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로드아일랜드주 결혼협회(RIMC)는 지난 18일(현지시간) 로드아일랜드 주민 중 59%가 동성결혼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동성결혼 합법화 찬성률은 2006년 동일한 여론조사가 시작된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로드아일랜드주는 타 주에서 결혼한 동성 커플도 법적 부부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최근 들어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지난 4일 미 연방 법원이 캘리포니아주의 동성결혼 금지 조치를 위헌이라고 판결한 이후 로드아일랜드주를 비롯한 미 전역에서 동성결혼 합법화 운동이 탄력을 받고 있다. 하지만 반대 진영의 반발도 만만치 않아 미 전역은 동성결혼 합법화를 둘러싼 전쟁터가 되고 있다. 보수 진보 세력 간에 낙태 전쟁 이후 최대의 이슈 전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동성결혼 논쟁 진앙, 캘리포니아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동성결혼 허용 문제를 놓고 찬반 양측의 승부가 여러 번 엇갈렸다.

2000년 주민들이 투표로 결혼을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 규정한 ‘연방 결혼보호법’을 채택했을 당시만 해도 동성결혼 반대론자들이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동성결혼 지지자인 개빈 뉴섬 샌프란시스코 시장은 2004년 동성 커플에 대한 결혼 인증서를 발급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동성결혼 합법화 문제의 공론화에 나섰다.

이후 주 대법원은 2008년 5월 동성애자가 제기한 소송에서 주 정부의 동성결혼 금지 조치를 뒤집는 판결로 동성결혼 찬반 진영의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켰다. 주 정부는 이 판결에 따라 그해 6월부터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합법화했다.

그러자 동성결혼 반대 진영은 11월 미 대선 투표와 함께 동성결혼을 금지하는 주 헌법 수정안(주민 발의 8·Proposition 8)을 주민 투표에 부쳐 52%의 찬성으로 수정안을 채택했다.

이로써 동성결혼이 다시 금지됐다. 주 대법원은 지난해 5월 이 같은 헌법 수정안을 지지하는 판결로 찬반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다만 수정안 발효 이전에 결혼한 동성 커플들의 법적 부부 관계는 예외로 인정했다.

◆동성결혼 판결

주민발의 8호는 미 연방 샌프란시스코 법원의 본 워커 판사에 의해 번복됐다. 워커 판사는 지난 4일 “주민발의 8호는 동성 커플인 원고들의 헌법상 평등 보호와 공형한 절차를 밟을 권리를 침해했다”고 판시했다. 이 판결은 동성결혼 반대 진영의 불복으로 항소심으로 넘겨져 법적 공방 2라운드가 시작됐다. 하지만 1심 판결만으로도 그 의미는 작지 않다.

무엇보다 이번 판결은 동성결혼 반대 진영의 전략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다. 반대 진영은 오는 11월 중간선거 때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아이오와주 등에서 캘리포니아의 주민 발의 8호와 같은 방식의 주민 투표를 밀어붙이려 했으나 연방 법원이 주민 발의 8호 자체를 위헌이라고 판결하면서 이 계획이 무산될 지경에 놓였다. 1심 판결이 미 연방 항소심과 대법원에서도 유지된다면 지난 십여년간 진행된 동성결혼 합법화 논쟁은 획기적 전기를 맞게 된다. 지난 2월 ABC 방송-워싱턴포스트 여론조사에 따르면 40세 이하 연령층에서는 10명 중 6명꼴로 동성결혼 합법화를 찬성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동성결혼 반대 진영의 맞불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5개 주와 워싱턴 DC를 제외한 나머지 주들은 대부분이 동성결혼을 금지한 ‘연방 결혼보호법’을 채택하고 있다. 31개 주는 아예 주민투표로 동성결혼 금지를 주 헌법에 못 박았다. 이런 확고한 법적 기반 위에서 동성결혼 반대 진영은 여전히 미국 사회의 주류를 점하고 있다.

