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부성향 증오단체 전역서 ‘우후죽순’

1995년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정부 청사 테러의 온상이 됐던 반정부 성향의 ‘증오 단체’들이 최근 미 전역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증오 단체는 무장조직인 ‘민병대’(militia)를 이끌고 반정부 투쟁을 기도하는 무장단체에서 총기 소지 옹호를 위한 합법적 조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우후죽순처럼 자라나 미국 사회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정부는 지난달 19일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청사 테러 사건 15주년을 맞아 증오 그룹에 대한 특단의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미국 내 증오 그룹의 실태를 추적해 본다.



◆증오 단체 급증= 235년 전인 1775년 4월19일, 자유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식민지인들은 민병대를 구성, 매사추세츠 주 렉싱턴에서 처음으로 영국에 맞서 총을 들었다. 그날 이후 4월19일은 반정부 민병대 운동가들의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민병대 운동에 동조한 티머시 맥베이가 1995년 폭탄이 적재된 트럭을 몰고 오클라호마 연방정부 청사로 돌진, 무려 168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날도 바로 이날이다.

미 정부와 국민들이 오클라호마 테러 사건 15주년을 추도했던 지난달 19일, 미국 워싱턴 DC에서는 총기 소유권을 보장한 ‘수정헌법 2조’ 옹호 대회가 열렸다. 카키색 위장복에 총기를 휴대한 수천명의 총기 소유 옹호론자들은 ‘내셔널 몰’의 워싱턴 기념탑 인근에 모여 연방정부의 총기 규제 움직임을 성토했다.

이날 대회는 주류 보수 진영에서도 기피하는 증오 단체 조직원들이 주도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이 애리조나주 보안관 출신으로 민병대 운동의 ‘대부’로 통하는 리처드 맥이다. 맥이 추종자들에게 보낸 “보안관이 주민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연방정부 공무원을 체포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영상 메시지는 증오 단체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이민에 반대하는 인종주의 성향의 증오단체는 히스패닉 이민자들의 증가가 미국 남서부를 재탈환하려는 멕시코 정부의 전략이라는 음모론을 믿고 있다.

최근 결성된 증오 단체 ‘오스 키퍼’는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고 전체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연방정부로부터 미국 헌법을 지켜낸다는 강령을 신봉하고 있다. 일부 증오 단체는 9·11 테러를 미 연방정부의 자작극으로 믿고 있다.

미국 내 증오 단체 동향을 추적 중인 비영리 인권 단체 ‘서던 파버티 로 센터’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증오 그룹이 2000년 602개에서 2009년 926개로 급증했다고 밝혔다. 민병대 조직을 갖춘 ‘애국주의 단체’는 2008년 149개에서 2009년 512개로 배 이상 늘었다. 빌 클린턴 정부 시절 미 전역에서 발호했던 증오 단체들이 오클라호마 테러 사건에 따른 여론의 냉대와 정부의 대대적인 단속, 보수적인 부시 행정부 출범 등의 요인으로 힘을 잃었다가 소생하고 있는 양상이다.

◆흑인 대통령 탄생이 기폭제= 서던 파버티 로 센터는 증오 단체 증가 배경과 관련해 “미국 내 소수 인종의 증가와 정부 부채 증가, 경제침체, 구제금융, 오바마 정부의 큰 정부 정책 등에 대한 분노가 증오 단체들의 태동에 기여하고 있다”면서 “특히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탄생은 증오 단체 증가의 기폭제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증오 단체들이 처음으로 미국의 관심사로 대두됐던 1990년대만 해도 이들의 공격 대상은 연방정부였다. 극우 민병대 조직인 ‘브랜치 다비디안’은 1993년 클린턴 정부의 총기 규제와 환경 규제 정책에 반감을 품고 대 정부 투쟁에 나섰다가 조직원 76명이 텍사스 와코에서 몰살됐다.

하지만 최근 생겨나는 증오 단체들은 연방정부와 함께 흑인과 히스패닉 이민자 등을 공격 대상으로 선정하는 인종 증오 양상을 띠고 있다.

