의 죽음이 이토록 큰 파문을 세상에 일으킨 전례가 드물기 때문이다.
 아이작슨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잡스는 아주 감성적인 사람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과 감성적 연결 고리를 갖고 있다. 전 세계인들은 그가 만든 아이폰, 아이팟을 사랑하고 즐기면서 그토록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제품들을 만들어낸 주인공과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존 레넌이 세상을 떠났을 때와 같은 분위기이다. 내가 존 레넌이 죽었을 때 정서적인 유대감을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이작슨은 잡스가 자신을 전기작가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내가 언론인이라는 점 때문에 부탁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내가 벤저민 프랭클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헨리 키신저 등에 대한 전기를 쓴 적이 있고, 다른 사람들게 질문을 하고, 또 그들로부터 얘기를 이끌어내는데 능하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했다. 그는 또 자신의 전기가 객관적인 책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하는지도 듣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의 전기를 순수 역사학자에게 맡기지 않은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잡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오 와우'(Oh Wow)라고 세 번 외쳤다고 한다.
 아이작슨은 "그 의미는 누구도 추정할 수 없다. 잡스는 종종 '삶은 거대한 미스터리'라고 말하곤 했다. 잡스의 삶 중 일부도 거대한 미스터리이다."

 잡스는 젊은 시절부터 영적인 인간이었다. 인도로 자아 찾기 순례를 떠나기도 하고 단식과 금식을 통해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려 애썼다. 채식주의를 고집한 이면엔 이런 영적 성향이 깔려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믿었을까. 아이작슨의 대답이다. "그는 선불교 수련을 쌓은 때문인지 윤회를 믿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그 무엇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인생이 전원 스위치처럼 꺼지면 공(空)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기도 했다. 신을 믿었느냐고 묻는다면 '50 대 50'이었다. ”

 잡스 전기의 마지막 대목은 잔상이 오래 남는다.
 
 "죽은 후에도 나의 무언가는 살아남는다고 생각하고 싶군요. 그렇게 많은 경험을 쌓았는데, 어쩌면 약간의 지혜까지 쌓았는데 그 모든 게 그냥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집니다. 그래서 뭔가는 살아남는다고, 어쩌면 나의 의식은 영속하는 거라고 믿고 싶은 겁니다."
그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냥 전원 스위치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딸깍!' 누르면 그냥 꺼져 버리는 거지요."
 그는 또 한 번 멈췄다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 그래서 내가 애플 기기에 스위치를 넣는 걸 그렇게 싫어했나 봅니다." (민음사, 안진환 옮김)


‘골수 보수’ 美버지니아주서 재선 확정
비결은 지역민 대변하는 의정활동

 미국 버지니아주 의회는 미국보다 역사가 깊다.
영국의 첫 미국 식민 거류지인 제임스타운 주민들이 1619년 선거로 뽑은 ‘식민지 의회’(House of Burgesses)가 그 기원이다. 4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민의의 전당이다. 버지니아의 주도(州都)이자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방군의 수도였던 리치몬드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버지니아주 의회는 보수주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됐다. 남부가 공화당 텃밭으로 변했을 때 버지니아주 의회는 공화당의 아성이 됐다. 정치 성향만 보수적인 게 아니다. 백인을 제외한 소수 인종은 오랫동안 버지니아주 의회 문턱을 넘기 힘들었다.

 버지니아주는 캘리포니아와 뉴욕에 이어 한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한국계의 버지니아주 의회 입성은 2009년 11월에야 실현됐다. 마크 김 하원의원(민주)이 그 주인공이다.

 

                                                                                                           마크 김

김 의원은 공화당세가 강한 버지니아주 35선거구에서 당선됐다. 8만여 유권자 중에서 한인은 몇천명에 불과했다. 한인들이 힘껏 도왔지만 김 의원 본인이 일궈낸 정치적 승리였다. 그는 딕 더빈 미 연방 상원의원(민주·일리노이) 보좌관 출신이다. 당시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이던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가깝게 지냈다. 오바마 대통령이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돼 워싱턴DC로 이사할 때는 함께 짐꾸러미를 날랐다. 그런 인연으로 오바마 대선 캠프에 초창기부터 참여했다. 오바마 당선 직후 미 언론은 그를 ‘오바마 사람’으로 분류했다. 지난 대선 때는 버지니아에도 ‘오바마 바람’이 불었다. 그런 만큼 김 의원의 당선에는 오바마 변수도 작용했을 것이다.

