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 시절 ‘자유의 전도사’로 활동했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중동정책은 이중적이었다. 부시 정부는 반미 성향의 이란을 ‘폭정의 전초기지’ ‘악의 축’으로 부르며 압박정책을 폈으나 이집트나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같은 친미 독재정권과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자서전 ‘결정의 순간들(Decision Points)’에서 “이란과 시리아, 북한, 베네수엘라의 독재정권 아래서 고통받는 민주 개혁가들을 지원해야 하며 사우디아라비아나 이집트, 러시아, 중국과는 전략적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자유를 옹호해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버락 오바마 정부 들어서도 이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첫해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 이슬람권과의 화해를 역설했으나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정부의 독재엔 눈을 감았다.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으로 촉발된 이집트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로 무바라크 정권의 몰락이 가시화하면서 미국의 기존 중동정책은 근본적 전환점을 맞게 됐다.

◆“독재자는 미국의 개”

“우리의 임무는 미국의 군사, 경제적 우위를 유지시키는 국제관계를 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일체의 감상주의는 배격해야 하며 인권이니 민주화니 하는 모호하고 비현실적인 논쟁은 멈춰야 한다.”

미국의 대외정책을 총괄하는 국무부가 1948년 작성한 정책계획에 포함된 내용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재자는 ‘개××’일지 모르나 우리의 개”라는 말을 했다. 미국은 이런 방침에 따라 1953년 반외세 민족주의 성향의 이란 정부를 전복시킨 쿠데타를 비롯해 수많은 3세계 국가들의 독재정권 출범을 막후 조종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카이로 연설에서 미국의 1953년 이란 쿠데타 개입을 처음으로 공식 시인했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막후에서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짓밟는 독재자들을 후원해온 셈이다. 오바마의 연설은 미국의 패권적 개입 행태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평가받았으나 현재진행형인 독재정권과의 고리를 끊는 지점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이집트의 경우 전임 사다트 정권부터 현 무바라크 정권에 이르기까지 7명의 미국 대통령이 독재정권과 우호적 관계를 맺었다. 인권을 강조했던 지미 카터 민주당 행정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집트는 미국이 중동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수레바퀴 축에 꽂는 린치핀(linchpin)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집트는 미·소 냉전시절 소비에트의 대중동 팽창 전략에 맞선 든든한 동맹국 역할을 수행했다. 이스라엘의 안보와 평화를 지키고 이슬람근본주의를 억제하는 보루이기도 했다. 주카이로 미국대사관은 이라크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3000여명의 직원이 상주하는 중동지역 최대 공관이었다.

◆“공짜는 없다”

미국은 그동안 독재정권을 비호하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독재정권이 무너진 자리엔 반미정권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뒤엎고 들어선 호메이니 정부는 이슬람에 기반한 반미 기지가 돼 지금까지 미국을 괴롭히고 있다. 쿠바는 친미성향의 바티스타 정부가 전복된 이후 반미노선을 걷고 있다. 중동 독재정권의 억압통치가 알 카에다 등 이슬람 과격단체의 세력을 키우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는 목소리도 높다.

독재정권을 후원한 미국은 국제적 이미지의 실추를 감수해야 했다. 이란의 팔레비 왕조는 카터 대통령이 팔레비 치하의 이란을 ‘안보의 섬’이라고 추켜세운 지 2년 만에 무너졌다.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은 조지 H 부시 부통령이 마르코스의 민주적 통치를 칭송한 이후 피플 파워에 밀려 권좌에서 쫓겨났다. 이집트는 부시 행정부가 넘긴 테러 용의자를 고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라시드 칼리디 컬럼비아대 교수는 “미국이 이집트로부터 끌어낸 가시적 혜택은 허상에 불과하다”면서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협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로 연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무바라크의 폭압통치가 테러리즘을 조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칼리디 교수는 “결국 미국의 중동정책은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파산상태에 이르렀다”고 진단했다.

◆미, 중동 민주화 시동?

