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미 하원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주도했던 민디 코틀러 ‘아시아폴리시포인트’ 대표(사진)는 8월 11일 “현재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이나 르완다 등지에서 자행되고 있는 강간 행위와 일본군의 종군 위안부 문제는 별개의 사안이 아니다”면서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한일 양국의 과거사 갈등 현안으로 치부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말했다. 코틀러 대표는 광복 64주년을 앞두고 세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같이 지적하고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현재 진행형인 국제적, 보편적 인권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 하원을 비롯, 유럽연합과 캐나다, 호주, 네덜란드 의회 등이 결의안을 통해 일본 정부의 위안부 문제 사과를 요구했으나 일본 정부의 태도는 바뀌지 않고 있다.

“2007년 당시 위안부 결의안을 제출했던 마이클 혼다 의원은 결의안을 계기로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길 바랐다. 그것은 현명한 접근법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그 문제를 회피했다. 무시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일본 정치인들에게 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무시 정책이 일본에게 득이 되는가.

“그들은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다. 무엇보다 위안부 문제가 21세기 들어 보편적 인권 문제로 부상했다는 점을 일본은 간과하고 있다. 르완다나 콩코, 다르푸르, 보스니아 등지에서 자행되는 강간 범죄가 거의 매일 신문을 장식하고 CNN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그 위로 한국과 대만,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의 종군 위안부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이제 인권은 민주화된 나라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등에 지고 있는 일본의 부담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의미다.”

-미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이 나온 지 2년이 됐다. 그동안 어떤 변화들이 있었는가.

“결의안 통과 당시 힘을 모은 미국 내 한국, 중국, 필리핀 등 아시안 공동체의 결속력이 커졌다. 위안부라는 대의 아래 무려 200여개의 그룹이 뭉쳤다. 전쟁 중이라도 강간은 범죄라는 국제사회의 인식이 고양되고 지난해 그런 취지의 유엔 결의안이 채택될 수 있었던 것도 미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을 이끌어낸 아시안 공동체의 역량 덕분이다. 유엔 결의안 통과 직전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기조 연설을 했을 정도로 조지 W 부시 행정부도 한 목소리를 내게됐다. 사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면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 중국의 과거사 갈등이 완화될 수 있는 만큼 이 위안부 문제는 미국의 안보와도 관련돼 있다.”

-위안부 활동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위안부 활동 이후 일본인들 사이에서 솔직히 ‘왕따’가 됐다. 일본측 기금에 의존하는 연구소들이 언제부턴가 나를 초청 대상에서 제외하기 시작했다. 많은 일본인들이 내가 운영하는 아시아폴리시포인트 회원에서 탈퇴하기도 했다.”

-위안부 활동에 관여한 일을 후회하나.

“위안부로 끌려갔던 아시아 여성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내가 치른 얼마간의 희생은 미미한 것이다. 누군가는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고 정당한 평가를 받도록 해야하지 않겠나.”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특파원 리포트]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가 지난 9월 4일자 한국 관련 기사에서 동해 대신 ‘일본해(Sea of Japan)’를 표기한 지도를 게재했다.

문제의 지도가 첨부된 NYT의 기사는 노무현 정부 때 시작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 활동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정부의 예산 축소와 정치권의 관심 부족으로 고사 위기에 놓였다는 취지의 보도였다. 기사와 일본해 표기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NYT의 외교안보 전문기자인 데이비드 생거도 지난 6월16일자 기사에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고위 당국자 언급을 인용, “미국은 ‘일본해’에서 북한 선박과 화물선을 추적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력과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썼다. 일본해 단독 표기는 NYT의 관행이다. 미국의 다른 유력 신문과 소속 기자들도 거의 모두가 이 관행을 고수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이 최근 ‘연안호 선원 석방’ 기사에서 동해와 일본해를 병행 표기하면서 동해를 앞세웠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뉴스거리가 되는 게 작금의 미 언론의 현실인 것이다. 이런 관행은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동해 알리기’ 광고를 게재한 가수 김장훈씨와 같은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야 개선될 수 있는 장기적 과제다.

