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심 외면한 중재안에 큰 실망
‘안하무인’ 日외교 美에 부담될 것

미국이 동해(East Sea) 표기 문제와 관련, ‘일본해(Sea of Japan) 단독 표기’ 입장을 국제수로기구(IHO)에 전달한 것으로 확인된 이후 국내의 대미 여론이 악화되고 있다.

미 국무부는 지난 8일(현지 시간) 정례 브리핑에서 “미국은 연방정부 기관인 지명위원회(BGN) 표기 방침에 따라 일본해를 사용한다”면서 일본해 단독 표기 방침을 공식 확인했다.


하지만 취재 과정에서 확인된 미국의 입장은 미국이 지난 수십 년 동안 견지한 일본해 단독표기 정책과는 차이가 있었다.

IHO에 미국 입장을 전달한 미 군사지리정보국(NOA) 소속의 크리스 앤더슨은 미국이 일본해 단독표기 입장을 IHO에 전달한 배경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일본해 단독 표기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런 뒤 “미국은 기존 수로 책자(세계 해도 작성의 지침서인 ‘해양과 바다의 경계’)를 개정하는 과정에 동해를 포함시키려 한다”면서 “일본해의 대안 명칭으로 동해가 사용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부록에 참고 자료 형식으로 동해라는 명칭을 넣는 전향적 방안을 마련했다”고 부연했다.
 
 국립해양대기청(NOAA) 연안조사국 공보관인 돈 포시더는 한 발 더 나아가 ‘해양과 바다의 경계’ 개정판의 한반도 해역 지도 본문에 각주(footnote)를 달아 동해를 표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은 NOA와 NOAA 소속 당국자 두 명을 IHO 미국 대표로 파견하고 있다. 앤더슨은 IHO 내에서 분쟁 지역 표기 갈등을 조율하는 임시 기구인 해양경계 실무그룹 부의장도 맡고 있다.

두 사람과의 인터뷰 내용을 종합하면, 미국은 일본이 한국의 동해·일본해 병기안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동해가 ‘해양과 바다의 경계’ 개정판에 표기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앤더슨은 “우리가 제시한 중재안이 수용되면 동해는 처음으로 IHO 책자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면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미국의 ‘일본해 단독 표기’ 정책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상황이 안타깝다는 속내도 내비쳤다.

하지만 미국의 중재안은 한국에서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네티즌들은 미국의 중재안을 다룬 본지 보도와 관련, “미국은 일제 시대부터 우리의 뒤통수를 때린 나라다”, “미국이 일본의 로비에 넘어갔다”는 등의 댓글을 달며 미국의 일본 편향 정책을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한 네티즌은 “일본이 조선을 강제합병한 이후 동해는 일본해로 바뀌었으나 일본은 패전 이후에도 한국의 바다와 섬을 장악하려는 야욕을 그치지 않고 있다”면서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벌써 잊었느냐”고 질타했다.

미국은 법과 제도, 관행을 중시하는 나라다.

미국의 일본해 단독 표기 관행도 한 지명에 한 명칭만 사용한다는 ‘단일 명칭 정책’에 따른 것이다. 미 당국자는 “해양 표기 명칭이 여러 개면 해난 사고가 발생했을 때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면서 “미국은 IHO가 1929년 ‘해양과 바다의 경계’에서 공식 명칭으로 채택하고 그 이후 널리 쓰인 일본해를 단일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미국의 태도는 결정적 결함을 안고 있다. 바로 일제의 침략으로 왜곡된 동북아 근대사를 고려하지 않은 판단이라는 점이다.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없었다면 일본해 표기가 관행으로 굳어지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대 미 행정부는 한·일 역사 갈등에 관한 한 수수방관적 행태를 보였다. 한국과 일본의 싸움에 끼어들어야 득될 게 없다는 계산속이다. 이런 태도는 ‘태평양 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이 취할 태도는 아니다. 궁극적으로 미국에도 득될 게 없다. 34년 동안 일본 외교관으로 봉직했던 도고 가즈히코(東鄕和彦)의 충고를 다시 소개한다.

