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폭침 3주기를 맞는 노병의 심경은 참담했다. 이상의 전 합참의장은 2010년 3월26일 북한의 어뢰 공격을 받은 천안함이 서해 바다에서 수장되던 당시를 회고하면서 “유족에게 죄인의 심정”이라고 말했다. 해마다 천안함 순직 용사들의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는 그는 “유족에게 아무리 사과한들 생때같은 아들들이 살아 돌아오겠느냐”면서 “당시 군의 수장으로서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북한의 3차 핵실험 강행으로 한반도 안보위기가 고조되는 지금, 천안함 폭침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도원빌딩 강한대한민국범국민운동본부 사무실에서 이 전 의장을 만나 천안함 사건이 남긴 교훈을 되새겨봤다. 그는 “북한의 도발 위기에 맞서 군과 정치권, 국민 모두가 천안함 폭침 사건의 교훈을 뼈에 새겨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천안함 폭침 당시 합참의장으로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천안함은 많은 교훈을 남겼다. 군의 입장에서는 북한의 악랄한 도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회한을 남겼다. 북한이 간첩 침투나 비무장지대 도발 등 간접 도발을 자행한 적은 있으나 우리 영해에 있는 초계함을 직접 타격해 피해를 준 사례는 처음이었다. 이런 도발을 군이 간과한 것은 반성해야 할 점이다. 국가적으로는 천안함 폭침 사건을 계기로 남남갈등이 조장되고 아직도 국제사회 전문가들이 모여 작성한 내용(미국·영국·호주·스웨덴 4개국 전문가들이 참여한 국제 합동조사단은 2010년 5월 “천안함이 북한 어뢰에 피격돼 침몰했다”고 공식 발표했다)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고 한편으론 황당한 일이기도 하다. 자기 입장만 주장하고 다른 사람을 믿지 않으려는 현 세태는 국가적으로 엄청난 에너지 낭비다.”

―한반도의 군사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천안함 사건과 같은 북한의 도발 위기에 충실히 대비하고 있는가.

“완전하지는 않다. 천안함 사건 직후 함정의 초계 속도를 높이고 대잠 헬리콥터를 수시로 출격시키는 등 추가 비용이 소요되지 않는 임시조치는 모두 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전력증강을 하려면 예산이 필요하다. 그런데 올 1월 국회는 국방예산을 4000억원 삭감했다. 그러고선 북한 핵실험(2월12일)이 터지자 국방비를 증액하겠다고 나서는데 국가가 이렇게 일관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 최근 군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고, 경계 실패는 1차적으로 군의 책임이다. 그러나 군의 무수한 전력증강 요구에도 우선순위로 제일 먼저 깎이는 게 국방예산이다. 눈에 띄는 것은 복지예산하고 국회의원 본인들의 지역구 예산이다. 국회가 국방예산을 처삼촌 묘 벌초하듯 잘라낼 때 어떤 정치인이 그래선 안 된다는 목소리를 냈나.”

―북한의 핵실험을 계기로 우리 국민의 안보불감증도 도마 위에 올랐다.

“공감한다. 우리 국민들은 북한이 설마 우리에게 핵 미사일을 쏘겠느냐고 생각하는데 안일하고 위험한 사고 방식이다. 미국을 향해서는 못 쏘지만 우리에게는 쏠 수 있는 게 북한이다. 우리는 북핵의 인질이다. 북한은 무력 시위용으로 핵을 사용할 수 있는 집단이다.”

―천안함 도발은 그야말로 허를 찌른 것이었다. 당시 우리 군은 무방비 상태로 당한 건가.

“천안함 사건 4개월 전에 ‘대청해전’이 있었다. 기동력이 약한 북한은 수상전에서 대패했다. 북한은 반드시 보복할 것이라고 봤다. 그 방법은 질 게 뻔한 해상도발이 아니라 수중도발일 것으로 예상했다. 이 문제로 2009년 말에 전술토의를 벌였다. 이때 참모들은 서해는 조류가 빠르고 혼탁한 데다 수심이 낮기 때문에 잠수함 도발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적이 서해 수중도발을 꾀할 수 있다고 봤다. 6·25전쟁 당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도 인천은 유속이 빠르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상륙작전이 어렵다는 참모의 조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인천으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전술토의에서 ‘키 리졸브’(한·미 연합훈련)가 끝난 직후 서해 수중 도발과 관련한 대비태세 검열을 벌이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천안함 피격 사건이 발생한 3월26일이 대비태세 검열을 위한 예비 회의를 가진 날이었다. 그 회의를 조금만 앞당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미리 대비했다면 피격 직후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도 포착할 수 있었나.