한일 과거사 현안과 관련된 미국 내의 ‘일본 편향’ 기류가 미 언론의 문제만은 아니다. 워싱턴 취재 현장에서 만난 한일 과거사 관련 활동가들은 미 한반도 전문가들이 한일 과거사 현안에 눈을 감거나 ‘일본 편향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2007년 미 하원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주도했던 민디 코틀러 ‘아시아폴리시포인트’ 대표는 지난달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조지 W 부시 행정부 내 지일파 관료들과 싱크탱크의 동아시아 전문가들이 위안부 결의안에 반대하는 행태를 보였다고 전했다. 코틀러 대표가 실명으로 지목한 한 싱크탱크 인사는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국무부 요직에 발탁됐다. 부시 행정부에서 동아시아 현안을 담당했던 인사는 정권이 바뀐 뒤 싱크탱크로 돌아갔다. 미 예일대에서 국제 관계학를 전공한 코틀러 대표는 누구보다 일본을 좋아하는 국제관계 전문가다. 처음 그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어느 일본인 가정집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런 그였지만, “위안부 문제는 보편적 인권 문제”라는 신념으로 위안부 결의안 채택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그가 운영하는 연구소의 일본계 후원금이 뚝 끊겼다. 어떤 싱크탱크들은 행사 초청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고 한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미 정부 내의 일부 관료와 싱크탱크, 미 언론이 일본을 중심으로 한통속이 되어 돌아가는 요란한 만화경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다. 일본의 선거혁명으로 철옹성 같던 자민당 체제가 54년 만에 무너지고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됐다. 오바마 행정부는 질적으로 변화된 일본의 새 정부를 맞아 신미일 관계를 모색할 수 있는 계기를 맞고 있다. 최근 워싱턴 외교가는 ‘대등한 미일 관계’를 내세운 하토야마 유키오 차기 일본 총리 시대에도 부시 정부 시절의 굳건했던 미일 동맹이 유지될 수 있는지를 전망하는 동아시아 전문가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하다.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의 대일 외교 기조가 부시 정부의 미일 관계를 복원하는 차원에만 머물러선 곤란하다.

34년 동안 일본 외교관으로 봉직한 도고 가즈히코(東鄕和彦)는 미 프린스턴대 교수 시절인 2006년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밀월관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역사왜곡과 신사참배 같은 과거사 문제로 이웃인 한국이나 중국과의 관계는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만 주력하는 일본 정부의 외교 정책은 잘못됐다고 진단했다. 미국에 대해서도 “일본의 안하무인격인 처신은 미국의 침묵에 의해 조장된 측면이 있다”면서 “일본이 한, 중 관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미국이 떠안게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아시아 정치환경의 변화 속에 부시 정부의 잘못된 외교 정책을 정상화하고 있는 오바마 정부가 경청해야 할 대목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일 과거사 현안에 눈감았던 부시·고이즈미 밀월 기조에서 탈피, 미래 지향적인 동북아 정책 구상을 펼쳐보이길 기대한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미 버지니아주 포토맥 강변에 위치한 마운트 버논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땀흘려 일군 농장이다.



 


조지 워싱턴은
이복 형인 로렌스 워싱턴에게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마운트 버논에서
45년 동안 살았으며, 죽어서는 그 곳에 묻혔다.



 

                                                               조지 워싱턴과 부인 마사 워싱턴이 안장된 곳


조지 워싱턴의 마운트 버논 사랑은 유명하다.
미 대륙군 총사령관을 맡아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가
“왕이 되어달라”는 일부 참모들의 권고를 뿌리친 채
총사령관직을 내놓고 말을 몰아 달려간 곳도,
재선 대통령 임기를 마친 그가
“3선 대통령이 되어달라”는 주변의 요청을 물리치고
서둘러 되돌아간 곳도
마운트 버논이었다.
대통령 재임 시절인 1790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통령 관저에서 유럽 국가들의 대표단과 마주 앉기 보다는
마운트 버논 고향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고 싶다”고 썼을 정도다.



