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지니아주 의회 역사상 첫 아시아계 의원인 한국계 마크 김(45·민주) 하원의원이 다음달 8일이면 재선된다. 선거는 아직 치러지지 않았지만 공화당이 후보를 내지 않아 사실상 당선이 확정된 상태다. 한국에서 태어난 김 의원은 미국에 정착한 이후 소수계의 한계를 극복하고 미 주류사회가 인정하는 차세대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재미 한국 동포사회의 기대주인 김 의원을 만나 의정생활과 정치관, 인생역정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대담은 지난 10일 미 국경일인 ‘콜럼버스 데이’에 워싱턴 DC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2009년 선거 당일 김 의원 캠프에서 개표 결과를 지켜본 기억이 난다. 벌써 2년이 흘렀다. 미국 정치에 뛰어든 이후 소회를 말해 달라.

“보람있었고 많이 배웠다. 미국은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교과서에 나와 있는 그대로 실현되는 국가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영어로 말하면 ‘룰 오브 피플’(rule of people·인치)이 아니고 ‘룰 오브 로’(rule of law·법치)의 나라다. 버지니아주 의회도 400년 전에 시작했을 때와 똑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배웠던 원칙이 현장에서 똑같이 실현되고 있었다.”

―한국 정치와는 어떤 점에서 다른가.

“한국 정치에선 원칙 따로 현실 따로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의회 운영과정에서 이른바 ‘실세’들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는 보도를 많이 봤다. 여기는 안 그렇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라고 해도 소속 정당인 민주당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미 전역에서 주별로, 카운티별로 민주당이 별도로 조직돼 있기 때문에 아무리 카리스마가 뛰어나고 잘난 지도자가 있어도 혼자 힘으로는 당을 움직일 수 없다.”

―미 국민들의 자발적인 정치 참여가 그런 토양을 만든 것 아닌가.

“그렇다. 그게 미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런 국민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민주주의가 성공한 것이다.”

―미국 내에서도 한인들의 정치 참여는 활발하지 않다. 김 의원이 주 의회에 진출한 이후 한인들의 정치 참여율은 높아졌나.

“내 선거 때는 나를 보고 한국계 유권자들이 투표장을 많이 찾았다. 하지만 지난해 중간선거 때는 그렇지 않았다. 한인 동포들의 수도 늘고 경제력도 커지면서 한인들의 정치적 영향력도 조금씩 커지는 것은 확실하다. 나를 비롯해 한인 정치인 수도 늘고 있다. 하지만 한인사회가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는데 그만큼은 못하고 있다고 본다.”

 

 

 


―버지니아주 의회는 전통적으로 보수적이어서 공화당이 강세인 것으로 알고 있다.

“맞다. 주 의회 100명 중 공화당이 61명으로 다수당이다. 이번 선거가 끝나면 민주당 의석은 더 줄어들 전망이다. 야당으로 의정활동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야당 의원으로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

“공화당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한국 정치 현실에선 상대당의 지원을 받는 것이 쉽지 않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민주당, 공화당 따지면 법안 통과는 불가능하다. 나는 민주당 소속 의원이지만 민주당을 대표해서 일하는 것은 아니다. 내 지역구민을 위해 일한다. 교통과 교육, 세금 등 모든 현안에서 지역구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지역구민을 위해 좋은 일이라면 공화당 의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한다.”

―주 의회도 연방 의회처럼 다수당이 모든 상임위를 독식하는 구조인가.

“연방 의회보다 다수당 지위가 더욱 강력하다. 연방 의회는 여야 관계없이 민주, 공화당을 분리해서 지도부를 구성하나 주 의회는 모든 상임위의장을 다수당이 독식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수당 소속의 상·하원 의장이 여야 구분 없이 지도부를 구성한다. 나는 소수당 소속 초선의원이어서 의회 내 영향력이 전무한 상황에서 의정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와 함께 들어온 초선 21명 중에서 공화당이 밀어주는 기대주 두세 명을 빼곤 내가 가장 많은 법안을 통과시켰다.”

―소수당 초선의원으로서의 한계는 어떻게 극복했나.

