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회사 버크셔 헤서웨이의 워런 버핏 회장은 첫번째 부인인 수잔과 1977년 사실상 별거 상태에 들어갔다. 수잔은 주식에 미친 버핏이 가정에 좀 더 충실하길 원했다고 최근 출간된 버핏의 자서전은 적고 있다. 그는 수잔과 별거하던 기간에 16살 연하의 아스트리드 멘크스와 살림을 차렸으나 수잔과 법적으로 이혼하지는 않았다. 버핏은 수잔이 암으로 숨질 때까지 법적 부부 상태를 유지했다. 버핏과 멘크스는 수잔이 2004년 암으로 숨진 뒤에야 결혼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추상표현주의 화가 윌리엄 드 쿠닝도 그의 부인이 1989년 죽을 때까지 34년 동안 이혼 수속을 밟지 않은 채 별거했다.

미국 사회에서 이혼 대신 별거를 선택하는 부부들이 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최근 보도했다. 버핏이나 쿠닝 같은 유명 인사들 만의 얘기는 아니다.

미 버지니아주에 살고있는 존 프로스트와 그의 아내는 25년 차 부부이나 애정이 식은 지 오래다. 두 부부 사이의 결혼 생활은 2000년 프로스트가 테네시주 녹스빌로 파견 발령을 받으면서 사실상 끝이 났다. 혼자 녹스빌로 떠난 프로스트는 이혼을 생각했으나 별거 생활이 지속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부부 모두 별거 생활에 익숙해졌고 함께 살 때 보다 더 잘 지내고 있다”면서 “당분간 이혼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건강보험이나 세금 문제에서도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말했다. 이혼 전문 변호사인 린 골드 비킨은 “이혼은 하지 않고 서로 친구 처럼 지내면서 각자 생활을 꾸려가는 별거 부부들이 도처에 있다”면서 “그들은 함께 살기를 원치 않을 뿐, 상대방에 대해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 부부들”이라고 말했다. 이혼 변호사인 실레스트 리버시지는 “이혼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그만 두고 별거하는 부부들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이런 별거 부부들이 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경제적 요인이다.

금융위기 와중에 집 값이 폭락하고 건강보험료 등이 치솟으면서 사이가 멀어진 부부들이 선뜻 이혼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배우자 일방이 경제적 능력을 갖지 못했을 경우, 이혼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이혼 보다 별거를 선택하는 부부들도 많다고 신문은 전했다.

배우자가 메디케어(노인 의료보험) 수혜 연령이 될 때까지 법적인 부부 관계를 유지하고 지병이 있는 배우자를 위해 자신의 보험을 이용할 수 있도록 이혼 대신 별거를 선택하는 식이다. 연방법에 따르면 부부가 결혼 생활을 10년 동안 유지하면 전 부인이나 전 남편도 배우자의 사회보장 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이혼 변호사들은 우호적 이혼 소송에서 해당 법정 기간을 채울 때까지 이혼 대신 별거를 하도록 당사자들에게 조언을 하고 있다.

하지만 생활은 따로 하면서 법적인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데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뉴욕주 처럼 별거 배우자에게도 재산 상속을 인정하는 주에서는 한 쪽 배우자가 숨진 뒤 재산 분쟁이 일어날 소지가 있다. 별거 중에 한 쪽 배우자가 외국으로 나가거나 실종됐을 때, 이혼 절차를 진행시키기 힘들다는 어려움도 있다. 혹시라도 복권에 당첨되면 별거 중인 상대 배우자와의 공동 재산으로 간주된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미국 정치권에 ‘여풍(女風)’이 거세게 불고 있다. 오는 11월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전례 없이 많은 여성 후보들이 미 연방 의회와 주 의회, 주지사 자리에 도전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민주, 공화 양당의 후보 경선 과정에서 남성 후보들을 누르고 선출돼 2010년 중간선거가 역대 최대의 여성 당선자를 배출하는 선거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이 유력한 대선 후보로 부상하고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가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발탁된 이래 미 정치권에서 여성의 영향력이 날로 커지고 있다. 미 정치권에 불어닥친 ‘여풍’의 실체와 그 배경을 진단해 본다.