“일본의 안하무인 격인 처신은 미국의 침묵에 의해 조장된 측면이 있다. 일본이 한, 중 관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미국이 떠안을 것이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세상 읽기, 한겨레] 일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

                                  박명림 연세대 교수


2011년은 전후 동아시아 지역질서와 기억을 정초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60돌을 맞는 해이다. 조약 체결 60주년을 맞아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넘어설 것인가 차분히 돌아볼 때이다. 특히 일본 대지진 구호성금 제공(한국·동아시아)과 독도·교과서 문제 야기(일본)가 엇물린 상황을 맞아 더욱더 그러하다.

무엇보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로 인해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가 거의 무임승차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조약은 일본을 인류 최악의 전범국가로부터 합법적인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게 해주었다. 게다가 조약에 바탕한 미-일 안보동맹은 일본을 동북아 지역에서 미국 안보전략의 요충국가가 되도록 해주었다. 역내 최악의 전쟁 대상이 최고의 동맹 대상으로 변전된 것이다.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핵심 피해국이 조약에 불참함으로 인해 전쟁 배상과 보상 문제 역시 철저히 왜곡되었다. 그 유산은 지금까지 역내 질서 및 동북아인들의 기억을 지배하고 있다.

원인은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특수’로 인한 급속한 경제회복과 함께, 국제사회로의 복귀 역시 한국전쟁 때문이었음을 고려할 때 전후 일본의 경제와 안보를 정초한 기축 요인은 한국 문제였던 것이다. 게다가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전체 동북아 지역을 다자주의와 집단안보기구가 부재한 세계 유일지역으로 만들고 말았다. 한국, 필리핀, 대만, 그리고 미국이 잠시 추구했던 역내 다자기구 구축 노력은 일본과 영국의 완강한 반대 속에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일 양자동맹으로 귀결되며 사산하였다. 탈냉전 시기까지 지속되는 동북아 다자주의·집단안보기구 결여는 미-일 동맹체제 구축, 일본 안보 확보와의 역사적 교환물이었던 것이다.

말을 바꾸면 전후 동북아에서 2차 세계대전의 유산·기억·질서는 단기간에 혁명적으로 전변되었다. 그것은 한국전쟁이 놓은 유산·기억·질서에 의해 대체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후 일본 사회를 규정해온 두 집단의식의 허위구조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냉전 초기의 ‘침략자·가해자 의식’이 후기로 오면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대표되는) ‘희생자·패전 의식’으로 변모되어, 이제 전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고 후자만 두드러지고 있다. 일본의 영토, 교과서, 참배, 과거 사과, 배상의 문제는 이 알레고리를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침략과 희생의 이분법에 기초한 후자로의 변모는, 한국전쟁에 의해 이미 실제 내용이 증류된 허위의식에 불과하다. 교과서, 영토, 과거 악행 사과, 배상 문제 등에서 일본을 보편문명국가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는 이 허위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선, 현대 일본을 주조한 한국전쟁으로 인한 ‘은혜와 혜택의 의식’이 일본 국민정신의 하나로 추가되어야 한다. 인접 국가의 비극에 대해, 자국의 경제와 안보를 정초한 데 대한 ‘은혜와 혜택의 의식’을 갖지 못한다면 일본의 보편문명국가로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제 동아시아와 국제사회의 논의의 핵심은 동아시아에서의 2차 세계대전의 유산·기억·질서가 아니라 한국전쟁의 그것들이어야 할 것이다. 즉 세계, 아시아, 일본에서의 일반적 담론구조인 ‘2차 세계대전의 유산과 기억’은 ‘한국전쟁의 유산과 기억’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것은 작게는 한-일 관계 개선과 동아시아 다자주의 건설을 위해, 크게는 동아시아 상호박애와 영구평화를 위해 반드시 점검되고 실현되어야 할 ‘현실’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두 번의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치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놓은 미국이 양대 강국(G2) 시대의 동아시아와 균형있게 만나는 방법이기도 하다. 첫 번째 아시아·태평양전쟁(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일본과 싸웠고, 두 번째 아시아·태평양전쟁(한국전쟁)에서는 중국과 싸웠다. G2 체제(미·중)와 중첩된 샌프란시스코 체제(미·일) 60주년의 시점에, 지진 성금과 독도 문제가 맞물린 상황에 함께 21세기를 건설해야 할 일본의 오늘을 묻는 연유이다. 그를 위해 우리 자신은 민족주의를 넘어 보편주의로 나아갈 준비가 얼마나 되어있는가? 21세기의 일본을 묻는 것은 곧 21세기의 세계, 동아시아, 한국을 묻는 것과 같다.