 버지니아의 정치 풍토는 오바마 집권 1주년이 되기도 전에 과거로 회귀했다. 2010년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참패했다. 당시 기자는 내심 김 의원의 재선을 걱정했으나 기우였다. 김 의원은 재선 선거(다음달 8일)가 치러지기도 전에 재선을 확정지었다. 공화당이 김 의원에게 도전장을 내민 자당 후보를 다른 지역구로 돌리면서
 단독 입후보 국면이 됐다. 오랫동안 국내 선거를 취재해본 기자로서는 이런 상황이 선뜻 납득되지 않았다. 어떻게 공화당이 민주당 후보를 밀어줄 수 있을까. 김 의원은 무슨 수로 민주당과 공화당의 지지를 동시에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얼마 전 김 의원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이런 의문들은 눈 녹듯 사라졌다. 해답은 김 의원의 ‘초당 정치’였다. 김 의원은 의정 활동 과정에서 민주당이 아니라 지역구 주민을 바라보며 뛰었다. 버지니아주 하원은 전체 100명 의원 중 공화당 소속이 61명이다. ‘승자 독식’ 룰에 따라 상·하원의장과 상임위원장 등 리더십 전부가 공화당 차지다. 현실적으로 공화당 도움 없이는 민주당 의원은 단 한 건의 법안도 통과시킬 수 없는 구조다.

 이런 정치 환경에서 김 의원은 지역구민을 위한 법안을 들고 공화당 지도부와 의원들을 부지런히 설득하러 다녔다. 이런 그를 민주당 일각에서 ‘배신자’로 몰아붙이는 분위기도 생겨났다. 그는 “나는 민주당 소속이지만 민주당을 대표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을 대표해서 일하고 있다”면서 “민주당, 공화당 따지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지역구에 민주당 성향 주민이 55%면 민주당만 가지고도 이길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나머지 45% 주민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지난해 민주당 지도부는 그를 ‘떠오르는 정치인’ 10명에 포함시켰다. 공화당은 지역구민의 지지세가 강한 김 의원의 능력을 인정, 선거구 획정 과정에서 공화당 후보를 다른 지역구로 돌렸다.

 당보다 지역구민을 앞세우고 주민들을 위해서라면 ‘배신자’ 소리도 감수하는 의원. 그런 의원을 내치지 않고 포용한 민주당 지도부. 더 역량있는 상대당 의원을 위해 자당 후보를 내지 않은 공화당 지도부. 그리고 김 의원이 초당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밀어준 지역구민들. 이들 모두가 400년 전통에 걸맞은 버지니아주 의회의 고품격 정치를 가능케 한 주인공들이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미국 버지니아주 의회 역사상 첫 아시아계 의원인 한국계 마크 김(45·민주) 하원의원이 다음달 8일이면 재선된다. 선거는 아직 치러지지 않았지만 공화당이 후보를 내지 않아 사실상 당선이 확정된 상태다. 한국에서 태어난 김 의원은 미국에 정착한 이후 소수계의 한계를 극복하고 미 주류사회가 인정하는 차세대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재미 한국 동포사회의 기대주인 김 의원을 만나 의정생활과 정치관, 인생역정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대담은 지난 10일 미 국경일인 ‘콜럼버스 데이’에 워싱턴 DC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2009년 선거 당일 김 의원 캠프에서 개표 결과를 지켜본 기억이 난다. 벌써 2년이 흘렀다. 미국 정치에 뛰어든 이후 소회를 말해 달라.

“보람있었고 많이 배웠다. 미국은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교과서에 나와 있는 그대로 실현되는 국가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영어로 말하면 ‘룰 오브 피플’(rule of people·인치)이 아니고 ‘룰 오브 로’(rule of law·법치)의 나라다. 버지니아주 의회도 400년 전에 시작했을 때와 똑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배웠던 원칙이 현장에서 똑같이 실현되고 있었다.”

―한국 정치와는 어떤 점에서 다른가.

“한국 정치에선 원칙 따로 현실 따로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의회 운영과정에서 이른바 ‘실세’들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는 보도를 많이 봤다. 여기는 안 그렇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라고 해도 소속 정당인 민주당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미 전역에서 주별로, 카운티별로 민주당이 별도로 조직돼 있기 때문에 아무리 카리스마가 뛰어나고 잘난 지도자가 있어도 혼자 힘으로는 당을 움직일 수 없다.”

―미 국민들의 자발적인 정치 참여가 그런 토양을 만든 것 아닌가.