“그것은 어렵다. 적에 대한 정보 판단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100% 북한 잠수함이 공격할 수 있다고 확신해도 몇 월 며칠에 온다고는 절대 예측하지 못한다. 그런 딜레마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쨌든 예측을 하고 조금만 일찍 서둘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폭침 사건 초기 군은 우왕좌왕했고 대통령도 허둥댔다.

“초기에 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기습당하는 사람은 상황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위기 시에 군사작전 지휘관은 절대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다음에 일어날 상황을 예측하고 그걸 대비하고 전투력을 할당하고 현재 상황에 대해 조치하는 게 지휘관의 역할이다. 소방관의 임무는 불 끄고 인명 구조하는 것이다.”

―결국 미리 예상은 했지만 준비가 제대로 안 돼서 당했다는 것인가.

“예상을 정확하게 했다기보다는 그런 식의 도발에 대비한 준비는 해야 된다는 판단을 했는데, 보다 적극적인 대비를 못했다는 게 솔직한 평가일 것이다.”

―천안함 폭침 이후 이명박정부가 안일한 대북 대응으로 일관하다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도발을 불렀다는 지적이 있다.

“천안함 사태 이후에 ‘5·24 (대북 제재) 조치’를 취할 때 확성기 등을 이용한 대북 심리전이 포함돼 있었다. 북한은 대북 심리전 방송을 핵무기보다 더 무서워한다. (합참의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이건 진짜 기가 막힌 카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군은 대북심리전 준비를 다 끝냈다. 북한은 겁이 나니까 계속 협박을 했다. 나는 ‘잘 됐다. 너희들이 타격을 하면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각오 아래 만반의 준비를 다 갖췄다. 부하들도 일전불사의 각오였다. 그런데 정부는 심리전 방송을 미뤘다. 결국 승인이 안 됐다. 그때 국민의 자존심이 상했다. ‘북한이 협박하니까 심리전도 못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국민이 자존심을 상했을 때 군인들은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나. 그러면 군인들이 무엇을 학습했겠나. ‘이 정부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구나. 일전 불사의 결연한 의지가 없다’는 것을 학습하는 거 아니냐.”

―박근혜정부가 반드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반드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군 통수권이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는 꼬리표가 붙고, 주가 떨어지는 문제부터 생각하는 정권이라는 인식이 퍼지면 그 다음부터 군 수뇌부는 가능하면 시끄러운 일을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군 통수권자의 결연한 의지가 없으면 절대 북한의 버릇은 못 고친다. 각오를 해야 한다. 국민들도 주권국가로서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대가를 치러야 하고,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용기와 성숙한 애국심을 가져야 한다. 통수권자의 결연한 의지와 국민의 용기, 애국심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어떤 능동적 선제공격도 할 수 없다. 계속 북한에 끌려가게 된다. 북한의 지도자보다 더 결연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북한은 실질적 핵보유국이 되어가는데 우리는 대응 수단이 마땅치 않다. 핵을 가진 북한과 어떻게 맞서야 하나.

“자존심은 상하지만 북한은 핵실험을 통해 핵의 경량화·소형화에 성공하고 운반수단도 갖춘 군사강국이 됐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북한은 이미 핵 강국이 돼버렸는데 우리만 비핵화하자는 얘기는 현실성이 없다. 이런 차원에서 미국의 전술핵을 남한에 재배치하는 방안은 고려해볼 만하다. 우리 땅에 핵이 있는 것과 하와이나 미국 본토에 있는 것은 북한이 받아들이는 위협강도에서 천지차이다.”

<약력>
1951년 경남 사천 진주고 육군사관학교(30기) 39사단장 1군 사령부 참모장 8군단장 건군60주년 기념사업단장 3군 사령관 35대 합참의장 국제대 석좌교수 강한대한민국 추진운동본부 고문

대담 =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정리=안두원 기자, 사진=이재문 기자

野雪(야설)

穿雪野中去(천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今朝我行跡(금조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李亮淵(이양연)(1771~1853)

 

눈을 뚫고 들판 길을 걸어가노니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를 말자.

오늘 내가 밟고 간 이 발자국이

뒷사람이 밟고 갈 길이 될 테니.

 

*조선 정조, 순조 시대를 살아간 시인 이양연의 시.

오랫동안 서산대사의 작품으로 알고 있었는데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논란의 여지 없이

이양연의 작품이라고 했다.

누구의 작품이든,

50을 바라보는 내 나이엔

예사롭게 읽히지 않는다.

뒤돌아 보면 '호란행'까지는 아니어도

갈짓자로 비틀거린 흔적이 보인다.

