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30

워싱턴에서 만난 이상수 전 의원은 편안해보였습니다.
워싱턴 시내의 '조티타운 클럽'
에서 그와 만났습니다. 조지타운 클럽은 로비스트 박동선씨가 창립한 사교 클럽으로 지금도 박씨의 사진이 걸려있더군요.  장소 탓인지, 박정희 정권 시절 미국 정치권을 상대로 한국 관련 로비를 벌이다 구속됐던 박씨의 인생과 노무현 후보의 '대선 금고지기'를 맡은 업보로 구속됐던 그의 행로가 자꾸 오버랩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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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타운 클럽에서 만난 이상수 전 의원


 
어떻든 편안한 그의 모습은 내가 그의 처지라면, 그렇지 못할 것 같았기에 의외였습니다.
그는 감옥에 갔다가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여늬 사람 같으면 한 번도 구경해 보기 어려운 감옥을 두 번이나 갔습니다.
한 번은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 갔으니 훈장으로 치부할 만 합니다.
두 번째는 그다지 자랑할 만한 이유가 아닙니다.
대선 자금을 위법하게 모았다는 죄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유죄로 확정된 그의 공소 사실은 기업체로부터 대선 후원금을 전달받고
영수증을 발급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영수증을 발급해 주지 않은 행위는 법적으로 유죄입니다.
후원금을 전달하는 기업체의 요청에 따라 영수증을 발급해 주지 않았던 것도,
또한 당시의 관행이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갈 수 밖에 없었던 정치적 상황이나
대선 자금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지난 대선을 기점으로 열리게 된
상황은 그간의 신문 보도가 전한 그대로입니다.
나는 정치인 이상수가 아닌 인간 이상수가 그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추스렸을지가 더욱 궁금했습니다.
지난 대선의 금고지기만 맡지 않았던들,
노무현 정부가 궤도에 올라선 이 시점에 미국에 머물 이유가 없는 그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의 감옥 생활은?
그는 "지옥 다음"이었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억울하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평소 단련한 단전 호흡이 아니었다면 견디기 힘들었다는 설명과 함께. 여담이지만 그는 딸의 권유로 시작한 단전 호흡이 상당한 경지입니다. 미국 체류중엔 그랜드 캐년 근처에 위치한 세도나에도 다녀왔습니다. 세도나는 볼텍스라는 신비한 에너지가 충만한 곳으로 알려져 세계의 명상가들이 자주 찾는 장소이고 한국의 단학 선원도 세도나에 본부를 두고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면 그는 결국 2004년 총선에 출마할 수 없게됐습니다.
불면의 번민은 어떻게 정리했을까요.
그는 자신의 희생으로 한국 정치의 고질이었던 대선 자금 문제가 앞으로 보다 투명해진다면 그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자위하며 정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말 대선 자금 모금 당시,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까요.

"노무현 선대본부의 총무위원장 직함은 대선 자금 모금 과정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후원금 모금을 위해 기업체 관계자를 만나면 도대체 총무위원장이 무슨 자리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는 민주당 사무총장이 별도로 있었고 노무현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희박했던 시절이었다. 유력한 기업체들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이미 '배팅'을 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노무현 후보로 단일화가 이뤄진 후 기업체에서 후원금을 내겠다는 연락이 왔는데 액수는 후에 대선 자금 수사 결과를 보니 한나라당의 10분의 1도 안되는 액수였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SK 수사로 대선 자금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나는 대선 자금 수사를 해도 한나라당이 문제지 우리 쪽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찰이 여야 형평성을 고려하면서 수사할 것이라는 점은 후에서야 실감하게 됐다" 

 그의 바람은?


 "정치적으로 명예 회복을 하고 싶다"

향후 그의 정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인생은 정말 그의 말대로 '다채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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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2004년초, 이상수 전 의원의 구속을 지켜보며 썼던 글입니다.

