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기이한 인연입니다.” 

미국 내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인 잭 프리처드 한미경제연구소(KEI) 소장은 한국과의 인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운을 뗐다. 그는 “주일 미군 장교 시절부터 15년 동안 일본 전문가로 활동했는데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백악관 선임 보좌관으로 특채된 직후 북한 잠수함이 동해로 침투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북한 문제에 천착하게 됐다”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행운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이후 프리처드 소장은 한국과 미국, 북한, 중국 등 4개국이 모여 한반도 긴장완화 문제를 논의한 4자회담과 북핵 제네바 협상의 산물인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관련 대북 특사로 활동하며 한반도 전문가로 입지를 굳혔다.

지난해 11월 영변 핵시설 방문을 포함, 북한을 11차례 방문했다. 북핵 6자회담이 장기간 공전하는 가운데 미 의회 일각에서 북·미 직접 대화 목소리가 높아지고 미 행정부가 대북 식량 지원 방안을 검토하는 등 워싱턴의 대북 기류 속에서 미묘한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최근 워싱턴DC에 위치한 KEI 소장 집무실에서 프리처드 소장을 만나 북핵 등 한반도 현안 등을 주제로 환담했다.

―지난 1일 미 상원 외교위가 주최한 북한 청문회에서 존 케리 위원장이 북·미 직접 대화를 촉구했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기존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미 행정부와 의회가 충돌하는 양상인데 당신은 어느 쪽에 서있나.

“그날 상원 외교위 요청으로 서면 증언을 했다. 내 입장은 오바마 행정부가 보다 적극적이고 종합적인 대북 정책을 마련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현 대북 정책 기조를 유지한다면 자칫 북한의 핵 보유국 지위가 굳어지는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 그렇다고 북한의 나쁜 행동에 보상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라는 의미는 아니다. 무엇보다 한국과 긴밀하게 협의하면서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안(1874호)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중국을 강하게 압박해야 한다. 그런 전제조건이 충족된다면 우리는 케리 위원장이 제안한 북·미 직접 대화로 이동할 수 있다. 우선 농업과 재난 구호 등과 같은 인도적 현안에 대한 대화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런 다음 과거 북·미가 진행했던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 협상으로 이동할 수 있다. 신뢰 구축 방안의 일환으로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만나 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기 위한 4자 대화를 시작할 필요도 있다. 이런 대화 과정에서 우리는 한국 등과 일치된 대북 제재에 나서야 한다. 1874호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면 이런 일련의 대북 대화는 탁상 공론이 될 수밖에 없다.”


―대북 압박 과정에서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는데 중국은 대북 제재에 소극적인 것 같다. 최근엔 중국이 김정은을 초청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내가 오바마 행정부에 비판적인 문제들 중 하나가 국무부 대북 제재 조정관들의 활동이다. 첫번째 대북 제재 조정관으로 활동했던 필립 골드버그가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북한은 매우 긴장했다. 당시 중국은 대북 제재 논의에 적극적이었다. 골드버그가 새로운 직책(미 국무부 정보조사국 담당 차관보)으로 이동하자 대북 제재 조정관이란 직책은 일 년 이상 잊혀진 자리가 됐다. 그리고 로버트 아인혼 대북 제재 조정관이 그 자리에 임명됐다. 개인적으로 아인혼이 더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하고, 베이징을 더 자주 방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베이징을 더 닦달하지 않으면 중국은 1874호 이행에 소극적이 될 것이다. 그런 사실을 북한은 잘 알고 있다. 결론은 오바마 행정부가 대북 제재 이행 과정에서 두 눈을 부릅떠야 한다는 점이다.”


―당신은 과거 여러 차례 ‘6자회담은 죽었다’고 말해왔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나.

“그렇다. 6자회담은 북한 비핵화라는 원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됐다. 대북 제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데다 북한 내에서 후계체제 구축 작업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은 핵 포기 대가를 바라기보다는 오히려 핵 포기의 두려움이 크다. 북한이 핵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북한이 최근 6자회담 복귀 의사를 밝히고 있는 것은 중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일 뿐이다. 중국은 중국대로 북한을 6자회담 틀 내로 끌어들임으로써 동북아 긴장 수위를 높이는 북한의 도발 행동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설사 6자회담이 재개된다 해도 북한 비핵화라는 당초 목적은 달성하기 힘들다.”


―중동 지역에서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북한을 11차례 방문한 전문가로서, 북한에서도 그런 시위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보나.