남은 인생엔

좀 더 반듯이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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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통합당 내에서 대선 패배 이후 “질 수 없는 선거를 졌다”는 자탄이 흘러나왔다.

그런 말이 나올 만하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대선 기간 내내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따른 ‘이명박 디스카운트’에 시달렸다. 야권 대선후보 단일화가 성사된 직후엔 여론 지지율 1위 자리를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에게 내주며 코너에 몰리기도 했다. 이번 대선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이 총결집한 대격돌이었다. 산업화 세력의 상징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은 보수 진영의 대표주자로 나섰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야권후보 단일화만 이뤄지면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의 박빙 경합 끝에 약 57만표 차로 신승을 거뒀던 2002년 대선의 판박이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야권의 바람대로 투표율도 높았지만 결과는 박 당선인의 108만여표 차 승리였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개인적으로 ‘야권이 질 수 없는 선거였다’는 명제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민주당은 오랫동안 질 수밖에 없는 길을 걸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선 패배는 그 결과물일 뿐이다.

그동안 우리는 이념 과잉의 시대를 살았다.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 공과를 놓고, 해방 이후 대미 종속 여부를 놓고, 또 무엇을 놓고 두 패로 갈려 서양의 보수·진보 개념을 빌려쓰며 좌파니 우파니 하는 이념 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진보 진영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선명성 경쟁이라도 하듯이 좌클릭을 거듭했다. 2004년 열린우리당 시절부터였다고 기억된다.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이 만들어낸 비정상적 분위기 속에서 원내 과반인 152석을 얻었는데도 총선 결과를 민심으로 오독(誤讀), 민생과 무관한 개혁 담론에 매몰됐다. 국가보안법 폐지 등 ‘4대 개혁법안’에 올인했다. 그러는 사이 당 지지율은 곤두박질쳤고 ‘100년 정당’을 꿈꿨던 열린우리당은 창당 4년 만에 공중분해됐다.
민주통합당은 지난해 4·11 총선 공천 과정에서도 열린우리당의 전철을 밟았다. 중도·실용파 의원들을 대거 낙천시키고 그 자리를 진보 진영 인사들로 메웠다. 문재인 대선 후보는 진보 진영의 주문대로 자신이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 추진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제주해군기지 건설 사업에 제동을 걸고 나서는 자가당착의 태도를 보였다. 민주당이 왼쪽으로 치닫는 동안 새누리당은 ‘경제 민주화’, ‘복지’ 같은 진보의 어젠다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수구 보수의 이미지를 탈색시켰다. 민주당은 새누리당의 경제 민주화, 복지 공약을 ‘짝퉁’으로 몰아붙이며 관련 공약을 더 좌파적으로 만들어갔다.

하지만 세상을 흑백으로 가르는 시대는 오래전에 저물기 시작했다. 좌파 정당인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민당은 1990년대부터 성장과 복지를 조화시킨 ‘제3의 길’을 제시하며 변신을 모색했다. 영국 노동당은 사회주의 성향을 완화한 ‘신노동당’ 기치로 바꿔든 이후에야 만년 야당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뼛속까지 보수주의자였던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공화당)도 2000년 대선 당시 중도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정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정권교체에 성공한 부시 대통령이 집권 8년 동안 보수 본색을 드러내며 ‘신보수주의’로 질주하자 미국인들은 2008년 대선에서 공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우파든 좌파든 빛바랜 강령 속에 갇혀 있던 정당과 정부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국민들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정당과 정부를 원한다.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간파했듯이, 상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번 대선의 화두가 됐던 복지를 말한다면, 복지를 하려면 재원이 필요하고, 재원 마련을 위해선 기업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게 상식이다. 글로벌 시대의 경제 첨병인 기업이야말로 복지 재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경쟁력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국가 주도의 복지정책에는 한계가 있다는 게 상식이다. 복지만의 문제가 아니다. 열린우리당 이전의 민주당은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을 표방하며 국민과 함께 호흡했다. 민주당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조남규 정치부 차장

 두 번은 없다

 비스와바 심보르스카(1923~2012)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

2012년이 3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연초부터 시끄웠지만

결국 지구의 종말은 오지 않았다.

다행이란 기분은 들지 않는다.

 

참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서울살이도 내년이면 30년째다.

대학 졸업하고 사회에 발을 내딛은지도 내년이면 24년째다.

신문기자 생활도 내년이면 21년째다.

고향을 떠난지는 더 오래돼 내년이면 33년째다.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고향.