오바마 정부는 이집트 시위 사태 초반만 해도 ‘안정’에 초점을 맞췄으나 지금은 무바라크 대통령과의 결별 수순을 밟고 있다. 무바라크의 퇴진을 압박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백악관 관계자는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의 국익 손상을 우려하며 지금 같은 혁명적 기회의 순간을 흘려보내려 한다는 인식이 카이로 시내와 다른 지역에서 퍼져나가고 있다”면서 “그런 인식을 차단하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은 ‘조용한 외교’ 대신 이집트 인근 국가 정상들과 전화하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 체결 당시 백악관 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무바라크와 손잡은 것은 미국과 이집트 모두에게 괜찮은 거래였다”면서 “이제 무바라크의 시대는 끝났으며, 그가 떠난다고 해도 1979년 이란혁명과 같은 나쁜 상황은 전개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바라크의 퇴진은 향후 미국의 이스라엘 정책을 포함한 중동정책 전반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그 구체적 형태는 무바라크 이후의 리더십이 어떤 식으로 형성될 것인지에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중동에서 불고 있는 자유와 민주의 바람이 미국의 치부였던 독재자 비호 관행을 종식시킬지 주목된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인 6일(현지시간) 미 전역이 레이건의 이름으로 뒤덮였다.

마침 이날은 미국 프로풋볼(NFL) 챔피언 결정전인 슈퍼볼이 열리는 날이어서 더욱 뜻깊은 날이 됐다. 슈퍼볼이 열리는 텍사스주 알링턴 카우보이스 스타디움에서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 대형스크린을 통해 레이건 전 대통령의 탄생을 축하하는 메시지가 방영됐다. 어느 평론가의 표현대로, 레이건 탄생 100주년과 슈퍼볼이 겹친 6일은 ‘기퍼 선데이’(Gipper sunday)가 됐다. 

1940년 영화배우 시절의 레이건은 실화에 바탕한 풋볼 영화 ‘누트 라크니’에 출연한 적이 있다. 영화에서 레이건은 25살에 폐렴으로 숨진 비운의 풋볼 선수 조지 기퍼로 나왔다. 노트르담대학 풋볼팀이 챔피언 결정전을 앞둔 어느 날 병상의 기퍼는 라크니 감독에게 “아무래도 난 죽을 것 같다. 동료들에게 기퍼를 위해 한 번만 더 이겨 달라고 전해 달라”고 유언처럼 말한다. 라크니는 선수들에게 “기퍼를 위해 승리하자”고 독려했고 팀은 승리했다.

그 자신 대학 시절 풋볼 선수로 뛰었던 레이건은 영화 속의 기퍼를 자신과 동일시했다.

                                                                                 대학 시절 풋볼 선수로 활약할 당시의 레이건

그 이후 기퍼는 레이건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 됐고, 레이건은 이 별칭을 무척 좋아했다. 레이건은 1984년 대통령 재선 당시 “기퍼를 위해 한 번 더 승리하자”(Win one for the Gipper)고 호소했다. 미 국민은 ‘기퍼’를 위해 표를 던졌다. 레이건은 전체 선거인단 538명 중 525명을 석권하며 압도적 표 차로 재선 고지에 올랐다. 미국인들은 지금도 그를 주저없이 링컨이나 루스벨트 같은 ‘위대한 대통령’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미국인들은 레이건 특유의 낙관주의에 매료됐다. 레이건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신발 판매원의 아들로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셋방을 전전했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이사할 때마다 집이 작아졌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는 술에 취해 살았다. 레이건의 형은 그런 가난을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레이건은 달랐다. 가난을 비가 개면 사라질 먹구름으로 봤다. ‘대통령을 키운 어머니들’(First Mothers)의 저자인 보니 앤젤로는 “그는 파란 하늘을 보았던 반면 형인 닐은 구름을 보았다”고 평가했다. 인간 레이건의 낙관주의는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의 유전자였다. 대통령 레이건의 낙관주의는 베트남 전쟁의 상흔과 경제 침체로 실의에 빠졌던 미국인들에게 자부심과 ‘할 수 있다는 정신’(can-do spirit)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레이건은 미국 보수주의 진영의 우상이지만 원래는 민주당원이었다. 그의 가족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민주당 정부가 펼친 뉴딜정책의 수혜자였다. 레이건이 공화당으로 전향한 이유 중 하나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었다. 이후 그는 감세와 재정지출 축소, 규제완화 등을 통한 ‘작은 정부’ 정책과 반공산주의 노선 등 보수적 기조를 고수했으나 당파성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민주당 소속의 토머스 오닐 하원의장과 손잡고 사회보장 개혁과 선거공영제 확립을 위해 힘썼다. 민주당은 요즘 레이건의 이 같은 초당 행보를 거론하면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건강보험 개혁과 선거법 개혁에 반대하는 공화당을 반격하고 있다. 소비에트를 ‘악의 제국’으로 몰아붙이며 전임 카터 행정부의 데탕트(긴장완화) 정책을 폐기한 그였으나 온건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리더로 부상하자 즉각 조지 H 부시 부통령을 소련으로 급파, 미·소 정상회담을 가동시켰다.

