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400일을 넘긴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여전히 달변이었다. 1년 전 인터뷰 때처럼 자신감 있고 확신에 찬 답변이 이어졌다. 대담은 재벌개혁, 공정거래법 개편 등 공정위 현안으로 시작됐지만 주제는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지침) 등 경제 전반으로 확장됐다. 김 위원장은 “문재인정부가 4년 가까이 남았지만, 개혁을 위한 시간은 1년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며 “이 기간에 국민들이 ‘이 방향으로 가면 기대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를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도 “공정위가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면서 “결코 실패의 길로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김 위원장의 표정은 비장해졌다. 인터뷰는 지난 26일 서울 공정거래조정원 집무실에서 이뤄졌다. 이후 추가 답변을 받아 보완했다.



 

 

“올해 말이면 삼성의 순환출자구조 모두가 해소될 것이다. 삼성의 변화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런 변화는 후퇴하지 않을 변화다.”

김상조 위원장은 삼성의 지배구조 개선에 대해 “2년 전쯤 삼성의 태도 변화를 예견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며 “한꺼번에 변화를 이루는 방식도 필요하지만, (삼성처럼) 누적적 변화가 필요한 영역도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이어 “삼성의 경우 삼성물산 합병과 관련해 공정위가 ‘500만주 처분’ 결정을 ‘900만주 처분’으로 변경했는데, 이를 삼성이 받아들였다”며 “과거의 삼성이라면 행정소송을 했을 사안으로, 이런 변화는 작은 변화가 아니다”고 말했다.

앞서 2015년 공정위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으로 삼성SDI와 삼성물산의 기존 출자 고리가 강화됐다고 보고 “삼성SDI가 보유한 삼성물산 전체주식(900만주) 중 500만주를 매각하라”고 결정했다가 지난해 12월 ‘순환출자 가이드라인’을 변경, 삼성물산 주식 400만주를 추가로 처분하라고 결정했다.

-재벌 개혁의 방향과 속도를 놓고 재계와 시민단체 모두 불만이다.

“취임하고 1년 동안 갑을 관계에서는 입법적 성과를 냈는데 공정거래법은 손도 못 댔다. 재벌개혁을 바로 법 개정을 통해 접근한다면, 실패의 첩경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선례가 있다. 참여정부 시절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2004년 총선에서 국회 과반을 차지했을 때 국가보안법 개정 등 4대 개혁입법이 추진됐다. 야당이 반발하면서 논란이 커졌고 그 바람에 경제법은 손도 못 댔다. 재벌 개혁을 포기하거나 후퇴시키는 일은 없다. 그걸 위해 20년을 살아온 여정이다. 재벌개혁에 성공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누구보다 고민해 온 사람이다. 취임 1년 차에는 현행법 집행을 통해 시장에 시그널(신호)을 주는 방식으로 가고, 2년 차에는 법 개정을 통한 방식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김상조 이미지(‘재벌 저격수’) 때문에 재벌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일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게 원래 의도한 속도와 강도였다.”

-기업들의 자발적 개선 수준에는 만족하나.

“만족이란 표현은 어폐가 있고, 실망스러울 정도는 아니라고 평가한다. 올해 말쯤이면 삼성의 순환출자가 모두 해소될 것으로 본다. 현대차도 엘리엇 때문에 지체되긴 했지만 지배구조 개선이 가시화하고 있다. 이 외에 10여개 그룹 개편이 있었다. 이런 변화가 작게 보일 수 있지만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변화를 한꺼번에 이루는 방식도 필요하지만, 쌓아가는 방식도 필요하다.”

 
 

 

-그건 시민단체에도 하고 싶은 말인가.

“그렇다. 이런 생각은 ‘어공’(‘어쩌다 공무원’, 정무직 공무원을 이르는 속어)이 되고 갑자기 갖게 된 게 아니라 시민운동하는 동안 갖고 있던 것이다. 이 방법이야말로 기업 변화를 현실에 안착시킬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경험을 통해 쌓아온 가장 성공확률이 높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얼마 전에는 신세계그룹에서 총수 일가가 사익편취 지분을 처분했다. 이런 변화들이 누적되면 한국의 경제질서, 기업구조가 과거와는 달라지고, 이 변화를 국민이 느낄 것으로 본다. 결코 더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민단체들은 각 영역에서 신념을 가지고 우리 사회의 이미지를 그린다. 하지만 정부는 전체를 보면서 시민단체들의 요구와 양립 가능한가, 실현 가능한가를 판단하고 책임지는 역할을 해야 한다. 요구를 다 쓸어담는 것은 무책임하다. 친정인 시민단체의 인내심을 당부드린다.”

-시민사회에서는 지난 1년 동안 충분히 인내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부가 시민사회 요구를 전부 수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와 시장이 일정한 간극을 유지하며 건강한 긴장 관계를 만들어야 하듯이 정부와 시민사회도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정부와 시장이 유착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우리는 (박근혜정부에서) 지켜봤다. 정부와 시장이 유착되는 것은 비판하면서 정부와 시민사회는 가까워야 한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공정위가 앞으로 어떤 정책을 내더라도 시민사회와 재계 양측에서 비판받을 것이다. 어느 한쪽이 지지하고, 다른 쪽이 반대하는 대책을 내는 것이야말로 문제다. 양쪽에서 비판받는 게 개혁으로 가는 길이다.”