동성결혼 반대파가 캘리포니아주 주민발의 8호를 무효화한 미 연방 샌프란시스코 판결에 분개하는 것은 주민들의 총의가 판결 하나로 부인됐기 때문이다. 동성결혼 반대 운동을 이끌고 있는 ‘결혼을위한조직’의 브라이언 브라운 국장은 최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심지어는 동성결혼 찬성론자 중에서도 주민의 52%가 찬성한 조치를 판사가 명령으로 뒤집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면서 “주민들이 과반수로 결정한 조치를 번복하려면 투표나 입법을 통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성결혼 실태, 주마다 제각각

미국의 동성결혼 합법화 실태는 50개 주가 모두 다르다. 미국인에게 동성결혼 문제는 종교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가치가 충돌하는 복합적 갈등 이슈이기 때문이다. 경로는 다르지만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주는 매사추세츠, 아이오와, 코네티컷, 버몬트, 뉴 햄프셔 등 5개 주다. 올 초 워싱턴 DC가 이들 5개 주의 동성결혼 합법화 흐름에 동참했다.

뉴욕주 등은 동성결혼을 허용하지 않지만 이미 다른 주에서 법적 부부가 된 동성 커플을 부부로 인정해 준다. 동성결혼은 금지됐지만 동성 커플을 ‘시민 결합’(civil union)으로 보거나 ‘파트너’ 형태로 간주해서 법적 부부들에게 제공되는 혜택의 일부나 전부를 제공하는 주들도 있다. 캘리포니아와 콜로라도, 워싱턴, 오리건, 네바다, 위스콘신, 메인, 로드아일랜드, 뉴저지, 하와이주 등이다.

미국의 부부들은 사회보장과 세금, 의료보험 등 각종 분야에서 다양한 혜택을 누린다. 동성애자들이 부부가 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이면에는 이런 경제적 요인도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동성결혼 합법화 논쟁은 코앞에 닥친 미국 중간선거 후보자들에게도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미 연방 샌프란시스코 법원 판결로 촉발된 동성결혼 논란이 선거에 미칠 영향을 저울질하며 대응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판결 직후 “동성애자들이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하지만 동성결혼 합법화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 연방 차원에서 최초로 샌프란시스코 법원이 동성결혼 금지 조치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기는 했으나 연방법상 결혼은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 규정돼 있는 현실을 고려한 절충 입장이랄 수 있다.

 데이비드 엑설로드 백악관 선임고문은 MSNBC에 출연, “오바마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결혼 문제는 각 주가 판단해서 결정해야 할 사안이며 캘리포니아주 주민들이 투표로 결정한 동성결혼 금지조치를 존중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공화당은 한층 더 난감한 처지에 놓였다. 동성결혼 이슈 자체를 쟁점화하는 것이 선거 전략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최근 미주리주 켄자스시티에서 열린 공화당 전국위(RNC) 회의는 중간선거 이슈를 동성결혼이나 이민 등과 같은 민감한 사안으로 확대하는 것은 잘못된 전략이라는 입장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민주당도 동성결혼 합법화 문제에서는 전폭적인 지지 입장을 공식화하지 못하고 있다. 자칫 동성결혼 합법화 진영에 가담했다가 부동층 유권자들의 이탈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동성결혼 찬반 진영은 모두 이번 중간선거를 동성결혼 찬반 대리전으로 삼을 태세여서 일선 선거현장에서는 당 지도부의 전략과는 무관하게 동성결혼 문제가 선거 쟁점으로 등장할 전망이다.

동성결혼 지지 정치행동위원회(PAC)는 오는 중간선거에서 동성결혼 반대 후보자에 대한 낙선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캘리포니아주 부지사직에 출마한 개빈 뉴섬 샌프란시스코 시장 캠프에는 동성결혼 지지자들이 몰려가 앞다퉈 선거운동 지원에 나서고 있다.