2004년 2월8일

 立春도 지난 2001년 2월 9일, 때 아닌 폭설이 내렸다. 처음엔 가루눈이 날리더니 점점 눈발이 드세어졌다. 오전부터 내린 눈은 점심 때가 되자 국회 의사당 주변 도로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차량들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국회의사당에서 나와 민주당 이상수 원내총무 당선 축하연 장소인 국민일보 빌딩까지 함박 눈을 맞으며 걸었다. 철 지난 겨울 정취에 조금은 감상에 젖어. 방금 전에 실시된 민주당 총무 경선은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나오지 않아 결선 투표까지 치러야 했을 정도로 접전이었다.
오찬 행사 중 문제가 발생했다. 초청 성악가가 노래를 부를 순서가 됐는데 폭설로 반주자가 도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초청 성악가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사이, 이 의원이 무대 위로 올라가 우정 출연을 자원, 먼저 무반주로 가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 실력은 수준급이어서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꿔 보려던 그의 시도는 예상 외의 호응을 받았다. 여기 저기서 앵콜 요청이 터져 나왔다. '정치인 이상수'가 아닌 '로맨티스트 이상수'와의 첫 遭遇였다.

그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 동료 의원들과 같이 로마 여행을 갔을 때는 베니스 거리 가요제에 특별 출연, '오 솔레미오'를 불러 열렬한 앵콜을 받았을 정도다. 당시 동료 의원들은 모자를 벗어들고 거리의 여행객으로부터 돈을 거두는 촌극을 연출했다고 한다. 변호사 시절엔 광화문 근처의 한 다방에 들렀다가 마테 알테리라는 소프라노 가수가 자신의 애창곡인 토셀리의 세레나데를 애절하게 부르는 것에 감동, 그 음반을 백방으로 찾아다니다 끝내 구할 수 없게 되자 그 다방 주인을 찾아가 다른 음반 30장을 사주는 조건으로 그 음반을 손에 넣을 만큼 노래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총무 담당이었던 나는 이런 저런 자리에서 그가 가곡을 반주도 없이 열창하는 모습을 유쾌한 심정으로 지켜보곤 했다. 애창곡은 '청산에 살리라'로 김연준 전 한대총장이 윤필룡 사건에 연루돼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면서 자신의 비장한 심회를 노래한 것인데 가사도 좋고 곡조도 맘에 들어 18번으로 정했다고 한다.
충무경찰서 유치장 가수로 데뷔한 일화는 2002년 발간한 에세이집에 남겼다. 그가 87년 6.29 선언 직후 인권 변호사로 대우조선 노조 생존권 투쟁에 동참했다가 구속됐을 당시 얘기다.


"충무경찰서 유치장은 근처에 구치소가 없어 상당히 오랜 기간 구금생활을 하는 수감자가 많았다. 그래서 가끔 교도관들이 수감자들의 기분 전환을 이유로 유치장 방별 노래자랑을 개최했고 1등한 방에는 유치장 최고 특식 중 특식인 담배를 한 개비씩 나눠 줬다. 수감자들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결사적으로 대회에 임했으나 우리 방은 계속 등외로 밀리곤 했다. 보다 못해 어느 날 내가 선수로 나가보겠다고 제안했다. 사실 그 날은 마음도 울적해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한껏 감정을 넣어 열창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 날 노래가 잘 되는 날이었고 결국 일등상을 받아 스타로 부상했다"

이 의원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드러누워 문학작품을 읽을 때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편하고 즐겁다"고 말하는 문학 애호가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그를 취재한 수첩을 펼쳐보면 군데 군데 '인생 讀本'에나 실려 있음직한 말들이 눈에 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인생은 悽然하나 多彩롭다'는 말이다. 인생은 유한하기 때문에 처연하고, 처연하지 않기 위해선 다채로워야 한다는 취지였던 것 같다.

그의 말이다.

 "서머셋 몸은 '인생은 페르시아의 융단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융단을 짜는 사람의 기호에 따라 융단의 무늬가 달라지듯이 우리 인생도 결국 그 것을 그려가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다양하게 채색될 뿐 절대적인 기준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훗날 인생이란 저울에 달았을 때 누구의 무게가 더 나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인용한 대목도 있는데, 파우스트로 변장한 메피스토펠레스가 배움의 열정에 넘쳐 파우스트 박사를 찾아 온 학생에게 건넨, '이론이란 모두 회색 빛이고 푸른 건 인생의 황금나무'라는 유명한 말이다. "나도 푸른 생을 추구하며 삶의 여정을 달려온 것 같다"고 이 의원은 말하곤 했다.

