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윌슨 미 연방하원의원(공화·사우스캐롤라이나)은 10일 그 어느 날보다 힘든 하루를 보내야 했다.전날 미 상·하원 합동회의장에 참석한 그는 연설 중이던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에게 “거짓말이야”라고 소리쳤다가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지난해 공화당 대선후보로 나섰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과 미치 매코넬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 존 뵈너 하원 공화당 원내대표 등 공화당 지도부마저 “윌슨 의원의 행동은 부적절했다”면서 한목소리로 그의 사과를 권유했다. 윌슨 의원은 당일 저녁 람 이매뉴얼 백악관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를 하고 사과 성명을 발표해야 했다.
윌슨 의원은 이날 사우스캐롤라이나 지역 라디오 방송에 나와 “전날 행동을 후회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렇다.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거짓말"이라고 외치는 조 윌슨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면서 “이제 서로 헐뜯지 말고 미 국민들에게 정말 중요한 논의를 해보자”면서 윌슨 의원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민주당은 윌슨 의원의 공개 사과를 압박했다. 제임스 클리번 미 연방하원 민주당 원내총무는 “윌슨 의원이 하원 회의장에서 공개 사과를 하지 않을 경우, 그에 대한 제재 결의안 상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미 국민과 언론의 반응은 한층 더 매서웠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민들은 윌슨 의원이 대통령에게 소리치는 장면을 목격한 전날 저녁부터 이날 오후까지 무려 50만달러가 넘는 선거 후원금을 윌슨 의원의 내년도 중간선거 경쟁자인 민주당 랍 밀러 후보 진영에 기부한 것으로 발표됐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윌슨 의원이 1964년 의사당에서 동료의원과 격투를 벌인 스트롬 서먼트 상원의원(공화·사우스캐롤라이나)의 보좌관 출신이었다고 소개하면서 “난장을 치는 정치 행태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전통인 듯하다”고 비꼬았다.
 
윌슨의 ‘야유’ 소동에는 한국의 국회까지 등장했다. 워싱턴포스트가 별도의 기사를 통해 전기톱이 등장하는 한국 국회의 폭력상을 전하면서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 국회에서 연설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보도한 것이다. 한국 국회의 이미지가 ‘의사당 폭력’의 대명사격이 된 셈이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coolman@segye.com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가 지난 4일자 한국 관련 기사에서 동해 대신 ‘일본해(Sea of Japan)’를 표기한 지도를 게재했다.

 문제의 지도가 첨부된 NYT의 기사는 노무현 정부 때 시작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 활동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정부의 예산 축소와 정치권의 관심 부족으로 고사 위기에 놓였다는 취지의 보도였다. 기사와 일본해 표기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NYT의 외교안보 전문기자인 데이비드 생거도 지난 6월16일자 기사에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고위 당국자 언급을 인용, “미국은 ‘일본해’에서 북한 선박과 화물선을 추적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력과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썼다. 일본해 단독 표기는 NYT의 관행이다. 미국의 다른 유력 신문과 소속 기자들도 거의 모두가 이 관행을 고수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이 최근 ‘연안호 선원 석방’ 기사에서 동해와 일본해를 병행 표기하면서 동해를 앞세웠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뉴스거리가 되는 게 작금의 미 언론의 현실인 것이다. 이런 관행은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동해 알리기’ 광고를 게재한 가수 김장훈씨와 같은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야 개선될 수 있는 장기적 과제다.
한일 과거사 현안과 관련된 미국 내의 ‘일본 편향’ 기류가 미 언론의 문제만은 아니다. 워싱턴 취재 현장에서 만난 한일 과거사 관련 활동가들은 미 한반도 전문가들이 한일 과거사 현안에 눈을 감거나 ‘일본 편향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2007년 미 하원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주도했던 민디 코틀러 ‘아시아폴리시포인트’ 대표는 지난달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조지 W 부시 행정부 내 지일파 관료들과 싱크탱크의 동아시아 전문가들이 위안부 결의안에 반대하는 행태를 보였다고 전했다. 코틀러 대표가 실명으로 지목한 한 싱크탱크 인사는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국무부 요직에 발탁됐다. 부시 행정부에서 동아시아 현안을 담당했던 인사는 정권이 바뀐 뒤 싱크탱크로 돌아갔다.