레이건 재임기간 냉전이 종식됐다. 수많은 세계인들이 자유의 세례를 받았다. 역사의 물줄기가 그 혼자만의 힘으로 바뀌진 않았다. 그 역시 결함을 지닌 지도자였다. 국정 현안에 무지했다는 자질론이 거론되고, 재임 시절의 양극화 심화와 재정적자 증가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고르바초프의 등장이 없었다면 냉전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을지도 모른다. 저격을 당하고도 살아난 레이건에게는 운이 좋아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온갖 난관과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긍정의 힘’은 그가 남긴 위대한 유산이었다. 그의 낙관주의는 반대편 세력까지 전염시켰다. 이로써 그는 보수진영과 미국를 넘어 자유세계의 영웅이 됐다.

조남규 워싱턴특파원


톨레랑스(tolerance)는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용인’하는 것이다.

타인의 입장, 차이를 존중하고 끌어안는 힘이다.

본격적인 다문화·다민족 시대, 남북 대결의 골이 깊어지는 시점에 ‘코리안 톨레랑스’의 길을 모색해 본다.



재미 한인 사회는 2011년 벽두부터 축제 분위기였다. 미 전역의 한인타운에서는 ‘미주 한인의 날(Korean American Day)’인 지난 13일을 전후해 이를 기념하는 각종 행사가 잇따라 개최됐다. 1903년 1월 13일 최초의 한국인 이민자 102명이 미국 땅(하와이 호놀룰루)을 밟은 이후 어느덧 한 세기가 흘렀다. 재미동포 250만 시대가 됐다. 미 연방 상·하원은 2005년 만장일치로 ‘미주 한인의 날’을 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워싱턴DC 인근 버지니아주 애넌데일 지역에 형성된 한인타운. 미국 사회에 융화된 재미 동포의 현주소를 말해주듯 한국어 간판과 영어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미 버지니아주 11선거구 출신인 제리 코널리 연방 하원의원(민주)은 지난 7일 최정범 한인연합회 회장의 취임을 축하하는 내용을 담은 발의문을 의회에 제출했다. 코널리 의원은 발의문에서 “페어팩스 카운티가 속한 11선거구에서 한인 사회가 경제 발전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고 밝혔다. 코널리 의원의 발의문은 한인 사회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졌음을 웅변하는 사례다. 워싱턴DC 인근의 대표적 한인타운인 애넌데일과 센터빌은 모두 코널리의 선거구인 페어팩스 카운티에 속해 있다. 애넌데일과 센터빌에 각각 2만5000, 3만4000명 정도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다.

페어팩스 카운티는 한인 단체들에 대한 재정 지원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 초기 이민자들의 정착을 돕는 영어·기술 교육 프로그램(한사랑종합학교)은 페어팩스 카운티의 재정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카운티는 지난해 한사랑종합학교 지원금으로만 13만 달러를 배정했다. 카운티 차원에서 한인들을 위한 세미나와 취업 박람회를 개최하고 카운티 프로그램을 한글로 홍보하고 있다. 미 연방정부와 버지니아주 정부 등은 한인 사회의 취업박람회에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한인 사회가 처음부터 미국 사회의 환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재미 한인들이 1990년대 들어 애넌데일 지역에 모여들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 지역은 백인들의 세상이었다. 대다수 재미 한인들은 세탁소와 식당, 당구장, 만화방 등과 같은 영세 자영업이나 배관공, 청소부 등과 같은 허드렛일에 종사했다. 황원균 전 북버지니아한인회 회장은 “당시만 해도 언어 장벽을 비롯한 문화 차이 탓에 미국 주류 사회 편입은 고사하고 미국인들과의 정상적인 소통도 쉽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런 배타적 분위기는 애넌데일 거리에 한국 간판을 단 상점이 늘고 한인 사회의 경제력이 커진 2000년대 들어서도 좀체 개선되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가 2005년 애넌데일 한인타운을 조명하는 특집기사에서 “과거 백인 지역이었던 애넌데일이 한글 간판을 내단 한국 상점들이 즐비한 한인타운으로 바뀌면서 한인 사회와 백인 사회 사이에 갈등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을 정도였다.