 

 

 

 

 

 

 

 



휴가를 맞아 최근 다녀온 마운트 버논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저택 식당 천장에는 농기구와 곡식들이 새겨져 있었고
벽난로 외벽에는 농장 풍경이 조각돼 있었다.
자원봉사 안내원은
“한 국가의 번영은 개명한 농사꾼들의 손에 달려있다고 믿은 워싱턴은
스스로를 농사꾼으로 생각하며
마운트 버논에서 새로운 품종 및 농법 개발에 힘썼다”고 설명했다.



 




안내원은 1층 서재에 놓인 소박한 의자를 가리키며
“워싱턴이 대통령 시절 사용했던 의자”라면서
“군주제가 대세였던 시절, 워싱턴은 이 의자에 앉아 대통령 임기를 고민했다”고 말했다.



 

                                                                    Life magazine (저택 내부는 사진 촬영 금지)


3선 대통령의 유혹을 거부한 워싱턴의 결단은
후임 대통령들이 재선을 끝으로 퇴임하는 관행으로 굳어졌다.
2008년 한햇 동안 마운트 버논을 찾은 이는 130만 여 명.
이 곳이 일반에게 본격적으로 공개된 1860년대부터 계산하면,
총 방문객은 약 750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매표소측은 밝혔다.



 

                                                      워싱턴이 심었다는 포플러 나무


 마운트 버논은 1799년 워싱턴이 자손을 남기지 못한 채
숨을 거둔 이후 서서히 쇠락해갔다.
농장을 상속받은 조지 워싱턴의 조카는
시장 환경의 변화로 더 이상 농장 유지가 어려워지자
농장을 분할 매각하기 시작했다.
그 후손들은 마운트 버논을 보존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1853년 미 연방 정부와 버지니아 주 정부에 마운트 버논 매입을 요청했으나
그 마저도 거절당했다.
이 때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살고 있던 여성인
앤 파멜라 커닝햄이 마운트 버논 지키기에 나섰다.

 그가 창설한  ‘마운트 버논 여성협회’(이하 협회)가
전국적으로 모금한 20만 달러로 1858년 12월
마운트 버논 저택과 인근 부지를 매입하지 않았더라면,
마운트 버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협회가 저택을 매입했을 당시 워싱턴 대통령의 유물은
채 12점도 남아있지 않았으나
협회의 꾸준한 복원 노력 덕분에
저택 가구의 40% 정도가 워싱턴이 실제 사용했던 가구들이라고
안내원은 말했다.

저택 뒤뜰에서 포토맥 강을 바라보면
강 건너편으로 메릴랜드주가 보인다.
워싱턴은 이 풍경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안내원에 따르면,
1950년대 개발 바람에 휩쓸려 이 풍경이 빌딩 숲으로 뒤바뀔 뻔 했으나
협회의 노력으로 워싱턴 생존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게 됐다.
협회는 지금도 미 연방 정부나 주 정부의 자금 지원 없이
마운트 버논 입장료와 기념품 판매, 기부금 등으로
마운트 버논을 관리해나가고 있다.

 2006년 마운트 버논 부지 내에 건립된 도널드 W 레이놀즈 박물관 및 교육센터도
국민들의 성금으로 건립됐다.
예비역 장성 출신으로 박물관에서 자원봉사하고 있는 테드 게이는
“마운트 버논 여성협회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조지 워싱턴과 보다 친숙해질 수 있도록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제공하자는 차원에서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다”면서
“25 달러 이상 기부한 이들의 명단만 해도 전화번호부 몇 권 분량이 된다”고 말했다.