상처 딛고 쌍둥이 빌딩 건설 ‘한창’


미국이 9·11 테러 10주년(2011년 9월11일)을 앞두고 테러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 재건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최근 기자가 찾은 뉴욕 맨해튼 월드트레이드센터(WTC) 테러 현장에서는 무너져 내린 WTC ‘쌍둥이 빌딩’을 재건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차단 벽으로 둘러싸인 현장에서는 타워 크레인과 불도저 등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지난 3년 동안 3000명 이상의 인부들이 투입됐다.

인부로 일하고 있는 티미 바시라키스는 9·11테러 당시 커피를 사러 WTC 사무실에서 나온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는 “테러 현장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외면했지만 나는 오래 전에 테러로 무너진 건물을 다시 세웠어야 했다고 생각한다”면서 “내가 프리덤 타워 인부로 돌아온 것은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라운드 제로에는 4개의 사무용 빌딩과 기념관, 박물관, 추모 공원, 교통환승센터가 들어설 예정이다. 기존 쌍둥이 빌딩이 있던 자리에는 약 9m 깊이의 사우스 메모리얼 풀(South Memorial Pool)과 노스 메모리얼 풀(North Memorial Pool) 등 ‘추모 연못’ 2개가 만들어진다. 공사를 주관하는 미국 뉴욕·뉴저지 항만청은 연못을 둘러싼 벽 위에 테러 희생자 2983명의 이름을 동판에 새겨 넣을 계획이다. 동판에는 가족의 이름을 붙여 새겨 넣었고 사이트(names.911memorial.org)에 들어가면 희생자들의 상세한 스토리를 볼 수 있다. 연못 주변의 나무는 10년 전 붕괴 현장에서 살려낸 나무들로 일명 ‘생존나무’로 불린다.

 



 

 

4개의 빌딩 중 북쪽 사무동(1 WTC)은 미국이 독립한 해인 1776년을 상징하기 위해 1776피트(541m) 높이의 104층 건물로 건설되고 있다.


 

 

뉴욕·뉴저지 항만청의 론 마시코 대변인은 “일명 ‘프리덤 타워’로 불리는 1 WTC 건물은 78층까지 올라갔고 9·11테러 10주년 기념식이 열릴 때까지는 80층까지 완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프리덤 타워가 내년에 완공되면 뉴욕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된다.
 나머지 3개 사무동 타워는 2013년과 2015년에 각각 순차적으로 세워지고 WTC 재건 사업은 2016년이나 돼야 모두 완료된다. 추모공원 공사는 10주년 기념식 때까지는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공사 관계자들은 전했다.


뉴욕·뉴저지 항만청의 크리스 워드 청장은 “새롭게 들어서는 WTC는 미국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뉴욕을 더욱 활기 있게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자녀들의 손을 잡고 공사 현장을 찾은 브라이언 티게는 “건물이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 힘이 나고 마음이 벅차다”면서 “프리덤 타워가 완공되면 반드시 꼭대기까지 올라가 볼 것”이라고 말했다.


그라운드 제로 인근에 설치된 ‘9·11 추모 전시관’은 미 전역에서 찾은 추모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관람객들은 9·11 당시 희생된 소방관의 모자 앞에서 눈자위가 붉어졌고, 희생자 유족들의 추모 육성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관람객들은 전시관 내에 마련된 9·11 추모사업 기금 모금함 앞에서 앞다퉈 지갑을 열었다.


 

미국민들은 9·11 10주년 행사 준비를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행사에는 5000명 이상의 자원봉사자가 필요하지만 뉴욕 시민을 비롯해 미 전역에서 자원봉사 신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미 언론은 전했다. 베스트 바이와 타깃,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등 미국 기업들도 거액의 후원금을 쾌척하고 있다.

10주년 행사가 다가오면서 그라운드 제로 주변의 경계도 더 강화되고 있다.

미 정보 당국은 탈레반 수장인 오사마 빈 라덴 사살작전 당시 그의 아지트에서 입수한 파일에서 9·11 10주년 행사장을 노린 대규모 테러 계획을 입수한 바 있다. 뉴욕 경찰 당국은 행사장 경계 인원을 증강 배치했다. 프리덤 타워 벽면에 성조기와 함께 걸린 현수막에는 ‘결코 잊지 말자’(NEVER FORGET)라는 문구가 선명했다.