증오 단체 전문가인 래리 켈러는 “보수 진영의 정치인이나 보수 언론도 증오 단체를 부추기고 있으며, 인터넷 등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도 증오 단체 확산의 요인이 되고 있다.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에는 민병대 캠프를 소개하는 영상 등이 공공연히 유포되면서 새로운 조직원을 유혹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 국토안보국은 지난해 펴낸 보고서에서 “지난 2년 동안 50개가 넘는 민병대 조직이 새로 태동했으며, 90년대 중반처럼 총기 규제를 우려한 총기와 탄약 사재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서던 파버티 로 센터의 마크 포톡 정보담당국장은 “현 상황은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청사 테러 직전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면서 “제2의 오클라호마시티 테러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1995년 168명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를 당한 미 오클라호마 연방정부 청사(왼쪽)와 지난 2월 소형항공기 충돌로 화염에 휩싸인 텍사스주 오스틴 연방 국세청 건물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증오 범죄 기승 =미 연방수사국(FBI)은 지난 3월 말 대 정부 무장투쟁을 기도한 혐의로 기독교계 민병대 ‘후타리’ 대원 9명을 체포했다. 미시간주를 근거지로 한 이들 민병대원은 자신들을 연방정부의 음모에 맞서 최후의 전쟁을 벌이는 기독교 전사로 믿고 연방정부의 하수인인 경찰을 무차별적으로 사살한 뒤 이를 계기로 미 전역의 민병대원들과 함께 무장 투쟁을 전개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앞서 3월 초에는 연방정부에 적대감을 품은 30대 남성이 미국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 입구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사살됐으며, 그 전달에는 정부에 반감을 지닌 50대 남성이 소형 항공기를 몰고 텍사스주 오스틴 소재 연방 국세청 건물로 돌진해 자폭한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6월에는 반유대주의자인 80대 남성이 워싱턴DC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경비원을 사살했다. 같은 해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는 반유태인 증오 단체 조직원이 오바마 정부의 총기 몰수 정책을 중단시킨다는 명분으로 경찰관 3명을 살해했고,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는 인종주의 증오단체 조직원이 아프리카 이민자 2명을 살해했다.

오바마 정부 출범 직후에는 흑인 대통령 당선에 분노한 백인우월주의자가 방사능 물질을 이용해 ‘더러운 폭탄’(dirty bomb)을 제조하다가 체포됐다.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태동된 ‘티 파티 운동’에도 증오 단체 조직원들이 일부 가담하고 있는 것으로 미 정부는 파악하고 있다. 


미국 증오 단체 전문가들은 본지와의 이메일 인터뷰와 언론 기고 등을 통해 제2의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정부 청사 테러를 막기 위한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의 현명한 대응을 권고했다.



미국 내 증오 단체 역사를 다룬 저서 ‘공포의 집단’을 저술한 데이비드 버넷 시러큐스대 교수(역사학·사진)는 “2010년의 미국은 실업률이 10%에 육박, 수백만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미국이 쇠락해가고 있는 두려움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흑인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당 정부는 건강보험과 환경, 에너지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극우 과격파 그룹이 발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또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 일상화하면서 미국 내에서 무장 테러를 자행하려는 단체에 대한 미국민들의 인내심도 과거보다 약해졌다”고 밝혔다.