◆2010년 미 중간선거, 여성 후보 약진=미국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는 여성의 정치권 진입이 힘든 주로 꼽힌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는 미 연방 상원(2석)과 하원(6석), 주 상원의원(46석)이 모두 남성으로 채워져 있다. 주지사와 검찰총장 등 고위 선출직에서도 여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 여성정치센터(CAWP)가 미 50개 주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성 정치 진입 평가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는 꼴찌를 차지했다. 바로 이런 곳에서 지난달 23일 정치적 지각 변동을 예고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공화당 주지사 후보 경선에서 주 하원의원인 인도계 여성이 4선 관록의 연방 하원의원 남성 후보를 압도적 표 차로 누르고 당선된 것이다. 이변의 주인공인 니키 헤일리가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꺾을 경우,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첫 여성 주지사가 된다. 미 언론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유리 천장’(여성 진입 장벽)이 깨졌다”면서 헤일리의 승리를 대서 특필했다.

◇칼리 피오리나(왼쪽)와 니키 헤일리.
헤일리처럼 여성 후보들이 ‘유리 천장’ 돌파에 나선 주는 캘리포니아 주와 뉴멕시코 주, 미네소타 주 등 8개 주에 이른다고 미 일간 USA 투데이가 집계했다. 이들 주는 지금껏 여성 주지사를 배출하지 못한 곳이다. 지난달 8일 실시된 캘리포니아 주 공화당 예비선거에서는 멕 휘트먼 전 이베이 CEO가 공화당 주지사 후보로 선출됐다. 뉴멕시코 주에서는 2002년 첫 여성 부지사로 당선됐던 민주당의 다이앤 데니시 후보가 주지사 선거에 도전장을 냈으며 공화당의 수전 마르티네스 후보도 여성이다. 메인 주 상·하원 의장을 동시에 지낸 최초의 여성 정치인인 엘리자베스 미첼 의원은 메인 주의 민주당 주지사 후보로 선출됐다.

미 연방 상·하원 예비선거전에서도 여성 후보들은 눈부신 활약상을 선보이고 있다.

칼리 피오리나 전 휴렛패커드 CEO는 캘리포니아 주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 경선에서 스탠퍼드·UC 버클리 교수 출신인 톰 캠벨 전 연방 하원의원을 상대로 기적 같은 역전승을 일궈냈다. 이로써 11월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 본선에서는 공화당의 피오리나 후보와 민주당의 바버라 복서 상원의원의 ‘여·여(女·女) 대결’이 펼쳐지게 됐다. 아칸소 주의 블랑슈 링컨 상원의원은 민주당 상원의원 후보 경선에서 아칸소 주 부주지사의 거센 도전을 물리치면서 여성 정치인 파워를 유감 없이 증명했다.

◆여성 이미지 탈색한 여성 후보=2010년 미 중간선거를 앞두고 불어닥친 ‘여풍’의 배경엔 역설적으로 ‘여성’이 없다. 지난달 8일 공화당 예비경선에서 각각 11월 중간선거 공화당 주지사와 상원의원 후보로 선출된 CEO 출신의 멕 휘트먼, 칼리 피오리나는 선거 기간 ‘여성’ 이미지 대신 ‘성공한 CEO’ 이미지로 승부했다. 휘트먼은 1998년 매출 400만 달러에 불과한 벤처 회사인 이베이를 연 매출 80억 달러(2008년 기준)의 회사로 키워내며 정보기술(IT) 업계의 성공 신화를 썼다. 피오리나 또한 휴렛패커드 CEO 재직 시절 ‘실리콘 밸리의 여제’라는 별칭을 얻었다. 

◇멕 휘트먼                        ◇바바라 복서
휘트먼은 유세 중에 여성이라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않았으며 남편이나 자식들을 대동하지 않은 채 주로 혼자 선거 운동을 전개했다고 미 언론은 전했다. 피오리나도 여성 후보로서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대신 강인한 정신력과 결단력을 지닌 후보라는 점을 유권자들에게 인식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휘트먼은 당선 연설을 통해 “워싱턴의 기성 정치인들은 일자리 창출 방법과 균형예산 집행 방법 등 문제 해결 능력을 지닌 ‘현실 세계’ 출신의 비즈니스 우먼들과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달 8일 민주, 공화 양당의 여성 후보 약진 결과를 보도하면서 “후보들의 성별은 더 이상 선거전의 쟁점이 되지 않고 있다”면서 “2010년 선거전에 나선 여성 후보들은 놀랄 만한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커 맘’이나 ‘하키 맘’을 외치며 여성 이미지를 강조하는 여성 후보들은 좀체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는 것이 미 언론의 진단이다.