“그렇다. 그게 미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런 국민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민주주의가 성공한 것이다.”

―미국 내에서도 한인들의 정치 참여는 활발하지 않다. 김 의원이 주 의회에 진출한 이후 한인들의 정치 참여율은 높아졌나.

“내 선거 때는 나를 보고 한국계 유권자들이 투표장을 많이 찾았다. 하지만 지난해 중간선거 때는 그렇지 않았다. 한인 동포들의 수도 늘고 경제력도 커지면서 한인들의 정치적 영향력도 조금씩 커지는 것은 확실하다. 나를 비롯해 한인 정치인 수도 늘고 있다. 하지만 한인사회가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는데 그만큼은 못하고 있다고 본다.”

 

 

 


―버지니아주 의회는 전통적으로 보수적이어서 공화당이 강세인 것으로 알고 있다.

“맞다. 주 의회 100명 중 공화당이 61명으로 다수당이다. 이번 선거가 끝나면 민주당 의석은 더 줄어들 전망이다. 야당으로 의정활동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야당 의원으로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

“공화당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한국 정치 현실에선 상대당의 지원을 받는 것이 쉽지 않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민주당, 공화당 따지면 법안 통과는 불가능하다. 나는 민주당 소속 의원이지만 민주당을 대표해서 일하는 것은 아니다. 내 지역구민을 위해 일한다. 교통과 교육, 세금 등 모든 현안에서 지역구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지역구민을 위해 좋은 일이라면 공화당 의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한다.”

―주 의회도 연방 의회처럼 다수당이 모든 상임위를 독식하는 구조인가.

“연방 의회보다 다수당 지위가 더욱 강력하다. 연방 의회는 여야 관계없이 민주, 공화당을 분리해서 지도부를 구성하나 주 의회는 모든 상임위의장을 다수당이 독식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수당 소속의 상·하원 의장이 여야 구분 없이 지도부를 구성한다. 나는 소수당 소속 초선의원이어서 의회 내 영향력이 전무한 상황에서 의정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와 함께 들어온 초선 21명 중에서 공화당이 밀어주는 기대주 두세 명을 빼곤 내가 가장 많은 법안을 통과시켰다.”

―소수당 초선의원으로서의 한계는 어떻게 극복했나.

“초당적 입장에서 지역구민을 위해 필요한 현안을 찾아 열심히 일했다. 지역구민들이 그런 나의 활동을 평가해 줬다. 기업계나 노조의 주장도 똑같이 경청하면서 일했다. 이번에 도전자가 없는 이유도 나에 대한 평판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통상 여당은 선거구를 획정하면서 야당을 짓눌러서 힘들게 하는데, 이번엔 공화당이 선거구를 획정하면서 나에게 도전장을 던진 자기 당 후보를 다른 지역구로 보냈다. ‘마크는 이길 수 없다’고 보고 공화당 후보는 다른 지역으로 돌렸다고 하더라. 그리고 내게 차기 의회에서도 공화당과 함께 지역구민을 위해 손잡고 일하자고 말했다.”

―초당적 의정활동이 의회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얘기로 들린다. 한국에선 그런 식으로 의정활동하면 당 지도부에 찍혀 불이익을 당하기 십상이다.

“당이 운영되는 시스템이 달라서 그럴 것이다. 한국은 당을 중심으로 의원이 충원되는 구조이나 미국은 지역구민이 대표를 뽑아서 의회로 보내는 시스템이다. 당은 선거를 하기 위해 필요할 뿐 의회를 운영하는 과정에선 필요하지 않다. 물론 미국에서도 일부 의원은 당에 충성한다. 그렇지만 지역구에는 민주당원도 있고 공화당원도 있다. 당에 충성하는 행태는 지역구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지역구에 있는 민주, 공화당원 모두를 대표하려 노력한다.”

 



―보수적 정치운동인 ‘티 파티’나 최근 확산되고 있는 ‘월가 점령’ 시위를 어떻게 보나.

“미국은 중도의 나라다. 태생적으로 좌 편향이나 우 편향을 싫어한다. 그런데 정치에는 보수든 진보든 익스트림(극단적임)이 항상 존재한다. 익스트림이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미국민 중 60, 70%인 중도파의 목소리는 실종되고 사방에서 익스트림의 목소리만 난무하니깐 중도파들이 좌절한다. 그런 좌절감이 월가의 탐욕이나 연방정부, 의회의 답답한 행태를 바라보며 티 파티나 월가 시위로 표출된 것으로 본다.”