  미 예일대에서 국제 관계학를 전공한 코틀러 대표는 누구보다 일본을 좋아하는 국제관계 전문가다. 처음 그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어느 일본인 가정집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런 그였지만, “위안부 문제는 보편적 인권 문제”라는 신념으로 위안부 결의안 채택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그가 운영하는 연구소의 일본계 후원금이 뚝 끊겼다. 어떤 싱크탱크들은 행사 초청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고 한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미 정부 내의 일부 관료와 싱크탱크, 미 언론이 일본을 중심으로 한통속이 되어 돌아가는 요란한 만화경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다. 일본의 선거혁명으로 철옹성 같던 자민당 체제가 54년 만에 무너지고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됐다. 오바마 행정부는 질적으로 변화된 일본의 새 정부를 맞아 신미일 관계를 모색할 수 있는 계기를 맞고 있다. 최근 워싱턴 외교가는 ‘대등한 미일 관계’를 내세운 하토야마 유키오 차기 일본 총리 시대에도 부시 정부 시절의 굳건했던 미일 동맹이 유지될 수 있는지를 전망하는 동아시아 전문가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하다.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의 대일 외교 기조가 부시 정부의 미일 관계를 복원하는 차원에만 머물러선 곤란하다.

 34년 동안 일본 외교관으로 봉직한 도고 가즈히코(東鄕和彦)는 미 프린스턴대 교수 시절인 2006년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밀월관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역사왜곡과 신사참배 같은 과거사 문제로 이웃인 한국이나 중국과의 관계는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만 주력하는 일본 정부의 외교 정책은 잘못됐다고 진단했다. 미국에 대해서도 “일본의 안하무인격인 처신은 미국의 침묵에 의해 조장된 측면이 있다”면서 “일본이 한, 중 관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미국이 떠안게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아시아 정치환경의 변화 속에 부시 정부의 잘못된 외교 정책을 정상화하고 있는 오바마 정부가 경청해야 할 대목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일 과거사 현안에 눈감았던 부시·고이즈미 밀월 기조에서 탈피, 미래지향적인 동북아 정책 구상을 펼쳐보이길 기대한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아래는 조선일보 정우상 논설위원이 2012년 9월13일자 조선일보에 쓴 칼럼.

[태평로] 60년 전 미국이 남긴 두 가지 불씨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2장 2조·1951년).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다.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과 미국 등 연합국 48개국이 맺은 이 조약은 일본의 전후(戰後) 배상과 영토 문제를 정리한 것이다. 일본은 이 조약에서 자기들이 한국에 반환할 섬에 독도가 포함되지 않았다며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한다. 일본 논리대로라면 조약에 언급되지 않은 한반도 주변 섬 3000여개도 일본 땅이라는 식인데 이건 말 그대로 억지다. 그러나 '일본이 폭력과 탐욕으로 빼앗은 모든 지역을 반환하라'고 했던 1943년의 카이로선언, 카이로선언의 모든 조항을 이행한다는 1945년의 포츠담선언,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명시한 1946년 연합국 최고사령관 지령(SCAPIN) 677호와 비교하면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독도에 관한 규정이 흐릿해진 것은 사실이다.

미국은 1947년 3월 1차 초안부터 1949년 11월 5차 초안까지 독도를 한국 땅으로 명기했다. 그러나 1949년 11월 19일 주일(駐日) 미 대사관의 정치 고문 윌리엄 시볼트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건의서를 미국 정부에 보내면서 12월 6차 초안에서는 독도가 일본 땅으로 둔갑했다. 일본은 1945년 패전 직후부터 독도를 포함해 침략으로 강탈했던 땅을 끝까지 움켜쥐려고 로비를 했다. 그러나 영국·호주 등 다른 연합국들이 6차 초안에 반발하자 미국은 이를 폐기했고 7차 초안부터 조약 체결 때까지 독도에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일본 편을 들지는 않았지만, 일본이 멋대로 해석할 '불씨'를 남긴 것이다. 노다 일본 총리가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성립 과정에서 일본에 다케시마(독도)를 포기하라고 요구했지만, 미국은 이 요청을 거부했다"고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독도를 한국 땅이라고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이 독도를 일본 땅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독도 문제가 불거지면 우리는 일본에 성난 눈빛을 보내지만, 일본은 미국 입을 쳐다본다. 이번에도 일본 고위 외교관이 미 국무부에 달려갔고 일본 기자들은 미 국무부 대변인에게 집요하게 독도에 대해 질문했다.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한일 양국에 '냉정과 침착'을 주문했다. 미국 외교에 영향을 미치는 '3차 아미티지 보고서'는 중국을 견제하려면 "한일 양국이 역사적 견해 차이를 부활시키려는 유혹을 떨쳐내야 한다"고 했다. 그 모습에서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때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별하지 않고 남북한 모두에 '냉정과 절제'를 요구했던 중국의 모습이 떠오른다.

