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위한 4자회담(남·북한, 미국, 중국)은 1997년 12월 시작돼 1999년 8월 6차 회담까지 이어졌다.
당시 평화체제 협상의 핵심 쟁점은 협상 당사자가 누구냐와 협정에 무슨 내용을 담느냐는 문제였다. 북측은 휴전협정 당사자가 아니라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을 배제하면서 평화협정 당사자는 북한과 미국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회담 내용에 관해서도 주한미군 철수를 의제에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런 주장들은 한미 양국이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4자회담은 한미 양국과 북한의 시각차가 평행선을 긋고 중국은 미온적 자세로 일관한 탓에 2년 가깝게 입씨름만 하다가 결렬됐다.
4자회담은 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협상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지를 생생하게 증언했다. 당시 외교부를 출입하면서 4자회담의 전 과정을 취재했던 기자는 회담이 결렬된 이후 평화협정에 대한 순진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 4자회담의 성과라면 성과일 것이라는 칼럼을 썼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흐르면서 4자회담이 남긴 교훈은 점점 퇴색해 갔다.
2005년 6자회담을 통해 합의된 북핵 9·19공동성명은 ‘직접 관련된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갖는다’는 조항을 담았다. 한국이 주도적으로 마련한 이 조항은 평화협정을 통해 북핵 폐기를 촉진한다는 취지에서 추진됐으나, 일각에서는 북한이 핵 협상과 평화협정 협상을 연계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내놨다.
이후 6자회담이 결렬되고 북한의 2차 핵실험까지 진행된 현 시점에서 판단해 보면, 당시 한미(노무현·조지 W 부시 행정부)의 6자회담 협상팀은 비핵화 협상 과정에 평화협상이라는 난제를 하나 더 추가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됐다.
일각의 우려는 북한이 최근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를 상대로 평화협정 카드를 빼들면서 현실로 나타났다. 북한은 지난 1월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평화협정 협상을 6자회담 복귀 조건으로 공식화했다.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얼마 전 중국을 방문해 “비핵화 협상과 평화체제 협상을 병행한다면 6자회담에 복귀할 수 있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요구와 관련해 한미 양국은 공식적으로 “비핵화 진전이 있으면 별도의 포럼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한국 정부의 고위 당국자는 지난달 27일(미 현지시간) 워싱턴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비핵화 진전의 의미는 2008년 12월 (6자회담이 중단됐던) 상태보다 나아간 조치”라고 설명했다. 6자회담이 북핵 검증 단계에서 중단됐던 점을 고려하면, 북한의 핵 검증 조치만으로도 평화협정 협상이 시작될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지는 언급이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밝혔던 평화협상 조건보다 한층 완화된 입장이다. 부시 대통령은 2007년 9월 호주 시드니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 한미 정상회담 언론회동에서 “나의 목적은 평화협정을 통해 한국전쟁을 종결하는 것”이라면서 “그러러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그의 (핵)무기에 관해 ‘검증 가능하도록 폐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평화체제 조기 수립 요청에 응하면서도 평화협정 조건만큼은 ‘검증 가능한 북핵 폐기’로 분명히 못박았던 것이다.
지난해 말 스티븐 보즈워스 미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평양 방문과 최근 북중 고위급 인사들의 교차방문 등을 계기로 북핵 협상 재개 움직임이 가속화하는 분위기다.
한미 양국의 고위 당국자들 입에서도 6자회담 재개 가능성을 내비치는 언급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북한의 조건 없는 6자회담 복귀라면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6자회담 진전 징후가 북측의 평화협정 공세에 굴복한 결과라면 문제다. 4자회담이 증명했듯이, 평화협정 협상은 6자회담을 촉진하기는커녕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노림수에 휘둘리지 않는 한미 양국 정부의 전략적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송년모임이 잦은 연말을 맞아 미국 전역에서 대대적인 음주운전 단속이 펼쳐지고 있다.
경찰 당국은 지난달 추수감사절 연휴기간부터 내년 초까지를 음주운전 집중단속 기간으로 정해 교통순찰 활동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한인 식당가 주변 도로엔 위장 순찰차들이 곳곳에 잠복하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선 길을 막고 음주운전을 단속하는 체크 포인트까지 등장했다.