◆2010년 선거는 ‘여성의 해’?=미국 여성정치센터에 따르면 올 6월 현재 미 연방 상원의원직에 도전한 여성 후보는 23명, 하원의원직 도전 후보는 216명, 주지사직 도전 후보는 23명으로 집계됐다. 이 같은 수치는 역대 선거의 여성 후보 숫자를 크게 상회하는 것이다. 현재 연방 상·하원 의원 중 여성은 각각 17명, 76명이다. 여성 주지사의 경우, 애리조나 주의 잰 브루어(공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베브 퍼듀(민주), 워싱턴 주의 크리스 그레고이어, 코네티컷 주의 조디 렐(공화), 미시간 주의 제니퍼 그랜홀름(민주), 하와이 주의 린다 링글(공화) 주지사 등이 현역이다. 올해에는 이들 외에도 캘리포니아 주 등 8개 주에서 여성 후보들이 선전하고 있다.

연방 상·하원의 여성 의원 수는 1917년 첫 여성 하원의원이, 1921년 첫 여성 상원의원이 배출된 이래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역대 최대의 여성 후보자가 뛰고 있는 올 중간선거에서는 미 의회의 여성 의원 수가 역대 최고치에 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바야흐로 미 정치권에 여성 시대가 개막되고 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한국전쟁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찰스 랑겔(민주·뉴욕·사진) 미 하원의원에게 한국전쟁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18세의 나이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랑겔 의원은 6월 10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미 의회 내 대표적 지한파 의원인 그는 지난해 ‘참전용사 인정 법안’을 대표 발의해 한국전 휴전일에 미 전역의 관공서에서 조기가 게양되도록 했고, 올해에는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내용의 결의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6·25전쟁 60주년 기념으로 유엔 참전 16개국 순회에 나선 리틀엔젤스 단원들의 워싱턴DC 공연을 계기로 의원회관 사무실과 공연이 열린 케네디센터에서 그를 만나 한국전쟁 얘기를 나눴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복합적이다. 함께 참전했다가 전사하거나 실종된 전우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다른 한편으로 수만 명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국이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로 발전한 모습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한국전쟁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사지에 놓였을 때 만약 살아 돌아간다면 그 은혜를 절대 잊지 않고 열심히 살겠다고 신에게 기도했다. (1950년 9월 ‘군우리 전투’) 당시 나는 수만명의 중공군들에게 포위돼 ‘이제 죽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기적같이 생환했다. 그러고 나는 그 기도를 지켰다. 전장에서 돌아와 참전용사 혜택을 받아 대학(뉴욕대)과 로 스쿨(세인트존스대)을 마칠 수 있었다. 졸업 후 변호사와 연방검사보를 거쳐 뉴욕주 하원의원과 연방 하원의원(20선)이 됐다. 한국전쟁에서 살아오지 못했다면 그 어느 것도 이뤄질 수 없는 일들이다. 한국전쟁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한국전쟁 당시 랑겔은 미 보병 2사단 포병대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50년 9월 군우리 전투에서 포탄의 파편으로 상처 속에서도 3일 동안 적군의 포위망을 뚫고 40여명의 전우를 이끌고 무사 귀환했다. 미군은 그의 용기를 기리기 위해 퍼플 훈장과 청동 성장, 종군 기념 청동 성장, 대통령 표창장을 수여했다. 한국 정부도 대통령 표창장을 수여했다)

                                                         <한국전 참전 당시의 랑겔. 그의 의원 사무실 벽에 걸려있다>

―한국전쟁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나 사건이 있는가.