“초당적 입장에서 지역구민을 위해 필요한 현안을 찾아 열심히 일했다. 지역구민들이 그런 나의 활동을 평가해 줬다. 기업계나 노조의 주장도 똑같이 경청하면서 일했다. 이번에 도전자가 없는 이유도 나에 대한 평판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통상 여당은 선거구를 획정하면서 야당을 짓눌러서 힘들게 하는데, 이번엔 공화당이 선거구를 획정하면서 나에게 도전장을 던진 자기 당 후보를 다른 지역구로 보냈다. ‘마크는 이길 수 없다’고 보고 공화당 후보는 다른 지역으로 돌렸다고 하더라. 그리고 내게 차기 의회에서도 공화당과 함께 지역구민을 위해 손잡고 일하자고 말했다.”

―초당적 의정활동이 의회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얘기로 들린다. 한국에선 그런 식으로 의정활동하면 당 지도부에 찍혀 불이익을 당하기 십상이다.

“당이 운영되는 시스템이 달라서 그럴 것이다. 한국은 당을 중심으로 의원이 충원되는 구조이나 미국은 지역구민이 대표를 뽑아서 의회로 보내는 시스템이다. 당은 선거를 하기 위해 필요할 뿐 의회를 운영하는 과정에선 필요하지 않다. 물론 미국에서도 일부 의원은 당에 충성한다. 그렇지만 지역구에는 민주당원도 있고 공화당원도 있다. 당에 충성하는 행태는 지역구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지역구에 있는 민주, 공화당원 모두를 대표하려 노력한다.”

 



―보수적 정치운동인 ‘티 파티’나 최근 확산되고 있는 ‘월가 점령’ 시위를 어떻게 보나.

“미국은 중도의 나라다. 태생적으로 좌 편향이나 우 편향을 싫어한다. 그런데 정치에는 보수든 진보든 익스트림(극단적임)이 항상 존재한다. 익스트림이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미국민 중 60, 70%인 중도파의 목소리는 실종되고 사방에서 익스트림의 목소리만 난무하니깐 중도파들이 좌절한다. 그런 좌절감이 월가의 탐욕이나 연방정부, 의회의 답답한 행태를 바라보며 티 파티나 월가 시위로 표출된 것으로 본다.”

―미국 한국인 사회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김 의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고 한인사회에 더 잘하고 싶은데 나의 지역구에는 한인이 많지 않다. 한인사회를 위해 더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주류사회에서 인정받고 더 성장해야 한다.”

―김 의원의 이력을 보니 한국과 베트남, 호주를 거쳐 미국에 정착했다. 인생역정이 참 다채롭다.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4살 때 베트남으로 갔다가 월남이 패망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이공 함락 3일 전에 가까스로 비행기를 탔다. 아버지는 탈출에 실패해서 1년 동안 호찌민 정부에 억류됐다가 풀려났다. 어려서 한국을 떠난 탓에 한국어를 못해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생환한 뒤 호주를 거쳐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80년 12월에 미국 땅을 밟았다.”

―어떤 계기로 정치에 입문하게 됐나.

“솔직히 학교 다니면서 동양인들이 잘하는 수학, 과학에는 관심이 없었다.(웃음) 정치나 정책, 역사 공부가 좋았다. 대학 때 미 연방 의회에서 인턴십을 하면서 워싱턴 DC가 세계를 움직이는 중심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88년 민주당 대선후보로 지명된 마이클 듀카키스 캠페인을 지원하면서 아시아계 인사들이 보이지 않는 데 놀랐다. 미 주류사회를 움직이는 과정에서 한국인은 고사하고 아시아계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정치 쪽에서 아시아계를 대표해 활동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 직후 언론에서 김 의원을 ‘오바마 사람’으로 분류한 기사를 봤다.

“딕 더빈 연방 상원의원 보좌관으로 일할 때 당시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이던 오바마를 처음 만났다. 이후 오바마 대통령과 줄곧 함께했다. 그 인연으로 2008년 대선 때 오바마 후보를 위해 일했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세가 워낙 강해서 다들 나의 정치경력이 끝났다고 말했지만 결과는 오바마의 승리였다.”

대담=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프로필

▲서울 출생(66년생) ▲베트남·호주 거쳐 1980년 미국 정착 ▲캘리포니아대, 해스팅 칼리지 로스쿨 ▲ 미 연방통신위(FCC) 변호사
▲미 중소기업청 변호사 ▲딕 더빈 연방 상원의원 보좌관 ▲2009년 버지니아주 의회 하원의원 선거 당선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 출범 직후인 2009년 초 미국 패권의 위기를 진단한 적이 있다.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노선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감과 신흥 강대국의 부상, 미국 주도 경제 질서에 충격을 가한 금융위기 등이 미국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취지의 기획물이었다.
 
