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나라는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고 민주주의를 꽃피웠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 이제 국제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산업화와 함께 민주화에서도 상당한 진전을 이뤄 선진 민주사회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러나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일단락된 6·25전쟁은 여전히 많은 사람의 가슴에 응어리져 남아 있다. ‘민족 분단’의 비극으로 신음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남북 대치는 계속되고, 이산가족·국군포로·평화협정 등은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세계일보는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전쟁의 아픔과 남은 과제에 대해 3부로 나눠 살펴본다.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 중 하나인 ‘펀치볼 전투’의 용장에게 한국전은 현재진행형이었다. 그가 성공적인 인생을 설계할 수 있게 한 주요 자양분이었다. 미국 굴지의 로펌인 스텝토 & 존슨의 회장을 역임한 존 놀런(83) 변호사 얘기다. 워싱턴 DC 듀폰 서클 인근에 위치한 스텝토 & 존슨 로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한국전쟁의 의미를 물었다. 그는 참전 경험을 토대로 ‘펀치볼을 향한 진군(The Run―up to the PUNCH BOWL·사진)’을 저술했다.

     

  • ―한국전쟁은 어떻게 참전하게 됐나.

    제1해병사단 소속 보병 소총 소대장으로 난생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전쟁 발발 2년째인 1951년 4월이었다. 부산에 상륙한 우리는 계속 북쪽으로 진격했으나 그해 7월부터 동해안 인접 지역(강원도)에서 한국전쟁 최대 격전 중 하나인 펀치볼 전투가 전개됐다. 그때부터 전선은 교착됐고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의 대치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그해 12월 미국으로 돌아온 후 지금까지 한국은 다시 찾지 못했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을 다시 만났다. 그들의 용맹은 공포를 자아낼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한국전쟁은 어떤 의미가 있나.

    한국전쟁 참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특히 펀치볼 전투는 엄청난 사상자 숫자가 말해주듯, 매우 위험한 전투였다. 내가 속했던 제1해병사단에서만 51년 8월 한 달 동안 2500여명이 전사했다. 한 달 전사자로는 50년 12월 장진호 전투와 51년 6월 중공군 반격 전투에 이어 가장 많은 숫자였다.

    이 같은 전투에선 간발의 차이로 생사가 갈린다. 정찰 중에 바로 내 앞에 있던 동료 병사가 죽은 적도 있다. 그와 나의 위치가 바뀌었더라면 나는 죽고 그가 전쟁 체험기를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웅이 되거나 희생자가 되는 일도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러한 경험들을 겪게 되면 인간은 겸허해진다. 군복을 벗고 선택한 법률 공부도 매우 도전적인 일이었다. 힘들거나 좌절감이 몰려올 때 한국전쟁 당시의 경험을 떠올렸다. 그러면 지금 겪고 있는 어떤 곤란과 어려움도 그리 큰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펀치볼 전투에 대해서 말해 달라.

    펀치볼은 삼팔선 북쪽으로 20마일 정도 부근에 위치한 화산 분화구 지역으로서 험준한 능선으로 둘러싸여 이 능선을 장악하는 쪽이 전술적으로 매우 유리했다.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는 요충이었다.

    미국 제7해병대와 한국 해병대가 북한군과 고지 점령과 탈환을 반복하며 혈전을 치르는 동안 우리는 후방에서 대기하다가 8월 초 7해병대를 지원하기 위해 펀치볼로 이동했다.

    7해병대는 749고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대포와 박격포를 동원해 맹폭을 가했다. 그 후 며칠 동안 잠도 자지 못했고 먹을 수도 없었다. 고지 탈환을 위해 한 차례씩 공격을 감행할 때마다 전사자가 속출했다.

    북한군의 수류탄에 몸을 던져 동료를 살리고 전사한 전우 에드워드 고메즈를 잊을 수 없다. 그는 죽어서 영웅이 됐고, 생전의 소원대로 명예훈장을 받았다. 다음 날 먼동이 트기 전까지 그가 속했던 해병1사단 2대대원 중 16명이 함께 전사했고 109명이 부상했다.