미국이 독도와 함께 남긴 또 다른 불씨는 천황제를 존속시키고 히로히토 일왕을 전범(戰犯) 재판에 세우지 않은 것이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성노예 문제를 부정하는 '집단 망각증'에 빠진 바탕에는 처벌되지 않은 전범 일왕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전후 일본을 냉전 시대 동아시아의 전략적 파트너로 삼기 위해 패전국으로 단호히 다루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도 독일처럼 양심적인 국가로 변모하길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지금 전쟁범죄 처리에서 미국이 일본의 형편을 봐줬던 1951년 수준으로 돌아가고 있다. 미국은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이 계속 비정상적인 질문을 하면 이제라도 제대로 응답해야 한다. 미국이 1951년 그때처럼 일본에 이중 신호를 보내면 한일 관계는 부서지고 동북아에서 미국 위상도 함께 흔들리게 될 것이다.

*미국 연방 상·하원 의원들에게 정책·법리 분석을 제공해온 미국 의회조사국(CRS)이 2014년 가을 발간한 '미일 관계 보고서'에서 일본의 과거사 부정 행태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미국 행정부 차원의 대응은 아니지만 일본의 과거사 왜곡 행태가 미국의 이익을 침해한다는 인식이 미국 내에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이 행정부 차원에서 일본의 잘못된 역사 대응 행태에 제동을 건다면 한일 과거사 문제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될 것이다. 다음은 이를 보도한 조선일보 2014년 9월29일자 보도와 사설.

일본이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하고 사죄한 고노(河野) 담화를 부정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는 데 대해 미국 의회와 전문가들이 정면 비판했다.

미국 의회조사국(CRS)은 최근 발간한 '미·일 관계 보고서'에서 일본 정부의 고노 담화 검증과 관련해 "관방장관은 담화를 계승하겠다고 하지만, 재검토 자체가 과거 있었던 사과의 진정성을 훼손시켰다"고 비판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6월 고노 담화가 역사적 진실이 아니라 한·일 간 협상의 산물로 만들어졌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의회조사국은 이달 초 고노 담화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다카이치 사나에 총무상 등이 입각한 것과 관련해 "일본 제국주의 시절을 미화하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위안부 문제 등 역사적 상처를 들쑤시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의 역사 수정주의 행태가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고, 결국은 미국의 이익을 침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미국 전문가들은 "2007년 미 하원의 위안부 규탄 결의안이 32년 전 아사히(朝日)신문에 게재된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의 허위 증언을 근거로 했다"는 일본의 일부 정치인·언론 주장도 정면 반박했다. 아사히신문은 1980년대 초 보도한 요시다의 위안부 강제 연행 주장 기사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다며 최근 뒤늦게 취소했다.

미 하원 결의안 작성에 관여했던 래리 닉시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과 민디 커틀러 '아시아 폴리시 포인트' 소장 등은 29일 정치 정보지 '넬슨 리포트' 공동 기고를 통해 "요시다 증언은 당시에도 논란이 있어 위안부 결의안 작성 과정에 전혀 반영하지 않았고, 인도·태평양 전역에 걸쳐 일본 제국주의가 강제 위안부 시스템을 조직하고 관리했음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문서와 증언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윤정호 특파원