“18살의 나이에 같은 또래 전우들과 한국으로 갔다. 함께 갔지만 같이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이 많다. 그들을 생각하면 고통스럽다. 생환한 이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떴다. 이런 나에게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찾아온 리틀엔젤스는 하나님이 보낸 특별한 선물이다. 감사의 뜻을 전하러 직접 찾아온 리틀엔젤스를 미국의 수도에서 환영하게 돼 자랑스럽다. 참전용사들을 명예롭게 한 리틀엔젤스에게 감사를 표하며 한미 양국에 신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원한다.”

  •  6·25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나라는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고 민주주의를 꽃피웠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 이제 국제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산업화와 함께 민주화에서도 상당한 진전을 이뤄 선진 민주사회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러나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일단락된 6·25전쟁은 여전히 많은 사람의 가슴에 응어리져 남아 있다. ‘민족 분단’의 비극으로 신음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남북 대치는 계속되고, 이산가족·국군포로·평화협정 등은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세계일보는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전쟁의 아픔과 남은 과제에 대해 3부로 나눠 살펴본다.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 중 하나인 ‘펀치볼 전투’의 용장에게 한국전은 현재진행형이었다. 그가 성공적인 인생을 설계할 수 있게 한 주요 자양분이었다. 미국 굴지의 로펌인 스텝토 & 존슨의 회장을 역임한 존 놀런(83) 변호사 얘기다. 워싱턴 DC 듀폰 서클 인근에 위치한 스텝토 & 존슨 로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한국전쟁의 의미를 물었다. 그는 참전 경험을 토대로 ‘펀치볼을 향한 진군(The Run―up to the PUNCH BOWL·사진)’을 저술했다.

     

  • ―한국전쟁은 어떻게 참전하게 됐나.

    제1해병사단 소속 보병 소총 소대장으로 난생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전쟁 발발 2년째인 1951년 4월이었다. 부산에 상륙한 우리는 계속 북쪽으로 진격했으나 그해 7월부터 동해안 인접 지역(강원도)에서 한국전쟁 최대 격전 중 하나인 펀치볼 전투가 전개됐다. 그때부터 전선은 교착됐고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의 대치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그해 12월 미국으로 돌아온 후 지금까지 한국은 다시 찾지 못했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을 다시 만났다. 그들의 용맹은 공포를 자아낼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한국전쟁은 어떤 의미가 있나.

    한국전쟁 참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특히 펀치볼 전투는 엄청난 사상자 숫자가 말해주듯, 매우 위험한 전투였다. 내가 속했던 제1해병사단에서만 51년 8월 한 달 동안 2500여명이 전사했다. 한 달 전사자로는 50년 12월 장진호 전투와 51년 6월 중공군 반격 전투에 이어 가장 많은 숫자였다.

    이 같은 전투에선 간발의 차이로 생사가 갈린다. 정찰 중에 바로 내 앞에 있던 동료 병사가 죽은 적도 있다. 그와 나의 위치가 바뀌었더라면 나는 죽고 그가 전쟁 체험기를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웅이 되거나 희생자가 되는 일도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러한 경험들을 겪게 되면 인간은 겸허해진다. 군복을 벗고 선택한 법률 공부도 매우 도전적인 일이었다. 힘들거나 좌절감이 몰려올 때 한국전쟁 당시의 경험을 떠올렸다. 그러면 지금 겪고 있는 어떤 곤란과 어려움도 그리 큰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펀치볼 전투에 대해서 말해 달라.

    펀치볼은 삼팔선 북쪽으로 20마일 정도 부근에 위치한 화산 분화구 지역으로서 험준한 능선으로 둘러싸여 이 능선을 장악하는 쪽이 전술적으로 매우 유리했다.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는 요충이었다.

    미국 제7해병대와 한국 해병대가 북한군과 고지 점령과 탈환을 반복하며 혈전을 치르는 동안 우리는 후방에서 대기하다가 8월 초 7해병대를 지원하기 위해 펀치볼로 이동했다.

    7해병대는 749고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대포와 박격포를 동원해 맹폭을 가했다. 그 후 며칠 동안 잠도 자지 못했고 먹을 수도 없었다. 고지 탈환을 위해 한 차례씩 공격을 감행할 때마다 전사자가 속출했다.