기자는 1991년 걸프전쟁 승리로 세계적인 군사 패권을 증명한 미국이지만 2001년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패권이 도전받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또한 경제침체 와중에 천문학적인 규모로 불어나는 재정 적자가 미국의 경제 패권도 약화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기자는 그런 전망들이 현실화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목도하고 있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 대출) 사태가 촉발한 미국 경제 패권의 위기는 오바마 정부 들어 더욱 심화됐다. 잇따른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식 금융모델, 경제모델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미국 주도의 경제질서가 도전받기 시작했다.
 
그동안 2조달러가 넘는 천문학적 규모의 경기부양 자금이 투입됐지만 미국 경제는 여전히 더블딥(이중침체) 전망에 시달리고 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들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한 미 재정적자는 2009 회계연도(2008년 10월∼2009년 9월)에 사상 최고치인 1조4000억달러, 2010 회계연도에는 1조2900억달러를 기록했다. 미 의회예산국(CBO)은 2011 회계연도 재정적자가 1조28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올 들어 8월까지 누적 적자액만도 1조2340억달러에 달해 CBO의 재정적자 추산치를 무색하게 했다.

 



미 재정적자는 경제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정치권의 지형도를 바꿔놓고 있다.

재정적자 변수는 보수 성향 정치운동인 ‘티 파티’ 세력을 성장시킨 일등공신이었다.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는 과정에서도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내년 11월 치러지는 미 대선도 재정적자 변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런 재정적자가 올 들어 미국의 군사력에 직접적 타격을 가하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백악관과 공화당이 지난 8월 초 국가부도(디폴트) 사태 직전에 합의한 재정적자 감축안에 따라 국방비는 향후 10년 동안 3500억달러가 줄어들게 됐다. 미 의회의 재정적자 감축 특별위원회가 올 추수감사절 전날(11월23일)까지 최대 1조5000억달러 규모의 재정적자 감축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미 국방비는 기존의 3500억달러 외에 추가로 6000억달러가 자동 삭감된다. 오바마 정부가 2012 회계연도에 책정한 국방예산이 6710억달러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군 수뇌부에서 터져나오는 탄성을 이해할 만하다.

미 국방비 삭감은 당장 2012 회계연도 예산 심의 과정에서부터 현실화하고 있다.
우리의 관심은 미국의 국방비 감축이 한·미 동맹에 미칠 파급 효과다.

리언 패네타 미 국방장관은 얼마 전 미 상원 군사위 청문회에서 예산 감축에 따른 미군 전력의 공동화(空洞化)를 걱정하면서 “지속되는 북한, 이란의 핵 개발 보유 위협에도 대비해야 하며 중국의 군사 능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주미 대사관을 비롯한 정부 당국자들은 현재까지 미국의 국방비 감축 기조가 주한미군 복무 정상화 계획 예산 등 한반도 방위 예산까지는 적용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로버트 윌러드 미 태평양사령관도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아·태 지역은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예산에서 우대받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런 한·미 당국자들의 희망과는 별개로 미 의회 내에서는 재정적자 감축을 위해 비용이 많이 드는 미군의 해외주둔 정책을 대폭 손질해야 한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면서 한·미 동맹도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미국인들에게 9·11 테러는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다. 9·11 테러는 초강대국 미국호의 항로와 미국인들의 삶을 변화시켰으며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에선 9·11 테러 10주년을 맞아 ‘9·11 이후 10년’에 대한 각 분야의 평가 작업이 한창이다. 향후 미국의 세계 전략과 국내 정책은 이런 평가 작업을 토대로 재조정될 것이다. 세계일보는 미국의 안보 분야 싱크탱크인 헨리 L 스팀슨 연구소의 링컨 블룸필드 회장에게 ‘9·11 이후 10년’을 물었다. 블룸필드 회장은 2001년 9·11 테러 당시 미 국무부 정치·군사 담당 차관보로 재직했다.







-9·11테러 이후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지난 10년의 세월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남겼는가.

“21세기의 안보 위협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국제적 위험이 미국의 본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미국의 안보는 다른 지역의 안보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미국은 21세기의 위협을 국제적 차원에서 대처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됐다.”