[사설] '日의 역사 退行' 비판한 美 의회 보고서

미국 의회조사국(CRS)이 최근 발표한 미·일 관계 보고서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의 역사 퇴행(退行)적 언동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이것이 결국 미국의 이익에 손상을 입히고 있다고 비판했다. 보고서는 "역사적 상처를 들쑤시는 아베 정권의 행태"라는 표현을 써가며 "한국과 중국을 당혹스럽게 하는 발언을 했다가 이를 부분적으로 철회하는 불일치한 행동 패턴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지난 6월 일본 정부가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河野) 담화'를 재검증한 것에 대해 "(1993년 고노 담화로 내놓은) 사과의 정통성을 저해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미국 의회의 정책 방향에 대한 자문 기관인 CRS가 발간하는 보고서는 미국 조야(朝野)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주목도가 매우 높다. 이번 보고서는 아베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고노 담화 재검증 이후 부쩍 커진 미국 정치권의 일본에 대한 우려를 보여준다.

CRS는 이달 초 구성된 아베 2기 내각에 대해서도 "과거 일제(日帝)의 행위를 찬양하는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여럿 포함됐다"고 했다. 또 아베 총리가 올 4월 한 사찰(寺刹)의 전범(戰犯) 추도 행사에 보낸 서한 내용과 작년 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사실까지 언급하며 "한국과 중국을 격앙시키는 의식(儀式)적 제스처를 반복하고 있다"고도 했다. CRS 보고서가 이처럼 강한 표현을 써가며 일본 총리의 서한을 문제 삼고 내각의 성격까지 거론한 것은 드문 일이다.

미국은 동북아 지역의 평화 및 전략적 균형 유지를 위해서는 순조로운 한·일 관계가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서는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줄곧 밝혀왔다. 그러나 일본 쪽 분위기는 거꾸로 흘러가고 있다. 여당인 자민당 정책조사회는 고노 담화를 사실상 폐기하는 '대체(代替) 담화'를 내각에 요구했고, 워싱턴에선 과거사 문제를 덮으려는 로비를 한층 강화하고 있다. 심지어 한국 정부의 대일(對日) 대화 복원 노력에 대해서마저 '한국이 굴복했다' 같은 치기(稚氣) 어린 해석들이 난무하고 있다고 한다.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는 일본의 유일한 동맹국인 미국마저 아베 내각의 폭주에 대해 얼마나 불편한 인식을 갖고 있는가를 드러낸 것이다. 이런 사정을 일본 정치 지도자들만 모르고 있다.

 

2007년 미 하원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주도했던 민디 코틀러 ‘아시아폴리시포인트’ 대표(사진)는 8월 11일 “현재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이나 르완다 등지에서 자행되고 있는 강간 행위와 일본군의 종군 위안부 문제는 별개의 사안이 아니다”면서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한일 양국의 과거사 갈등 현안으로 치부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말했다. 코틀러 대표는 광복 64주년을 앞두고 세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같이 지적하고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현재 진행형인 국제적, 보편적 인권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 하원을 비롯, 유럽연합과 캐나다, 호주, 네덜란드 의회 등이 결의안을 통해 일본 정부의 위안부 문제 사과를 요구했으나 일본 정부의 태도는 바뀌지 않고 있다.

“2007년 당시 위안부 결의안을 제출했던 마이클 혼다 의원은 결의안을 계기로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길 바랐다. 그것은 현명한 접근법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그 문제를 회피했다. 무시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일본 정치인들에게 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무시 정책이 일본에게 득이 되는가.

“그들은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다. 무엇보다 위안부 문제가 21세기 들어 보편적 인권 문제로 부상했다는 점을 일본은 간과하고 있다. 르완다나 콩코, 다르푸르, 보스니아 등지에서 자행되는 강간 범죄가 거의 매일 신문을 장식하고 CNN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그 위로 한국과 대만,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의 종군 위안부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이제 인권은 민주화된 나라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등에 지고 있는 일본의 부담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의미다.”

-미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이 나온 지 2년이 됐다. 그동안 어떤 변화들이 있었는가.