  • ◇한국전쟁에 미 해병대 소위로 참전했던 존 놀런 변호사가 미 워싱턴 DC에 위치한 자신의 로펌 사무실에서 참전 경험과 소회를 밝히고 있다.

    ―군인에게 전쟁 체험은 어떤 느낌인가.

    한국전쟁 이후 전쟁과 관련된 책들을 읽어보기도 하고 베트남전쟁 지역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전혀 전쟁 체험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나의 전쟁 체험을 기록으로 남기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전쟁 중의 군인은 우주로부터 온전히 고립된 채 자기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 자체가 다르다. 순간을 살아가고 전투지역에만 고도로 집중하게 된다. 인간관계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전투가 한창이던 51년 여름, 미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한국전쟁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담긴 편지를 받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질문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소 웃기는 질문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군인에게 그의 질문은 다른 행성에서 전달된 메시지와 같았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과 북한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남북한을 어떻게 평가하나.

    1950년대엔 남북한 모두 논과 밭뿐이었다. 이후 한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며 동아시아의 등대와도 같은 존재가 됐다. 하지만 북한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다. 김정일 북한 정권은 주민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북한은 실패한 국가다.

    한국전쟁은 미국 독립전쟁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미국이 독립전쟁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웠듯이, 한국전쟁도 어떤 측면에서는 한국이 새로운 나라로 거듭나는 발판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글·사진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 존 놀런 변호사가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대 소위로 참전했던 '펀지볼 전투'는 현재의 휴전선을 결정한 한국전쟁 최대 격전 중 하나이다.

    강원도 동부전선 최전방에 위치했던 펀치볼 전투 지역은 화산 폭발에 따른 분지 지형으로서 가칠봉과 도솔산, 대암산 등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1951년 여름에서 가을 사이 40여일 동안 주인이 6번이나 바뀌는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펀치볼마을의 전경. 펀치볼마을의 지명은 6·25전쟁당시 외국의 종군기자가 가칠봉에서 내려다본 노을진 분지가 칵테일 유리잔 속의 술빛과 같고, 해안분지의 형상이 화채그릇(Punch Bowl)처럼 생겼다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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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년 봄 한국전에 투입됐던 놀런 변호사는 펀치볼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치러낸 펀치볼 전투의 산 증인이다. 그는 이 전투를 마친 뒤 본국으로 귀대했다.

    그로부터 50여년이 흐른 2006년, 놀런 변호사는 당시의 전투 경험을 ‘펀치볼을 향한 진군’이란 회고록에 담아냈다. 그는 집필 동기와 관련해 “펀치볼 전투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라면서 “세월이 흐른 뒤 당시 전투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본국의 가족들에게 정기적으로 보낸 편지 등을 토대로 펀치볼 전투를 일기체로 풀어냈다. 북한군에 대해서는 “중국군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죽을 때까지 진지를 고수하는 역할을 맡은 북한군들은 훈련은 덜 됐지만 전투에는 치열했다”면서 “이탈 병사를 총살하는 북한군 정치위원들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적었다.

    그가 소개한 미 해병대원들의 군기와 전우애는 수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이름도 생소한 ‘코리아’에서 어떤 심정으로 전투에 임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해병대원을 다른 젊은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요인은 바로 규율과 자신보다 남을 앞세우는 해병대 전통”이라면서 병사들이 먼저 치료받을 수 있도록 뒷줄에서 기다리다 전사한 장교의 사례를 소개했다.

    또 하나는 ‘그 어떤 해병도 뒤에 남기지 않는다’는 전통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부상자는 물론이고 전사자까지도 끝까지 챙기는 전통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하는 해병 정신을 만들어냈다고 놀런 변호사는 썼다.