반대로 동성결혼 반대 진영은 뉴섬 후보 같은 동성결혼 찬성후보들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선거 전략가인 로버트 쉬럼은 “미국인들의 인식이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쪽으로 다소 진보화한 만큼 동성결혼 문제는 이번 중간선거에서 처음으로 전국적인 문화전쟁 양상을 띨 것”이라고 전망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투자회사 버크셔 헤서웨이의 워런 버핏 회장은 첫번째 부인인 수잔과 1977년 사실상 별거 상태에 들어갔다. 수잔은 주식에 미친 버핏이 가정에 좀 더 충실하길 원했다고 최근 출간된 버핏의 자서전은 적고 있다. 그는 수잔과 별거하던 기간에 16살 연하의 아스트리드 멘크스와 살림을 차렸으나 수잔과 법적으로 이혼하지는 않았다. 버핏은 수잔이 암으로 숨질 때까지 법적 부부 상태를 유지했다. 버핏과 멘크스는 수잔이 2004년 암으로 숨진 뒤에야 결혼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추상표현주의 화가 윌리엄 드 쿠닝도 그의 부인이 1989년 죽을 때까지 34년 동안 이혼 수속을 밟지 않은 채 별거했다.

미국 사회에서 이혼 대신 별거를 선택하는 부부들이 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최근 보도했다. 버핏이나 쿠닝 같은 유명 인사들 만의 얘기는 아니다.

미 버지니아주에 살고있는 존 프로스트와 그의 아내는 25년 차 부부이나 애정이 식은 지 오래다. 두 부부 사이의 결혼 생활은 2000년 프로스트가 테네시주 녹스빌로 파견 발령을 받으면서 사실상 끝이 났다. 혼자 녹스빌로 떠난 프로스트는 이혼을 생각했으나 별거 생활이 지속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부부 모두 별거 생활에 익숙해졌고 함께 살 때 보다 더 잘 지내고 있다”면서 “당분간 이혼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건강보험이나 세금 문제에서도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말했다. 이혼 전문 변호사인 린 골드 비킨은 “이혼은 하지 않고 서로 친구 처럼 지내면서 각자 생활을 꾸려가는 별거 부부들이 도처에 있다”면서 “그들은 함께 살기를 원치 않을 뿐, 상대방에 대해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 부부들”이라고 말했다. 이혼 변호사인 실레스트 리버시지는 “이혼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그만 두고 별거하는 부부들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이런 별거 부부들이 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경제적 요인이다.

금융위기 와중에 집 값이 폭락하고 건강보험료 등이 치솟으면서 사이가 멀어진 부부들이 선뜻 이혼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배우자 일방이 경제적 능력을 갖지 못했을 경우, 이혼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이혼 보다 별거를 선택하는 부부들도 많다고 신문은 전했다.

배우자가 메디케어(노인 의료보험) 수혜 연령이 될 때까지 법적인 부부 관계를 유지하고 지병이 있는 배우자를 위해 자신의 보험을 이용할 수 있도록 이혼 대신 별거를 선택하는 식이다. 연방법에 따르면 부부가 결혼 생활을 10년 동안 유지하면 전 부인이나 전 남편도 배우자의 사회보장 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이혼 변호사들은 우호적 이혼 소송에서 해당 법정 기간을 채울 때까지 이혼 대신 별거를 하도록 당사자들에게 조언을 하고 있다.

하지만 생활은 따로 하면서 법적인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데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뉴욕주 처럼 별거 배우자에게도 재산 상속을 인정하는 주에서는 한 쪽 배우자가 숨진 뒤 재산 분쟁이 일어날 소지가 있다. 별거 중에 한 쪽 배우자가 외국으로 나가거나 실종됐을 때, 이혼 절차를 진행시키기 힘들다는 어려움도 있다. 혹시라도 복권에 당첨되면 별거 중인 상대 배우자와의 공동 재산으로 간주된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미국 정치권에 ‘여풍(女風)’이 거세게 불고 있다. 오는 11월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전례 없이 많은 여성 후보들이 미 연방 의회와 주 의회, 주지사 자리에 도전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민주, 공화 양당의 후보 경선 과정에서 남성 후보들을 누르고 선출돼 2010년 중간선거가 역대 최대의 여성 당선자를 배출하는 선거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이 유력한 대선 후보로 부상하고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가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발탁된 이래 미 정치권에서 여성의 영향력이 날로 커지고 있다. 미 정치권에 불어닥친 ‘여풍’의 실체와 그 배경을 진단해 본다.