“결의안 통과 당시 힘을 모은 미국 내 한국, 중국, 필리핀 등 아시안 공동체의 결속력이 커졌다. 위안부라는 대의 아래 무려 200여개의 그룹이 뭉쳤다. 전쟁 중이라도 강간은 범죄라는 국제사회의 인식이 고양되고 지난해 그런 취지의 유엔 결의안이 채택될 수 있었던 것도 미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을 이끌어낸 아시안 공동체의 역량 덕분이다. 유엔 결의안 통과 직전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기조 연설을 했을 정도로 조지 W 부시 행정부도 한 목소리를 내게됐다. 사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면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 중국의 과거사 갈등이 완화될 수 있는 만큼 이 위안부 문제는 미국의 안보와도 관련돼 있다.”

-위안부 활동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위안부 활동 이후 일본인들 사이에서 솔직히 ‘왕따’가 됐다. 일본측 기금에 의존하는 연구소들이 언제부턴가 나를 초청 대상에서 제외하기 시작했다. 많은 일본인들이 내가 운영하는 아시아폴리시포인트 회원에서 탈퇴하기도 했다.”

-위안부 활동에 관여한 일을 후회하나.

“위안부로 끌려갔던 아시아 여성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내가 치른 얼마간의 희생은 미미한 것이다. 누군가는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고 정당한 평가를 받도록 해야하지 않겠나.”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특파원 리포트]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가 지난 9월 4일자 한국 관련 기사에서 동해 대신 ‘일본해(Sea of Japan)’를 표기한 지도를 게재했다.

문제의 지도가 첨부된 NYT의 기사는 노무현 정부 때 시작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 활동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정부의 예산 축소와 정치권의 관심 부족으로 고사 위기에 놓였다는 취지의 보도였다. 기사와 일본해 표기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NYT의 외교안보 전문기자인 데이비드 생거도 지난 6월16일자 기사에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고위 당국자 언급을 인용, “미국은 ‘일본해’에서 북한 선박과 화물선을 추적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력과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썼다. 일본해 단독 표기는 NYT의 관행이다. 미국의 다른 유력 신문과 소속 기자들도 거의 모두가 이 관행을 고수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이 최근 ‘연안호 선원 석방’ 기사에서 동해와 일본해를 병행 표기하면서 동해를 앞세웠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뉴스거리가 되는 게 작금의 미 언론의 현실인 것이다. 이런 관행은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동해 알리기’ 광고를 게재한 가수 김장훈씨와 같은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야 개선될 수 있는 장기적 과제다.

한일 과거사 현안과 관련된 미국 내의 ‘일본 편향’ 기류가 미 언론의 문제만은 아니다. 워싱턴 취재 현장에서 만난 한일 과거사 관련 활동가들은 미 한반도 전문가들이 한일 과거사 현안에 눈을 감거나 ‘일본 편향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2007년 미 하원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주도했던 민디 코틀러 ‘아시아폴리시포인트’ 대표는 지난달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조지 W 부시 행정부 내 지일파 관료들과 싱크탱크의 동아시아 전문가들이 위안부 결의안에 반대하는 행태를 보였다고 전했다. 코틀러 대표가 실명으로 지목한 한 싱크탱크 인사는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국무부 요직에 발탁됐다. 부시 행정부에서 동아시아 현안을 담당했던 인사는 정권이 바뀐 뒤 싱크탱크로 돌아갔다. 미 예일대에서 국제 관계학를 전공한 코틀러 대표는 누구보다 일본을 좋아하는 국제관계 전문가다. 처음 그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어느 일본인 가정집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런 그였지만, “위안부 문제는 보편적 인권 문제”라는 신념으로 위안부 결의안 채택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그가 운영하는 연구소의 일본계 후원금이 뚝 끊겼다. 어떤 싱크탱크들은 행사 초청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고 한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미 정부 내의 일부 관료와 싱크탱크, 미 언론이 일본을 중심으로 한통속이 되어 돌아가는 요란한 만화경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다. 일본의 선거혁명으로 철옹성 같던 자민당 체제가 54년 만에 무너지고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됐다. 오바마 행정부는 질적으로 변화된 일본의 새 정부를 맞아 신미일 관계를 모색할 수 있는 계기를 맞고 있다. 최근 워싱턴 외교가는 ‘대등한 미일 관계’를 내세운 하토야마 유키오 차기 일본 총리 시대에도 부시 정부 시절의 굳건했던 미일 동맹이 유지될 수 있는지를 전망하는 동아시아 전문가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하다.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의 대일 외교 기조가 부시 정부의 미일 관계를 복원하는 차원에만 머물러선 곤란하다.