    그는 “내가 소속된 베이커 중대는 탁월한 리더십 덕분에 최소의 희생으로 임무를 완수하곤 했다”면서 “다른 중대에서는 후방 배치를 원하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베이커 중대에선 아무도 떠나려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반정부성향 증오단체 전역서 ‘우후죽순’

    1995년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정부 청사 테러의 온상이 됐던 반정부 성향의 ‘증오 단체’들이 최근 미 전역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증오 단체는 무장조직인 ‘민병대’(militia)를 이끌고 반정부 투쟁을 기도하는 무장단체에서 총기 소지 옹호를 위한 합법적 조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우후죽순처럼 자라나 미국 사회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정부는 지난달 19일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청사 테러 사건 15주년을 맞아 증오 그룹에 대한 특단의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미국 내 증오 그룹의 실태를 추적해 본다.



    ◆증오 단체 급증= 235년 전인 1775년 4월19일, 자유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식민지인들은 민병대를 구성, 매사추세츠 주 렉싱턴에서 처음으로 영국에 맞서 총을 들었다. 그날 이후 4월19일은 반정부 민병대 운동가들의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민병대 운동에 동조한 티머시 맥베이가 1995년 폭탄이 적재된 트럭을 몰고 오클라호마 연방정부 청사로 돌진, 무려 168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날도 바로 이날이다.

    미 정부와 국민들이 오클라호마 테러 사건 15주년을 추도했던 지난달 19일, 미국 워싱턴 DC에서는 총기 소유권을 보장한 ‘수정헌법 2조’ 옹호 대회가 열렸다. 카키색 위장복에 총기를 휴대한 수천명의 총기 소유 옹호론자들은 ‘내셔널 몰’의 워싱턴 기념탑 인근에 모여 연방정부의 총기 규제 움직임을 성토했다.

    이날 대회는 주류 보수 진영에서도 기피하는 증오 단체 조직원들이 주도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이 애리조나주 보안관 출신으로 민병대 운동의 ‘대부’로 통하는 리처드 맥이다. 맥이 추종자들에게 보낸 “보안관이 주민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연방정부 공무원을 체포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영상 메시지는 증오 단체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이민에 반대하는 인종주의 성향의 증오단체는 히스패닉 이민자들의 증가가 미국 남서부를 재탈환하려는 멕시코 정부의 전략이라는 음모론을 믿고 있다.

    최근 결성된 증오 단체 ‘오스 키퍼’는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고 전체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연방정부로부터 미국 헌법을 지켜낸다는 강령을 신봉하고 있다. 일부 증오 단체는 9·11 테러를 미 연방정부의 자작극으로 믿고 있다.

    미국 내 증오 단체 동향을 추적 중인 비영리 인권 단체 ‘서던 파버티 로 센터’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증오 그룹이 2000년 602개에서 2009년 926개로 급증했다고 밝혔다. 민병대 조직을 갖춘 ‘애국주의 단체’는 2008년 149개에서 2009년 512개로 배 이상 늘었다. 빌 클린턴 정부 시절 미 전역에서 발호했던 증오 단체들이 오클라호마 테러 사건에 따른 여론의 냉대와 정부의 대대적인 단속, 보수적인 부시 행정부 출범 등의 요인으로 힘을 잃었다가 소생하고 있는 양상이다.

    ◆흑인 대통령 탄생이 기폭제= 서던 파버티 로 센터는 증오 단체 증가 배경과 관련해 “미국 내 소수 인종의 증가와 정부 부채 증가, 경제침체, 구제금융, 오바마 정부의 큰 정부 정책 등에 대한 분노가 증오 단체들의 태동에 기여하고 있다”면서 “특히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탄생은 증오 단체 증가의 기폭제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증오 단체들이 처음으로 미국의 관심사로 대두됐던 1990년대만 해도 이들의 공격 대상은 연방정부였다. 극우 민병대 조직인 ‘브랜치 다비디안’은 1993년 클린턴 정부의 총기 규제와 환경 규제 정책에 반감을 품고 대 정부 투쟁에 나섰다가 조직원 76명이 텍사스 와코에서 몰살됐다.

    하지만 최근 생겨나는 증오 단체들은 연방정부와 함께 흑인과 히스패닉 이민자 등을 공격 대상으로 선정하는 인종 증오 양상을 띠고 있다.