추수감사절 연휴부터 시작된 경찰의 집중단속은 연휴기간 교통사고 통계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미 연방 교통부 통계에 따르면, 추수감사절 하루 동안 교통사고 사망자는 1982년 이후 2008년까지 평균 567명으로 집계돼 미국의 주요 휴일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성탄절과 새해 첫날에도 각각 평균 414명, 410명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중에서도 음주 관련 사망자는 지난해 추수감사절 교통사고 사망자의 41%에 달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국은 몇년 전 부터 ‘음주운전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음주운전 행위에 대한 처벌 수위를 매년 높이고 있다. 뉴욕주 의회는 최근 16세 미만 어린이를 태운 음주운전자를 중범죄로 처벌하는 내용의 ‘린드라법’을 제정했다. 린드라법 제정은 지난 10월 사고 당시 11세이던 린드라 로사도가 엄마의 음주운전 탓에 숨진 이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법안에 따르면, 16세 미만 어린이를 태운 음주운전자는 중범죄로 기소돼 최고 4년의 징역형에 처해지며, 동승한 어린이가 음주사고로 숨지면 최고 25년형까지 선고될 수 있다.
하와이 호놀룰루 경찰국은 음주운전자의 사진을 찍어 웹사이트에 게재하는 방안을 시범실시하고 있다고 미 언론은 전했다. 하와이 경찰 당국이 일각의 인권 침해 논란을 무릅쓰면서 음주운전자를 공개 망신시키기로 결정한 것도 음주운전 피해를 줄여보자는 취지에서다. 캘리포니아주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를 중심으로 신년 초부터 음주운전 적발 운전자 차량에는 음주측정기를 의무적으로 부착하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뉴욕주는 2007년 10월부터 음주운전에 따른 인명사고 처벌 규정을 대폭 강화했다.
미국에선 단순 음주운전이라 하더라도 한국에 비해 엄청난 정신적, 물질적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기자가 거주하는 버지니아주의 경우, 음주운전(혈중 알콜농도 0.08% 이상)으로 적발되면 경찰차에 태워져 경찰서로 연행된다. 카운티 구치소에서 풀려나면 차량 보관소에 가서 300달러에 이르는 견인비용과 보관료를 물어야 차를 되찾을 수 있다.
재범일 경우엔 한 달 동안 차량이 압류된다. 하루 50∼60달러의 보관료는 차량 소유주 부담이다. 면허는 1년 동안 정지된다. 본격적인 제재는 이때부터다. 음주운전 형량은 최고 징역 1년 또는 벌금 2500달러 이하이다. 변호사 선임비로 1000∼2000달러가 들어간다. 음주운전 예방교육 이수 비용도 본인 부담이다. 재범이면 변호사 선임비와 교육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최소 96시간 수감생활을 해야 한다. 향후 보험사의 보험료 인상은 물론 재계약 거부 조치도 각오해야 한다. 면허정지 기간 대체 교통수단 이용에 따른 비용 부담과 정신적 고통 역시 음주운전자 몫이다. 음주운전으로 걸리면 최소 1만달러 안팎의 돈이 깨지는 셈이다.
전미고속도로안전협회에 따르면, 미 전역의 음주운전 관련 사망자는 2007년 1만3041명에서 2008년 1만1773명으로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매년 증가해온 음주운전 관련 사망자 수가 감소세로 돌아선 것은 10년 만에 처음이라고 협회는 밝혔다.
정부의 단호한 음주운전 단속 의지와 엄격한 처벌, 음주운전자에게 가해지는 엄청난 경제적 부담 등이 이 같은 감소세를 이끈 요인이라고 미 언론은 분석했다.
최근 한나라당 손숙미 의원이 발표한 경찰청 자료 분석 결과를 보면 한국의 음주운전 실태는 점차 심각해지는 양상이다. 2008년 한국의 교통사고 사망자 5870명 중 음주운전 관련 사망자는 969명으로 전체 16.5%에 달하며,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 중에 음주운전 관련 사망자 비율은 2006년 14.5%, 2007년 16.1%로 매년 증가세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음주운전 처벌은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미한 편이다. 자동차의 나라인 미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음주운전 처벌 강화 정책을 우리도 적극 검토해볼 시점이 됐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부부의 자식 교육열은 한국 부모들 못지않다.