◆2010년 미 중간선거, 여성 후보 약진=미국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는 여성의 정치권 진입이 힘든 주로 꼽힌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는 미 연방 상원(2석)과 하원(6석), 주 상원의원(46석)이 모두 남성으로 채워져 있다. 주지사와 검찰총장 등 고위 선출직에서도 여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 여성정치센터(CAWP)가 미 50개 주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성 정치 진입 평가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는 꼴찌를 차지했다. 바로 이런 곳에서 지난달 23일 정치적 지각 변동을 예고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공화당 주지사 후보 경선에서 주 하원의원인 인도계 여성이 4선 관록의 연방 하원의원 남성 후보를 압도적 표 차로 누르고 당선된 것이다. 이변의 주인공인 니키 헤일리가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꺾을 경우,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첫 여성 주지사가 된다. 미 언론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유리 천장’(여성 진입 장벽)이 깨졌다”면서 헤일리의 승리를 대서 특필했다.

◇칼리 피오리나(왼쪽)와 니키 헤일리.
헤일리처럼 여성 후보들이 ‘유리 천장’ 돌파에 나선 주는 캘리포니아 주와 뉴멕시코 주, 미네소타 주 등 8개 주에 이른다고 미 일간 USA 투데이가 집계했다. 이들 주는 지금껏 여성 주지사를 배출하지 못한 곳이다. 지난달 8일 실시된 캘리포니아 주 공화당 예비선거에서는 멕 휘트먼 전 이베이 CEO가 공화당 주지사 후보로 선출됐다. 뉴멕시코 주에서는 2002년 첫 여성 부지사로 당선됐던 민주당의 다이앤 데니시 후보가 주지사 선거에 도전장을 냈으며 공화당의 수전 마르티네스 후보도 여성이다. 메인 주 상·하원 의장을 동시에 지낸 최초의 여성 정치인인 엘리자베스 미첼 의원은 메인 주의 민주당 주지사 후보로 선출됐다.

미 연방 상·하원 예비선거전에서도 여성 후보들은 눈부신 활약상을 선보이고 있다.

칼리 피오리나 전 휴렛패커드 CEO는 캘리포니아 주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 경선에서 스탠퍼드·UC 버클리 교수 출신인 톰 캠벨 전 연방 하원의원을 상대로 기적 같은 역전승을 일궈냈다. 이로써 11월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 본선에서는 공화당의 피오리나 후보와 민주당의 바버라 복서 상원의원의 ‘여·여(女·女) 대결’이 펼쳐지게 됐다. 아칸소 주의 블랑슈 링컨 상원의원은 민주당 상원의원 후보 경선에서 아칸소 주 부주지사의 거센 도전을 물리치면서 여성 정치인 파워를 유감 없이 증명했다.

◆여성 이미지 탈색한 여성 후보=2010년 미 중간선거를 앞두고 불어닥친 ‘여풍’의 배경엔 역설적으로 ‘여성’이 없다. 지난달 8일 공화당 예비경선에서 각각 11월 중간선거 공화당 주지사와 상원의원 후보로 선출된 CEO 출신의 멕 휘트먼, 칼리 피오리나는 선거 기간 ‘여성’ 이미지 대신 ‘성공한 CEO’ 이미지로 승부했다. 휘트먼은 1998년 매출 400만 달러에 불과한 벤처 회사인 이베이를 연 매출 80억 달러(2008년 기준)의 회사로 키워내며 정보기술(IT) 업계의 성공 신화를 썼다. 피오리나 또한 휴렛패커드 CEO 재직 시절 ‘실리콘 밸리의 여제’라는 별칭을 얻었다. 

◇멕 휘트먼                        ◇바바라 복서
휘트먼은 유세 중에 여성이라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않았으며 남편이나 자식들을 대동하지 않은 채 주로 혼자 선거 운동을 전개했다고 미 언론은 전했다. 피오리나도 여성 후보로서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대신 강인한 정신력과 결단력을 지닌 후보라는 점을 유권자들에게 인식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휘트먼은 당선 연설을 통해 “워싱턴의 기성 정치인들은 일자리 창출 방법과 균형예산 집행 방법 등 문제 해결 능력을 지닌 ‘현실 세계’ 출신의 비즈니스 우먼들과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달 8일 민주, 공화 양당의 여성 후보 약진 결과를 보도하면서 “후보들의 성별은 더 이상 선거전의 쟁점이 되지 않고 있다”면서 “2010년 선거전에 나선 여성 후보들은 놀랄 만한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커 맘’이나 ‘하키 맘’을 외치며 여성 이미지를 강조하는 여성 후보들은 좀체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는 것이 미 언론의 진단이다.