    증오 단체 전문가인 래리 켈러는 “보수 진영의 정치인이나 보수 언론도 증오 단체를 부추기고 있으며, 인터넷 등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도 증오 단체 확산의 요인이 되고 있다.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에는 민병대 캠프를 소개하는 영상 등이 공공연히 유포되면서 새로운 조직원을 유혹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 국토안보국은 지난해 펴낸 보고서에서 “지난 2년 동안 50개가 넘는 민병대 조직이 새로 태동했으며, 90년대 중반처럼 총기 규제를 우려한 총기와 탄약 사재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서던 파버티 로 센터의 마크 포톡 정보담당국장은 “현 상황은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청사 테러 직전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면서 “제2의 오클라호마시티 테러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1995년 168명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를 당한 미 오클라호마 연방정부 청사(왼쪽)와 지난 2월 소형항공기 충돌로 화염에 휩싸인 텍사스주 오스틴 연방 국세청 건물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증오 범죄 기승 =미 연방수사국(FBI)은 지난 3월 말 대 정부 무장투쟁을 기도한 혐의로 기독교계 민병대 ‘후타리’ 대원 9명을 체포했다. 미시간주를 근거지로 한 이들 민병대원은 자신들을 연방정부의 음모에 맞서 최후의 전쟁을 벌이는 기독교 전사로 믿고 연방정부의 하수인인 경찰을 무차별적으로 사살한 뒤 이를 계기로 미 전역의 민병대원들과 함께 무장 투쟁을 전개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앞서 3월 초에는 연방정부에 적대감을 품은 30대 남성이 미국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 입구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사살됐으며, 그 전달에는 정부에 반감을 지닌 50대 남성이 소형 항공기를 몰고 텍사스주 오스틴 소재 연방 국세청 건물로 돌진해 자폭한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6월에는 반유대주의자인 80대 남성이 워싱턴DC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경비원을 사살했다. 같은 해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는 반유태인 증오 단체 조직원이 오바마 정부의 총기 몰수 정책을 중단시킨다는 명분으로 경찰관 3명을 살해했고,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는 인종주의 증오단체 조직원이 아프리카 이민자 2명을 살해했다.

    오바마 정부 출범 직후에는 흑인 대통령 당선에 분노한 백인우월주의자가 방사능 물질을 이용해 ‘더러운 폭탄’(dirty bomb)을 제조하다가 체포됐다.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태동된 ‘티 파티 운동’에도 증오 단체 조직원들이 일부 가담하고 있는 것으로 미 정부는 파악하고 있다. 


    미국 증오 단체 전문가들은 본지와의 이메일 인터뷰와 언론 기고 등을 통해 제2의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정부 청사 테러를 막기 위한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의 현명한 대응을 권고했다.



    미국 내 증오 단체 역사를 다룬 저서 ‘공포의 집단’을 저술한 데이비드 버넷 시러큐스대 교수(역사학·사진)는 “2010년의 미국은 실업률이 10%에 육박, 수백만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미국이 쇠락해가고 있는 두려움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흑인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당 정부는 건강보험과 환경, 에너지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극우 과격파 그룹이 발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또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 일상화하면서 미국 내에서 무장 테러를 자행하려는 단체에 대한 미국민들의 인내심도 과거보다 약해졌다”고 밝혔다.