    북한군의 수류탄에 몸을 던져 동료를 살리고 전사한 전우 에드워드 고메즈를 잊을 수 없다. 그는 죽어서 영웅이 됐고, 생전의 소원대로 명예훈장을 받았다. 다음 날 먼동이 트기 전까지 그가 속했던 해병1사단 2대대원 중 16명이 함께 전사했고 109명이 부상했다.

  • ◇한국전쟁에 미 해병대 소위로 참전했던 존 놀런 변호사가 미 워싱턴 DC에 위치한 자신의 로펌 사무실에서 참전 경험과 소회를 밝히고 있다.

    ―군인에게 전쟁 체험은 어떤 느낌인가.

    한국전쟁 이후 전쟁과 관련된 책들을 읽어보기도 하고 베트남전쟁 지역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전혀 전쟁 체험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나의 전쟁 체험을 기록으로 남기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전쟁 중의 군인은 우주로부터 온전히 고립된 채 자기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 자체가 다르다. 순간을 살아가고 전투지역에만 고도로 집중하게 된다. 인간관계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전투가 한창이던 51년 여름, 미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한국전쟁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담긴 편지를 받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질문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소 웃기는 질문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군인에게 그의 질문은 다른 행성에서 전달된 메시지와 같았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과 북한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남북한을 어떻게 평가하나.

    1950년대엔 남북한 모두 논과 밭뿐이었다. 이후 한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며 동아시아의 등대와도 같은 존재가 됐다. 하지만 북한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다. 김정일 북한 정권은 주민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북한은 실패한 국가다.

    한국전쟁은 미국 독립전쟁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미국이 독립전쟁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웠듯이, 한국전쟁도 어떤 측면에서는 한국이 새로운 나라로 거듭나는 발판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글·사진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 존 놀런 변호사가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대 소위로 참전했던 '펀지볼 전투'는 현재의 휴전선을 결정한 한국전쟁 최대 격전 중 하나이다.

    강원도 동부전선 최전방에 위치했던 펀치볼 전투 지역은 화산 폭발에 따른 분지 지형으로서 가칠봉과 도솔산, 대암산 등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1951년 여름에서 가을 사이 40여일 동안 주인이 6번이나 바뀌는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펀치볼마을의 전경. 펀치볼마을의 지명은 6·25전쟁당시 외국의 종군기자가 가칠봉에서 내려다본 노을진 분지가 칵테일 유리잔 속의 술빛과 같고, 해안분지의 형상이 화채그릇(Punch Bowl)처럼 생겼다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  

    51년 봄 한국전에 투입됐던 놀런 변호사는 펀치볼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치러낸 펀치볼 전투의 산 증인이다. 그는 이 전투를 마친 뒤 본국으로 귀대했다.

    그로부터 50여년이 흐른 2006년, 놀런 변호사는 당시의 전투 경험을 ‘펀치볼을 향한 진군’이란 회고록에 담아냈다. 그는 집필 동기와 관련해 “펀치볼 전투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라면서 “세월이 흐른 뒤 당시 전투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본국의 가족들에게 정기적으로 보낸 편지 등을 토대로 펀치볼 전투를 일기체로 풀어냈다. 북한군에 대해서는 “중국군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죽을 때까지 진지를 고수하는 역할을 맡은 북한군들은 훈련은 덜 됐지만 전투에는 치열했다”면서 “이탈 병사를 총살하는 북한군 정치위원들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적었다.

    그가 소개한 미 해병대원들의 군기와 전우애는 수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이름도 생소한 ‘코리아’에서 어떤 심정으로 전투에 임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해병대원을 다른 젊은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요인은 바로 규율과 자신보다 남을 앞세우는 해병대 전통”이라면서 병사들이 먼저 치료받을 수 있도록 뒷줄에서 기다리다 전사한 장교의 사례를 소개했다.

    또 하나는 ‘그 어떤 해병도 뒤에 남기지 않는다’는 전통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부상자는 물론이고 전사자까지도 끝까지 챙기는 전통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하는 해병 정신을 만들어냈다고 놀런 변호사는 썼다.