로버트 처칠 하트퍼드 대학 교수(역사학)는 “지난 3월 말 적발된 민병대 조직 ‘후타리’가 전형적인 증오 단체라면 정부가 증오 그룹에 대한 일망타진에 나서야 할 때이나 여기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서 “93년 텍사스 민병대 ‘브랜치 다비디안’ 조직원 집단 사망 사건에서 예시됐듯이 정부의 탄압책은 뜻하지 않는 비극을 낳을 수 있고, 이를 계기로 폭력과 보복이 반복되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는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1992년 백인우월주의자인 루디 리지 가족이 연방수사국(FBI) 요원에 의해 사살된 사건을 소재로 소설을 쓴 제스 월터는 “우파 극단주의자들의 부활은 경제적 고통과 정치인들의 선동적인 언사, 미 중산층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는 절박감 등이 어우러진 결과”라면서 “정치인들은 자극적인 발언을 삼가하고 폭력적인 극단주의 그룹들과 거리를 둬야 한다”고 촉구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최근 기자는 미국 워싱턴 취재 현장에서 한국의 높아진 위상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첫번째 현장은 지난달 23일 워싱턴
DC에서 개최됐던 G20(주요 20개국)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였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공동의장 자격으로 주재한 이번 회의에서 한국은 G20 국가의 이해를 수렴한 공동 코뮈니케(성명서) 작성을 주도했다. 실무작업을 총괄했던 신재윤 재정부 차관보는 “국제회의에서 받아쓰기만 하다가 직접 쓰려니 힘들었다”고 농담 조로 얘기했지만, 한국은 이번 회의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쿼터 재조정 시기를 앞당기자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등 오는 11월 G20 서울 정상회의 개최국으로서의 리더십을 십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참석자들 스스로도 과거와는 달라진 국제사회의 ‘한국 대접’에 격세지감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윤증현 장관은 지난달 24일 워싱턴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여간해선 양자 면담에 응하지 않는 티머시 가이트너 미 재무장관과의 면담 장소에 갔더니 성조기와 태극기를 걸어놔 매우 흐뭇했다”며 “국민이 이룬 국력의 바탕 위에서 G20 재무장관 회의를 주재하는 뜻깊은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를 개최했던 네덜란드가 G20 서울 정상회의에 게스트로 초청해 줄 것을 한국에 요청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이 됐다.
당시 고종의 특사자격으로 일제의 침략성을 폭로하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을 찾았던 이준 열사가 열강들의 냉대 끝에 분사(憤死)한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인이라면 윤 장관의 심경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전날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도 “과거엔 선진국들이 규칙을 정할 때 우리 의견을 묻지도 않았지만 이젠 선진국들이 규칙을 정할 때 우리에게 먼저 물어본다”면서 “세계가 한국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몇 년 전만 해도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과의 면담 일정을 잡기 위해 100번 넘게
메일을 보내며 통사정을 하고도 10분밖에 시간을 얻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메일 몇 번으로 김중수 총재와의 면담이 성사됐다”는 후일담을 전했다.

 두번째 현장은 한국전력이 지난달 21∼22일 워싱턴 DC에서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를 상대로 개최했던 한국형 원자력발전(APR1400) 설계인증 설명회였다. APR1400은 우리가 아랍에미리트(UAE)에 수출한 바로 그 모델이다.

 한국전력 연구원 등으로 구성된 원전 설계전문가 20여명은 설명회에서 미 원자력 인허가 기관인 NRC에서 우리나라 수출형 원전인 APR1400의 설계 특성을 설명하고 설계인증을 위한 향후 추진 일정을 제시했다. 한국 원전사의 산증인인 정근모 한국전력 고문은 지난달 22일 워싱턴 근교 식당에서 기자와 만나 “미국은 설계인증 신청을 3년 전부터 받기 시작했다”면서 “미국이 심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 자체가 큰 의미”라고 말했다.

 NRC의 사전심사 과정을 통과한 업체는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GE, 프랑스 아레바, 일본 미쓰비시 등 4개 업체에 불과하다. 한국이 이들 원전 선진국 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으로 도약한 것이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NRC의 설계인증 획득은 UAE 원전 수주에 이은 한국 원전사의 쾌거로 기록될 것이다. 아울러 한국형 원전의 해외 진출을 촉진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이날 저녁 기자는 정 고문과 그에게서 바통을 넘겨받은 신진 연구원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해냈다”는 자긍심을 읽을 수 있었다. 서울대 핵 물리학과 72학번인 황순택을 비롯해 연구원들 대부분은 미국 유수 대학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하고 다시 국내로 돌아와 한국 원전 개발에 청춘을 바친 애국자들이었다.


 기자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만하지 말고 더 실력을 키우라”는 조언은 사족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스스로가 “열등생반에 있다가 우등생반 반장을 맡은 처지여서 내공이 부족하다는 점을 절실하게 느낀다”(지경부 관리), “통역 없이 NRC 전문가들에게 우리 기술을 이해시켜야 하는 점에서 다소 힘에 부친다”(한전 연구원)는 겸손한 자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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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올해로 지구상에 ‘핵무기 시대’가 개막된 지 65년이 됐다. 