마운트 버논을 둘러보면서,
“이 곳을 찾는 미국인들은 ‘국부(國父)‘ 워싱턴에 대한 존경심에
 자부심까지 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미 국민들은 워싱턴이 사랑했던 마운트 버논을 정성껏 관리하고 있었다.
 마운트 버논에서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한 채 망명지에서 숨을 거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해나 킴. 한국 이름 김한나.
6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온 그가 일을 냈습니다.
미국 내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숙원이었던 '한국전쟁 참전용사 인정법안'이
미 의회에서 통과되도록 한 것 입니다.
물론 그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로 이번 법안을 발의했던 찰스 랑겔 미 하원의원을 비롯,
한국전 참전용사들, 재미 교포들이 힘을 모은 덕분입니다.
하지만 400명이 넘는 미 하원의원들을 상대로
법안 로비를 하기 위해 발품을 팔고
참전용사들에게 해당 지역구 의원 설득을 독려하고
한인 2세와 유학생들을 조직해 여론 환기에 나선 해나 킴의 노력 덕분에
법안이 조기에 통과될 수 있었습니다.
법안 통과로, 한국전쟁 휴전일인 7월27일엔 미 전역의 관공서 등지에서
성조기가 조기로 게양됩니다.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는 한국전쟁이
매년 성조기 조기 게양이라는 의식을 통해
미 전역에서 기억되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된 것입니다.
미 현충일인 메모리얼 데이에 이어 두번째로 조기가 게양되는 날이 된 것이지요.
성조기 조기게양은 의식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언젠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시켜
한반도에 영구적인 평화를 정착시켜야한다는 당위를
미국민들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한반도 정세가 그 어느 때 보다 불안정한 요즘,
그 의미는 한층 각별합니다.

해나 킴을 처음 만난 건
독도관련 세미나 행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참석자들을 안내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명문대 대학원에 재학중인 재원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는 지난 24일 대학원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7월26일로 예정된 한국전 참전 희생자 추모 행사 준비 회의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날 밤,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하던 그를 설득하느라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7월26일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 계단 앞에서 개최된
제2회 한국전쟁 참전 희생자 추모 및 평화 기원 행사장.
이날 행사는 6·25전쟁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오후 6시25분에 시작됐으며,
휴전일(7월27일)에 맞춰 오후 7시27분 촛불에 불을 붙였습니다.
휴전일을 미 국경일로 지정하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인정법안’이 미 의회를 통과하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7일을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일로 선포한 직후여서
이날 행사는 축제를 방불케했습니다.
아카펠라 공연과 태권도 시범, 국악 한마당이 어우러졌지요.


동분서주하며 행사를 이끌던 해나 킴은
행사 말미에 참석자들과 함께 아리랑을 부르면서
끝내 눈물을 보였습니다.



                

자랑스런 한국인, 해나 킴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대통령을 살리기 위한 ‘인간 방패’(Meat Shield)가 되어야 한다.”

미 백악관 경호실 요원들은 ‘죽는 훈련’에 집중한다. 경호원들은 대통령 근접 경호 도중 총성이 들렸을 때, 생존 본능과는 반대로 대통령을 향해 몸을 던지는 훈련을 ‘근육이 기억할 때까지’ 반복적으로 실시한다. 경찰 출신의 한 경호요원 훈련생은 총소리를 듣고 경찰의 대응 방식에 따라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었다가 교관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아야 했다. 또 다른 훈련생은 “빙판에서 미끌어진 임신한 아내가 뱃속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중에 팔을 내뻗는 바람에 팔이 부러졌다는 얘기를 듣고 ‘인간 방패’ 개념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훈련 교관들은 또 ‘죽은 자의 10초’를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치명상을 입더라도 10초 동안은 숨이 붙어있는 만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방아쇠를 당기라는 주문이다. 경호원들은 경찰과 달리 경고 사격 연습을 하지 않는다. 목표물의 심장을 겨냥하는 사격 훈련만 실시한다.

워싱턴포스트 매거진은 25일 백악관 경호실의 훈련 과정을 전하는 특집 기사에서 이 같은 경호 원칙들을 소개하면서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맞아 경호실의 긴장도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통상 1년에 3000건 정도인 대통령 살해 협박 사례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 이후 전임 대통령들의 집권 기간보다 대폭 증가했다고 경호실 측은 밝혔다. 경호 환경도 이전보다 한층 위험해졌다. 워싱턴DC 인근에 위치한 대통령 경호요원 훈련센터(제임스 로우리 트레이닝 센터) 교관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행사 때마다 참석자들과 악수하는 의전이 포함돼 있느냐고 경호원들에게 질문할 정도로 친경호 환경이었으나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면서 “오바마 대통령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처럼 의전에 없는 우발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대통령”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훈련생들에게도 “파격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라”고 요구한다.