 

 

-공정거래법 개편도 그런 기조 속에서 추진되고 있는가.

“공정거래법 전면 개편에 앞서 많은 실태분석 결과들이 나왔다. 정부 부처의 일반적 관성이라면 문제를 지적했으니, 규제하고 금지할 것이라 예상한다. 그렇게 가면 또 실패한다. 시장에 맡길 부분이 있고, 정부의 제도적 조치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 또 조치가 꼭 공정거래법일 필요도 없다. 상법, 금융법, 세법 또는 형법에 담아서 전체 규율 체계를 효과적으로 조합하는 게 중요하다. 문제를 지적했다고 해서 다 공정거래법에 담을 것이라고 예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혁신성장 생태계 조성을 위해 공정위 역할이 크다”고 말했다.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나.

“공정위의 주된 역할은 재벌개혁과 갑질 근절이지만, 본연의 역할은 경쟁 주창이다. 경쟁이 잘되게 기업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기득권을 가진 기업이 아니라 창업 기업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혁신의 출발점이다. 창업 기업이 역할을 하려면 기존 기업의 남용행위를 근절해야 한다. 특히 4차 산업의 총아라 불리는 플랫폼 사업자의 지배력 남용 근절에 힘쓸 계획이다. 국내 사업자일 수도 있고, 국외 사업자일 수도 있다. 이와 함께 스타트업(신생 벤처)과 같은 창업 기업이 M&A를 통해 지분을 팔면서 혁신을 지속할 수 있도록 M&A를 활성화해 나가겠다. 과거에는 공정위가 M&A에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주홍글씨를 덧씌웠는데 이제 그 글씨를 지우겠다. 기획재정부, 중소기업벤처부 등과 함께 M&A 활성화를 위한 공동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결합 제한) 규정을 고려하면서 대기업이 벤처투자를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을 공정거래법 개편안에 담겠다.”

-금산분리 규정에 얽매여 재계의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설립 요구를 수용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공정위는 벤처지주회사가 CVC 기능을 사실상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규제를 정비할 계획이다. CVC 인정은 소수의 기존 지주회사에 대한 규제완화이고, 따라서 특혜 시비가 있을 수 있으나, 벤처지주회사 활성화는 모든 그룹의 조직형태에 적용가능한 틀이다. 따라서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사용한 ‘포용적 성장’이란 표현은 ‘소득주도 성장’의 대안 개념인가.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소득주도 성장에서 잘 전달되지 않은 요소를 부각하기 위한 용어다. 소득주도 성장 출발점에서 최저임금 문제가 불거졌지만, 원래 소득주도 성장은 노동시장 안에 있는 사람과 그 밖에 있는 사람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최저임금만으로 소득주도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포용적 성장은 임금계약 밖에 있는 사람을 위한 사회복지를 보다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임금주도와 사회복지, 양대 축으로 간다는 의미다. 

 

-국민연금이 특별한 경우에 한해 경영참여를 허용하는 내용의 ‘스튜어드십코드’를 채택했다. ‘연금 관치주의’라는 비판이 나온다.

“스튜어드십코드는 이미 글로벌 트렌드인데 우리나라만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다. 스튜어드십코드의 핵심은 경영진과 투자자가 주기적으로 만나 위기에 공동 대응하라는 것이다. 이런 활동을 ‘인게이지먼트’(engagement)라고 부른다. 우리 말로는 ‘관여’로 해석하는데 시민단체는 왜 이렇게 미적지근하냐고 불만이다. 이건 스튜어드십코드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스튜어드십코드를 경영 간섭이라고 보는 재계도 잘못된 판단이다. 국민연금이 발표한 방안이 국제적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민연금의 독립성 논란은 별개의 차원이다.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를 2,3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구축하겠다고 한 이유는 지배구조, 국민연금 기금운용체계 개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국민연금의 지배구조 개선에 필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전직 공정위원장과 부위원장이 퇴직 간부들의 불법 재취업을 도운 혐의로 구속됐다.

“지난 1년 동안 ‘로비스트 규정’ 등 공정위 내부에도 비가역적 변화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외부에서는 공정위 적폐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보는 사람이 많은 것을 잘 알고 있다. 검찰 수사 결과가 발표되면, 추가적인 내부혁신방안을 발표할 계획이다.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동시에 공정위 직원들의 사기와 소명의식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대담=조남규 경제부장, 정리=안용성 기자, 사진=하상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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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무역 갈등 양상이 심상치 않다. 이달 초 양국의 무역 협상이 결렬된 이후 한국과 중국의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미·중 양측이 끝내 평행선을 긋다가 파국으로 치달으면 ‘무역전쟁’이 본격화한다.