“북한 정권은 권력이 잘 통제되고 있는 정권이다. 중동 국가에서 목도되는 민주화 시위 가능성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와 비슷한 상황을 굳이 상정한다면, 김정일이 갑작스럽게 죽고 권력 공백 사태가 초래됐을 때다. 김정은은 아직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 않다. 김정일이 갑자기 죽는다면 북한 주민들의 불만이 일부 권력 공백 지역을 중심으로 분출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중동 민주화 시위 같은 규모의 봉기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프리처드와 필자




―얼마 전 국내에서는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북핵에 맞서 한국도 전술 핵무기를 재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될 것이다. 왜 그런 주장이 나왔는지는 이해가 가지만,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상원 청문회에서 커트 캠벨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현재의 한·미 관계를 최상으로 평가했다. 동의하나.

“그동안 한반도 현안을 다루면서 미국의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한국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 관계를 지켜봤다. 한·미 관계는 양국 대통령들의 성향과 이념 성향에 따라 부침이 있었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한·미 관계야말로 당장의 이해 관계를 넘어서야 하는 동맹이라는 점이다. 전 세계적 안보, 경제 현안들과 긴밀하게 얽혀 있는 복합 동맹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사이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이 전례없는 우의를 과시하고 있다. 정상들 사이의 관계는 실무 차원의 관계를 보다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개인적 경험에 비춰봤을 때, 한·미 정상의 관계가 지금처럼 좋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미국의 한국, 한국인에 대한 인식은 어떤지 궁금하다. 미국 내 한국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KEI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미국 내 한국 인식은 좋은 쪽으로 변화해왔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미국인들은 사실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한국은 미국 대중들에게 조그만 지역 국가에서 세계적 존재감을 키워온 나라로 이미지를 개선시켰다. 2008년 금융위기가 발발했을 때, 나는 TV에서 현대차 광고를 보고 무릎을 친 일이 있다. 현대차를 사면 당신이 실직했을 때 할부금 납부 문제를 도와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금융위기로 고통받는 일반 미국인들의 정서를 정확히 읽고 그들과 눈높이를 맞춘 광고였다. 현대차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고 미국인들의 한국 인식이 좋아졌음은 물론이다. 이런 관점에서 KEI는 미국의 미래 세대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고양시키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지역사회를 방문, 미국인들과 대화하고 간행물을 미 전역의 대학에 배포하는 등 한·미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


―KEI 소장에 취임한 지 5년이 됐다. 언제 보람을 느꼈나. 아쉬움은 없었나.

“아쉬움은 없다.(웃음) KEI 소장에 취임한 직후 한·미 양국 대사가 함께 미국 도시들을 돌며 양국 현안을 미국의 대중들에게 설명하는 행사를 보고 매우 큰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전·현직 주한 미 대사와 주미 한국 대사들의 경험을 책으로 엮어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들이 펴낸 비망록은 한·미 관계의 궤적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유산’이 됐다. 이 비망록은 앞으로도 양국 대사들의 경험을 추가해 증보판을 만들어낼 계획이다. 4년 전부터 재미 한국인들의 날을 KEI 차원에서 기념하고 있는데 재미 한국인들의 놀라운 성취가 너무 자랑스럽다.”

대담=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 잭 프리처드 약력(50년생)

▲하와이대 국제관계학 석사 ▲주일 미군 정보장교, 대령 예편 ▲빌 클린턴 행정부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 보좌관, 4자(한국, 미국, 북한, 중국)회담 미국 부대표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대북 특사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 연구원 ▲한미경제연구소(KEI) 소장 ▲진 프리처드와 2남

 

 

 

 

 

 

 

 

 

 

 

 

 

 

 

 

 

 

 

 

 

 

 

 

 

 

 

 

 

 

 

 

 

 

 

 

 

 

 

 

 

 

  

 

 

 

 

 

 

 

   

 

 

 

 

  

 

  

  

 

  

 

    

 

 

 

 

 

 

 

 

 

 

 

 

 

 

 

 

 

 

 

 

재임 시절 ‘자유의 전도사’로 활동했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중동정책은 이중적이었다. 부시 정부는 반미 성향의 이란을 ‘폭정의 전초기지’ ‘악의 축’으로 부르며 압박정책을 폈으나 이집트나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같은 친미 독재정권과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자서전 ‘결정의 순간들(Decision Points)’에서 “이란과 시리아, 북한, 베네수엘라의 독재정권 아래서 고통받는 민주 개혁가들을 지원해야 하며 사우디아라비아나 이집트, 러시아, 중국과는 전략적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자유를 옹호해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버락 오바마 정부 들어서도 이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첫해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 이슬람권과의 화해를 역설했으나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정부의 독재엔 눈을 감았다.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으로 촉발된 이집트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로 무바라크 정권의 몰락이 가시화하면서 미국의 기존 중동정책은 근본적 전환점을 맞게 됐다.