다음달 11일 이곳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9·11 10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뉴욕=조남규 특파원 


 *숫자로 풀어본 9ㆍ11테러 10주년*
 
8151 = 추모공원 내에 들어설 기념관과 박물관에 사용된 구조용 강재의 총 무게는 8151t이다. 이는 파리의 철제 타워인 에펠탑에 사용된 구조용 강재보다 더 많은 양이다. 
4만9900 = 추모공원 건설을 위해 사용된 콘크리트는 4만9900입방야드(3만8384㎥)에 달한다. 뉴욕시의 보도200마일(322m)을 깔 수 있는 정도다.
3968 = 추모공원에 있는 추모 연못인 사우스 메모리얼 풀과 노스 메모리얼 풀의 내부 장식에는 3968장의 화강암 판이 들어간다. 이 화강암 판의 크기는 가로 5피트(1.5m), 세로 2.5피트(0.8m)이고 무게는 420파운드(190㎏)에 달한다. 추모 연못의 깊이는 30피트(9.1m)이고 연못 벽면 윗부분에서 나온 물이 벽면을 따라 폭포처럼 떨어지게 돼 있다. 
48만5919 = 추모 연못에 담겨 있는 물의 양은 48만5919갤런(184만ℓ)에 달한다. 추모 연못의 벽에 나온 물들이 폭포처럼 떨어지게 하려고 16대의 펌프가 가동된다. 
2983 = 추모 연못 벽 위의 동판에 이름이 새겨진 테러 희생자들의 숫자는 2983명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다시 도버 기지를 찾았다.
미 델라웨어주에 위치한 도버 공군 기지는 해외 전쟁터에서 숨진 미군들의 유해가 도착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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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대통령은 9일(현지시간) 이곳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쟁터에서 탈레반의 로켓포 공격으로 헬기가 추락하면서 사망한 미군 30명을 맞았다.
 이들의 시신은 온전하지 않았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을리고 절단된 시신 조각들은 30개의 관에 골고루 나뉘어 담겼다.
 공식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도버로 향한 오바마 대통령은 활주로에 서서 자신의 명령으로 전쟁터로 떠났다 주검으로 돌아오는 병사들을 기다렸다.
 시신이 안치된 대형 수송기가 도착하자 오바마 대통령은 그 안으로 들어가 군목이 주도한 예배에 참석했다. 30개의 관이 밴에 실려 시신 안치소를 향해 떠날 때까지 오바마 대통령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유족들은 오열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인근 마을 회관에서 유족들을 위로했다.

2009년 10월에도 오바마 대통령은 같은 목적으로 도버 기지를 찾은 바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미군 증파 결정을 앞둔 시점이었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 도버로 출발한 오바마 대통령은 새벽 시간에 활주로에서 아프간 전쟁 전사 미군 18명의 유해 송환 장면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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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임기를 막 시작한 젊은 대통령이었다. 당시만 해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시작한 아프간 전쟁은 온전히 그의 전쟁이 아니었다. 군 통수권자로서 파병 결정의 엄중함을 가슴에 새기기 위한 방문이었다. 그의 표정에선 비장한 결의가 엿보였다. 그 해 12월 3만명 증파 결단이 이뤄졌다. 이후 아프간 전쟁은 '오바마의 전쟁'이 됐다.
 
첫 도버 방문 이후 두번째 방문이 이뤄질 때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874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때마다 유족들에게 보내는 위로 편지에 자필로 서명했다. 이날 주검으로 돌아온 병사 30명 중 22명이 탈레반 수장인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던 네이비실(해군 특수부대) 소속이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가장 큰 성과와 보람을 안겨줬던 그들이, 이날은 오바마 대통령을 참담하고 비통하게 했다.


              AP

그의 두번째 도버 방문은 아프간 전쟁 뿐 아니라 대통령 임기에서 결정적 순간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보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지쳐 보였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coolman@segye.com


과거에도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

20 여 년 한반도를 옥죈 북한 핵 문제를 남북한이 상생하는 방식으로 풀어갈 기회 말이다.

가장 최근의 기회는 2009년 하반기 다가왔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출범 직후 북한의 2차 핵실험(2009년 5월) 도발에 직면했으나, 그해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북·미가 직접 대화를 통해 북핵 문제의 일괄타결을 모색해보자는 분위기가 다시 살아났다. 북한이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초청하자 미 국무부는 9월 들어 “미·북 양자 대화, 준비됐다”는 메시지를 날리며 화답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의장을 맡아 진행한 유엔 핵감축 정상회의를 불과 2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북·미 대화 기류 근저에는 오바마 대통령의 강력한 핵 감축·비확산 의지가 깔렸다.