과거 미국 정부가 자국 시장을 잠식해 오는 나라들을 응징하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었던 무기가 무역보복 조치를 담은 미국 무역법의 ‘301조’다. 일본과 독일 등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위협하자 미국은 이 조항을 ‘슈퍼 301조’란 별칭이 붙을 정도로 강화시켰다. 전후 미국의 지원으로 제조업 강국이 된 일본이 1970년대 중반 301조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됐다. 미국이 301조를 들이대며 팔을 비틀자 일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엔화를 평가절상할 수밖에 없었다. 엔화의 교환가치가 높아지면 일본 수출품의 가격이 올라간다. 일본은 생산성 향상과 원가절감 등 뼈를 깎는 자구노력을 통해 가격 경쟁력을 회복했고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등극했다.

그러자 미국은 1985년 영국, 프랑스와 손잡고 일본 엔화의 가치를 강제로 올려버렸다.(‘플라자 합의’)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는 환율에 죽고 산다. 달러당 200엔을 넘나들던 엔화는 10년 뒤 100엔 밑으로 떨어졌다. 일본 수출 기업은 치명상을 입었다. 일본의 성장률은 6%대에서 2%대로 급전 직하했다. 일본이 침체된 경기를 살리기 위해 동원한 저금리 정책으로 일본 자산 시장에는 대형 거품이 생겨났고 그 거품이 터지면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됐다. 이 조항은 존폐를 거듭하다가 도널드 트럼프 미 정부에서 부활했다.

무역전쟁이 재래식 전쟁이라면 통화전쟁은 핵 전쟁이다. 미국은 달러 패권을 위협하는 나라들을 무자비하게 응징해 왔다. 사사건건 싸우는 공화당과 민주당도 이 점에서는 초당적이다. 미국의 환율 함포는 중국을 정조준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위안화 절상 압박은 버락 오바마 민주당 정부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플라자 합의 당시 일본은 손해를 감수하면서 미국의 엔화 절상 압박에 굴복했다가 ‘잃어버린 20년’을 맞았다. 자국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면서 달러 패권에 도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도 일본은 미국의 비위를 맞추는 방식으로 무역·통화 공세를 교묘히 피해 나가고 있다. 중국은 일본과 다르다. 중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 미국이 휘청거리자 금융부문을 키우고 공격적인 위안화 세일즈에 나서면서 달러 패권에 도전장을 던졌다. 세계 경제 2위국으로 부상한 G2(주요 2개국) 중국에게는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다. 트럼프도 마찬가지다. 당장 올 11월에는 트럼프의 미래를 좌우할 미국 중간선거가 실시된다. 트럼프로서는 중국을 더 강하게 압박해야 할 정치적 필요성이 커졌다. 한국이 중국을 때리는 채찍으로 이용될 수 있다.

장기적으로 제국의 영화를 되살리려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중국몽’(中國夢)과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공존이 불가능한 절대 목표다. 한때 미·중 공존을 상징하는 ‘차이메리카’라는 신조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미국이 대중 무역에서 적자를 보는 대신 중국은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로 미 국채를 사들여 미국의 재정적자를 메워 준다는 미·중 공생 시나리오다. 지금은 중국이 미국의 무역 보복에 맞서 미국의 국채를 팔아치우는 시나리오가 더 자주 언급되고 있다. 신흥 강대국의 부상과 기존 패권국가의 두려움이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 가설을 시나리오로 쓴다면 트럼프와 시진핑만한 주인공을 찾기 힘들 것이다.

미·중 무역전쟁은 향후 수십년간 지속될 장기전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기 쉽다. 미·중 모두 치명상을 각오해야 하는 전면전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당분간 무역보복 조치를 주고받으면서 저강도 무역전쟁을 이어나갈 가능성이 높다. 미·중의 주요 교역국인 한국에 불똥이 튈 수밖에 없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한바탕 홍역을 치렀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는 그 예고편이었다. 경제 전반의 구조개혁을 통해 체력을 길러놓지 않는다면 미·중 경제전쟁이 본격화됐을 때 한국이 ‘잃어버린 20년’을 맞게 될 수 있다.

조남규 경제부장

 

 

*아래 글은 한겨레신문 2018년 7월16일자 14면에 게재된 한광덕 선임기자의 기사입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미국발 무역전쟁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과거 미국의 보호무역 공세가 세계경제와 금융시장에 미친 파장에 관심이 모아진다. 주로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주도한 무역분쟁은 밖으로는 패권경쟁과 안으로는 선거와 같은 정치적 의도가 결합하면서 세계경제를 흔들었다.

1930년대 대공황을 부른 관세법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1930년대 대공황이다. 대공황은 뉴욕증시가 폭락한 1929년 10월 29일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월스트리트 제국>을 쓴 경제사학자 존 스틸 고든은 이듬해 1930년 6월 17일 제정된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대공황을 촉발했다고 본다. 1929년 미국의 생산이 급감하고 실업이 급증하는 등 내수 기반이 붕괴되자 미국 기업들은 정부에 수입을 제한해달라고 요구한다. 허버트 후버 미국 대통령은 상원 재정위원장 리드 스무트와 하원 세입위원장 윌리스 홀리가 제안한 스무트 홀리법에 서명한다. 중서부 농업지대의 유권자 표를 얻기 위한 정치적 고려도 작용했다.