―미국 한국인 사회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김 의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고 한인사회에 더 잘하고 싶은데 나의 지역구에는 한인이 많지 않다. 한인사회를 위해 더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주류사회에서 인정받고 더 성장해야 한다.”

―김 의원의 이력을 보니 한국과 베트남, 호주를 거쳐 미국에 정착했다. 인생역정이 참 다채롭다.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4살 때 베트남으로 갔다가 월남이 패망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이공 함락 3일 전에 가까스로 비행기를 탔다. 아버지는 탈출에 실패해서 1년 동안 호찌민 정부에 억류됐다가 풀려났다. 어려서 한국을 떠난 탓에 한국어를 못해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생환한 뒤 호주를 거쳐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80년 12월에 미국 땅을 밟았다.”

―어떤 계기로 정치에 입문하게 됐나.

“솔직히 학교 다니면서 동양인들이 잘하는 수학, 과학에는 관심이 없었다.(웃음) 정치나 정책, 역사 공부가 좋았다. 대학 때 미 연방 의회에서 인턴십을 하면서 워싱턴 DC가 세계를 움직이는 중심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88년 민주당 대선후보로 지명된 마이클 듀카키스 캠페인을 지원하면서 아시아계 인사들이 보이지 않는 데 놀랐다. 미 주류사회를 움직이는 과정에서 한국인은 고사하고 아시아계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정치 쪽에서 아시아계를 대표해 활동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 직후 언론에서 김 의원을 ‘오바마 사람’으로 분류한 기사를 봤다.

“딕 더빈 연방 상원의원 보좌관으로 일할 때 당시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이던 오바마를 처음 만났다. 이후 오바마 대통령과 줄곧 함께했다. 그 인연으로 2008년 대선 때 오바마 후보를 위해 일했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세가 워낙 강해서 다들 나의 정치경력이 끝났다고 말했지만 결과는 오바마의 승리였다.”

대담=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프로필

▲서울 출생(66년생) ▲베트남·호주 거쳐 1980년 미국 정착 ▲캘리포니아대, 해스팅 칼리지 로스쿨 ▲ 미 연방통신위(FCC) 변호사
▲미 중소기업청 변호사 ▲딕 더빈 연방 상원의원 보좌관 ▲2009년 버지니아주 의회 하원의원 선거 당선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 출범 직후인 2009년 초 미국 패권의 위기를 진단한 적이 있다.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노선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감과 신흥 강대국의 부상, 미국 주도 경제 질서에 충격을 가한 금융위기 등이 미국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취지의 기획물이었다.
 
기자는 1991년 걸프전쟁 승리로 세계적인 군사 패권을 증명한 미국이지만 2001년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패권이 도전받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또한 경제침체 와중에 천문학적인 규모로 불어나는 재정 적자가 미국의 경제 패권도 약화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기자는 그런 전망들이 현실화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목도하고 있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 대출) 사태가 촉발한 미국 경제 패권의 위기는 오바마 정부 들어 더욱 심화됐다. 잇따른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식 금융모델, 경제모델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미국 주도의 경제질서가 도전받기 시작했다.
 
그동안 2조달러가 넘는 천문학적 규모의 경기부양 자금이 투입됐지만 미국 경제는 여전히 더블딥(이중침체) 전망에 시달리고 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들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한 미 재정적자는 2009 회계연도(2008년 10월∼2009년 9월)에 사상 최고치인 1조4000억달러, 2010 회계연도에는 1조2900억달러를 기록했다. 미 의회예산국(CBO)은 2011 회계연도 재정적자가 1조28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올 들어 8월까지 누적 적자액만도 1조2340억달러에 달해 CBO의 재정적자 추산치를 무색하게 했다.

 



미 재정적자는 경제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정치권의 지형도를 바꿔놓고 있다.

재정적자 변수는 보수 성향 정치운동인 ‘티 파티’ 세력을 성장시킨 일등공신이었다.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는 과정에서도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내년 11월 치러지는 미 대선도 재정적자 변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런 재정적자가 올 들어 미국의 군사력에 직접적 타격을 가하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백악관과 공화당이 지난 8월 초 국가부도(디폴트) 사태 직전에 합의한 재정적자 감축안에 따라 국방비는 향후 10년 동안 3500억달러가 줄어들게 됐다. 미 의회의 재정적자 감축 특별위원회가 올 추수감사절 전날(11월23일)까지 최대 1조5000억달러 규모의 재정적자 감축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미 국방비는 기존의 3500억달러 외에 추가로 6000억달러가 자동 삭감된다. 오바마 정부가 2012 회계연도에 책정한 국방예산이 6710억달러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군 수뇌부에서 터져나오는 탄성을 이해할 만하다.