 미국이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투하함으로써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 낸 이래 핵무기는 2차 대전 이후 확고한 전쟁 억지 수단으로 인식돼 왔다. 핵무기의 가공할 만한 위력은 역설적으로 냉전 시대 핵 보유국들 간의 전쟁을 막아낸 일등공신이 됐다.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를 경쟁하듯 양산한 것은 상대의 선제공격을 받은 이후에도 상대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충분한 핵무기가 있다는
공포감을 안겨주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공포의 균형’에 바탕한 ‘핵 억지력(nuclear deterrence)’이 가동된 셈이다. 이는 냉전 시대 미국 등 주요 핵보유국의 핵심 안보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4월
체코 프라하에서 선포한 ‘핵 없는 세상’ 구상은 냉전 시대의 핵 억지 전략에 근본적 수정을 가하겠다는 선언이다. 핵 기술 이전이 용이해진 시대에 핵 보유국 중심의 핵 억지 전략은 더 이상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유효한 전략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미 시사잡지인 ‘더 네이션’은 ‘핵무기 제로로 가는 길’이라는 제하의 지난 1일자 기사에서 핵 억지 전략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버나드 브로디 박사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같은 이들도 냉전 시대의 핵 억지 전략에 회의를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오바마 정부 들어 진행된 미국 조야의 핵 정책 관련 논의 추이는 미국의 핵 정책이 궤도 수정에 착수했음을 보여준다.


 올 4월은 미국 핵 정책 전환이 여러 국면에서 가시화하는 달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1년 동안 공을 들인 미·러 전략무기감축협정(
START-1) 후속 협정을 타결짓고 오는 8일 프라하를 다시 찾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START-1 후속 협정에 조인한다. 

 

                                               2010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만난 오바마와 메드베데프.

 오는 12일에는 중국을 비롯한 5개 공식 핵무기 보유국과 인도 등 비공식 핵보유국 등 전 세계 40여개국 정상들을 워싱턴 DC로 불러 북한·이란 핵 개발을 포함한 핵 비확산 대책을 논의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이번 주 발표할 ‘핵 태세 검토’ 보고서(NPR)를 통해 전임 정부와 차별되는 핵 정책 기조를 밝힐 예정이다.

 오바마 정부의 핵 정책 기조 변경은 미국의 ‘핵 우산’ 속에 포함된 한국의 안보 환경과 직결돼 있다. 특히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은 오바마 정부가 이번 NPR를 통해 ‘선제 핵공격 포기’ 정책(NFU·No First Use)을 도입하느냐의 여부다. 

 미국의 진보진영에서는 START-1 후속 협정을 통해 미·러 양국이 전략 핵무기 보유 상한을 1550기로 제한한 협정 내용을 평가절하하고 있는 분위기다. “보유 상한을 1550기로 정한 것은 핵무기를 1550기까지 보유할 수 있다는 의미”(조너선 셸 예일대 교수)라는 식의 비판들이다. 이들은 오히려 미국이 “어느 나라든 미국이 핵무기로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진정한 핵 감축, 비확산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오바마 정부의 NFU 정책 채택을 압박하고 있다.

 
그 반대 편에선 미국의 NFU 선언이 현실적으로 북한, 이란 등 핵확산금지조약(NPT) 바깥에서 핵무기 개발에 나선 ‘
불량국가’들과 핵무기 획득을 노리는 테러집단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반박 논리를 펴고 있다. 또한 NFU 선언은 핵 비보유국이 생화학 무기로 군사공격이나 테러를 감행했을 경우, 미국은 재래식 무기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치명적 결함을 지니고 있다고 NFU 반대파는 주장한다.


 다행히 오바마 정부는 NFU 정책의 채택 여부와 관계없이 북한, 이란 등과 같은 ‘불량 국가’들에 대해서는 기존의 핵 정책을 완화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1일 이명박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지난해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확장된 핵 억지력 제공’을 재확인한 것도 같은 맥락의 언급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핵 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오바마 정부는 이번 NPR에서 핵 무기 사용 범위와 조건 등에 관한 기조 변경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변화된 미국의 핵 정책 하에서 미국의 대북한 억지력이 약화되지 않도록 우리 정부의 주도면밀한 대응이 요망되는 시점이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위한 4자회담(남·북한, 미국, 중국)은 1997년 12월 시작돼 1999년 8월 6차 회담까지 이어졌다.