    그는 “내가 소속된 베이커 중대는 탁월한 리더십 덕분에 최소의 희생으로 임무를 완수하곤 했다”면서 “다른 중대에서는 후방 배치를 원하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베이커 중대에선 아무도 떠나려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반정부성향 증오단체 전역서 ‘우후죽순’

    1995년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정부 청사 테러의 온상이 됐던 반정부 성향의 ‘증오 단체’들이 최근 미 전역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증오 단체는 무장조직인 ‘민병대’(militia)를 이끌고 반정부 투쟁을 기도하는 무장단체에서 총기 소지 옹호를 위한 합법적 조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우후죽순처럼 자라나 미국 사회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정부는 지난달 19일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청사 테러 사건 15주년을 맞아 증오 그룹에 대한 특단의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미국 내 증오 그룹의 실태를 추적해 본다.



    ◆증오 단체 급증= 235년 전인 1775년 4월19일, 자유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식민지인들은 민병대를 구성, 매사추세츠 주 렉싱턴에서 처음으로 영국에 맞서 총을 들었다. 그날 이후 4월19일은 반정부 민병대 운동가들의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민병대 운동에 동조한 티머시 맥베이가 1995년 폭탄이 적재된 트럭을 몰고 오클라호마 연방정부 청사로 돌진, 무려 168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날도 바로 이날이다.

    미 정부와 국민들이 오클라호마 테러 사건 15주년을 추도했던 지난달 19일, 미국 워싱턴 DC에서는 총기 소유권을 보장한 ‘수정헌법 2조’ 옹호 대회가 열렸다. 카키색 위장복에 총기를 휴대한 수천명의 총기 소유 옹호론자들은 ‘내셔널 몰’의 워싱턴 기념탑 인근에 모여 연방정부의 총기 규제 움직임을 성토했다.

    이날 대회는 주류 보수 진영에서도 기피하는 증오 단체 조직원들이 주도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이 애리조나주 보안관 출신으로 민병대 운동의 ‘대부’로 통하는 리처드 맥이다. 맥이 추종자들에게 보낸 “보안관이 주민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연방정부 공무원을 체포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영상 메시지는 증오 단체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이민에 반대하는 인종주의 성향의 증오단체는 히스패닉 이민자들의 증가가 미국 남서부를 재탈환하려는 멕시코 정부의 전략이라는 음모론을 믿고 있다.

    최근 결성된 증오 단체 ‘오스 키퍼’는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고 전체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연방정부로부터 미국 헌법을 지켜낸다는 강령을 신봉하고 있다. 일부 증오 단체는 9·11 테러를 미 연방정부의 자작극으로 믿고 있다.

    미국 내 증오 단체 동향을 추적 중인 비영리 인권 단체 ‘서던 파버티 로 센터’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증오 그룹이 2000년 602개에서 2009년 926개로 급증했다고 밝혔다. 민병대 조직을 갖춘 ‘애국주의 단체’는 2008년 149개에서 2009년 512개로 배 이상 늘었다. 빌 클린턴 정부 시절 미 전역에서 발호했던 증오 단체들이 오클라호마 테러 사건에 따른 여론의 냉대와 정부의 대대적인 단속, 보수적인 부시 행정부 출범 등의 요인으로 힘을 잃었다가 소생하고 있는 양상이다.

    ◆흑인 대통령 탄생이 기폭제= 서던 파버티 로 센터는 증오 단체 증가 배경과 관련해 “미국 내 소수 인종의 증가와 정부 부채 증가, 경제침체, 구제금융, 오바마 정부의 큰 정부 정책 등에 대한 분노가 증오 단체들의 태동에 기여하고 있다”면서 “특히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탄생은 증오 단체 증가의 기폭제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증오 단체들이 처음으로 미국의 관심사로 대두됐던 1990년대만 해도 이들의 공격 대상은 연방정부였다. 극우 민병대 조직인 ‘브랜치 다비디안’은 1993년 클린턴 정부의 총기 규제와 환경 규제 정책에 반감을 품고 대 정부 투쟁에 나섰다가 조직원 76명이 텍사스 와코에서 몰살됐다.

    하지만 최근 생겨나는 증오 단체들은 연방정부와 함께 흑인과 히스패닉 이민자 등을 공격 대상으로 선정하는 인종 증오 양상을 띠고 있다.