미 국방비 삭감은 당장 2012 회계연도 예산 심의 과정에서부터 현실화하고 있다.
우리의 관심은 미국의 국방비 감축이 한·미 동맹에 미칠 파급 효과다.

리언 패네타 미 국방장관은 얼마 전 미 상원 군사위 청문회에서 예산 감축에 따른 미군 전력의 공동화(空洞化)를 걱정하면서 “지속되는 북한, 이란의 핵 개발 보유 위협에도 대비해야 하며 중국의 군사 능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주미 대사관을 비롯한 정부 당국자들은 현재까지 미국의 국방비 감축 기조가 주한미군 복무 정상화 계획 예산 등 한반도 방위 예산까지는 적용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로버트 윌러드 미 태평양사령관도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아·태 지역은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예산에서 우대받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런 한·미 당국자들의 희망과는 별개로 미 의회 내에서는 재정적자 감축을 위해 비용이 많이 드는 미군의 해외주둔 정책을 대폭 손질해야 한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면서 한·미 동맹도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미국인들에게 9·11 테러는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다. 9·11 테러는 초강대국 미국호의 항로와 미국인들의 삶을 변화시켰으며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에선 9·11 테러 10주년을 맞아 ‘9·11 이후 10년’에 대한 각 분야의 평가 작업이 한창이다. 향후 미국의 세계 전략과 국내 정책은 이런 평가 작업을 토대로 재조정될 것이다. 세계일보는 미국의 안보 분야 싱크탱크인 헨리 L 스팀슨 연구소의 링컨 블룸필드 회장에게 ‘9·11 이후 10년’을 물었다. 블룸필드 회장은 2001년 9·11 테러 당시 미 국무부 정치·군사 담당 차관보로 재직했다.







-9·11테러 이후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지난 10년의 세월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남겼는가.

“21세기의 안보 위협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국제적 위험이 미국의 본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미국의 안보는 다른 지역의 안보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미국은 21세기의 위협을 국제적 차원에서 대처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됐다.”

―미국인들은 9·11 테러의 충격에서 회복됐다고 보는가.

“9·11의 상흔은 아직 아물지 않았다. 특히 테러 희생자 유족들과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서 숨진 병사들의 유족들은 여전히 상실감에 빠져 있다. 하지만 미국 사회와 정부는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에 맞서 놀라운 회복력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 9·11과 같은 충격과 놀라움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9·11를 겪었고 9·11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미국은 슬픔을 딛고 더 현명해졌다.”

―9·11이 낳은 ‘테러와의 전쟁’은 지난 10년 동안 어떻게 변화했는가.

“대테러 전쟁은 미국을 공격한 테러리스트들을 반격하는 군사 작전의 형태로 시작됐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전개된 대테러 전쟁이 그것이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은 아랍 정부·시민 사회와 손잡고 무슬림 젊은이들의 분노를 완화시키는 노력에 초점을 맞추게 됐다. 무슬림 젊은이들의 분노는 테러리즘에 양분을 제공한 테러리즘의 뿌리이다. 우리는 그동안 아랍권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외교와 개발 지원, 미디어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무슬림 세계에서 테러리즘의 구심력은 현격히 약화됐다.”

―미국은 2001년 당시 보다 더 안전해졌는가.

“그렇다. 미국은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테러 대비 태세에서 이전보다 더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했다. 미 정부는 9·11 이후 국토안보부를 창설하고 정보 기관들을 재편, 대테러 역량을 강화했다. 이에 따라 9·11과 같은 테러가 미 본토에서 성공하기는 이전보다 훨씬 더 힘들어졌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9·11 이후 국가정보국(DNI)을 신설, 미 중앙정보국(CIA) 등 16개 정보 기관을 총괄하도록 했다. 이런 정보 기관 재편이 제2의 9·11 테러를 막는 데 기여했다고 보나.

“정보 기관 개편은 원래 부시 행정부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부시 행정부는 9·11 테러 조사위원회와 미 의회의 권고에 따라 정보 기관 개편을 실행에 옮겼다. 정보 기관 개편과 관련해선 일각에서 집행 기관 없이 총괄 기능만 갖고 있는 DNI를 창설한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내놓고 있다. 합당한 비판이라고 본다. 하지만 정보 기관 개편 과정의 일부 하자에도 현재 미 정보기관들의 업무 수행은 매우 전문적이고 효율적이다.”