 당시 평화체제 협상의 핵심 쟁점은 협상 당사자가 누구냐와 협정에 무슨 내용을 담느냐는 문제였다. 북측은 휴전협정 당사자가 아니라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을 배제하면서 평화협정 당사자는 북한과 미국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회담 내용에 관해서도 주한미군 철수를 의제에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런 주장들은 한미 양국이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4자회담은 한미 양국과 북한의 시각차가 평행선을 긋고 중국은 미온적 자세로 일관한 탓에 2년 가깝게 입씨름만 하다가 결렬됐다.

 4자회담은 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협상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지를 생생하게 증언했다. 당시 외교부를 출입하면서 4자회담의 전 과정을 취재했던 기자는 회담이 결렬된 이후 평화협정에 대한 순진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 4자회담의 성과라면 성과일 것이라는 칼럼을 썼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흐르면서 4자회담이 남긴 교훈은 점점 퇴색해 갔다.

 2005년 6자회담을 통해 합의된 북핵 9·19공동성명은 ‘직접 관련된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갖는다’는 조항을 담았다. 한국이 주도적으로 마련한 이 조항은 평화협정을 통해 북핵 폐기를 촉진한다는 취지에서 추진됐으나, 일각에서는 북한이 핵 협상과 평화협정 협상을 연계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내놨다. 

 이후 6자회담이 결렬되고 북한의 2차 핵실험까지 진행된 현 시점에서 판단해 보면, 당시 한미(노무현·조지 W 부시 행정부)의 6자회담 협상팀은 비핵화 협상 과정에 평화협상이라는 난제를 하나 더 추가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됐다.

 일각의 우려는 북한이 최근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를 상대로 평화협정 카드를 빼들면서 현실로 나타났다. 북한은 지난 1월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평화협정 협상을 6자회담 복귀 조건으로 공식화했다.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얼마 전 중국을 방문해 “비핵화 협상과 평화체제 협상을 병행한다면 6자회담에 복귀할 수 있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요구와 관련해 한미 양국은 공식적으로 “비핵화 진전이 있으면 별도의 포럼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한국 정부의 고위 당국자는 지난달 27일(미 현지시간) 워싱턴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비핵화 진전의 의미는 2008년 12월 (6자회담이 중단됐던) 상태보다 나아간 조치”라고 설명했다. 6자회담이 북핵 검증 단계에서 중단됐던 점을 고려하면, 북한의 핵 검증 조치만으로도 평화협정 협상이 시작될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지는 언급이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밝혔던 평화협상 조건보다 한층 완화된 입장이다. 부시 대통령은 2007년 9월 호주 시드니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 한미 정상회담 언론회동에서 “나의 목적은 평화협정을 통해 한국전쟁을 종결하는 것”이라면서 “그러러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그의 (핵)무기에 관해 ‘검증 가능하도록 폐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평화체제 조기 수립 요청에 응하면서도 평화협정 조건만큼은 ‘검증 가능한 북핵 폐기’로 분명히 못박았던 것이다.

 지난해 말 스티븐 보즈워스 미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평양 방문과 최근 북중 고위급 인사들의 교차방문 등을 계기로 북핵 협상 재개 움직임이 가속화하는 분위기다. 