    증오 단체 전문가인 래리 켈러는 “보수 진영의 정치인이나 보수 언론도 증오 단체를 부추기고 있으며, 인터넷 등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도 증오 단체 확산의 요인이 되고 있다.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에는 민병대 캠프를 소개하는 영상 등이 공공연히 유포되면서 새로운 조직원을 유혹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 국토안보국은 지난해 펴낸 보고서에서 “지난 2년 동안 50개가 넘는 민병대 조직이 새로 태동했으며, 90년대 중반처럼 총기 규제를 우려한 총기와 탄약 사재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서던 파버티 로 센터의 마크 포톡 정보담당국장은 “현 상황은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청사 테러 직전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면서 “제2의 오클라호마시티 테러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1995년 168명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를 당한 미 오클라호마 연방정부 청사(왼쪽)와 지난 2월 소형항공기 충돌로 화염에 휩싸인 텍사스주 오스틴 연방 국세청 건물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증오 범죄 기승 =미 연방수사국(FBI)은 지난 3월 말 대 정부 무장투쟁을 기도한 혐의로 기독교계 민병대 ‘후타리’ 대원 9명을 체포했다. 미시간주를 근거지로 한 이들 민병대원은 자신들을 연방정부의 음모에 맞서 최후의 전쟁을 벌이는 기독교 전사로 믿고 연방정부의 하수인인 경찰을 무차별적으로 사살한 뒤 이를 계기로 미 전역의 민병대원들과 함께 무장 투쟁을 전개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앞서 3월 초에는 연방정부에 적대감을 품은 30대 남성이 미국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 입구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사살됐으며, 그 전달에는 정부에 반감을 지닌 50대 남성이 소형 항공기를 몰고 텍사스주 오스틴 소재 연방 국세청 건물로 돌진해 자폭한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6월에는 반유대주의자인 80대 남성이 워싱턴DC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경비원을 사살했다. 같은 해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는 반유태인 증오 단체 조직원이 오바마 정부의 총기 몰수 정책을 중단시킨다는 명분으로 경찰관 3명을 살해했고,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는 인종주의 증오단체 조직원이 아프리카 이민자 2명을 살해했다.

    오바마 정부 출범 직후에는 흑인 대통령 당선에 분노한 백인우월주의자가 방사능 물질을 이용해 ‘더러운 폭탄’(dirty bomb)을 제조하다가 체포됐다.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태동된 ‘티 파티 운동’에도 증오 단체 조직원들이 일부 가담하고 있는 것으로 미 정부는 파악하고 있다. 


    미국 증오 단체 전문가들은 본지와의 이메일 인터뷰와 언론 기고 등을 통해 제2의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정부 청사 테러를 막기 위한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의 현명한 대응을 권고했다.



    미국 내 증오 단체 역사를 다룬 저서 ‘공포의 집단’을 저술한 데이비드 버넷 시러큐스대 교수(역사학·사진)는 “2010년의 미국은 실업률이 10%에 육박, 수백만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미국이 쇠락해가고 있는 두려움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흑인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당 정부는 건강보험과 환경, 에너지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극우 과격파 그룹이 발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또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 일상화하면서 미국 내에서 무장 테러를 자행하려는 단체에 대한 미국민들의 인내심도 과거보다 약해졌다”고 밝혔다.

    로버트 처칠 하트퍼드 대학 교수(역사학)는 “지난 3월 말 적발된 민병대 조직 ‘후타리’가 전형적인 증오 단체라면 정부가 증오 그룹에 대한 일망타진에 나서야 할 때이나 여기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서 “93년 텍사스 민병대 ‘브랜치 다비디안’ 조직원 집단 사망 사건에서 예시됐듯이 정부의 탄압책은 뜻하지 않는 비극을 낳을 수 있고, 이를 계기로 폭력과 보복이 반복되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는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1992년 백인우월주의자인 루디 리지 가족이 연방수사국(FBI) 요원에 의해 사살된 사건을 소재로 소설을 쓴 제스 월터는 “우파 극단주의자들의 부활은 경제적 고통과 정치인들의 선동적인 언사, 미 중산층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는 절박감 등이 어우러진 결과”라면서 “정치인들은 자극적인 발언을 삼가하고 폭력적인 극단주의 그룹들과 거리를 둬야 한다”고 촉구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최근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