―미국인들은 9·11 테러의 충격에서 회복됐다고 보는가.

“9·11의 상흔은 아직 아물지 않았다. 특히 테러 희생자 유족들과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서 숨진 병사들의 유족들은 여전히 상실감에 빠져 있다. 하지만 미국 사회와 정부는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에 맞서 놀라운 회복력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 9·11과 같은 충격과 놀라움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9·11를 겪었고 9·11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미국은 슬픔을 딛고 더 현명해졌다.”

―9·11이 낳은 ‘테러와의 전쟁’은 지난 10년 동안 어떻게 변화했는가.

“대테러 전쟁은 미국을 공격한 테러리스트들을 반격하는 군사 작전의 형태로 시작됐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전개된 대테러 전쟁이 그것이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은 아랍 정부·시민 사회와 손잡고 무슬림 젊은이들의 분노를 완화시키는 노력에 초점을 맞추게 됐다. 무슬림 젊은이들의 분노는 테러리즘에 양분을 제공한 테러리즘의 뿌리이다. 우리는 그동안 아랍권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외교와 개발 지원, 미디어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무슬림 세계에서 테러리즘의 구심력은 현격히 약화됐다.”

―미국은 2001년 당시 보다 더 안전해졌는가.

“그렇다. 미국은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테러 대비 태세에서 이전보다 더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했다. 미 정부는 9·11 이후 국토안보부를 창설하고 정보 기관들을 재편, 대테러 역량을 강화했다. 이에 따라 9·11과 같은 테러가 미 본토에서 성공하기는 이전보다 훨씬 더 힘들어졌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9·11 이후 국가정보국(DNI)을 신설, 미 중앙정보국(CIA) 등 16개 정보 기관을 총괄하도록 했다. 이런 정보 기관 재편이 제2의 9·11 테러를 막는 데 기여했다고 보나.

“정보 기관 개편은 원래 부시 행정부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부시 행정부는 9·11 테러 조사위원회와 미 의회의 권고에 따라 정보 기관 개편을 실행에 옮겼다. 정보 기관 개편과 관련해선 일각에서 집행 기관 없이 총괄 기능만 갖고 있는 DNI를 창설한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내놓고 있다. 합당한 비판이라고 본다. 하지만 정보 기관 개편 과정의 일부 하자에도 현재 미 정보기관들의 업무 수행은 매우 전문적이고 효율적이다.”

―알 카에다 수장으로 9·11 테러를 자행한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됐다. 머리를 잃은 알 카에다의 미래는 어떻게 전망하나.

“빈 라덴이 알 카에다의 정신적 리더였고 그의 수족들이 9·11 테러를 계획했지만 알 카에다는 지금까지 일사불란하게 통제되는 조직이 아니었다.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빈 라덴의 후계자로 부상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예멘과 소말리아 등지에 근거지를 둔 아라비아 반도의 알 카에다 그룹들은 알 카에다 지도부의 통제권 밖에 있다.”

-올 초부터 불기 시작한 아랍의 민주화 바람이 테러와의 전쟁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나. ‘아랍의 봄’이 아랍권의 반미, 반서방 경향을 심화시킬 가능성은 없는가.

“아랍의 봄은 수 많은 아랍 젊은이들을 좌절시키고, 끝내 테러리즘으로 내몬 상황에 대한 합당한 응답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아랍의 젊은이들은 테러리스트들이 보내는 부정적인 메시지에 현혹되지 않게 됐다. 테러리스트들의 메시지는 ‘지하드’(성전·聖戰)라는 미명 하에 죽음을 부추기는 어둠의 메시지였다. 테러 구실로 악용됐던 독재 정권이 무너진 이후, 새로운 메시지가 젊은이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좋은 정부와 열린 정치 참여, 인권 보장에 대한 열망을 담은 메시지들이다. 새로운 세대를 향한 미국의 영향력은 긍정적이다. 관건은 미국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아랍 국가들의 (민주국가로의) 전환에 기여할 수 있는지 여부다.”

―9·11 이후 부시 행정부 내에서는 ‘네오콘’(신보수주의)으로 불린 강경파들이 득세했다. 9·11은 미국의 대북정책을 더 강경하게 만들었다고 보는가.