 한미 양국의 고위 당국자들 입에서도 6자회담 재개 가능성을 내비치는 언급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북한의 조건 없는 6자회담 복귀라면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6자회담 진전 징후가 북측의 평화협정 공세에 굴복한 결과라면 문제다. 4자회담이 증명했듯이, 평화협정 협상은 6자회담을 촉진하기는커녕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노림수에 휘둘리지 않는 한미 양국 정부의 전략적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지구촌은 알 카에다 테러리스트의 미국 항공기 테러 기도 소동 속에서 2010년을 맞았다. 알 카에다로 대표되는 극단주의 세력의 테러리즘과 ‘불량국가’들의 핵무기 개발, 지구 기후변화 등은 21세기 지구촌을 위협하는 주요 도전들이다. 특히 북한의 핵개발은 국제 사회의 비확산 체제를 겨냥한 중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가 이러한 도전에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따라 21세기 세계사의 흐름이 달라질 것이다. 본지는 창간 21주년을 맞아 미국의 안보 분야 싱크탱크인 헨리 L 스팀슨 연구소의 링컨 블룸필드 회장을 만나 지구촌이 직면한 주요 도전들에 대한 해법을 모색해 봤다. 인터뷰는 1월 13일 워싱턴 DC 듀퐁서클에 위치한 스팀슨 연구소의 블룸필드 회장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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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L 스팀슨 연구소의 링컨 블룸필드 회장이 워싱턴 DC 연구소 집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북핵 문제 등 국제적인 안보 이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핵 무기 없는 세계’를 주창하며 전 세계 핵무기 감축 노력에 힘을 쏟고 있다. 스팀슨 연구소도 핵무기 감축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핵무기 감축 구상은 실현 가능한 것인가.

    “오바마 정부의 핵무기 제로 구상은 조지 슐츠,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나 샘 넌 전 상원의원 등이 주도한 핵무기 감축 구상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다. 이 구상은 성공이냐, 실패냐로 일도양단할 사안이 아니다. 핵무기 보유국들이 체계적인 공조를 통해 단계적으로 성사시켜 나가야 할 사안이다.

    미국, 러시아를 비롯한 세계 열강은 50년 전에 핵 위협 및 억제 전략에 의존해 왔다. 하지만 이제 핵무기는 더 이상 유용한 외교정책 수단이 아니라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50년 전의 낡은 핵무기 위협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세계적 추세에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하고 무책임한 행동이다.”

    ―지난해 12월 북미 고위급 회담 개최에도 불구하고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의 ‘강인하고 직접적인’ 대북 정책 기조가 효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바마 정부는 가장 위험한 한반도 현안인 북핵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스티븐 보즈워스 미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민주당뿐 아니라 공화당 진영의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개인적으로도 오랫동안 그를 알고 있으며 오바마 대통령의 대북 특사로 그만한 인물이 없다. 이런 점 등을 고려할 때, 오바마 정부는 지금 북한에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오바마 정부가 모든 것을 다 해줄 수는 없다. 북한이 1994년 북핵 제네바 합의와 2005년 9·19공동성명 합의를 어기면서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오바마 정부는 북한의 신뢰 회복 조치 없이 북핵 상황을 진전시켜 나갈 수 없는 입장이다. 이제는 북한이 신뢰를 보여야 할 때다.”

    ―이란 핵문제도 실마리가 풀리지 않고 있다. 그 누구도 이란 정부가 우라늄 농축 활동을 중단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않는다.

    “테헤란 정부가 핵무기 개발을 멈추지 않을 것이란 전망은 미국 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하지만 지난해 이란의 대선 과정에서 이란 국민들이 반정부 투쟁에 나서고 이란 정부가 시위대를 강경진압하는 상황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이는 이란 핵 사태의 새로운 국면이다.

    석유 자원과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이란의 집권층은 급속히 국민의 지지를 잃어가고 있다. 미국이나 한국은 모두 적법한 정부를 국민이 선출하는 민주주의 제도를 가지고 있으나 이란은 그렇지 못하다. 미국은 이란의 향후 행동을 예의 주시할 것이다. 이란이 무모한 핵개발을 지속한다면 모든 옵션이 열려 있다. 미국은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중동 지역의 이해를 지키기 위해 군사적 옵션을 선택할 것이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발생한 미국 항공기 테러 기도 사건은 알 카에다와 같은 테러리스트들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테러리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전개하고 있는 군사적 조치도 중요하지만 이번 항공기 테러 기도 사건에 연루된 나이지리아 청년의 경우처럼, 왜 중동의 젊은이들이 테러리스트로 변하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무고한 탑승객을 목표로 한 나이지리아 젊은이는 어리석은 희생양이다. 그를 테러 현장으로 내몬 이슬람 성직자는 부도덕한 이슬람의 전형이다. 그들은 지금도 예멘의 은신처에서 또 다른 테러리스트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나는 중동의 동맹국들이 젊은이들의 급진화를 막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하토야마 정권 출범 이후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 등을 둘러싸고 미일 관계가 전례없는 갈등을 겪고 있는데.