한인 사회는 적극적으로 미국 주류 사회와의 소통을 시도했다. 뜻있는 교민들이 나서 애넌데일 지역을 돌며 거리 청소를 시작했다. 자영업에 종사하는 한인들은 한국어 간판을 영어 간판으로 바꿔 달았다. 각종 선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한인들의 목소리를 키웠다. 그 결과 2009년 재미 한인 2세인 마크 김 후보가 한인으론 최초로 버지니아주 하원에 입성하게 됐다. 한인들의 직종도 한국인 상대의 영세 자영업에서 교육과 의료, 부동산 등 미국인을 고객으로 하는 전문직종으로 다양하게 분화했다. 사양길에 접어들었던 애넌데일 상권에 한인 자금이 유입되면서 이 지역이 다시 번창하게 되자 미국 사회도 한인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한인 단체의 리더십도 영어가 자유로운 세대로 교체되면서 미국 사회와의 벽도 차츰 낮아졌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세계 유일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지위는 아주 오랜 기간 지속될 것이다.”

미국 보수 진영의 거두인 에드윈 풀너 헤리티지 재단 이사장은 세계일보와의 신년인터뷰에서 미국과 중국을 두 초강대국으로 바라보는 ‘G2’(주요 2개국)라는 개념을 일축했다. 그러면서 2008년 금융위기로 타격을 받긴했지만 미국의 힘은 여전히 중국을 비롯한 다른 열강들을 압도하고 있다면서 “미국은 ‘G1’”이라고 주장했다.



미 전략정보 분석 전문업체 스트랫포(STRATFOR)의 설립자 조지 프리드먼은 25일 앞으로 미국이 유럽, 중국보다 더 강력해지고 세계적 영향력도 더욱 커질 것이라며 거대한 경제적, 군사적 힘을 가진 하나의 ‘제국’으로 간주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날 출간된 저서 ‘10년 후’에서 “향후 10년 간 미국 경제는 과거 1970년대보다는 못하겠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다른 나라보다 위기에서 아주 잘 빠져나오는 중”이라며 “유럽연합(EU)의 본질과 건전성에 대한 유럽인들의 안이한 생각이 산산조각났고 중국에서는 심각한 위기상황이 조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대단한 힘을 갖고 있다. 그 것은 경제력, 군사력과 광범위한 동의에 기반을 둔 정치력”이라며 “반면 중국은 심각한 불균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빈곤층 10억명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지가 난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래서 앞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의 힘이 더욱 강력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흔들리는 미국 패권

보수 정권이었던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람보식 일방주의’는 압도적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의 국방비는 중국과 러시아, 인도, 일본, 유럽연합(EU)의 국방비를 모두 합한 것보다 많았다. 경제력에서도 미국의국내 총생산(GDP·2004년 기준)은 일본과 독일, 영국, 프랑스, 중국의 총생산액을 합한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로 미국의 생산력은 저하됐으나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는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다. 수렁에 빠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 군사력의 한계를 노출했다. 미국의 경제패권은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와 미국 주도의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은 금융위기를 예측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해법도 내놓지 못했다. 경제위기 극복 과정에서 천문학적 규모로 불어난 재정적자는 미국의 경제 패권을 약화시켰다.