“미국은 지난 10년 동안 9·11 테러가 야기한 혹독한 위협들을 견뎌내면서 북한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억지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웠다.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는 북한의 도발은 9·11 이후 강건해진 미국의 억지력에 의해 봉쇄될 것이다. 미국은 또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동맹국과의 안보 협력 체제를 공고하게 만들었다. 아프가니스탄과 리비아에서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공조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9·11 테러 초기엔 미국의 관심이 온통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대테러 전쟁과 국내 방위에 집중되는 바람에 북한에 대한 관심이 다소 약화되기도 했다.”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국방예산을 감축하고 있다. 국방예산 감축이 대테러 전략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

“부시 행정부와 의회는 9·11 테러 직후 추가 테러를 막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강구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초과 지출되거나 낭비된 예산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국방부는 예산 절감 압력 속에서 대테러 조치의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더 이상 안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각적인 조치를 병행하는 사치를 부릴 수 없게 됐다. 고위 정책 결정자들의 판단이 이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9·11이 미국 재정건전성을 악화시킨 주 요인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런 견해에 동의하는가.

“미국의 재정적자를 초래한 요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9·11 이후 대응 조치들이 재정적자를 불린 주범이라는 견해엔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 기업들은 많은 일자리를 해외로 아웃소싱했고 의회 역시 이익 집단의 요구에 영합, 세입보다 세출이 더 큰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9·11은 미국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이나 미국인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공항에 설치된 ‘전신 스캐너’(알몸 투시기)처럼 일부 대테러 조치들은 인권 침해 논란을 낳기도 했다.

“교육이나 사업, 관광 목적으로 미국에 입국하는 사람들은 9·11 이후 큰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특별한 대테러 조치에 따라 정부가 민간인의 활동을 감시하거나 특정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는 사생활 침해 우려를 낳고 있다. 이러한 안전 조치들은 미국인들의 삶을 과도하게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집행될 수 있다고 본다. 시민들도 안전 문제를 전적으로 정부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 시민 모두가 테러를 감시하는 자경단이 되어야 한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헨리 L 스팀슨 연구소 링컨 블룸필드 회장

하버드 대학, 프레처 스쿨 법학·국제관계학 석사. 1988년 미 국무부 국제안보분야 수석 부차관보. 1991년 댄 퀘일 미 부통령 안보분야 보좌관(부차관보). 1992년 국무부 극동 담당 부차관보. 2001년 국무부 정치·군사 담당 차관보. 2008년 부시 대통령 특사. 2010년 스팀슨 연구소 회장



 9·11테러가 촉발시킨 미국의 대테러 전쟁이 막을 내리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이라크전쟁 종식을 공시 선언했다. 9·11테러 직후인 2001년 10월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끝나가고 있다. 오바마 정부는 지난달부터 아프간 주둔 미군 철수에 들어가 2014년까지 마무리하고 군사 지휘권 및 치안 유지권을 아프간 정부에 이양할 계획이다.

전쟁은 끝나가지만 대테러 전쟁이 남긴 후유증은 깊다.
 
10년에 걸친 전쟁기간에 6000명이 넘는 미군이 전사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사상자도 수십만명에 달한다. 두 전쟁에 투입된 천문학적 규모의 전비는 미국의 위상을 약화시키는 변수로 작용했다. 미 브라운 대학의 왓슨 국제관계연구소 최근 발표한 ‘전쟁 비용 보고서’에서 미국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4조4000억달러를 썼다고 밝혔다. 이는 미국의 2012 회계연도 총예산을 웃도는 금액이다.

백악관은 올 초 공개한 아프간전쟁 평가 전략보고서에서 “극단주의 테러 위협의 싹을 잘랐다”고 자평했지만, 9·11테러가 낳은 두 전쟁은 또 다른 테러를 부르면서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알카에다의 뒤를 이어 제2, 제3의 반미 테러조직이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테러 전쟁을 언급하면서 단 한 차례도 ‘승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피가 피를 부르는 보복의 악순환,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 남긴 수렁 속에서 좀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는 9·11테러를 계기로 새로 씌어졌다.

 미 본토가 사상 처음으로 공격당한 9·11테러 이후 미국은 달라졌다. 미국은 더 이상 국제적 현안에 개입하길 꺼리는 ‘고립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변화는 전면적이고 심층적이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최근 인터뷰에서 “9·11이 확실하게 나의 대통령직 수행 항로를 변경시켰다”고 토로했다. 부시 행정부는 미 본토 방위를 국방전략의 최우선 과제로 제시하면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는 부시 행정부의 정책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공격받은 미국은 거대한 병참기지로 변했다. 모든 자원은 대테러 전쟁에 집중됐다.