◆2010년 선거는 ‘여성의 해’?=미국 여성정치센터에 따르면 올 6월 현재 미 연방 상원의원직에 도전한 여성 후보는 23명, 하원의원직 도전 후보는 216명, 주지사직 도전 후보는 23명으로 집계됐다. 이 같은 수치는 역대 선거의 여성 후보 숫자를 크게 상회하는 것이다. 현재 연방 상·하원 의원 중 여성은 각각 17명, 76명이다. 여성 주지사의 경우, 애리조나 주의 잰 브루어(공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베브 퍼듀(민주), 워싱턴 주의 크리스 그레고이어, 코네티컷 주의 조디 렐(공화), 미시간 주의 제니퍼 그랜홀름(민주), 하와이 주의 린다 링글(공화) 주지사 등이 현역이다. 올해에는 이들 외에도 캘리포니아 주 등 8개 주에서 여성 후보들이 선전하고 있다.

연방 상·하원의 여성 의원 수는 1917년 첫 여성 하원의원이, 1921년 첫 여성 상원의원이 배출된 이래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역대 최대의 여성 후보자가 뛰고 있는 올 중간선거에서는 미 의회의 여성 의원 수가 역대 최고치에 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바야흐로 미 정치권에 여성 시대가 개막되고 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한국전쟁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찰스 랑겔(민주·뉴욕·사진) 미 하원의원에게 한국전쟁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18세의 나이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랑겔 의원은 6월 10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미 의회 내 대표적 지한파 의원인 그는 지난해 ‘참전용사 인정 법안’을 대표 발의해 한국전 휴전일에 미 전역의 관공서에서 조기가 게양되도록 했고, 올해에는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내용의 결의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6·25전쟁 60주년 기념으로 유엔 참전 16개국 순회에 나선 리틀엔젤스 단원들의 워싱턴DC 공연을 계기로 의원회관 사무실과 공연이 열린 케네디센터에서 그를 만나 한국전쟁 얘기를 나눴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복합적이다. 함께 참전했다가 전사하거나 실종된 전우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다른 한편으로 수만 명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국이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로 발전한 모습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한국전쟁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사지에 놓였을 때 만약 살아 돌아간다면 그 은혜를 절대 잊지 않고 열심히 살겠다고 신에게 기도했다. (1950년 9월 ‘군우리 전투’) 당시 나는 수만명의 중공군들에게 포위돼 ‘이제 죽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기적같이 생환했다. 그러고 나는 그 기도를 지켰다. 전장에서 돌아와 참전용사 혜택을 받아 대학(뉴욕대)과 로 스쿨(세인트존스대)을 마칠 수 있었다. 졸업 후 변호사와 연방검사보를 거쳐 뉴욕주 하원의원과 연방 하원의원(20선)이 됐다. 한국전쟁에서 살아오지 못했다면 그 어느 것도 이뤄질 수 없는 일들이다. 한국전쟁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한국전쟁 당시 랑겔은 미 보병 2사단 포병대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50년 9월 군우리 전투에서 포탄의 파편으로 상처 속에서도 3일 동안 적군의 포위망을 뚫고 40여명의 전우를 이끌고 무사 귀환했다. 미군은 그의 용기를 기리기 위해 퍼플 훈장과 청동 성장, 종군 기념 청동 성장, 대통령 표창장을 수여했다. 한국 정부도 대통령 표창장을 수여했다)

                                                         <한국전 참전 당시의 랑겔. 그의 의원 사무실 벽에 걸려있다>

―한국전쟁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나 사건이 있는가.