고려대 법대 재학 시절, 그는 독서 서클인 '호박회(虎博會)' 멤버였다.

"최인훈의 '광장'을 토론하며 분단 상황에 처해있는 지식인의 고뇌를 이해하려 노력했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논하며 초인 정신을 흠모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토론을 끝내고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학교 앞 콩나물 밥집이나 세느 주점을 찾아 뒤풀이 토론도 벌였다. 안암동 실개천을 세느 강으로, 그 위 다리를 미라보 다리로, 천변 술집을 세느 주점으로 삼아 우리는 술에 취해 기욤 아뽀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를 크게 암송하며 젊은 날의 꿈과 낭만을 만끽하곤 했다"

대학 시절, 정체 모를 열정에 휩싸여 1년 동안 학교를 自罷한 경험이 있는 나는, 이 의원의 이런 낭만성에 이끌려 한결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검찰에 몇 차례나 출두하여 조사를 받고, 특히 그 때 마다 TV에 마치 비리 정치인처럼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착잡한 심정을 가눌 길 없었습니다. '왜 대선 자금의 금고지기를 맡아 이 곤욕을 치르는가'라고 자문하면서 회한의 밤을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대선 사상 가장 깨끗한 선거를 치렀다고 자부하고서도, 지금은 왜 이토록 돌팔매를 맞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가눌 길 없는 억울한 심정으로 괴로워한 때도 많았습니다"


2004년 1월 27일, 이상수 의원은 '대선 자금 수사에 대한 입장'이라는 제목의 e-메일을 발송했다. 그 날은 2002년 대선자금 수사를 진행중인 대검 중수부가 이 의원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한 날이었다. 영장 요지는 이 의원이 2002년 대선 당시 민주당 노무현 후보 선대위 총무본부장으로서 한화와 금호그룹에서 각각 10억원, 6억원을 받고 영수증을 발급하지 않은 부분과 SK 10억원, 현대 6억6000만원에 대해 임직원 명의로 영수증을 발급한 행위가 정치 자금법 위반에 해당된다는 것. 이 의원은 금호와 한화 부분에 대한 위법 혐의는 시인하면서도 SK와 현대 부분은 수긍할 수 없다는 취지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확실히 이 의원은 용의주도하거나 노련한 정치인은 아니었다.

 그가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이 되어 당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던 2003년 3월 7일의 일이다. 필자를 포함한 일부 기자들과 점심 식사 자리에서 그는 "지난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후원금 모금을 위해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돌아다녔고 전부 120억원을 모금했다. 만나 보니 괜찮은 사람들도 많더라" 고 자랑스레 얘기했다. 당시만 해도 그와 단짝이던 김경재 의원이 아연해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대선 당시 노무현 선대위 총무본부장으로서 캠프 살림을 떠맡은 장본인의 언급치곤, 너무나 천연스런 말투였다. 이 발언이 문제되자, 그는 부랴부랴 "120억원 중 노사모 돼지 저금통으로 모금한 80억원, 서울·경기·인천지역 후원회를 통해 모금한 6억원을 제외한 나머지 34억원이 기업체 등의 합법적인 후원금"이라고 해명했다. 이 의원은 이 발언으로 '철이 덜 들었다'느니, '순진하다'느니 하는 당내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당과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어떤 기업에서, 얼마 만큼의 후원금을 받아 무슨 용도로 사용했는지 낱낱이 공개해야 한다"고 강도높게 촉구한 것은 후일 검찰 수사를 통해 500억원이 넘는 불법자금을 끌어들인 것으로 밝혀진 한나라당이었으니, 정치의 세계는 우스운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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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e-메일을 받고 착잡한 심정이었다. 진위 여부야 법정에서 따질 일이다. 이 의원이 기업에서 받은 돈을 개인적으로 유용한 것이 아닌 바에야, 개인 차원의 문제로 치부할 문제도 아니다. 내 마음이 심란해진 이유는 '로맨티스트 이상수'와 '대선 자금의 금고지기'가 양립할 수 없는 우리의 정치 현실 탓이었다.