    “미일 관계는 국가 간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양국 국민 간의 관계이기도 하다. 우리가 중국이나 이란, 북한이 제기하는 도전들을 말할 때, 그 것은 민주적 제도에 대한 도전의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일본은 민주적 제도 하에서 국민의 정부를 창출했다. 하토야마 정부는 오랫동안 그들이 반대했던 정책들을 재검토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이를 반미주의가 아닌 일본 정치의 건강한 진화로 간주한다. 후텐마 이슈는 도전적이기는 하나 미일 관계를 해칠 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종국에는 일본 국민들이 수용할 수 있는 해법이 도출될 것으로 전망한다.”

    ―최근 인터넷 검색엔진 구글이 중국 정부의 검열 문제에 반발하면서 미중 양국 사이에 갈등 국면이 전개됐다. 이번 ‘구글 사태’는 중국이 과연 미국과 함께 이른바 ‘G2’(주요 2개국)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론을 낳고 있다.

    “G2는 다분히 상징적 개념이다. 일당주의 국가인 중국은 모든 비용을 치르더라도 권력을 유지하려는 속성이 강하다. 하지만 이런 경직된 자세로는 사회적·경제적 어려움, 재난, 국제적 도전들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나는 16억 중국 국민이 자유롭게 외부 세계와 교류하길 원한다. 오바마 정부는 중국 정부의 자국 국민에 대한 인권 침해나 언론 탄압, 인근 국가 주권 침해 등을 용인해선 안 된다. 이로 인한 미중 양국의 갈등이 양측의 위험한 대응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미중 양국은 다양한 수준에서 많은 대화를 해나갈 필요가 있다.”

    ―1974년 체결된 한미 원자력협정에 따라 한국 내에서는 ‘사용 후 핵 연료’의 재처리가 원천 금지돼 있다. 한국 정부는 2014년 만료되는 원자력 협정 개정을 통해 한국도 일본처럼 국내에서 재처리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전향적으로 반응할 것이라고 보나.

    “이 문제는 한국을 특정해서 접근하기보다는 핵 비확산 체제 유지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 2006년 이후 이란을 비롯한 수많은 중동 국가들이 민수용 원자력 발전을 시작했으며, 곧바로 사용 후 핵연료의 재처리 문제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고려할 때, 한국의 목소리는 핵 비확산 체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크다. 한국뿐 아니라 개별 국가들이 각자의 국익에 따른 목소리를 낼 때 우리는 국제적 규범을 우선해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북한이나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중단시키기가 더욱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견해가 미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보유해 온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을 2012년 4월 한국에 넘길 계획이다. 한국 내에서는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불안정한 안보 환경 등을 이유로 전작권 전환 시기를 연기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전작권과 같은 현안은 한미가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전작권 전환 시기를 연기할 필요가 있다면 한미 양국의 충분한 합의가 우선돼야 한다. 하지만 그 점에 관해 한국 내 여론이 충분한 합의를 이루고 있지 않다고 본다. 덧붙여 강조하고 싶은 점은 전작권 전환 이후에도 한미 동맹은 더욱 강력한 동맹으로 남을 것이며 전작권 전환이 한반도 안보를 결코 약화시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 스팀슨 연구소=국제 평화와 안보, 대량살상무기 감축 문제를 전문으로 연구하고 미 행정부에 정책 제언을 해주고 있는 비영리, 비당파적 성향의 연구소다.
    ■블룸필드 회장 약력

    ●미 프레처 스쿨 법학·국제관 계학 석사, 1988년 미 국무부 국제안보분야 수석 부차관보, 1991년 댄 퀘일 미 부통령 안보분야 보좌관(부차관보), 1992년 국무부 극동담당 부차관보, 2001년 국무부 정치·군사담당 차관보, 현 스팀슨 연구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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