―알 카에다 수장으로 9·11 테러를 자행한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됐다. 머리를 잃은 알 카에다의 미래는 어떻게 전망하나.

“빈 라덴이 알 카에다의 정신적 리더였고 그의 수족들이 9·11 테러를 계획했지만 알 카에다는 지금까지 일사불란하게 통제되는 조직이 아니었다.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빈 라덴의 후계자로 부상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예멘과 소말리아 등지에 근거지를 둔 아라비아 반도의 알 카에다 그룹들은 알 카에다 지도부의 통제권 밖에 있다.”

-올 초부터 불기 시작한 아랍의 민주화 바람이 테러와의 전쟁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나. ‘아랍의 봄’이 아랍권의 반미, 반서방 경향을 심화시킬 가능성은 없는가.

“아랍의 봄은 수 많은 아랍 젊은이들을 좌절시키고, 끝내 테러리즘으로 내몬 상황에 대한 합당한 응답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아랍의 젊은이들은 테러리스트들이 보내는 부정적인 메시지에 현혹되지 않게 됐다. 테러리스트들의 메시지는 ‘지하드’(성전·聖戰)라는 미명 하에 죽음을 부추기는 어둠의 메시지였다. 테러 구실로 악용됐던 독재 정권이 무너진 이후, 새로운 메시지가 젊은이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좋은 정부와 열린 정치 참여, 인권 보장에 대한 열망을 담은 메시지들이다. 새로운 세대를 향한 미국의 영향력은 긍정적이다. 관건은 미국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아랍 국가들의 (민주국가로의) 전환에 기여할 수 있는지 여부다.”

―9·11 이후 부시 행정부 내에서는 ‘네오콘’(신보수주의)으로 불린 강경파들이 득세했다. 9·11은 미국의 대북정책을 더 강경하게 만들었다고 보는가.

“미국은 지난 10년 동안 9·11 테러가 야기한 혹독한 위협들을 견뎌내면서 북한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억지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웠다.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는 북한의 도발은 9·11 이후 강건해진 미국의 억지력에 의해 봉쇄될 것이다. 미국은 또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동맹국과의 안보 협력 체제를 공고하게 만들었다. 아프가니스탄과 리비아에서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공조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9·11 테러 초기엔 미국의 관심이 온통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대테러 전쟁과 국내 방위에 집중되는 바람에 북한에 대한 관심이 다소 약화되기도 했다.”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국방예산을 감축하고 있다. 국방예산 감축이 대테러 전략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

“부시 행정부와 의회는 9·11 테러 직후 추가 테러를 막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강구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초과 지출되거나 낭비된 예산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국방부는 예산 절감 압력 속에서 대테러 조치의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더 이상 안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각적인 조치를 병행하는 사치를 부릴 수 없게 됐다. 고위 정책 결정자들의 판단이 이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9·11이 미국 재정건전성을 악화시킨 주 요인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런 견해에 동의하는가.

“미국의 재정적자를 초래한 요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9·11 이후 대응 조치들이 재정적자를 불린 주범이라는 견해엔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 기업들은 많은 일자리를 해외로 아웃소싱했고 의회 역시 이익 집단의 요구에 영합, 세입보다 세출이 더 큰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9·11은 미국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이나 미국인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공항에 설치된 ‘전신 스캐너’(알몸 투시기)처럼 일부 대테러 조치들은 인권 침해 논란을 낳기도 했다.

“교육이나 사업, 관광 목적으로 미국에 입국하는 사람들은 9·11 이후 큰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특별한 대테러 조치에 따라 정부가 민간인의 활동을 감시하거나 특정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는 사생활 침해 우려를 낳고 있다. 이러한 안전 조치들은 미국인들의 삶을 과도하게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집행될 수 있다고 본다. 시민들도 안전 문제를 전적으로 정부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 시민 모두가 테러를 감시하는 자경단이 되어야 한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헨리 L 스팀슨 연구소 링컨 블룸필드 회장

하버드 대학, 프레처 스쿨 법학·국제관계학 석사. 1988년 미 국무부 국제안보분야 수석 부차관보. 1991년 댄 퀘일 미 부통령 안보분야 보좌관(부차관보). 1992년 국무부 극동 담당 부차관보. 2001년 국무부 정치·군사 담당 차관보. 2008년 부시 대통령 특사. 2010년 스팀슨 연구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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