"정치가의 주머니는 돈이 일시 지나가는 정거장이 되어야지, 돈을 언제까지나 보관하는 금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 있다. 정치가에게 있어서 돈은 활동의 수단이지, 치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평생 쌓아올린 명예를 하루아침에 잃고 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린 듯이 검찰청을 빠져 나오는 노태우씨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 인생살이가 처연해지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언젠가 비자금 사건에 연루된 노태우 전 대통령을 지켜보며 피력한 이런 '돈과 인생'의 철학이, 본인이 연루된 대선 자금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던 것이다. 서울구치소의 차가운 감방 안에서, 냉혹한 정치 현실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을 그는 지금, '로맨티스트 이상수'와의 결별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주와 테네시주 접경에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이 우뚝
서 있습니다.

 모든 게 다 큰 미국 사람들이 산 이름 앞에 'Great'를 붙여 놨으니 오죽 크겠습니까.
산 중간에 위치한 안내소에서 출발해 차로 꼬박 한 나절씩을 달린 끝에야 동쪽 끝과 서쪽 끝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산 정상 인근에 설치된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모습.

 


 

       
     

          

 스모키 마운틴에서 사 나흘 머물기에는 이런 통나무 집이 제 격. 저는 함께 연수중이던 한국일보 고태성 선배 가족과 같이 여행을 떠났는데 두 세 가족이 함께하면 저렴한 비용으로 렌트할 수 있습니다.


                                                      

 스모키 마운틴의 구불구불한 길을 초기 개척자들은 말을 타고 다녔을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엔 인디언들의 길이었겠지요.
바로 체로키 인디언의 삶터였습니다.
지금은 박물관과 보호구역에 유폐된 체로키족말입니다.


   
 아무리 백인 정착민과 인디언의 역사는 피로 써내려 갔다고는 하지만 체로키족의 경우에는 좀 심했습니다. 체로키족은 그들 스스로 백인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학교도 세우고 교회도 짓고 대표자도 뽑았으나 끝내 추방당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히려 싸우다 죽은 인디언 보다 더 비참한 종말을 맞았습니다.
  조지아에서 쫓겨난 체로키족은 테네시와 캔터키를 지나 오클라호마로 이동하는 중에 4000여명이 죽어갔습니다.  후에 '눈물의 발자국'으로 널리 알려진
죽음의 이주입니다. 나치의 유태인 말살 정책을 연상시키는 이전책입니다.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체로키족 족장들은  대서양을 건너 영국왕 조지3세를 찾아갔습니다. 그 결과 자신들의 영토까지는 백인 식민자들이 넘어가지 않도록 하겠다는 문서를 받아왔으나 결국 휴지가 되고 만 셈입니다.
 아래 사진 속의 인물들이 대서양을 건넌 분들인데 그 때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내쫓기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싸우다 죽자는 부족민도 있었고,

 



 백인과 협상하자는 이들도 있었지만,



 결과는 같았을 것입니다.
 몇년 전 미국 의회는 자신들이 인디언들에게 했던 수많은 약속들을
 헌신짝 버리듯 어긴 점을 사과해야 한다는 안건이 상정되자
 이를 부결시킨 바 있습니다.
 역사는 냉혹한 동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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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인디언 조각상.




 이제 신대륙의 주인이 된 식민자들은

 인디언에게 화해하자고 제안합니다.

 식민자들과 인디언의 우정을 상징하는 불꽃이랍니다.

 지금도 타고 있습니다.

 물론 가식적인 가스불에 불과하지만.



 


존 덴버 아시죠?



 저처럼 386세대라면

 학창 시절 꽤나 흥얼거리고 다녔던 노래가

 그의 'Take Me Home Country Roads'였을 겁니다.
 

 이 노래는 논두렁따라 학교를 다닌 제가


 가사를 외우고 있는 몇 안되는 팝송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미국산인데도 마치 민요처럼 정겹게 느껴졌던 노래요,

 이웃집 시골 아저씨같은 가수였습니다.

 그래서 어딘지도 모르고 십 수 년을 따라 불렀던 곳을

 직접 가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솔직히 블루리지가 고유명사인 줄은 이번에야 알았습니다.

 버지니아주의 유일한 국립공원 쉐난도어와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블루리지 모습을 담아 왔습니다.