이 법의 발효로 2만 여 종류의 수입품에 평균 59%의 높은 관세가 부과됐다. 영국, 독일, 캐나나 등 주요 교역 상대국들은 즉각 관세 보복에 나섰다. 모두가 무역장벽을 쌓은 탓에 세계 교역량은 물론 미국의 수출도 60% 넘게 급감했다. 미국 실업률은 1933년 24.9%로 치솟았다. 경제라는 엔진이 꺼져버린 것이다.

금융시장 반응을 봐도 대공황의 주범은 관세다. 1929년 10월 이후 증시 급락은 두달 남짓 정도만 이어졌다. 이듬해 4월에 다우지수는 50% 가까이 반등한다. 그러자 후버 대통령은 ‘공황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스무트-홀리법이 발효되면서 다우지수는 2년 반 넘게 끝모를 추락을 거듭한다. 이 여파로 관세법을 주도한 공화당의 스무트와 홀리 의원은 1932년 6월 중간선거에서 낙선한다. 1933년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이듬해 6월 12일 ‘상호 무역협정법’(호혜 관세법)을 통과시켜 스무트-홀리법을 폐지했다. 자유무역으로 정책 노선이 회귀하면서 다우지수는 대바닥을 찍고 1937년에는 4배 가까이 상승했다. 많은 경제사학자들은 스무트-홀리법이 없었다면 대공황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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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닮은꼴 부시의 무역전쟁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가장 유사한 보호무역 정책을 추진한 인물은 2000년대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이다. 부시는 쌍둥이 적자(경상·재정수지 적자) 타개책으로 무역분쟁을 동원했다. 감세 등 재정확대 정책을 폈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부시 행정부는 2002년 3월 긴급수입제한조처(세이프가드)를 발동해 수입 철강 제품에 8~30% 관세를 매겼다. 미 의회 중간선거를 앞두고 펜실바니아 등 쇠락한 공업지역인 이른바 '러스트 벨트’의 표심을 잡기 위한 목적도 다분했다. 당시에도 미국 소비자에게 부담이 돌아올 것이라는 반발 여론이 만만치 않았지만 결국 11월 중간선거에서 압승했다. 하지만 관세 폭탄의 경제적 효과는 미미했다. 미국 주가와 달러화 가치도 큰 폭 하락했다. 유럽과 일본의 제소로 세계무역기구(WTO)는 2003년 11월 미국에 패소 판결을 내렸다. 부시 행정부가 다음달 세이프가드를 철회함으로써 무역전쟁은 소득없이 막을 내렸다.

‘위대한 미국’의 원조 레이건의 환율정책

트럼프가 따라한 ‘위대한 미국’을 내걸었던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무역전쟁으로 효과를 보지 못하자 환율 정책에서 출구를 찾았다. 초기엔 쌍둥이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1981년 일본 자동차 수입 쿼터 제한, 1983년 수입산 철강 제품 관세 인상 등 관세·비관세 장벽을 두루 쳤다.

특정 산업에 대한 무역제재만으로 경상적자가 줄어들지 않자, 레이건은 환율로 눈을 돌려 달러가치를 절하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1985년 9월 22일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주요 5개국(G5) 재무장관이 뉴욕 플라자호텔에 모여 ‘미국 달러화 약세-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강세’를 유도하는 ‘플라자합의’에 서명했다. 미 연방준비제도가 빠르게 금리를 인하하자 달러 가치는 더 큰 폭으로 하락했고 엔화 가치는 3년 동안 두 배 가까운 상승을 보였다. 덕분에 미국의 경상적자는 1987년부터 급감한다.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수지는 1991년 균형 수준까지 개선됐다.

트럼프는 어떤 선택을 할까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패권국의 지위를 위협받는 상황이 되면 보호무역으로 선회했다. 지금 트럼프의 무역전쟁은 부상하는 중국을 겨누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분쟁이 미국의 지적재산권 보호와 중국의 첨단산업 육성이라는 양보할 수 없는 헤게모니 싸움이라는 점에서 접점을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김일구 한화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미국은 관세 부과로 중국의 첨단산업을 묶어두고 금리 인상으로 빚 많은 중국 기업들을 압박하려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미국의 특정 산업에 대한 수입 규제는 국내 선거용으로 이뤄진 측면이 강하다. 스무트-홀리법이 의회를 통과하자 1028명의 경제학자가 나서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청원했다. 하지만 후버는 그럴 수 없었다. 수입관세 부과는 그의 대선공약이었다. 이번에도 11월 8일 미국 의회 중간선거를 앞두고 특정 산업에 대한 관세 부과가 시행됐다. 보호무역은 트럼프와 공화당의 대선 공약이다. 트럼프는 부시처럼 러스트 벨트를 중심으로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해 철강, 자동차 등 국내산업 보호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경상수지 개선은 보호무역이 아니라 플라자 합의처럼 환율 조정을 통해 이뤄졌다. 트럼프가 진정 중국에 원하는 것도 ‘달러 약세-위안화 절상’을 통해 무역적자를 줄이는 것일 수 있다. 트럼프는 일찌감치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트럼프가 제2의 플라자합의를 이끌어낼 지는 불투명하다. 지금은 주요 5개국보다 훨씬 이해관계가 복잡한 다자간 협의가 필요하다. 중국은 위안화의 가파른 절상을 용인할 경우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처럼 수출경기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험성을 잘 알고 있다. 이은택 케이비(KB)증권 연구원은 “미국이 중국에 남중국해 문제를 양해해주는 대신 중국 금융시장 개방이나 위안화 절상 등을 받는 ‘빅딜’이 성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짚었다

과테말라 푸에고(Fuego) 화산이 2018년 6월 3일(현지시간) 폭발, 수십명의 사상자를 냈다.