오바마 부부는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자마자 두 딸 말리아(11)와 사샤(8)가 다닐 학교부터 물색했다. 아이들 엄마인 미셸 오바마는 퍼스트레이디 시절 딸 첼시를 초등학교에 보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부부의 초청을 받아 백악관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자식 교육 문제가 주요 화제였다. 워싱턴 DC 시장 등은 오바마 부부가 두 딸을 워싱턴 DC의 공립학교에 입학시키면 열악한 공교육 제도 개혁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으나 오바마 부부는 명문 사립인 시드웰 프렌즈 초등학교를 선택했다. 두 딸에게 더 나은 교육을 제공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시드웰 프렌즈 초등학교의 1년 학비는 3만달러에 육박한다. 오바마 부부가 대통령 취임에 앞서 백악관에 사전 입주하려 했던 것도 두 딸의 개학 시점에 맞춰 워싱턴으로 이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 방한 기간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한국에서는 찢어지게 가난한 학부모들조차도 자식들이 최고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매우 강하다”는 말을 들었다. 한국의 비약적인 성장 비결 중 하나가 한국민의 높은 교육열이라고 믿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이다. 수천개의 고등학교 중퇴율이 50%에 육박하는 미국 교육 현실 속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이 대통령의 ‘고민’이 내심 부러웠을 것이다. 그는 지난 23일 미국 학생들의 학업 능력 제고를 위한 ‘혁신을 위한 교육’ 캠페인을 주창하는 자리에서 이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하며 미국 학부모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그런 뒤 “교육 문제는 정부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학생과 학부모, 학교, 기업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중에서도 “교사의 역할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오바마의 공교육 개혁을 현장에서 추진하는 대표적 인물이 한국계인 미셸 리 워싱턴 DC 교육감이다. 그는 2007년 6월 미 전역에서 수 년째 학업 성취도 꼴찌를 면치 못했던 워싱턴 DC 교육감으로 임명돼 학업 성취도를 향상시키고 매년 감소 추세이던 관내 공립 초·중·고교 등록 학생 수를 35년 만에 증가세로 반전시켰다. 학생들의 성적을 끌어올리지 못한 교사와 무사안일한 자세로 학교를 운영해온 교장을 해고하는 파격적 조치를 동원해 교사들로부터 소송을 당하기도 했으나 굴복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법원은 최근 그의 손을 들어줬다.
리 교육감의 개혁 작업을 지켜보면서 기자는 ‘학교가 노력한다면, 공립학교도 사립학교와 같은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미국 교육 문제의 본질은 워싱턴 DC의 공립학교가 시드웰 프렌즈 초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학생들에게 제공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최근 미셸 리 교육감을 만나 인터뷰하는 도중, 그 의문을 던져봤다. 그러자 그는 “사립학교는 그들이 원하는 교사를 뽑고, 그러지 않은 교사를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으나 공립학교는 학생들을 위한 최고의 교사를 선택할 능력을 제한당하고 있다”면서 “우리가 사립학교와 같은 자율성을 확보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고 답변했다. 확신에 찬 어조였다. 덧붙여 사교육 의존도가 심한 한국의 교육 풍토와 관련해 “아이들의 성공 유무가 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좌우되는 사회는 민주 사회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부모의 인종과 소득 수준이 자녀들의 교육 불평등, 사회 양극화로 연결되는 미국 교육의 현실이나 부모의 사교육 능력 여하에 따라 자녀들의 학력 서열이 결정되는 한국 교육의 현실 모두 문제라는 것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한국 교육 예찬론은 자녀 교육에 헌신하는 한국 학부모들의 노력과 밤을 밝히며 책과 씨름하는 한국 학생들을 향한 부러움 섞인 찬사일 뿐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틈 날 때마다 교육 현장을 찾아 미국 공교육 개혁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학생들의 교육 환경이 좋아진다면 그 누구로부터도 욕 먹을 각오가 돼 있다”는 일념으로 뛰고 있는 미셸 리 교육감은 미 전역의 공교육 종사자들을 분발케 하고 있다.
미국 못지않은 문제점투성이의 한국 교육은 오바마 대통령의 칭찬에 안주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오바마 대통령의 교육 개혁 의지와 미셸 리 교육감의 개혁 노력에 주목해야 한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