◆압도적인 미 군사력

‘제국’으로서의 미국은 전성기였던 걸프전 당시의 패권이 눈에 띄게 약화됐지만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 문화력은 여전히 다른 열강들과의 경쟁에서 압도적 우위를 견지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가 2011년 회계연도에 책정한 국방비는 7400억 달러에 달한다.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향후 5년 동안 780억 달러의 국방비를 삭감하겠다는 계획이지만 그럼에도 부동의 세계 1위다. 미 국방부가 지난해 의회에 제출한 ‘중국 군사력 증강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국방비는 2009년 1500억 달러로 추정됐다. 중국 정부가 2010년 3월 공식 발표한 국방비 규모는 이보다 적은 786억 달러다. 미국의 군사력은 질적으로도 중국의 군사력을 압도한다. 미군은 해외 기지들과 항공모함을 이용해 세계 전 지역에서 전쟁 수행이 가능한 유일한 나라다. 중국은 최근 들어서야 본토 방위를 넘어선 역내 진출을 전략화하고 있다. 미사일 개발이나 우주과학 분야에선 첨단 기술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패권 국가로선 걸음마 단계다.

◆중국의 3배인 미 경제력

경제력에서도 미국의 힘은 아직 강력하다. 경기침체 속에서도 미국의 GDP는 2010년 15조 달러에 육박했다. 조사 기관별로 편차가 있지만 대략 전 세계 GDP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규모다. 중국의 GDP는 6조 달러 수준이다. 헤리티지재단은 최근 보고서에서 “지난 40년 동안 미국의 생산력은 아시아권의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 속에서도 기술혁신 등을 통해 전 세계 생산력의 25% 이상을 꾸준히 유지해왔다”면서 “그간 이뤄진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 신흥경제국들의 성장으로 미국 경제력이 잠식됐다는 추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헤리티지 재단의 미·중 경제 전문가인 데릭 시저스는 “미국 보다 인구가 10억 정도 많은 중국이지만 전체 경제력에서도 미국은 중국의 3배에 달하고 1인당 국민총생산은 금융위기로 어려웠던 2008년에도 미국이 4만7000달러였던 반면 중국은 3400달러에 불과했다”면서 “미국은 오랫동안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경제국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견제 나선 미국

미국이 주시하는 대목은 중국의 군사력 증강 동향이다. 미국 내에서는 중국이 대만해협을 넘어 미국의 태평양 지배권에 도전할 수 있다는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이런 의구심은 지난해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과정에서 미국의 중국 견제 행보로 표면화했다.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인도와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국가들, 대만, 일본, 한국 등을 묶어 중국의 패권화를 견제하는 포위 전략을 선보였다. 동시에 중국과는 미·중 군사교류 협력을 통해 양국의 군사적 긴장 수위가 높아지지 않도록 관리해나간다는 전략이다.


중국 전문가인 마이클 셰인(사진) 카네기재단 선임연구원은 24일(현지 시간) 전환기를 맞은 미·중 관계와 관련해 “중국을 공격적이라고 보는 미국의 인식과 미국은 쇠퇴하고 있다는 중국의 인식이 양측의 라이벌 의식을 키우고 있다”면서 미·중 양국의 신뢰 구축 노력이 긴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중국의 부상 이후에도 아시아 지역의 군사 패권을 유지하고 있는가.

“미국은 의문의 여지 없이 아시아 해상에서 압도적 군사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은 하와이에서 페르시아만까지 다수의 군대를 투입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다. 하지만 서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은 중국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중국이 탄도미사일과 잠수함, 대공 방어 시스템을 갖추고 나아가 항공모함까지 배치하게되 면 미국은 예전처럼 자유롭게 군사력을 운용하기 힘들어진다.”

―미·중 양국은 서로를 군사적 라이벌로 인식하고 있는가.

“미·중은 서로를 위협으로 간주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양측의 적대감이 커지면 워싱턴과 베이징은 아시아 지역에서의 이해관계를 ‘제로섬 게임’으로 보기 시작할 것이고, 상대의 군사력을 타격할 수 있는 방안들을 고려할 것이다. 아직 그 단계까지 가지는 않았으나 그런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 양측의 미디어는 상대의 위협을 과장하고 있다. 이는 긴장을 완화하려는 양국 지도자들의 노력을 방해할 것이다. 주요한 전략적 불신은 양국의 군사 지도자들 사이에 존재한다.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이 최근 베이징을 방문한 것과 같은 군사 당국 간 교류가 필수적이다. 양국의 라이벌 의식이 냉전으로 치달으면 양국 모두에 위험스럽다.”