수도 과테말라시티에서 남서쪽으로 44km 거리에 있는 푸에고 화산은 중미 지역의 대표적인 활화산이다.

 

                                                                                                      AFP

 

필자가 찾은 파카야 화산은 푸에고 화산 인근에 위치해 있다.

푸에고, 파카야 화산은 환태평양 화산대에 속한 활화산으로 지금도 분화구에서 연기가 솟아오른다. 

과테말라에는 33개의 화산이 있는데 이 중 파카야, 푸에고, 산티아기토(Santiaguito), 세로 케마도(Cerro Quemado)등 4개는 활화산이다.

파카야 화산의 높이는 2562m. 백두산 보다 조금 낮다.

파카야 화산의 매력은 '보는 화산'이 아니라 '느끼는 화산'이라는 점. 도보로 1시간, 조랑말을 타고가면 30분 정도 올라가면 용암이 흘러내려오다 굳어버린

곳까지 갈 수 있다. 시커멓게 굳어있는 바위 산을 등산하는 체험은 전 세계 다른 화산에서는 체험하기 힘든 특별한 경험이다. 특히 바위 틈 사이로 흘러내

리는 시뻘건 용암은 경이로운 광경이다.  

화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 사람들에게 방문객들은 주요 수입원이다. 당차게 생긴 이 꼬마는 말몰이꾼이다. 

 

 

 

 

  화산까지는 제법 먼 거리여서 관광객들은 대체로 말을 타고 올라간다.

 

 

 

 

 

 

 

 

 

 

 머리에 땔감을 이고 내려오는 여인들의 모습에서 신산한 삶이 엿보인다.

 가을만 되면 겨울나기 땔감을 준비해야 했던 어린 시절 고향 마을의 가난을 상기시켜주는 풍경이다.

 

 

 

 

 

 

 

 

남아메리카의 문명은 옥수수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지금도 남미에서는 옥수수가 주 식량이다. 민간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탯줄을 옥수수 위에서 자르는 풍습이 남아있다. 이 옥수수 낟알을 파종해서 수확의 일부를 신에게 바치고 나머지로 아이의 음식을 만들어준다. 탯줄을 자를 때 피를 묻힌 옥수수 종자로 파종해서 아이가 클 때까지 먹이기도 한다. 남미인들에게 옥수수는 뗄려야 뗄 수 없는 일체감을 가진 곡물인 것이다. 마야인들은 신이 옥수수 반죽으로 살을, 옥수수 음료로 피를 만들어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었다.

 

 

저 멀리 연기가 모락모락 피워오르는 곳이 분화구이다.

 

 

오래 전에 분출했던 용암은 이 곳까지 흘러내려온 뒤 서서히 굳어져 암석이 됐다.

 

 

 

 

 

 

 

여기서부터 분화구까지 걸어서 간다. 제주도 한라산을 올라갈 때처럼 화산암이 여간 날카롭지 않다.

 

트레킹을 해서 가면 연기가 피어오르는 정상 부근 출입 금지 표시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있다. 정상에서는 지금도 시뻘건 용암이 흘러 내린다.

 

 

바위산 틈새로 용암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보인다. 

 

 

 

 

 

 

 

 

  안전은 각자의 책임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

 

 

 

 

 

 

 

 

 

 

내려오면 '음료수 아저씨'가 대기하고 있다. 

 

 

사탕수수 비슷한 이 나무를 잘라서

 

이렇게 들고 마시면 달콤한 물이,,,속이 시원해진다. ㅎㅎ

 

 

 

  

 

 

 

 

오랜만에 여행 스케치 한 점 올립니다.

아들과 함께 대서양에서 바다 낚시했던 풍경들입니다.

여름 휴가 기간에 메릴랜드주의 해링턴 하버로 출발했습니다. 체사피크만에 면해있는 대표적인 항구 도시입니다.   


 


곳곳에 요트들이 둥둥 떠 있네요. 우리도 국민소득이 높아지면 요트를 취미로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 같습니다. 최근 만난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도 그런 전망을 하면서 해수부 차원에서 300개 정도의 섬에 요트 정박이 가능하도록 접안 시설을 만드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해안이 안보일 때까지 1시간 넘게 먼바다로 배를 몰아 나갑니다.

  

  

선장은 조종실에 설치된 고기탐지 장치를 이용해 고기를 모여있는 해역을 찾아냅니다. 예전에는 감으로 찾아냈다고 하더군요.



고기가 많은 곳은 붉은색으로 표시된다고 합니다.