34년 동안 일본 외교관으로 봉직한 도고 가즈히코(東鄕和彦)는 미 프린스턴대 교수 시절인 2006년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밀월관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역사왜곡과 신사참배 같은 과거사 문제로 이웃인 한국이나 중국과의 관계는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만 주력하는 일본 정부의 외교 정책은 잘못됐다고 진단했다. 미국에 대해서도 “일본의 안하무인격인 처신은 미국의 침묵에 의해 조장된 측면이 있다”면서 “일본이 한, 중 관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미국이 떠안게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아시아 정치환경의 변화 속에 부시 정부의 잘못된 외교 정책을 정상화하고 있는 오바마 정부가 경청해야 할 대목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일 과거사 현안에 눈감았던 부시·고이즈미 밀월 기조에서 탈피, 미래 지향적인 동북아 정책 구상을 펼쳐보이길 기대한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미 버지니아주 포토맥 강변에 위치한 마운트 버논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땀흘려 일군 농장이다.



 


조지 워싱턴은
이복 형인 로렌스 워싱턴에게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마운트 버논에서
45년 동안 살았으며, 죽어서는 그 곳에 묻혔다.



 

                                                               조지 워싱턴과 부인 마사 워싱턴이 안장된 곳


조지 워싱턴의 마운트 버논 사랑은 유명하다.
미 대륙군 총사령관을 맡아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가
“왕이 되어달라”는 일부 참모들의 권고를 뿌리친 채
총사령관직을 내놓고 말을 몰아 달려간 곳도,
재선 대통령 임기를 마친 그가
“3선 대통령이 되어달라”는 주변의 요청을 물리치고
서둘러 되돌아간 곳도
마운트 버논이었다.
대통령 재임 시절인 1790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통령 관저에서 유럽 국가들의 대표단과 마주 앉기 보다는
마운트 버논 고향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고 싶다”고 썼을 정도다.



 

 

 

 

 

 

 

 



휴가를 맞아 최근 다녀온 마운트 버논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저택 식당 천장에는 농기구와 곡식들이 새겨져 있었고
벽난로 외벽에는 농장 풍경이 조각돼 있었다.
자원봉사 안내원은
“한 국가의 번영은 개명한 농사꾼들의 손에 달려있다고 믿은 워싱턴은
스스로를 농사꾼으로 생각하며
마운트 버논에서 새로운 품종 및 농법 개발에 힘썼다”고 설명했다.



 




안내원은 1층 서재에 놓인 소박한 의자를 가리키며
“워싱턴이 대통령 시절 사용했던 의자”라면서
“군주제가 대세였던 시절, 워싱턴은 이 의자에 앉아 대통령 임기를 고민했다”고 말했다.



 

                                                                    Life magazine (저택 내부는 사진 촬영 금지)


3선 대통령의 유혹을 거부한 워싱턴의 결단은
후임 대통령들이 재선을 끝으로 퇴임하는 관행으로 굳어졌다.
2008년 한햇 동안 마운트 버논을 찾은 이는 130만 여 명.
이 곳이 일반에게 본격적으로 공개된 1860년대부터 계산하면,
총 방문객은 약 750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매표소측은 밝혔다.



 

                                                      워싱턴이 심었다는 포플러 나무


 마운트 버논은 1799년 워싱턴이 자손을 남기지 못한 채
숨을 거둔 이후 서서히 쇠락해갔다.
농장을 상속받은 조지 워싱턴의 조카는
시장 환경의 변화로 더 이상 농장 유지가 어려워지자
농장을 분할 매각하기 시작했다.
그 후손들은 마운트 버논을 보존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1853년 미 연방 정부와 버지니아 주 정부에 마운트 버논 매입을 요청했으나
그 마저도 거절당했다.
이 때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살고 있던 여성인
앤 파멜라 커닝햄이 마운트 버논 지키기에 나섰다.