 블루리지 파크웨이는

 쉐난도어와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 국립공원을 잇는 길로

 도로의 평균 고도가 3000 피트를 넘고

 최고 고도가 6000 피트를 넘는 Sky Line입니다.

 오죽하면 존 덴버가 천국에 가깝다고 표현했겠습니까.

 그럼 존 덴버 노래가 묘사하고 있는 풍경들을 감상해 보시죠.  

Almost heaven west Virginia ♬♪


                                                      <쉐난도어 능선에서 바라본 웨스트 버지니아>

 

Blue Ridge mountain ♩♪



 


                                                  <너무 멀어서 개울처럼 나왔지만 쉐난도어 강 맞습니다>

 블루리지따라서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으로 연결됩니다.

 






 정상에서 기념 사진 한 장.


 




운이 좋으면 차 타고 가다 길 가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어먹고 있는

 엘크를 볼 수 있습니다.





 


미국 연수가 결정된 이후 나는 많은 사람에게서

좋겠다는 부러움 섞인 축하의 말을 들었습니다.

3개월 가까이 지내보니

정말 좋긴 좋더군요.

무엇보다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그렇고요.

기자 생활 10여년 동안 가족에게 빚진 것을 일거에 만회할 수는 없겠지만,

있으나마나 한 남편과 아버지로 낙인 찍혔던 저도

얼마든지 가정적인 남편, 자상한 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가족들에게 인식시킬 수 있어 좋습니다.

기자가 된 이후로는

데드라인(기사 마감시간)이 없는 편안한 세상을 살아볼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연수 와서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도

일종의 보너스입니다.

1년이면 도피하고 싶어질 만큼 자유가 부담스러워지지도 않을 정도의 기간이니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뒀던 일들을 원없이 해보려 합니다.

그러나 미국도 사람이 사는 땅인지라

살림살이의 무거운 짐은 한국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역만리의 객지 생활은

까딱 잘못하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성냥개비 집처럼

취약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 가족은 얼마 전 여행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예상치 못한 정신적·물질적 손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연수는 엄연한 현실이더군요.

각설하고,

제가 미국연수 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독자 여러분 덕분이었습니다.

기자의 해외 연수를 지원하는 기관은 많지만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은

저를 선정해준 한국언론재단뿐이거든요.

이 대목에서 독자 여러분은 묻겠지요.

내 혈세를 축내가며 미국엔 뭐하러 갔느냐고.

그래도 명색이 국비 장학생인데

허송세월하고 오진 않을 각오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는 점을 우선 밝힙니다.

제가 연수기관으로 선택한 곳은

워싱턴 DC에 위치한 조지타운 대학과 워싱턴타임스입니다.

 

 

 

 

 

 물가도 비싼 워싱턴을 굳이 연수지로 택한 것은

오는 11월의 미국 대통령 선거를

이왕이면 미국 정치의 중심지인 워싱턴에서 지켜보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막상 와서 보니 공화당 후보인 부시 대통령이나 민주당 케리 후보 모두 전국 순회 유세에 나서,

오히려 워싱턴에서는

그들의 모습을 TV를 통해서나 볼 수 있긴 했지만요.

그래도 ‘남부 촌놈’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백악관 시절

워싱토니안들에게 한 번도 친구 대접을 받아보지 못했다고 고백했던

그 콧대 높은 워싱턴,

미국과 세계를 움직인다는 자부심과 엘리트 의식이 가득한

오만한 워싱턴이야말로

기자로서 부딪쳐 보고 싶은 미국이었습니다.

‘바람둥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학부 과정을 마친 조지타운 대학은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사립 명문입니다.

저도 대학 졸업 14년 만에 다시 캠퍼스를 밟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대학측은 세계 각국의 연수생들을 위해

다양한 특강과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어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워싱턴타임스는 워싱턴에서 발행되는 두 신문 중 하나로

세계일보의 자매지입니다.

워싱턴포스트의 다소 진보적 성향의 논지와 차별화하며

1982년 창간된 워싱턴타임스는

이번 대선에서도 공화당의 부시 대통령을 사설로 지지한

보수적 논조의 신문입니다.