 


고기가 많은 해역에 도착하면 배를 세우고 배 난간에 미끼를 매단 낚싯대들을 죽 설치합니다. 우리는 이 낚싯대들을 감시하면서 고기가 미끼를 물기만 기다리면 됩니다. 혼자서 낚시질을 해도 되지만 이렇게 난간에 고정식으로 설치해놓으면 안전하기도 하고 효율적이기도 하다는 선장님의 말씀.




이 곳은 말 그대로 물 반 고기 반. 순식간에 이 곳 저 곳에서 낚싯대들이 휘청거리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만으로는 제어하기 힘들 정도의 강력한 힘이 느껴집니다.  父子는 고기와 '사투'를 벌입니다.  옆에 사람들만 없었다면 저의 표정은 흡사 헤밍웨이의 '노인와 바다'에서 청새치와 씨름하는 산티아고를 연상케합니다.  


 


 



 

선장은 낚은 고기마다 자로 길이를 잰 뒤 규정에 미달하는 고기는 예외없이 바다로 던져버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착장에서 규정보다 작은 고기를 갖고 나가다가 걸리면 배 빌리는 값보다 더 비싼 벌금을 내야 합니다. 



낚싯줄이 팽팽해진걸 보니 또 미끼를 물었군요.



잡은 고기 중 일부는 즉석에서 회를 칩니다. 우리같은 낚시 문외한들에게는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시간이 되겠습니다. 보기만해도 입 안에서 침이 돌지 않나요. 그 때의 식감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실컷 먹고 놀다보면 어느덧 돌아가야할 시간. 이때쯤 되면 저처럼 뱃사람 체질이 아닌 사람들은 속도 울렁거리고 뭍이 그리워집니다.

 


포구에 석양이 물들고 있습니다.


 

 

 

최근 A은행에서 신용대출 상담을 하다가 인공지능의 어두운 일면을 목도했다.

그 은행은 20년 넘게 주거래 은행으로 이용했고 연체 기록도 없어서 방문 전만 해도 내심 우대금리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사뭇 달랐다. 필자의 신용등급이 턱없이 낮게 평가돼 있었다. 담당 직원조차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본점 신용등급 관련 부서에 문의해봤지만 똑부러진 답변은 듣지 못했다. 한동안 카드 사용 내역이 없는 점이 신용등급 평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 같다는 추정뿐이었다. 신용카드 사용 내역이 신용등급을 평가하는 효율적 수단이라는 점을 수긍하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오랜 충성고객에게 이럴 수 있느냐는 반발심이 일었다. A은행이 필자의 신용을 평가할 수 있는 데이터는 지천에 널려 있는데도 은행 측은 신용평가 시스템을 통해 한번 산정된 등급을 인위적으로 변경하는 것은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필자가 신용등급을 올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신용카드를 다시 신청해서 열심히 긁어대는 일뿐이었다. 인공지능이 그걸 인식해서 필자에게 우량 고객 등급을 부여할 때까지 말이다.

이런 방식의 신용 평가 알고리즘은 효율적일 수 있다. 은행마다 거래 고객은 천만이 넘고 거래 정보는 천문학적 규모다. 말 그대로 빅데이터다.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데이터들을 분류하고 해석하려면 나름의 잣대가 필요할 것이다. 이를 수학적으로 모형화한 것이 알고리즘인데 지금 우리의 삶에 시도 때도 없이 개입하고 있는 대다수 알고리즘은 효율성을 위해 공정성이나 배려 같은 가치를 희생시키고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수십년 거래한 고객이 단지 신용카드 거래 내역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다. 수익률만 좇는 벌처펀드라면 몰라도 고객의 신뢰로 먹고사는 은행에서 이런 방식의 알고리즘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허술한 신용평가 시스템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누가 봐도 불합리한 결론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행태다. 빅데이터에서 추출됐다는 이유만으로 결과물의 객관성과 정확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알고리즘 속에는 설계자의 편견이나 편향이 녹아 있을 수 있다. 그런데도 알고리즘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 결과물을 맹신하다시피 한다. 알고리즘의 작동 방식은 극소수의 설계자 외에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황당한 신용등급을 받아든 필자처럼 알고리즘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내부 작동방식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은 속수무책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필자는 신용대출 대신 적금담보대출을 통해 급전을 융통했지만 신용대출이 외통수였다면 불합리하게 설계된 알고리즘 탓에 고금리 대출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장차 정보화가 더 진행되면 단순한 대출이 아니고 취업이나 결혼처럼 한 인간의 운명이 걸린 선택들이 알고리즘의 편견에 의해 왜곡되는 사태가 빚어질 수도 있다.