오바마 시대로 접어들면서 경호요원 훈련장에는 흑인 대통령을 경멸하고 유대인인 람 이매뉴얼 백악관 비서실장을 ‘그리스도의 적’으로 매도하는 백인 우월주의자가 새로운 공격 유형으로 설정됐다고 매거진은 보도했다. 훈련센터에는 공항과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 카페와 식당 같은 세트가 설치돼 있으며 이곳에서 대통령 전용헬기가 풀장에 추락하거나 암살자들이 갑자기 나타나 사린 가스를 살포하는 등 다양한 긴급 상황에 대한 대응 훈련이 실시된다.

경호실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 경호를 보다 각별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매거진은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는 역사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실수하면 국가적 재앙이 초래될 것이다. 절대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경호실 관계자의 다짐을 전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AP

 ‘백의의 천사’가 버락 오바마 정부의 공중보건 사령탑에 올랐다.

오바마 대통령은 7월 13일 미 앨라배마주 벽촌에서 저소득층 주민을 상대로 의료구호 활동을 해온 흑인 여의사 레지나 벤저민(52·사진)을 공중보건국장(surgeon general)에 지명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진행된 지명발표에서 “벤저민 지명자는 가난한 환자에게 병원비를 물리지 않았으며 병원이 수익을 내지 못했을 때 월급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질병 퇴치 전쟁에서는 무자비한 전사였다”고 덧붙였다. 벤저민은 미 상원의 인준을 거쳐 공식 임명된다.

그의 삶에는 성녀의 역정이 녹아 있다.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벤저민 지명자는 1990년 미 남부 걸프만에 접한 어촌으로 내려가 비영리 보건소를 열었다. 무의촌 봉사를 조건으로 학비를 지원하는 미 연방정부 프로그램이 봉사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봉사 기간이 끝난 뒤에도 그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2500여명의 주민 대부분이 병원에 가는 것을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으며, 그 마을에는 의사라고는 벤저민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젠가 의료봉사에 나선 이유를 묻는 질문에 “나를 찾아온 환자들이 소득과 지위에 관계 없이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의료 서비스를 받도록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 출신 이민자를 비롯한 무보험 환자가 몰려들면서 보건소 재정이 악화되자 벤저민은 집을 저당 잡혀 꾼 돈으로 운용 자금을 충당했다. 가난한 주민들은 병원비 대신 굴이나 고기 등을 놓고 가기도 했다.

보건소가 화재로 전소되거나 태풍으로 반파되는 시련도 닥쳤다. 그럴 때마다 벤저민은 팔을 걷어붙인 채 병원 재건에 나섰고 주민들은 힘을 보탰다. 그가 픽업 트럭을 몰고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진료 활동을 벌이는 모습은 어느 곳에서나 목격됐다고 외신은 전했다.

‘존 앤드 캐서린 맥아더 재단’은 지난해 벤저민의 의료구호 활동을 돕기 위해 50만달러를 지원했다.

시사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는 벤저민을 ‘미국 최고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벤저민은 포기를 몰랐고, 그의 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고 경의를 표했다.

벤저민이 주인공이 된 이날 행사에 그의 가족은 참석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당뇨와 고혈압으로, 어머니는 폐암으로 숨졌으며 하나뿐인 오빠 또한 에이즈로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가족의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앞으로 우리나라의 건강 수준이 높아질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수천만명이 무보험 상태에 놓인 미국 의료보험 체계를 개탄하며 “의료보험 체계를 개편하면서 그 누구도 갈라진 틈 사이로 추락해선 안 된다”고 역설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 가난한 이웃들의 상처를 치유했던 벤저민은 미국을 바꾸기 위한 도전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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