    로버트 처칠 하트퍼드 대학 교수(역사학)는 “지난 3월 말 적발된 민병대 조직 ‘후타리’가 전형적인 증오 단체라면 정부가 증오 그룹에 대한 일망타진에 나서야 할 때이나 여기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서 “93년 텍사스 민병대 ‘브랜치 다비디안’ 조직원 집단 사망 사건에서 예시됐듯이 정부의 탄압책은 뜻하지 않는 비극을 낳을 수 있고, 이를 계기로 폭력과 보복이 반복되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는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1992년 백인우월주의자인 루디 리지 가족이 연방수사국(FBI) 요원에 의해 사살된 사건을 소재로 소설을 쓴 제스 월터는 “우파 극단주의자들의 부활은 경제적 고통과 정치인들의 선동적인 언사, 미 중산층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는 절박감 등이 어우러진 결과”라면서 “정치인들은 자극적인 발언을 삼가하고 폭력적인 극단주의 그룹들과 거리를 둬야 한다”고 촉구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최근 기자는 미국 워싱턴 취재 현장에서 한국의 높아진 위상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첫번째 현장은 지난달 23일 워싱턴
    DC에서 개최됐던 G20(주요 20개국)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였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공동의장 자격으로 주재한 이번 회의에서 한국은 G20 국가의 이해를 수렴한 공동 코뮈니케(성명서) 작성을 주도했다. 실무작업을 총괄했던 신재윤 재정부 차관보는 “국제회의에서 받아쓰기만 하다가 직접 쓰려니 힘들었다”고 농담 조로 얘기했지만, 한국은 이번 회의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쿼터 재조정 시기를 앞당기자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등 오는 11월 G20 서울 정상회의 개최국으로서의 리더십을 십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참석자들 스스로도 과거와는 달라진 국제사회의 ‘한국 대접’에 격세지감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윤증현 장관은 지난달 24일 워싱턴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여간해선 양자 면담에 응하지 않는 티머시 가이트너 미 재무장관과의 면담 장소에 갔더니 성조기와 태극기를 걸어놔 매우 흐뭇했다”며 “국민이 이룬 국력의 바탕 위에서 G20 재무장관 회의를 주재하는 뜻깊은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를 개최했던 네덜란드가 G20 서울 정상회의에 게스트로 초청해 줄 것을 한국에 요청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이 됐다.
    당시 고종의 특사자격으로 일제의 침략성을 폭로하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을 찾았던 이준 열사가 열강들의 냉대 끝에 분사(憤死)한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인이라면 윤 장관의 심경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전날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도 “과거엔 선진국들이 규칙을 정할 때 우리 의견을 묻지도 않았지만 이젠 선진국들이 규칙을 정할 때 우리에게 먼저 물어본다”면서 “세계가 한국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몇 년 전만 해도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과의 면담 일정을 잡기 위해 100번 넘게
    메일을 보내며 통사정을 하고도 10분밖에 시간을 얻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메일 몇 번으로 김중수 총재와의 면담이 성사됐다”는 후일담을 전했다.

     두번째 현장은 한국전력이 지난달 21∼22일 워싱턴 DC에서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를 상대로 개최했던 한국형 원자력발전(APR1400) 설계인증 설명회였다. APR1400은 우리가 아랍에미리트(UAE)에 수출한 바로 그 모델이다.

     한국전력 연구원 등으로 구성된 원전 설계전문가 20여명은 설명회에서 미 원자력 인허가 기관인 NRC에서 우리나라 수출형 원전인 APR1400의 설계 특성을 설명하고 설계인증을 위한 향후 추진 일정을 제시했다. 한국 원전사의 산증인인 정근모 한국전력 고문은 지난달 22일 워싱턴 근교 식당에서 기자와 만나 “미국은 설계인증 신청을 3년 전부터 받기 시작했다”면서 “미국이 심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 자체가 큰 의미”라고 말했다.

     NRC의 사전심사 과정을 통과한 업체는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GE, 프랑스 아레바, 일본 미쓰비시 등 4개 업체에 불과하다. 한국이 이들 원전 선진국 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으로 도약한 것이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NRC의 설계인증 획득은 UAE 원전 수주에 이은 한국 원전사의 쾌거로 기록될 것이다. 아울러 한국형 원전의 해외 진출을 촉진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이날 저녁 기자는 정 고문과 그에게서 바통을 넘겨받은 신진 연구원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해냈다”는 자긍심을 읽을 수 있었다. 서울대 핵 물리학과 72학번인 황순택을 비롯해 연구원들 대부분은 미국 유수 대학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하고 다시 국내로 돌아와 한국 원전 개발에 청춘을 바친 애국자들이었다.


     기자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만하지 말고 더 실력을 키우라”는 조언은 사족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스스로가 “열등생반에 있다가 우등생반 반장을 맡은 처지여서 내공이 부족하다는 점을 절실하게 느낀다”(지경부 관리), “통역 없이 NRC 전문가들에게 우리 기술을 이해시켜야 하는 점에서 다소 힘에 부친다”(한전 연구원)는 겸손한 자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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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올해로 지구상에 ‘핵무기 시대’가 개막된 지 65년이 됐다. 