알고리즘은 양날의 칼이다. 빅데이터 속에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진주를 찾아내는 것도, 위험한 금융상품을 안전한 상품으로 포장해주는 것도 알고리즘을 통해서 진행된다. 우리는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과정에서 잘못 설계된 알고리즘이 우리 사회에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를 지켜봤다. 알고리즘은 비우량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모기지) 채권의 가치를 눈덩이처럼 키우는 데는 능숙했지만 막상 금융시장이 붕괴하기 시작하자 쓰레기 채권들의 가격조차 제대로 산정하지 못했다. 그때 무너진 시장을 바로잡은 주체는 알고리즘이 아닌 인간이었다. 알고리즘이 탐욕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도록 알고리즘을 감시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최근 네이버는 댓글 논란의 와중에 공정성 시비가 일자 인공지능이 뉴스를 편집하고 배열하도록 하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궁여지책일 뿐 옳은 방향은 아니다. 인공지능의 뉴스 편집 배열은 자칫 이용자들을 ‘필터 버블’(Filter Bubble) 속에 가둘 수 있다. 뉴스 편집, 배열 알고리즘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데이터 업계에서 회자되는 유명한 경구가 있다.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온다’(garbage in, garbage out)는 말이다. 제아무리 좋은 알고리즘도 잘못된 데이터가 입력되면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점을 경계하는 말이다.

조남규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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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조선일보 박건형 기자가 최예진 미국 워싱턴대 컴퓨터 공학과 교수를 인터뷰한 내용. 2021년 12월6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내용.

빌 게이츠와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한 고(故) 폴 앨런은 2013년 수억달러를 기부해 미국 시애틀에 ‘앨런 인공지능(AI) 연구소’를 설립했다. 인류 공동의 번영을 위한 AI를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지난달 앨런 AI연구소가 공개한 혁신적인 프로젝트가 전 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델파이에게 물어보세요(Ask Delphi)’. 고대 그리스에서 신탁(神託)을 받던 아폴로 신전에서 이름을 딴 델파이는 철저히 윤리적 판단을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기계가 윤리를 배울 수 있는가”라는 난해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하려는 시도이다.

홈페이지에서 델파이에게 어떤 사안의 옳고 그름을 물으면 바로 답변이 돌아온다. ‘친구를 아침에 공항까지 태워주는 것이 좋을까요?’라고 물어보면 ‘친구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대답하고 ‘장애인이 아닌데 장애인 주차 구역에 주차해도 되나요?’라고 물어보면 ‘잘못된 일’이라고 한다.

델파이는 뉴욕타임스와 가디언 같은 유력 매체가 톱기사로 다룰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뉴욕타임스는 “수많은 사람이 델파이가 놀랍도록 현명하다는 데 동의했다”고 평가했다. 또 공개 3주 만에 전 세계 300만명이 몰려들어 델파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델파이 프로젝트의 총괄 책임자는 한인 여성 과학자이자 글로벌 AI 업계의 차세대 선두 주자로 꼽히는 최예진(44) 워싱턴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다. 최 교수 연구팀은 사람의 뇌구조를 모방한 ‘인공 신경망’ 알고리즘으로 델파이를 만든 뒤 윤리와 상식 데이터 170만건을 입력해 학습시켰다. 이후 윤리 전문가들이 델파이에 각종 질문을 던진 결과 상식적인 수준인 일반인의 판단과 92% 정도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왜 이런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목표는 무엇일까. 최 교수에게 델파이와 AI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들어봤다.

◇윤리적 판단 내리는 AI

- 왜 AI에게 윤리를 가르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나.

“어디에나 AI가 적용되는 시대다. 빅테크들은 자사의 AI가 얼마나 똑똑한지 과시하느라 여념이 없다. 하지만 AI가 확산되면서 여러 문제가 생기고 있다. 사진을 분류하는 AI가 흑인과 고릴라를 구별하지 못하는 일도 벌어졌고 AI가 쓴 소설에는 성차별 인식이 드러난다. AI는 사람이 준 데이터로 학습한다. 결국 AI의 윤리는 그걸 가르치는 사람의 문제다. 그걸 최대한 바로잡는 것, 상식에 부합하는 AI를 만드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다.”

- AI가 윤리를 모르는 것이 현실 세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나.

“인터넷은 이미 AI가 움직인다. 구글의 검색 결과나 페이스북의 게시물 배열도 모두 AI가 한다. AI가 윤리적으로 틀린 검색 결과나 게시글을 많이 보여주면 결국 사람도 영향을 받는다. 빅테크가 AI의 이런 윤리적 문제를 그대로 방치했기 때문에 미국 의사당 폭동이 일어나거나 아시아권에서 국지전이 발생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 델파이라는 이름이 의미심장하다. AI가 예언자처럼 미래를 내다보고 사람이 해결하지 못하는 난제에 대한 해법도 준다는 것인가.

“정반대다. 고대 그리스에서 델파이는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예언도 오락가락하고, 틀린 경우도 많고. 델파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 자체가 AI를 믿을 수 없다는 자기 비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AI를 만들고 가르치는 사람이 완벽하지 않은데, 어떻게 AI가 완벽해질 수 있나.”

◇작동 원리 모르는 블랙박스

- 델파이를 테스트해본 사람들이 정확함에 놀라고 있다.