9·11이 낳은 ‘부시 독트린’은 미국의 달라진 외교·안보 정책을 웅변한다.

미국은 2002년 안보정책 기조를 ‘억제와 봉쇄’에서 ‘선제공격’으로 전환했다. 선제공격 전략은 말 그대로 적이 공격하기 전에 먼저 무력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은 선제공격 전략의 첫 타깃이 됐다. 부시 정부는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을 빌미로 국제사회의 동의 없이 독단적으로 이라크전쟁을 개시했다. 미국의 동맹관계도 재조정됐다. 미국의 편에 서지 않는 국가는 ‘미국의 적’으로 규정됐다. 9·11은 미국민들의 의식도 변화시켰다. 최근 미 브루킹스 연구소가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31.6%가 미래의 가장 큰 위협으로 테러리즘을 첫손에 꼽았다. 청소년기에 9·11를 경험한 이른바 ‘9·11세대’는 미 적십자사가 행한 조사에서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고문 등 어떤 수단도 활용할 수 있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미국인들은 9·11 이후 테러의 공포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게 됐다.
 
대다수 미국인들이 최근 미 동북부를 강타했던 지진을 테러로 오해했을 정도다. 9·11테러 현장인 뉴욕에서는 최소 1만명의 시민, 경찰, 소방관 등이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와 우울증 등에 시달리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테러 경고 방송과 검색대 통과는 미국인들에게 일상사가 됐다. 지난 5월 미국에서 가나로 향하던 유나이티드 항공 소속 보잉 767 여객기 내에서 두 승객의 사소한 다툼으로 소동이 벌어지자 F-16 전투기가 출격했다. 미국 사회의 테러 공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화다.

이슬람에 대한 적대감도 커졌다.
 
9·11 이후 이슬람교도에겐 테러주의자의 낙인이 찍혔다. 여론조사기관인 퓨 리서치 센터가 9·11테러 10년을 맞아 미국 내 이슬람교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52%는 미 정부가 이슬람교도들을 감시, 경계의 대상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답했다. 43%는 지난 1년간 이슬람교도라는 이유로 갖은 조롱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때론 여행지 보다 사람이 추억될 때가 있다.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한 참을 잊고 지내다
불현듯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이 생각날 때가 있다.
사진을 정리하다 만난 북구의 소녀가 그런 경우다.

에스토니아로 향하던 페리 선상에서
에스토니아의 슬픈 역사를 들었다.


 

그들의 나라는 강대국들에 여러 차례 유린됐다.
러시아와 독일, 소련이 그들의 나라를 차례로 복속시켰다.
그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이후에야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그들의 지정학적 조건이
강대국의 식욕을 자극했으리라.
발트해를 달리는 페리 위에서 나는,
조금씩 다가오는 에스토니아 땅을 바라보며
동병상련의 심정이 됐다.

                                                                                  <페리에서 바라본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발트해에서 바라본 풍경이 다가갈수록 환해졌다.
짙은 오렌지색 지붕들이 독특하다.



 


소녀를 만난 곳은 광장이었다.
탈린 한 복판에 자리잡은 광장은 관광객들도 인산인해를 이뤘다.
관광객을 유인하려는 식당들의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내가 찾은 식당은 아름다운 소녀와 아코디언 연주자를 전면에 내세웠다.



 


  
 레스토랑 사장님의 고명 딸일까,
 아니면 동생 학비를 벌기위해 생업 전선에 나선 가난한 집의 착한 누나일까.
 나그네의 궁금증은 아랑곳 없이
 이국의 소녀는 쉴 새 없이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에스토니아 소녀를 보며
시인 백석이 노래한 '나타샤'를 떠올렸다.

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백석이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고,
읊었던 바로 그 나타샤.

나타샤는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 여주인공 이름이지만
백석은 북구의 소녀를 통칭하는 보통명사로 나타샤를 사용했다는 것이,
시인 신경림의 해석이다.

이름도 모르는 소녀 만큼이나
탈린의 풍광은 정갈한 이미지로 남았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출출이: 뱁새
*마가리: 오막살이


최근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