 그가 창설한  ‘마운트 버논 여성협회’(이하 협회)가
전국적으로 모금한 20만 달러로 1858년 12월
마운트 버논 저택과 인근 부지를 매입하지 않았더라면,
마운트 버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협회가 저택을 매입했을 당시 워싱턴 대통령의 유물은
채 12점도 남아있지 않았으나
협회의 꾸준한 복원 노력 덕분에
저택 가구의 40% 정도가 워싱턴이 실제 사용했던 가구들이라고
안내원은 말했다.

저택 뒤뜰에서 포토맥 강을 바라보면
강 건너편으로 메릴랜드주가 보인다.
워싱턴은 이 풍경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안내원에 따르면,
1950년대 개발 바람에 휩쓸려 이 풍경이 빌딩 숲으로 뒤바뀔 뻔 했으나
협회의 노력으로 워싱턴 생존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게 됐다.
협회는 지금도 미 연방 정부나 주 정부의 자금 지원 없이
마운트 버논 입장료와 기념품 판매, 기부금 등으로
마운트 버논을 관리해나가고 있다.

 2006년 마운트 버논 부지 내에 건립된 도널드 W 레이놀즈 박물관 및 교육센터도
국민들의 성금으로 건립됐다.
예비역 장성 출신으로 박물관에서 자원봉사하고 있는 테드 게이는
“마운트 버논 여성협회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조지 워싱턴과 보다 친숙해질 수 있도록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제공하자는 차원에서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다”면서
“25 달러 이상 기부한 이들의 명단만 해도 전화번호부 몇 권 분량이 된다”고 말했다.

마운트 버논을 둘러보면서,
“이 곳을 찾는 미국인들은 ‘국부(國父)‘ 워싱턴에 대한 존경심에
 자부심까지 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미 국민들은 워싱턴이 사랑했던 마운트 버논을 정성껏 관리하고 있었다.
 마운트 버논에서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한 채 망명지에서 숨을 거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해나 킴. 한국 이름 김한나.
6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온 그가 일을 냈습니다.
미국 내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숙원이었던 '한국전쟁 참전용사 인정법안'이
미 의회에서 통과되도록 한 것 입니다.
물론 그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로 이번 법안을 발의했던 찰스 랑겔 미 하원의원을 비롯,
한국전 참전용사들, 재미 교포들이 힘을 모은 덕분입니다.
하지만 400명이 넘는 미 하원의원들을 상대로
법안 로비를 하기 위해 발품을 팔고
참전용사들에게 해당 지역구 의원 설득을 독려하고
한인 2세와 유학생들을 조직해 여론 환기에 나선 해나 킴의 노력 덕분에
법안이 조기에 통과될 수 있었습니다.
법안 통과로, 한국전쟁 휴전일인 7월27일엔 미 전역의 관공서 등지에서
성조기가 조기로 게양됩니다.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는 한국전쟁이
매년 성조기 조기 게양이라는 의식을 통해
미 전역에서 기억되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된 것입니다.
미 현충일인 메모리얼 데이에 이어 두번째로 조기가 게양되는 날이 된 것이지요.
성조기 조기게양은 의식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언젠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시켜
한반도에 영구적인 평화를 정착시켜야한다는 당위를
미국민들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한반도 정세가 그 어느 때 보다 불안정한 요즘,
그 의미는 한층 각별합니다.

해나 킴을 처음 만난 건
독도관련 세미나 행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참석자들을 안내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명문대 대학원에 재학중인 재원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는 지난 24일 대학원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7월26일로 예정된 한국전 참전 희생자 추모 행사 준비 회의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날 밤,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하던 그를 설득하느라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7월26일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 계단 앞에서 개최된
제2회 한국전쟁 참전 희생자 추모 및 평화 기원 행사장.
이날 행사는 6·25전쟁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오후 6시25분에 시작됐으며,
휴전일(7월27일)에 맞춰 오후 7시27분 촛불에 불을 붙였습니다.
휴전일을 미 국경일로 지정하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인정법안’이 미 의회를 통과하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7일을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일로 선포한 직후여서
이날 행사는 축제를 방불케했습니다.
아카펠라 공연과 태권도 시범, 국악 한마당이 어우러졌지요.


동분서주하며 행사를 이끌던 해나 킴은
행사 말미에 참석자들과 함께 아리랑을 부르면서
끝내 눈물을 보였습니다.



                

자랑스런 한국인, 해나 킴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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