◆“독재자는 미국의 개”

“우리의 임무는 미국의 군사, 경제적 우위를 유지시키는 국제관계를 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일체의 감상주의는 배격해야 하며 인권이니 민주화니 하는 모호하고 비현실적인 논쟁은 멈춰야 한다.”

미국의 대외정책을 총괄하는 국무부가 1948년 작성한 정책계획에 포함된 내용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재자는 ‘개××’일지 모르나 우리의 개”라는 말을 했다. 미국은 이런 방침에 따라 1953년 반외세 민족주의 성향의 이란 정부를 전복시킨 쿠데타를 비롯해 수많은 3세계 국가들의 독재정권 출범을 막후 조종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카이로 연설에서 미국의 1953년 이란 쿠데타 개입을 처음으로 공식 시인했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막후에서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짓밟는 독재자들을 후원해온 셈이다. 오바마의 연설은 미국의 패권적 개입 행태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평가받았으나 현재진행형인 독재정권과의 고리를 끊는 지점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이집트의 경우 전임 사다트 정권부터 현 무바라크 정권에 이르기까지 7명의 미국 대통령이 독재정권과 우호적 관계를 맺었다. 인권을 강조했던 지미 카터 민주당 행정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집트는 미국이 중동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수레바퀴 축에 꽂는 린치핀(linchpin)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집트는 미·소 냉전시절 소비에트의 대중동 팽창 전략에 맞선 든든한 동맹국 역할을 수행했다. 이스라엘의 안보와 평화를 지키고 이슬람근본주의를 억제하는 보루이기도 했다. 주카이로 미국대사관은 이라크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3000여명의 직원이 상주하는 중동지역 최대 공관이었다.

◆“공짜는 없다”

미국은 그동안 독재정권을 비호하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독재정권이 무너진 자리엔 반미정권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뒤엎고 들어선 호메이니 정부는 이슬람에 기반한 반미 기지가 돼 지금까지 미국을 괴롭히고 있다. 쿠바는 친미성향의 바티스타 정부가 전복된 이후 반미노선을 걷고 있다. 중동 독재정권의 억압통치가 알 카에다 등 이슬람 과격단체의 세력을 키우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는 목소리도 높다.

독재정권을 후원한 미국은 국제적 이미지의 실추를 감수해야 했다. 이란의 팔레비 왕조는 카터 대통령이 팔레비 치하의 이란을 ‘안보의 섬’이라고 추켜세운 지 2년 만에 무너졌다.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은 조지 H 부시 부통령이 마르코스의 민주적 통치를 칭송한 이후 피플 파워에 밀려 권좌에서 쫓겨났다. 이집트는 부시 행정부가 넘긴 테러 용의자를 고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라시드 칼리디 컬럼비아대 교수는 “미국이 이집트로부터 끌어낸 가시적 혜택은 허상에 불과하다”면서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협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로 연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무바라크의 폭압통치가 테러리즘을 조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칼리디 교수는 “결국 미국의 중동정책은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파산상태에 이르렀다”고 진단했다.

◆미, 중동 민주화 시동?

오바마 정부는 이집트 시위 사태 초반만 해도 ‘안정’에 초점을 맞췄으나 지금은 무바라크 대통령과의 결별 수순을 밟고 있다. 무바라크의 퇴진을 압박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백악관 관계자는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의 국익 손상을 우려하며 지금 같은 혁명적 기회의 순간을 흘려보내려 한다는 인식이 카이로 시내와 다른 지역에서 퍼져나가고 있다”면서 “그런 인식을 차단하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은 ‘조용한 외교’ 대신 이집트 인근 국가 정상들과 전화하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 체결 당시 백악관 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무바라크와 손잡은 것은 미국과 이집트 모두에게 괜찮은 거래였다”면서 “이제 무바라크의 시대는 끝났으며, 그가 떠난다고 해도 1979년 이란혁명과 같은 나쁜 상황은 전개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바라크의 퇴진은 향후 미국의 이스라엘 정책을 포함한 중동정책 전반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그 구체적 형태는 무바라크 이후의 리더십이 어떤 식으로 형성될 것인지에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중동에서 불고 있는 자유와 민주의 바람이 미국의 치부였던 독재자 비호 관행을 종식시킬지 주목된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인 6일(현지시간) 미 전역이 레이건의 이름으로 뒤덮였다.