     미국이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투하함으로써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 낸 이래 핵무기는 2차 대전 이후 확고한 전쟁 억지 수단으로 인식돼 왔다. 핵무기의 가공할 만한 위력은 역설적으로 냉전 시대 핵 보유국들 간의 전쟁을 막아낸 일등공신이 됐다.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를 경쟁하듯 양산한 것은 상대의 선제공격을 받은 이후에도 상대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충분한 핵무기가 있다는
    공포감을 안겨주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공포의 균형’에 바탕한 ‘핵 억지력(nuclear deterrence)’이 가동된 셈이다. 이는 냉전 시대 미국 등 주요 핵보유국의 핵심 안보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4월
    체코 프라하에서 선포한 ‘핵 없는 세상’ 구상은 냉전 시대의 핵 억지 전략에 근본적 수정을 가하겠다는 선언이다. 핵 기술 이전이 용이해진 시대에 핵 보유국 중심의 핵 억지 전략은 더 이상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유효한 전략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미 시사잡지인 ‘더 네이션’은 ‘핵무기 제로로 가는 길’이라는 제하의 지난 1일자 기사에서 핵 억지 전략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버나드 브로디 박사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같은 이들도 냉전 시대의 핵 억지 전략에 회의를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오바마 정부 들어 진행된 미국 조야의 핵 정책 관련 논의 추이는 미국의 핵 정책이 궤도 수정에 착수했음을 보여준다.


     올 4월은 미국 핵 정책 전환이 여러 국면에서 가시화하는 달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1년 동안 공을 들인 미·러 전략무기감축협정(
    START-1) 후속 협정을 타결짓고 오는 8일 프라하를 다시 찾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START-1 후속 협정에 조인한다. 

     

                                                   2010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만난 오바마와 메드베데프.

     오는 12일에는 중국을 비롯한 5개 공식 핵무기 보유국과 인도 등 비공식 핵보유국 등 전 세계 40여개국 정상들을 워싱턴 DC로 불러 북한·이란 핵 개발을 포함한 핵 비확산 대책을 논의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이번 주 발표할 ‘핵 태세 검토’ 보고서(NPR)를 통해 전임 정부와 차별되는 핵 정책 기조를 밝힐 예정이다.

     오바마 정부의 핵 정책 기조 변경은 미국의 ‘핵 우산’ 속에 포함된 한국의 안보 환경과 직결돼 있다. 특히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은 오바마 정부가 이번 NPR를 통해 ‘선제 핵공격 포기’ 정책(NFU·No First Use)을 도입하느냐의 여부다. 

     미국의 진보진영에서는 START-1 후속 협정을 통해 미·러 양국이 전략 핵무기 보유 상한을 1550기로 제한한 협정 내용을 평가절하하고 있는 분위기다. “보유 상한을 1550기로 정한 것은 핵무기를 1550기까지 보유할 수 있다는 의미”(조너선 셸 예일대 교수)라는 식의 비판들이다. 이들은 오히려 미국이 “어느 나라든 미국이 핵무기로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진정한 핵 감축, 비확산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오바마 정부의 NFU 정책 채택을 압박하고 있다.

     
    그 반대 편에선 미국의 NFU 선언이 현실적으로 북한, 이란 등 핵확산금지조약(NPT) 바깥에서 핵무기 개발에 나선 ‘
    불량국가’들과 핵무기 획득을 노리는 테러집단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반박 논리를 펴고 있다. 또한 NFU 선언은 핵 비보유국이 생화학 무기로 군사공격이나 테러를 감행했을 경우, 미국은 재래식 무기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치명적 결함을 지니고 있다고 NFU 반대파는 주장한다.