 한국에서는 워싱턴포스트에 비해 저평가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워싱턴 정가에서는 워싱턴포스트 못지않게,

특히 공화당 내에서는 포스트를 능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신문입니다.

저의 좌충우돌 미국 체험기는 세계일보 기자 블로그에 연재되고 있으니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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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정착기(3) - 조남규(세계일보/조지타운대)
<교통사고 대처법>

해외 여행객에서의 교통 사고도 예고 방송이 없다. 더욱이 언어상의 애로 등으로 국내에서 보다 사고 뒷처리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불측의 손해를 방지할 수 있다. 본인이 값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겪은 교통사고 처리 경험담을 소개한다.

버지니아주 남단에 위치한 버지니아 비치에서 1박한 뒤 CHESAPEAKE BAY BRIDGE-TUNNEL을 거쳐 메릴랜드 오션시티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오션시티 4거리에서 STOP SIGN 표지판을 착각하는 바람에 좌측에서 출발한 차에 의해 내 차의 뒷 범퍼 좌측이 받히는 사고를 당했다. STOP SIGN이 교차로 4곳에 모두 있으면 FIRST COME FIRST GO 원칙에 따라 먼저 도착한 차량에 우선권이 있고 본인 차의 진행 방향에만 있으면 다른 방향의 차량이 모두 지나갈 때까지 계속 기다려야 한다. 나는 4곳 모두에 STOP SIGN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좌측에서 진행중인 차를 한 대 보내고 출발했다. 그런데 나 보다 늦게 4거리에 다다른 좌측의 차량 역시 내가 출발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계속 달려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물론 STOP SIGN을 지키지 않은 본인의 과실이었다. 사고가 난 메릴랜드주에서는 1%의 과실이라도 더 많은 쪽이 100% 책임을 지도록 도로교통법이 규정하고 있다.

일단 사고가 발생한 후에는 다음의 조치를 신속히 강구해야 한다. 무엇보다 탑승자의 구호조치가 가장 중요하다. 교통사고시 본인 과실 여부를 불문하고 모든 비용(내 경우 Medical Expense는 1인당 5000달러)은 보험처리되는 만큼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고 의사의 확실한 진단을 받아두는 것이 좋다. 병원에서는 후에 보험사로 비용을 청구한다. 엑스레이 촬영비와 의사 진단비, 응급실 이용비가 별도로 계산된다. 내 건의 경우는 나와 두 자녀가 병원 응급실에서 엑스레이 만 찍고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나왔는데 1인당 500달러 안팎의 비용이 청구됐다.

사고가 나면 소방차와 앰뷸런스가 득달같이 달려온다. 만약 부상 정도가 심한 경우라면 절대 부상자에게 손을 대서는 안된다. 뒷 좌석에 탔던 아들이 차에서 나와 디카로 사고 현장을 찍으며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현장에 도착한 응급 구호팀 직원이 깜짝 놀라며 제지했다. 목이나 척추가 다쳤을 경우 부상자를 움직이면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이 구호팀 직원의 설명이다.

사고 뒷 처리는 우선 현장을 촬영하고 상대차 운전자의 이름과 전화번호, 상대차의 보험회사, 차 넘버를 확인한다. 상대방 과실이거나 어느 쪽 과실인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자신에게 유리한 목격자를 확보에 나서야 한다. 내 사고의 경우, 상대차 운전자는 사고가 발생한 직후 맨 먼저 목격자를 찾아서 내가 STOP SIGN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받고 후에 경찰관이 도착하자 그 목격자로 하여금 상황을 설명하도록 했다. 목격자를 확보한 후에야 내게로 와서 다친 사람이 없는지 물어보고 내 신원과 보험사를 확인했다. 목격자가 현장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름과 전화번호만이라도 확보하면 도움이 된다. 영어를 모르
는 외국인은 누구의 과실인지 분명치 않을 경우 목격자를 확보하지 못해 졸지에 가해자로 몰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상대차 운전자와는 다툴 이유가 전혀 없고 실제 고성이 오가지도 않는다. 단, 어떤 상황에서도 “I’m sorry”라는 표현은 금물이다.