마침 이날은 미국 프로풋볼(NFL) 챔피언 결정전인 슈퍼볼이 열리는 날이어서 더욱 뜻깊은 날이 됐다. 슈퍼볼이 열리는 텍사스주 알링턴 카우보이스 스타디움에서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 대형스크린을 통해 레이건 전 대통령의 탄생을 축하하는 메시지가 방영됐다. 어느 평론가의 표현대로, 레이건 탄생 100주년과 슈퍼볼이 겹친 6일은 ‘기퍼 선데이’(Gipper sunday)가 됐다. 

1940년 영화배우 시절의 레이건은 실화에 바탕한 풋볼 영화 ‘누트 라크니’에 출연한 적이 있다. 영화에서 레이건은 25살에 폐렴으로 숨진 비운의 풋볼 선수 조지 기퍼로 나왔다. 노트르담대학 풋볼팀이 챔피언 결정전을 앞둔 어느 날 병상의 기퍼는 라크니 감독에게 “아무래도 난 죽을 것 같다. 동료들에게 기퍼를 위해 한 번만 더 이겨 달라고 전해 달라”고 유언처럼 말한다. 라크니는 선수들에게 “기퍼를 위해 승리하자”고 독려했고 팀은 승리했다.

그 자신 대학 시절 풋볼 선수로 뛰었던 레이건은 영화 속의 기퍼를 자신과 동일시했다.

                                                                                 대학 시절 풋볼 선수로 활약할 당시의 레이건

그 이후 기퍼는 레이건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 됐고, 레이건은 이 별칭을 무척 좋아했다. 레이건은 1984년 대통령 재선 당시 “기퍼를 위해 한 번 더 승리하자”(Win one for the Gipper)고 호소했다. 미 국민은 ‘기퍼’를 위해 표를 던졌다. 레이건은 전체 선거인단 538명 중 525명을 석권하며 압도적 표 차로 재선 고지에 올랐다. 미국인들은 지금도 그를 주저없이 링컨이나 루스벨트 같은 ‘위대한 대통령’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미국인들은 레이건 특유의 낙관주의에 매료됐다. 레이건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신발 판매원의 아들로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셋방을 전전했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이사할 때마다 집이 작아졌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는 술에 취해 살았다. 레이건의 형은 그런 가난을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레이건은 달랐다. 가난을 비가 개면 사라질 먹구름으로 봤다. ‘대통령을 키운 어머니들’(First Mothers)의 저자인 보니 앤젤로는 “그는 파란 하늘을 보았던 반면 형인 닐은 구름을 보았다”고 평가했다. 인간 레이건의 낙관주의는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의 유전자였다. 대통령 레이건의 낙관주의는 베트남 전쟁의 상흔과 경제 침체로 실의에 빠졌던 미국인들에게 자부심과 ‘할 수 있다는 정신’(can-do spirit)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레이건은 미국 보수주의 진영의 우상이지만 원래는 민주당원이었다. 그의 가족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민주당 정부가 펼친 뉴딜정책의 수혜자였다. 레이건이 공화당으로 전향한 이유 중 하나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었다. 이후 그는 감세와 재정지출 축소, 규제완화 등을 통한 ‘작은 정부’ 정책과 반공산주의 노선 등 보수적 기조를 고수했으나 당파성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민주당 소속의 토머스 오닐 하원의장과 손잡고 사회보장 개혁과 선거공영제 확립을 위해 힘썼다. 민주당은 요즘 레이건의 이 같은 초당 행보를 거론하면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건강보험 개혁과 선거법 개혁에 반대하는 공화당을 반격하고 있다. 소비에트를 ‘악의 제국’으로 몰아붙이며 전임 카터 행정부의 데탕트(긴장완화) 정책을 폐기한 그였으나 온건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리더로 부상하자 즉각 조지 H 부시 부통령을 소련으로 급파, 미·소 정상회담을 가동시켰다.

레이건 재임기간 냉전이 종식됐다. 수많은 세계인들이 자유의 세례를 받았다. 역사의 물줄기가 그 혼자만의 힘으로 바뀌진 않았다. 그 역시 결함을 지닌 지도자였다. 국정 현안에 무지했다는 자질론이 거론되고, 재임 시절의 양극화 심화와 재정적자 증가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고르바초프의 등장이 없었다면 냉전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을지도 모른다. 저격을 당하고도 살아난 레이건에게는 운이 좋아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온갖 난관과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긍정의 힘’은 그가 남긴 위대한 유산이었다. 그의 낙관주의는 반대편 세력까지 전염시켰다. 이로써 그는 보수진영과 미국를 넘어 자유세계의 영웅이 됐다.