앞서 보즈워스 특별대표는 한국과 중국, 일본을 돌며 오바마 정부의 이런 입장을 전달했다. 중국은 환영했고, 한국 정부도 반대하지 않았다. 한 달 뒤 북한 외무성의 리근 미국 국장이 미국을 방문했다. 미 정부는 전미외교정책협의회(NCAFP) 등이 주최한 세미나 참석용 비자를 선뜻 내줬다. 그리고 당시 6자회담 수석대표이던 성 김 북핵특사(현 주한 미 대사 지명자)를 세미나장에 보내 북·미 고위급 회담 의제 등을 논의토록 했다.

이런 오랜 준비 기간을 걸쳐 그해 12월 보즈워스와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현 내각 부총리), 김계관 외무성 부상(현 제1부상)이 평양에서 처음으로 회동했다. 보즈워스의 평양 방문으로 대화 물꼬가 열린 양측의 관계 개선 움직임은 북한 고위 당국자의 미국 방문 문제를 논의하는 단계로 발전됐다. 이를 통해 북·미 양측의 이견을 조율한 뒤 6자회담을 열어 북핵 폐기 및 북·미 관계 정상화 등 일련의 조치들을 추진해 나간다는 게 미측의 구상이었다. 하지만 2009년 하반기부터 2010년 초까지 흘렀던 북·미의 우호 기류는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사건이 터지면서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이번 주 미국 정부의 초청으로 뉴욕을 방문한다. 2009년 12월 보즈워스 특별대표의 방북 이후 1년7개월 만에 이뤄지는 북·미 대화 재개다. 2009년 리근의 뉴욕 방문이 민간단체 회의 석상에서 미 당국자를 간접 대면하는 '트랙 1.5' 성격의 접촉이었다면 이번엔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의 공식 초청을 통한 '트랙 1' 대화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왼쪽)이 2011년 7월 뉴욕 유엔 주재 미국 대표부에서 스티븐 보즈워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무대에서 남북 비핵화 회담이 열린 만큼, 북·미 대화는 예고된 수순이었다. 북핵은 남북한 만의 양자 현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은 핵 카드를 만들어낸 이후 시종일관 한국을 따돌리고 미국과 담판짓는 협상 전술을 구사해왔다. 발리에서의 남북 비핵화 회담도 북한이 김계관과 보즈워스의 뉴욕 회담을 약속받고 응한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2009년 리근의 방미 전후 상황을 장황하게 복기해 본 것은 최근의 김계관 방미 추진 정황이 그 당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오바마 정부는 내년 선거를 앞두고 장기 교착 상태인 북핵 현안의 진전 내지는 북한 발 위기 관리가 필요한 상황에 놓였다. 북한이 지난해 말 공개한 우라늄 농축 시설도 검증이 시급한 현안이다. 한국도 더 이상 천안함 사건을 북핵 현안과 연계하기 힘든 처지다.

달라진 상황이라면 오바마 대통령을 둘러싼 정치 환경이다. 지금은 정권 초반이 아니라 백악관이 2012년 오바마 재선을 염두에 두고 북핵 등 수많은 대선 변수들을 관리해야 하는 임기 후반부다. 우리는 조지 W 부시 전임 행정부가 임기 말 북핵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한국을 따돌리고 일방적으로 대북 접촉을 밀어붙이다 낭패를 당한 사례를 기억하고 있다. 긴밀한 한·미 공조만이 북한의 오판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을 한·미 모두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북한은 그간 북핵 협상 과정에서 수많은 기회를 발로 걷어차 버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무모한 핵실험과 대남 도발은 유엔과 유럽연합(EU), 미국, 한국 등의 다자·양자적 제재와 국제적 고립을 불렀다. 한·미 모두 북핵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는 하나, ‘같은 말(馬)을 두 번 사지 않겠다’는 원칙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대화 국면 속에서 북한이 남북 상생의 기회를 붙잡기를 기대한다.