“18살의 나이에 같은 또래 전우들과 한국으로 갔다. 함께 갔지만 같이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이 많다. 그들을 생각하면 고통스럽다. 생환한 이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떴다. 이런 나에게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찾아온 리틀엔젤스는 하나님이 보낸 특별한 선물이다. 감사의 뜻을 전하러 직접 찾아온 리틀엔젤스를 미국의 수도에서 환영하게 돼 자랑스럽다. 참전용사들을 명예롭게 한 리틀엔젤스에게 감사를 표하며 한미 양국에 신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원한다.”

  •  6·25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나라는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고 민주주의를 꽃피웠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 이제 국제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산업화와 함께 민주화에서도 상당한 진전을 이뤄 선진 민주사회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러나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일단락된 6·25전쟁은 여전히 많은 사람의 가슴에 응어리져 남아 있다. ‘민족 분단’의 비극으로 신음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남북 대치는 계속되고, 이산가족·국군포로·평화협정 등은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세계일보는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전쟁의 아픔과 남은 과제에 대해 3부로 나눠 살펴본다.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 중 하나인 ‘펀치볼 전투’의 용장에게 한국전은 현재진행형이었다. 그가 성공적인 인생을 설계할 수 있게 한 주요 자양분이었다. 미국 굴지의 로펌인 스텝토 & 존슨의 회장을 역임한 존 놀런(83) 변호사 얘기다. 워싱턴 DC 듀폰 서클 인근에 위치한 스텝토 & 존슨 로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한국전쟁의 의미를 물었다. 그는 참전 경험을 토대로 ‘펀치볼을 향한 진군(The Run―up to the PUNCH BOWL·사진)’을 저술했다.

     

  • ―한국전쟁은 어떻게 참전하게 됐나.

    제1해병사단 소속 보병 소총 소대장으로 난생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전쟁 발발 2년째인 1951년 4월이었다. 부산에 상륙한 우리는 계속 북쪽으로 진격했으나 그해 7월부터 동해안 인접 지역(강원도)에서 한국전쟁 최대 격전 중 하나인 펀치볼 전투가 전개됐다. 그때부터 전선은 교착됐고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의 대치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그해 12월 미국으로 돌아온 후 지금까지 한국은 다시 찾지 못했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을 다시 만났다. 그들의 용맹은 공포를 자아낼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한국전쟁은 어떤 의미가 있나.

    한국전쟁 참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특히 펀치볼 전투는 엄청난 사상자 숫자가 말해주듯, 매우 위험한 전투였다. 내가 속했던 제1해병사단에서만 51년 8월 한 달 동안 2500여명이 전사했다. 한 달 전사자로는 50년 12월 장진호 전투와 51년 6월 중공군 반격 전투에 이어 가장 많은 숫자였다.

    이 같은 전투에선 간발의 차이로 생사가 갈린다. 정찰 중에 바로 내 앞에 있던 동료 병사가 죽은 적도 있다. 그와 나의 위치가 바뀌었더라면 나는 죽고 그가 전쟁 체험기를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웅이 되거나 희생자가 되는 일도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러한 경험들을 겪게 되면 인간은 겸허해진다. 군복을 벗고 선택한 법률 공부도 매우 도전적인 일이었다. 힘들거나 좌절감이 몰려올 때 한국전쟁 당시의 경험을 떠올렸다. 그러면 지금 겪고 있는 어떤 곤란과 어려움도 그리 큰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펀치볼 전투에 대해서 말해 달라.

    펀치볼은 삼팔선 북쪽으로 20마일 정도 부근에 위치한 화산 분화구 지역으로서 험준한 능선으로 둘러싸여 이 능선을 장악하는 쪽이 전술적으로 매우 유리했다.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는 요충이었다.

    미국 제7해병대와 한국 해병대가 북한군과 고지 점령과 탈환을 반복하며 혈전을 치르는 동안 우리는 후방에서 대기하다가 8월 초 7해병대를 지원하기 위해 펀치볼로 이동했다.

    7해병대는 749고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대포와 박격포를 동원해 맹폭을 가했다. 그 후 며칠 동안 잠도 자지 못했고 먹을 수도 없었다. 고지 탈환을 위해 한 차례씩 공격을 감행할 때마다 전사자가 속출했다.