―미국은 중국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가.

“미국은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고 중국의 군사력을 위협으로 보는 동맹국을 안심시키기 위해 다양한 차원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괌에 더 많은 병력을 배치하고 미·일 관계를 개선시키고 있다.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를 지속하고 있는 것도 중국 억지 차원이다. 중국의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려는 은밀한 조치들도 진전시키고 있다.”

―중국이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가운데 미·중의 신뢰 구축이 가능한가.

“과거의 사례를 보면 미·중 관계가 악화될 때 맨 먼저 희생된 것은 군사 교류였다. 양국 관계의 부침에 영향받지 않고 군사 교류가 지속되는 것이 중요하다. 대만 문제에 대한 양측의 진지한 평가가 필요하다. 대만해협의 긴장완화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일촉즉발의 화약고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미국 사회에서 ‘성공의 사다리’로 통했던 로스쿨이 흔들리고 있다.

금융위기 와중에 법률 시장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로스쿨 학자금을 갚지 못한 파산자가 속출하고 있다. 미국 로스쿨들은 졸업생 취업률 뻥튀기 논란에 휩싸였다.

졸업생들의 취업률은 미 전역의 로스쿨 순위를 산정하는 주요 근거 자료다. 시사주간지인 ‘유에스 뉴스&월드 리포트’가 최근 집계한 로스쿨 졸업생들의 취업률은 무려 93%에 달했다. 뉴욕타임스는 이 같은 수치가 취업 통계가 작성된 1997년 이후 평균 취업률(84%)보다 10%포인트 가깝게 증가한 것이며 찬바람이 불고 있는 법률 시장 현실과 배치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법률 시장 상황을 추적하는 단체인 노스웨스턴 법연구회에 따르면, 금융위기가 시작된 2008년 이후 미 법률 시장에서 1만5000여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로펌들은 신규 채용을 꺼리고 있다.

그런데도 로스쿨 취업률이 치솟고 있는 것은 로스쿨들이 학생 유치 차원에서 취업 통계를 부풀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로스쿨 졸업생 취업률은 법률 관련 일자리를 잡은 졸업생만을 대상으로 산정되나 로스쿨들은 스타벅스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는 졸업생들까지 취업자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명문 로스쿨들도 이런 취업률 뻥튀기 행렬에 가담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조지타운대학 로스쿨(2010년 14위)은 지난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졸업생들을 위해 6주 동안의 한시직인 시간당 20달러짜리 일자리를 급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순위가 낮은 로스쿨에서는 더 노골적인 방식으로 취업률을 조작하고 있다. 볼티모어 로스쿨 학장인 필립 클로시우스는 “학장 면접 당시 허위 자료에 기초한 로스쿨 순위는 의미가 없다고 역설했으나 아무도 내 얘기에 주목하지 않았다”면서 “로스쿨 순위가 수백만 달러를 좌우하는 학생 유치 문제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 대학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통하는 로스쿨은 매년 증가세다. 2009년 현재 200개로 지난 10년 동안 19개가 늘었다.

추가로 5개 대학에서 로스쿨 승인을 신청해놓고 있다. 매년 15만여명이 로스쿨에 등록하고 4만3000여명의 변호사가 배출되고 있다. 변호사 일자리는 줄어들고 변호사 숫자는 증가하는 공급 과잉 현상이 전개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로스쿨 학비는 증가 일로여서 일자리를 잡지 못한 로스쿨 졸업생들의 학자금 대출 파산이 사회문제화하고 있다. 9000억 달러에 육박하는 로스쿨 학자금 대출금은 금융시장의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로스쿨의 무리한 취업률 조작과 과도한 학생 유치 경쟁이 낳은 결과라고 뉴욕타임스는 진단했다.

문제는 로스쿨의 이런 엇나간 행태에도 불구하고 뾰족한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는 데 있다. 로스쿨들은 지난해 말부터 취업률 통계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나 자정 노력이 없는 한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서는 로스쿨 정원을 줄이고 함량 미달의 로스쿨을 정리해 공급 과잉의 법률 시장을 안정시키자는 극단적인 의견도 나오고 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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