조남규 워싱턴특파원

미국 의회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이 막바지 단계로 접어들었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8월 초 의회 여름 휴회 전에 한·미 FTA 이행법안(비준안)을 통과시킨다는 계획 아래 의회를 압박하고 있으나, 공화당은 한·미 FTA 비준안과 함게 올린 ‘무역조정지원’(TAA) 제도 연장 조항을 따로 처리해야 한다면서 반발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한·미 FTA가 우여곡절 끝에 미 의회 비준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다. 태미 오버비 미 상공회의소 부회장을 만나 한·미 FTA 비준을 둘러싼 미 정치권의 움직임과 비준 전망 등을 들어봤다. 인터뷰는 11일(현지 시간) 워싱턴 DC 미 상공회의소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백악관은 한·미 FTA 비준안을 다음 달 6일 미 의회의 여름 휴회 전에 통과시킨다는 계획이다. 이번엔 비준안이 통과될 것으로 보나.

“전망이 매우 밝다. 긴 여행의 막바지에 서 있다. 마무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명확치 않다. TAA 제도 연장 문제를 한·미 FTA와 병합할 것인지, 분리해 처리할 것인지의 절차적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백악관은 TAA 연장 조항을 포함한 한·미 FTA 비준안을 파나마, 콜롬비아 FTA 비준안과 함께 의회에 제출한다는 방침이다. 백악관과 공화당은 존 베이너 하원의장 사무실에서 막바지 절충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하원은 6월 말 TAA 이견을 절충했으며, 민주·공화 양당 모두 한·미 FTA 비준안에 대해선 이견이 없는 만큼 TAA를 포함한 한·미 FTA 비준안이 의회에서 통과될 것으로 낙관한다.”

―미 의회의 여름 휴회까지는 시간이 많지 않다. 더욱이 의회는 정부의 채무상한 조정 협상으로 여유가 없지 않나.

“의회는 현재 정부 채무상한 조정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채 상한 조정과 한·미 FTA 비준안 현안을 다루는 백악관과 의회 협상팀은 같은 사람들이다. 한·미 FTA 협상은 정부 채무상한 증액 문제에 앞서 처리될 것으로 본다. 의회의 여름 휴회 전에 비준될 것으로 본다.”

―미 상공회의소는 그동안 한·미 FTA 비준을 위해 힘썼다. 어떤 활동들을 해왔나.

“미 국민들을 상대로 한 아웃리치(outreach) 활동에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한덕수 주미 대사의 도움이 컸다. 우리는 한 대사와 함께 미 38개 주를 돌며 한·미 FTA 비준 필요성을 홍보하며 여론을 움직이려 애썼다. 한국 무역협회(KITA)와 한·미 경제연구소(KEI) 등도 방문지역 선정 단계에서부터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방문지역에서는 그 지역에 소재한 한국 수출기업과 지역구 의원, 선거구민들을 상대로 한·미 FTA 필요성과 혜택을 설파했다. 미 국민은 일반적으로 통상의 필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한국에서는 대부분이 FTA가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미국 내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우리가 더 많이 수출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FTA가 긴요하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리려 노력했고, 그 결과 미 국민의 통상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됐다.”

―한 대사의 한·미 FTA 아웃리치 활동을 옆에서 지켜봤을 텐데 에피소드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

“매우 힘든 일정이었다. 38개 주를 돌면서 어떤 날엔 일정이 오전 4시30분에 시작될 때도 있었다. 알다시피 미국 여행은 일기가 불순한 관계로 수시로 항공기 운항이 취소된다. 그럴 때마다 한 대사는 투어 버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노스캐롤라이나 방문 당시에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4시간 가깝게 차로 이동하기도 했다. 한 대사는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이 추진 중인 환태평양무역협정(TPP)에는 미국 외에 8개 나라가 참여하고 있다. 이들 나라의 대사들과 매주 만나 현안을 논의하고 있는데, 이 자리에서 한 대사의 한·미 FTA 아웃리치 활동이 화제가 됐다. 대사들은 TPP 추진 과정에서 자신들도 한 대사를 벤치마킹하고 싶다면서 한 대사의 아웃리치 활동을 꼬치꼬치 캐묻는다.”


 




―한 대사와 호흡이 잘 맞는 것 같다.

“솔직히 한 대사와는 20년지기라고 할 수 있다. 1998년부터 2009년까지 한국에서 살았다. 처음 한국에 갔을 때 한 대사는 외교부 통상교섭본부장이었다. 이후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과 재정경제부 장관, 총리를 역임하는 기간에 한 대사와 좋은 인연을 맺었다. 한·미 FTA 비준을 위해 협력하는 과정에서 그런 인연이 자양분이 됐다. 훌륭한 파트너다. 한·미 FTA는 미 상공회의소의 역점 사업이다. 개인적으로 큰 보람을 느끼며 한·미 FTA를 성사시키기 위해 뛰었다.”