경찰은 사고 경위를 조사한 뒤 과실이 있는 운전자에게 스티커를 발부한다. 나는 Negligent Driving과 Fail to make requird Stop 두 항목 위반으로 스티커를 발부받았다.
벌금액은 ‘30,35,48,55….525,572,Other$’로 천차만별이다. 결정은 경찰관 재량이다. 미국인 친구 한 명은 젊은 시절 경찰의 정지 요구를 무시하고 도주하다가 3000달러가 넘는 스티커를 발부받았다고 말했다. 나는 75달러 짜리와 275달러 짜리 2장을 발부받았다. 경찰이 발부한 스티커에 사인하지 않으면 현장에서 구속될 수 있다. 영어가 짧은 외국인에게는 다소 억울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겠지만 일단 경찰관이 스티커를 끊으면 달리 방도가 없다. 나는 내가 STOP SIGN에서 서지 않고 질주했다는 목격자의 진술이 사실과 다르며 STOP SIGN에서 일단 정지했다가 출발했다고 항의했으나 경찰관은 법정에 가서 따지라고 했다. 어느 경우나 내 과실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지만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티커는 정확히 표현하면 Citation(소환장)이다. 보험사에서 가장 관심을 갖는 대목이 누가 Citation을 받았느냐는 대목이다. Citation을 받은 운전자측 보험사가 모든 비용을 부담해야하기 때문이다. Citation은 두 종류다. 하나는 반드시 법정에 출두해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인이 잘못을 인정하고 벌금을 납부하든지 아니면 법정에 출두해 경찰관의 판단이 잘못됐다고 항변하든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본인 과실이든 아니든 스티커 발부하고 현장의 사고 처리는 종결된다.
스티커를 발부받은 운전자에게는 후에 주소지로 벌금 납부 통지서가 우송된다. 참고로 목격자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갈 경우 경찰관의 결정을 뒤집을 확률은 낮다고 한다. 미국은 제복입은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그 어느 나라 보다 높기 때문이다.

벌금은 개인 수표로 납부하는데 가급적 등기 우편을 이용하기를 권한다. 현지 미국인에 따르면 왕왕 벌금 납부 수표가 중간에 없어져 법원에서 출두 명령서가 날라오는 황당한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벌금을 납부하면 교통사고 위반 건은 종결된다.

경찰관이 사고 차량을 가까운 야적장으로 견인했다면 하루라도 빨리 자신이 이용하는 정비소로 차를 이동시켜야 한다. 야적장 보관 기일이 길어지면 보험사가 보관료 부담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정도라면 보험사가 견인 비용과 보관료를 부담한다.
이제부터는 보험사와의 관계다. 일단 사고 신고를 하면 보험사는 사고 경위를 파악한 뒤 Adjuster를 지정해 준다. 향후 사고 처리는 이 Adjuster와 협의하게 된다. 보험사는 차가 수리되는 정비소로 사람을 보내 견적을 낸 뒤 수리할 것인지, 폐차시킬 것인지를 결정해서 통보해준다. 통상 수리비가 차량 가격의 75% 이상 나오게 되면 보험사는 차량 가격을 보상하고 차를 인도해간다고 보험사측은 설명했다. 수리하는 것으로 결정되면 보험사는 수리비에서 피보험자의 Deductible(내 경우는 500달러)을 제외한 돈을 피보험자에게 수표로 우송해 준다. 피보험자는 정비소에 보험사가 보내준 수표와 본인의 Deductible을 주고 차를 인도받아오면 된다. 본인 과실로 사고를 내면 벌점 3점이고 사고마다 3점이 추가된다. 한 번 사고를 내면 추후 보험 갱신할 때 보험료가 30~50% 할증된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은 보험 가입할 때 사고시 차를 렌트할 수 있는 항목이 들어있는 지 확인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사고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탓에 이 부분의 확인을 소홀히 했다가 막상 사고를 당한 뒤 차가 수리될 때까지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끼쳐야 했다. 내게 보험을 권유한 한국인 에이전트가 실수했는지, 아니면 고의로 누락시켰는 지 알 수 없으나 나는 그 에이전트에 대한 신뢰를 철회했다. 실제 하루 렌트 비용이 30달러 안팎으로 보험사측으로는 만만치 않은 금액일 것이나 하루도 차 없으면 살 수 없는 미국인데 이는 실수라 하더라도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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