대처로 유학길을 떠나던 그 날,

신작로를 터덜거리며 달리는 냄새나는 버스 안에서

차창 너머로 걸린 무지개를 봤다.

인생에 낙제는 없다는 심보르스카의 말을 믿고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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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속 안철수 대선후보가 지난 12일 부산대 강연에서 재선에 성공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언급했다. 안 후보는 “4년 전 오바마 대통령은 정말 정치 경험이 적은 무명의 흑인 정치인이었다”면서 “그런데 그때 대통령이 됐고, 저와 나이 차가 한 살 정도 난다. 그러니까 거의 저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왜 그렇게 4년 전에도 되고 이번에도 됐을까를 봤더니 미국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 ‘변화’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분석했다.

안 후보가 오바마를 ‘정치 경험이 적은 무명의 정치인’으로 규정한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안 후보는 정치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정치 경험이 적은’ 오바마도세계 최강 미국의 대통령이 됐는데 정치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한국 대통령이 되지 말란 법이 있느냐는 나름의 항변인 셈이다.

하지만 전제가 틀렸다. 오바마는 2007년 대선 출마 선언 당시 일리노이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이었다. 지금까지 선출된 미 대통령 44명 가운데 연방 상원의원 출신은 16명에 이른다. 연방 상원의원은 대선 때마다 주지사와 함께 대선 후보 풀을 구성하는 정치인 중의 정치인이다. 미 정치권에선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서 연방 상원의원에 선출되는 일은 흔치 않다. 오바마 대통령도 일리노이주 의회 상원의원으로 3선의 경력을 쌓은 후에야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주 의회 상원 시절엔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나섰다가 고배를 마신 경험도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35살의 나이로 첫 공직선거에 나서기 전에도 민권 변호사이자 지역사회 운동가로 활동했다. 그의 준(準)정치경력은 명문 컬럼비아대를 졸업한 직후인 1985년, 24살의 나이로 빈민 운동에 투신했을 때부터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안 후보는 미 국민의 ‘변화’ 열망을 오바마 재선의 이유로 꼽고 이를 안 후보가 대선 출마 기치로 내건 ‘정치 쇄신’과 중첩시킴으로써 자신을 ‘한국의 오바마’로 자리매김시키고 싶은 것 같다.

 



오바마가 2008년 대선에서 ‘변화’(Change)의 기치를 내걸고 당선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재선에 도전하는 현직 대통령의 당락을 좌우하는 가장 큰 변수는 집권 성적표다. 미국 대통령의 성적표는 누가 좌우할까. 미 연방의회다. 의회의 협조를 이끌어내지 못하면 단 한 건의 법안 통과도 어렵다. ‘식물 대통령’이나 다름없다. 오바마 집권 1기의 연방의회는 그 어느 때보다 당파적이었다. 2010년 중간선거에서 하원이 공화당 수중에 넘어간 후론 더욱 그랬다. 오바마는 사분오열된 민주당 의원들을 한데 모으고 중도 성향 의원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정치력을 발휘, 백전노장의 빌 클린턴 대통령도 실패했던 건강보험 개혁 등을 성사시켰다. 워싱턴특파원으로 오바마 집권 1기를 현장에서 지켜본 기자는, 오바마 재선의 원동력이 오랜 정치 경험의 산물인 그의 정치력이라고 생각한다.

안 후보 캠프에서는 요즘 오바마가 2007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무너뜨리고 승리하는 과정을 담은 ‘게임 체인지’(Game Change)라는 책이 인기라고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오바마 진영이 기존 정치권에 실망한 유권자들의 변화 열망을 자양분 삼아 미 대선의 ‘게임 규칙’을 바꾸며 승리를 일궈냈다고 평가했다. 안 후보 측의 대선 전략 기조와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미 민주당 지지자들이 두 명의 클린턴(힐러리와 남편 빌)에게 피로감을 느꼈던 것처럼 한국의 야권 지지자들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에게서 노무현 정부의 그림자를 본다. 안 후보 측은 미 민주당 지지자들이 클린턴의 대안으로 신상품 오바마를 선택했던 것처럼 한국의 야권 지지자들이 문 후보 대신 자신을 선택할 것이란 기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 후보 측 인사들은 오바마 후보가 민주당 경선의 대세가 판가름난다는 이른바 ‘슈퍼 화요일’을 1년이나 앞둔 시점에 대선 도전을 공식 선언하고, 경선을 통해 당당히 민주당 후보 자리를 따냈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대선을 불과 90여일 앞두고 출마 선언을 한 뒤 후보 등록 10여일 전 민주당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에 나선 안 후보와 오바마 대통령의 길은 전혀 달랐던 셈이다.

조남규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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