     다행히 오바마 정부는 NFU 정책의 채택 여부와 관계없이 북한, 이란 등과 같은 ‘불량 국가’들에 대해서는 기존의 핵 정책을 완화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1일 이명박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지난해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확장된 핵 억지력 제공’을 재확인한 것도 같은 맥락의 언급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핵 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오바마 정부는 이번 NPR에서 핵 무기 사용 범위와 조건 등에 관한 기조 변경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변화된 미국의 핵 정책 하에서 미국의 대북한 억지력이 약화되지 않도록 우리 정부의 주도면밀한 대응이 요망되는 시점이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위한 4자회담(남·북한, 미국, 중국)은 1997년 12월 시작돼 1999년 8월 6차 회담까지 이어졌다.

     당시 평화체제 협상의 핵심 쟁점은 협상 당사자가 누구냐와 협정에 무슨 내용을 담느냐는 문제였다. 북측은 휴전협정 당사자가 아니라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을 배제하면서 평화협정 당사자는 북한과 미국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회담 내용에 관해서도 주한미군 철수를 의제에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런 주장들은 한미 양국이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4자회담은 한미 양국과 북한의 시각차가 평행선을 긋고 중국은 미온적 자세로 일관한 탓에 2년 가깝게 입씨름만 하다가 결렬됐다.

     4자회담은 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협상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지를 생생하게 증언했다. 당시 외교부를 출입하면서 4자회담의 전 과정을 취재했던 기자는 회담이 결렬된 이후 평화협정에 대한 순진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 4자회담의 성과라면 성과일 것이라는 칼럼을 썼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흐르면서 4자회담이 남긴 교훈은 점점 퇴색해 갔다.

     2005년 6자회담을 통해 합의된 북핵 9·19공동성명은 ‘직접 관련된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갖는다’는 조항을 담았다. 한국이 주도적으로 마련한 이 조항은 평화협정을 통해 북핵 폐기를 촉진한다는 취지에서 추진됐으나, 일각에서는 북한이 핵 협상과 평화협정 협상을 연계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내놨다. 

     이후 6자회담이 결렬되고 북한의 2차 핵실험까지 진행된 현 시점에서 판단해 보면, 당시 한미(노무현·조지 W 부시 행정부)의 6자회담 협상팀은 비핵화 협상 과정에 평화협상이라는 난제를 하나 더 추가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됐다.

     일각의 우려는 북한이 최근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를 상대로 평화협정 카드를 빼들면서 현실로 나타났다. 북한은 지난 1월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평화협정 협상을 6자회담 복귀 조건으로 공식화했다.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얼마 전 중국을 방문해 “비핵화 협상과 평화체제 협상을 병행한다면 6자회담에 복귀할 수 있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요구와 관련해 한미 양국은 공식적으로 “비핵화 진전이 있으면 별도의 포럼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한국 정부의 고위 당국자는 지난달 27일(미 현지시간) 워싱턴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비핵화 진전의 의미는 2008년 12월 (6자회담이 중단됐던) 상태보다 나아간 조치”라고 설명했다. 6자회담이 북핵 검증 단계에서 중단됐던 점을 고려하면, 북한의 핵 검증 조치만으로도 평화협정 협상이 시작될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지는 언급이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밝혔던 평화협상 조건보다 한층 완화된 입장이다. 부시 대통령은 2007년 9월 호주 시드니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 한미 정상회담 언론회동에서 “나의 목적은 평화협정을 통해 한국전쟁을 종결하는 것”이라면서 “그러러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그의 (핵)무기에 관해 ‘검증 가능하도록 폐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평화체제 조기 수립 요청에 응하면서도 평화협정 조건만큼은 ‘검증 가능한 북핵 폐기’로 분명히 못박았던 것이다.

     지난해 말 스티븐 보즈워스 미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평양 방문과 최근 북중 고위급 인사들의 교차방문 등을 계기로 북핵 협상 재개 움직임이 가속화하는 분위기다. 

     한미 양국의 고위 당국자들 입에서도 6자회담 재개 가능성을 내비치는 언급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북한의 조건 없는 6자회담 복귀라면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6자회담 진전 징후가 북측의 평화협정 공세에 굴복한 결과라면 문제다. 4자회담이 증명했듯이, 평화협정 협상은 6자회담을 촉진하기는커녕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노림수에 휘둘리지 않는 한미 양국 정부의 전략적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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