    북한군의 수류탄에 몸을 던져 동료를 살리고 전사한 전우 에드워드 고메즈를 잊을 수 없다. 그는 죽어서 영웅이 됐고, 생전의 소원대로 명예훈장을 받았다. 다음 날 먼동이 트기 전까지 그가 속했던 해병1사단 2대대원 중 16명이 함께 전사했고 109명이 부상했다.

  • ◇한국전쟁에 미 해병대 소위로 참전했던 존 놀런 변호사가 미 워싱턴 DC에 위치한 자신의 로펌 사무실에서 참전 경험과 소회를 밝히고 있다.

    ―군인에게 전쟁 체험은 어떤 느낌인가.

    한국전쟁 이후 전쟁과 관련된 책들을 읽어보기도 하고 베트남전쟁 지역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전혀 전쟁 체험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나의 전쟁 체험을 기록으로 남기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전쟁 중의 군인은 우주로부터 온전히 고립된 채 자기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 자체가 다르다. 순간을 살아가고 전투지역에만 고도로 집중하게 된다. 인간관계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전투가 한창이던 51년 여름, 미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한국전쟁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담긴 편지를 받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질문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소 웃기는 질문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군인에게 그의 질문은 다른 행성에서 전달된 메시지와 같았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과 북한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남북한을 어떻게 평가하나.

    1950년대엔 남북한 모두 논과 밭뿐이었다. 이후 한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며 동아시아의 등대와도 같은 존재가 됐다. 하지만 북한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다. 김정일 북한 정권은 주민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북한은 실패한 국가다.

    한국전쟁은 미국 독립전쟁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미국이 독립전쟁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웠듯이, 한국전쟁도 어떤 측면에서는 한국이 새로운 나라로 거듭나는 발판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글·사진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 존 놀런 변호사가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대 소위로 참전했던 '펀지볼 전투'는 현재의 휴전선을 결정한 한국전쟁 최대 격전 중 하나이다.

    강원도 동부전선 최전방에 위치했던 펀치볼 전투 지역은 화산 폭발에 따른 분지 지형으로서 가칠봉과 도솔산, 대암산 등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1951년 여름에서 가을 사이 40여일 동안 주인이 6번이나 바뀌는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펀치볼마을의 전경. 펀치볼마을의 지명은 6·25전쟁당시 외국의 종군기자가 가칠봉에서 내려다본 노을진 분지가 칵테일 유리잔 속의 술빛과 같고, 해안분지의 형상이 화채그릇(Punch Bowl)처럼 생겼다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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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년 봄 한국전에 투입됐던 놀런 변호사는 펀치볼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치러낸 펀치볼 전투의 산 증인이다. 그는 이 전투를 마친 뒤 본국으로 귀대했다.

    그로부터 50여년이 흐른 2006년, 놀런 변호사는 당시의 전투 경험을 ‘펀치볼을 향한 진군’이란 회고록에 담아냈다. 그는 집필 동기와 관련해 “펀치볼 전투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라면서 “세월이 흐른 뒤 당시 전투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본국의 가족들에게 정기적으로 보낸 편지 등을 토대로 펀치볼 전투를 일기체로 풀어냈다. 북한군에 대해서는 “중국군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죽을 때까지 진지를 고수하는 역할을 맡은 북한군들은 훈련은 덜 됐지만 전투에는 치열했다”면서 “이탈 병사를 총살하는 북한군 정치위원들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적었다.

    그가 소개한 미 해병대원들의 군기와 전우애는 수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이름도 생소한 ‘코리아’에서 어떤 심정으로 전투에 임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해병대원을 다른 젊은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요인은 바로 규율과 자신보다 남을 앞세우는 해병대 전통”이라면서 병사들이 먼저 치료받을 수 있도록 뒷줄에서 기다리다 전사한 장교의 사례를 소개했다.

    또 하나는 ‘그 어떤 해병도 뒤에 남기지 않는다’는 전통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부상자는 물론이고 전사자까지도 끝까지 챙기는 전통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하는 해병 정신을 만들어냈다고 놀런 변호사는 썼다.

    그는 “내가 소속된 베이커 중대는 탁월한 리더십 덕분에 최소의 희생으로 임무를 완수하곤 했다”면서 “다른 중대에서는 후방 배치를 원하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베이커 중대에선 아무도 떠나려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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