조남규 워싱턴특파원


톨레랑스(tolerance)는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용인’하는 것이다.

타인의 입장, 차이를 존중하고 끌어안는 힘이다.

본격적인 다문화·다민족 시대, 남북 대결의 골이 깊어지는 시점에 ‘코리안 톨레랑스’의 길을 모색해 본다.



재미 한인 사회는 2011년 벽두부터 축제 분위기였다. 미 전역의 한인타운에서는 ‘미주 한인의 날(Korean American Day)’인 지난 13일을 전후해 이를 기념하는 각종 행사가 잇따라 개최됐다. 1903년 1월 13일 최초의 한국인 이민자 102명이 미국 땅(하와이 호놀룰루)을 밟은 이후 어느덧 한 세기가 흘렀다. 재미동포 250만 시대가 됐다. 미 연방 상·하원은 2005년 만장일치로 ‘미주 한인의 날’을 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워싱턴DC 인근 버지니아주 애넌데일 지역에 형성된 한인타운. 미국 사회에 융화된 재미 동포의 현주소를 말해주듯 한국어 간판과 영어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미 버지니아주 11선거구 출신인 제리 코널리 연방 하원의원(민주)은 지난 7일 최정범 한인연합회 회장의 취임을 축하하는 내용을 담은 발의문을 의회에 제출했다. 코널리 의원은 발의문에서 “페어팩스 카운티가 속한 11선거구에서 한인 사회가 경제 발전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고 밝혔다. 코널리 의원의 발의문은 한인 사회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졌음을 웅변하는 사례다. 워싱턴DC 인근의 대표적 한인타운인 애넌데일과 센터빌은 모두 코널리의 선거구인 페어팩스 카운티에 속해 있다. 애넌데일과 센터빌에 각각 2만5000, 3만4000명 정도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다.

페어팩스 카운티는 한인 단체들에 대한 재정 지원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 초기 이민자들의 정착을 돕는 영어·기술 교육 프로그램(한사랑종합학교)은 페어팩스 카운티의 재정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카운티는 지난해 한사랑종합학교 지원금으로만 13만 달러를 배정했다. 카운티 차원에서 한인들을 위한 세미나와 취업 박람회를 개최하고 카운티 프로그램을 한글로 홍보하고 있다. 미 연방정부와 버지니아주 정부 등은 한인 사회의 취업박람회에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한인 사회가 처음부터 미국 사회의 환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재미 한인들이 1990년대 들어 애넌데일 지역에 모여들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 지역은 백인들의 세상이었다. 대다수 재미 한인들은 세탁소와 식당, 당구장, 만화방 등과 같은 영세 자영업이나 배관공, 청소부 등과 같은 허드렛일에 종사했다. 황원균 전 북버지니아한인회 회장은 “당시만 해도 언어 장벽을 비롯한 문화 차이 탓에 미국 주류 사회 편입은 고사하고 미국인들과의 정상적인 소통도 쉽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런 배타적 분위기는 애넌데일 거리에 한국 간판을 단 상점이 늘고 한인 사회의 경제력이 커진 2000년대 들어서도 좀체 개선되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가 2005년 애넌데일 한인타운을 조명하는 특집기사에서 “과거 백인 지역이었던 애넌데일이 한글 간판을 내단 한국 상점들이 즐비한 한인타운으로 바뀌면서 한인 사회와 백인 사회 사이에 갈등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을 정도였다.

한인 사회는 적극적으로 미국 주류 사회와의 소통을 시도했다. 뜻있는 교민들이 나서 애넌데일 지역을 돌며 거리 청소를 시작했다. 자영업에 종사하는 한인들은 한국어 간판을 영어 간판으로 바꿔 달았다. 각종 선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한인들의 목소리를 키웠다. 그 결과 2009년 재미 한인 2세인 마크 김 후보가 한인으론 최초로 버지니아주 하원에 입성하게 됐다. 한인들의 직종도 한국인 상대의 영세 자영업에서 교육과 의료, 부동산 등 미국인을 고객으로 하는 전문직종으로 다양하게 분화했다. 사양길에 접어들었던 애넌데일 상권에 한인 자금이 유입되면서 이 지역이 다시 번창하게 되자 미국 사회도 한인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한인 단체의 리더십도 영어가 자유로운 세대로 교체되면서 미국 사회와의 벽도 차츰 낮아졌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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