―한·미 FTA가 성사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미 자동차 업계의 반발이 가장 큰 도전이었다. 그들은 한·미 FTA를 좋은 협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도 지난해 12월 한·미 FTA를 재협상하는 과정에서 마음을 바꿨다. 이제 전미자동차노조(UAW)는 한·미 FTA의 가장 큰 후원자가 됐다. 미 의회 내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어떤 의원들은 한국의 달라진 경제적 위상을 모른 채 한·미 FTA를 반대했다. 또 어떤 의원들은 북한 개성공단 제품들이 한·미 FTA를 통해 미국에 수출될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중국 제품이 개성과 서울을 거쳐 미국에 자유롭게 수출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의원들도 있었다. 이런 오해들이 의회를 움직이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다.”

―북한도 장기적으로는 한·미 FTA의 혜택을 볼 수 있나.

“한·미 FTA 협정에 따르면 현재로선 북한 생산 제품은 한·미 FTA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 개성공단 제품이 한·미 FTA 적용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한·미 양국이 우선 동의해야 하며, 미 의회가 승인하고 대통령이 서명해야 한다. 수많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북한도 변화해서 FTA 혜택을 보게 되길 원한다. 많은 시간이 필요한 문제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북한이 변화해야 한다.”

―미 상공회의소는 오바마 행정부와 갈등 관계에 있다는 보도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통상 기업계와 행정부는 자연스런 긴장 관계다. 어느 당이 백악관을 차지해도 그렇다. 기업은 대체로 재정적으로 보수적이고 같은 지향을 지닌 공화당과 친한 것으로 사실이다. 우리도 민주당 보다는 공화당과 가깝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겠다. 하지만 우리가 선거자금을 후원할 때는 철저히 의원들의 투표 성향을 토대로 결정한다. 친기업 성향 의원들은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지원한다. 민주당 소속 의원 중에도 한·미 FTA를 지지하는 의원들이 많다. 그 대표적 의원이 맥스 보커스 상원의원이다.”

―한국에서는 한·미 FTA를 반대하는 여론이 여전히 높다.

“흥미로운 사실은 현재 한·미 FTA를 반대하는 인사 중 일부는 과거에 찬성했던 인사들이다. 노무현 정부 때 협상에 참여했던 인사들도 있고, 당시 주요 협상 파트너가 지금은 국회에서 한·미 FTA 반대 운동의 선봉에 서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정치가 그렇다는 점을 이해하지만 선뜻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다. 물론 FTA는 어느 한쪽이 이기는 게임은 아니다. 과거엔 미국과 한국의 관계가 대등하지 않았다. 형님아우 정도의 불평등 관계였다. 하지만 지금은 동반자 관계다. 어느 한쪽만 전적으로 이익을 보고 다른 편은 손해보는 협상은 있을 수 없다. 한·미 FTA는 양국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협상이다. 그래서 한국 국회에서도 종국엔 한·미 FTA를 비준해줄 것으로 믿는다.”

―한·미 FTA 발효 이후의 바람직한 한·미 통상협력 관계는 어떻게 정립돼야 하나.

“그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미국은 아시아권에서 유일하게 호주, 싱가포르하고만 FTA를 맺고 있다. 한·미 FTA가 성사되면 한국과 세 번째 라인을 그을 수 있게 된다. 한국은 미국의 동북아 전진 기지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을 교두보로 삼아 중국과 러시아, 일본 등과의 통상관계 개선 노력을 펼칠 수 있게 된다. 아시아를 중시하는 미국에게 한국은 매우 소중한 존재다. 우리는 아시아 지역에서 통상 활동을 증진하고 싶다. 한국 역시 미국을 전진기지 삼아 캐나다와 중미, 남미 공략에 나설 수 있게 될 것이다.”

―한·미 FTA가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나.

“오바마 대통령은 경기 회복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일자리 창출이 필수적이다. 한·미 FTA는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다. 다른 한편으로 오바마 대통령의 지지기반인 노동계는 대체로 FTA에 부정적이다. 두 변수가 어떻게 작용할지는 미지수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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