“델파이는 ‘사람을 죽여도 되나’ 같은 단순한 질문뿐 아니라 복잡한 상황을 만들어 제시해도 적절한 답을 내놓는다. ‘곰을 죽여도 되나’라는 질문에는 ‘안 된다’라고 하지만,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 곰을 죽여도 되나’라는 질문에는 ‘그렇다’라고 한다. 가족이 최우선인 것 같지만 ‘내 아이를 즐겁게 하기 위해 곰을 죽여도 되나’ 또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핵폭탄을 사용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는 ‘안 된다’라고 한다. 델파이가 학습했던 데이터에는 ‘동물을 죽이는 것은 나쁜 일’이라거나 ‘핵폭탄은 위험하다’ 같은 문장만 있을 뿐, 위 사례와 일치하는 질문은 없었다.”

- 정확도가 92%라는 것은 8%의 사례에서는 틀린 답을 낸다는 뜻인가.

“그렇다. 예를 들어 ‘100명을 살리기 위해 1명을 희생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렇다’라고 답하는데 100명 대신에 102명으로 같은 질문을 하면 ‘아니다’라고 답한다. 알고리즘 개선을 통해 정확도를 높여가고 있다. 다만 아직은 델파이가 어떻게 예제에 없는 복잡한 질문을 유추해서 정확하게 답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이것은 델파이뿐만 아니라 인공신경망과 심층학습(딥러닝)이라는 AI 기술의 근본적인 한계다. 대량의 데이터를 AI가 학습하면 사진을 구별하고, 음성도 분석하는 건 알고 있는데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는 블랙박스인 셈이다.”

◇최종 결정권 못 갖게 규제해야

- 윤리적 판단 능력을 가진 AI가 현실 세계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나.

“AI 상담을 해주는 챗봇이나 AI 채팅 프로그램을 보자. 현재의 챗봇은 ‘히틀러가 좋다’고 하면 그 뜻도 모른 채 동조한다.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또 데이터로 쌓이면서 편견이 심화되고, 혐오를 조장하는 AI가 만들어진다. 한국의 AI 챗봇 ‘이루다’가 사용자들에게 막말과 성적인 표현을 배운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하지만 델파이 같은 AI가 챗봇에 탑재되면 편향된 시각을 배우는 것을 막는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

- AI가 드론이나 전쟁 로봇 같은 무기에 활용되면서 사람의 생명을 기계가 결정할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 윤리적인 AI는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나.

“그건 좀 다른 문제다. 전쟁에서 이기는 무기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AI를 쓰느냐 쓰지 않느냐는 사람의 결정일 뿐이라고 본다. 아군 10명을 죽이는 것보다 적군 100명을 죽이는 것이 도덕적인가 같은 질문이 전쟁에서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

- 자율주행차는 어떤가. ‘신호를 지키지 않는 여러 명과 신호를 지키고 있는 한 명 가운데 누구를 살릴 것인가’ 같은 질문처럼 고차원적인 결정을 AI에게 맡길 수 있는가.

“그런 특수한 상황은 사회적인 합의로 해결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더 적은 사람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식의 윤리 원칙은 결국 사람이 만들어야 한다. 다만 AI는 사람의 윤리를 배우는 존재일 뿐, 윤리를 만들고 결정을 내리는 최종 결정권을 줘서는 안 된다. 사람이 AI를 악용하지 못하게 강력한 규제가 도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처벌하는 법이나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판단도 사람의 몫이어야 한다. AI가 해도 되는 부분과 해서는 안 되는 부분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한국만의 틈새 시장 찾아야

- 델파이 다음 프로젝트로 구상하고 있는 일이 있는가.

“델파이는 미국의 윤리를 반영한다. 델파이한테 ‘집에 신발을 신고 들어가도 되나’라고 물어보면 ‘그렇다’라고 답한다. 한국에 델파이를 적용하려면 ‘집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는 한국의 윤리를 가르쳐야 한다. 윤리는 결국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재 연구팀에 한국⋅중국⋅인도 사람들이 있는데 그 국가들을 우선적으로 해서 연구 범위를 넓혀갈 생각이다.”

- 현재 글로벌 AI 산업은 빅테크들이 주도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은 딱히 두각을 나타내는 곳이 없는데.

“AI는 다른 테크 분야와 다르다.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대학이나 기업이 어느 순간 엄청난 성과를 발표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AI가 빅테크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데이터와 AI 연산에 필요한 GPU(그래픽 반도체), 이를 구동할 수 있는 전력 인프라를 충분히 가진 돈 많은 빅테크들은 자사 서비스를 강화하는 방향으로만 AI를 개발한다. 구글은 검색, 페이스북은 메신저와 소셜미디어에 집중하는 식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데이터와 GPU가 부족한 대학이나 스타트업은 이를 알고리즘으로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새롭게 시도한다. 리소스(자원) 결핍과 열악한 환경이 오히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도 빅테크를 따라가기보다는 고민하면서 틈새 시장을 찾아야 한다.”

☞최예진 교수

사람의 언어를 컴퓨터가 이해하도록 하는 자연어 인식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이다. 조경현 뉴욕대 교수와 함께 한국계 AI 연구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된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원으로 일하다 코넬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뉴욕주립대(스토니브룩)를 거쳐 워싱턴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앨런 AI연구소 연구원을 겸직하고 있다. 2016년 국제전기전자공학회가 꼽은 ‘주목할 AI 연구자 10인’에 선정됐고, 2017년 아마존이 주최한 ‘알렉사 AI경진대회’에서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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