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 공원 디즈니 랜드로 유명한 미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동쪽으로 1시간 정도 차를 달리면

 대서양 파도가 넘실거리는 Space Coast와 만나게 됩니다.

 해변 이름 그대로 이 곳에

 우주를 향한 미국인의 도전 정신이 응축된

 Kennedy Space Center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NASA(미 항공우주국)의 로켓 발사 센터였던 이 곳은

 케네디 대통령이 63년 암살된 이후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60년대가 저물기 전에 달에 인간을 보내겠다는 케네디 대통령의 遺志는

 69 716일 실현됐습니다.

 케네디 센터의 로켓 발사대(Launch Pads 39A)를 떠난 아폴로11호가 나흘 뒤 Neil Armstrong Buzz Aldrin을 달에 내려 놓습니다.


 두 아이와 함께 케네디 센터를 찾았습니다.

 관광객 대부분은 자녀들을 동반한 부모들이더군요.

 호기심 많은 어린이들의 눈빛 속에

 과학 선진국의 미래가 투영돼 있는 듯 했습니다.

  67년 케네디 센터 일반 관람객을 위해

 비지팅 센터가 문을 연 이래

 매년 83만여명이 이 곳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우주 탐험대의 도전과 성취, 희생의 궤적을 좇다보면

 어른인 저도 벅찬 감동에 몸이 떨리는 순간이 있었는데

 눈 맑은 어린이, 가슴이 뜨거운 청소년들의 감동은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60년대라면 소련과의 우주 개발 경쟁이 한창이었을 시절인데

 어떻게 미 정부는 일반 국민들에게

 이처럼 중요한 시설을 공개할 생각을 다 했을까요?

 남북 대치 상황이 정치적으로 악용되던 시절,

 사방에 도배된 '민간인 출입 금지' 표지판에 익숙해 있던 나로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우주 개발 초창기 역사를 장식한 로켓들이 전시된

 로켓 가든이 맨 먼저 눈에띕니다.

  

 투어에 참가하면 버스를 타고

 실제 로켓이 조립되고 있는 건물과 발사대 등이 있는

 제한 구역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버스는 한쪽 벽면에 NASA 로고가

 미국 국기와 함께 선명한 빌딩을 끼고 한 바퀴 돕니다.

 



  가이드를 겸하고 있는 운전 기사는 이 로고를

 98 NASA 설립 40주년을 기념해 그려 넣었다고 설명하더군요.

 

 운전 기사는 환갑을 훌쩍 넘긴 할아버지였습니다.

일하는 노인들은 여행 기간 내내 익숙한 풍경이었습니다.

 고속도로 상의 관광 안내소나 국립공원 매표소 등에서 일하는 이들은

 대개가 노인이었습니다.

 그 연세에 모두가 용돈을 벌기 위해 나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궁금해서 물어보니 대부분이 자원 봉사라고 답변했습니다.

 

  NASA 로고가 새겨진 빌딩이 바로

 우주 왕복선이 조립돼 발사대로 옮겨지는

Vehicle Assembly Building입니.

 우주왕복선 발사가 있는 날마다 TV카메라가 부각시키는 이 빌딩은

 이제 케네디 센터의 상징이라 할 만하지요.

 당초 로켓 저장 창고로 지어진 이 빌딩은

 세계에서 제일 규모가 큰 창고 중 하나라고 합니다.

 

 우주왕복선이 착륙하는 활주로는

 길이가 4572m에 이릅니다.

 활주로 옆 수로는 인근 습지에 서식하는 악어들이

 일광욕하는 단골 장소이니 잘 찾아 보라고,

가이드는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조립된 우주 왕복선은

 축구장 절반쯤 되는 크기에

 무게가 3000톤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렇게 큰 우주 왕복선을

 조립 빌딩에서 어떻게 발사대까지 옮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가이드는 저의 이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이 목적만을 위해 특수 수송차를 만들었는데

 속도는 시속 1마일 정도지만

 언덕을 오를 때는 평형을 유지하는 등의

 첨단 장치가 내장돼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투어 버스는 발사대와 로켓 모형(달 탐험 로켓으론 처음으로

 우주인을 태우고 발사된 Saturn V)이 전시된 Apolle/Saturn V 센터 두 곳에서

 승객을 풀어 놓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발사대는

 우주 왕복선을 지탱하는 단순한 철골 구조물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주 왕복선 발사 직전 무려 30만 갤런의 물이 채워진다는

 발사대 물탱크 하나만 놓고 봐도,

 이 물의 용도가 발사시 발생하는 엄청난 양의 소리 에너지를

 흡수토록하는 용도로 사용된다고 하니

 사람은 아는 만큼 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Apollo/Saturn V센터에는 볼 거리가 풍성합니다.

  이 곳을 찾은 이들은 미국이,

 57 10월 사상 처음인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 성공 이후

 소련과의 우주 개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그리고 어떤 희생을 치러왔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켓 발사 장면을 당시의 발사 관제실을 재현한 방에서

 생생히 지켜볼 수 있습니다.

 카운트 다운이 실제와 똑같이 이뤄져 박진감을 더합니다.

 


 <달 탐험 로켓 발사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는 The Firing Room Theater>

 무려 40만명이 넘는 과학자와 공학자, 기술자들이

 우주선을 만들고 발사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달 표면을 걸어 본 12명을 포함해 소수만이 우주 여행을 떠날 수 있답니다.

  Apollo/Saturn V 센터는

 소수를 위해 땀을 쏟은 수많은 이들을 위해 바쳐진 전당입니다.

 압권은 실제 크기 그대로 전시된 Saturn V 로켓입니다.

 

   
<내 디카로는 로켓 전체를 담을 수 없어 밑부분만>

 딸 아이는 달에서 가져왔다는 돌(?)이 신기한 지 손을 대봅니다.

 



 60억 인류 중에
대기권의 두터운 벽을 뚫고

 우주로 날아간 행운아들은 500명 미만이라고 합니다.

 그런 만큼 우주비행사들이 찍어온 우주의 모습을

 5층 건물 높이의 스크린을 통해 입체 영상으로 즐길 수 있는 IMAX 영화관은

 필수 관람 코스이겠지요.


 우리는 관광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다

 검은색의 커다란 화강암 추모비를 발견했습니다.

 

추모비 위엔 S.Christa McAuliffe, Michael J.Smith, Ronald E.McNair

 20명 가까운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모두 우주 비행이나 훈련 도중 목숨을 읽은 우주 비행사들입니다.

  매컬리프,

 86 1월 발사 직후 폭발한 우주왕복선 챌린처호 승무원입니다.

 고등학교 교사이자 최초로 일반 국민 중에 선발된 여성 우주인.

 당시 대학생이던 저는 TV를 통해 환하게 웃던 그녀의 사진들을 바라보다가

 학생들에게 우주의 신비를 전하고 싶어했다는 그녀의 너무도 소박한 소망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이 화강암 구조물은 'Space Mirror'로 부릅니다.

 화강암 표면이 거울입니다.

 정확한 과학적 원리는 알 도리가 없지만

 화강암 거울에 비친 하얀 구름 속에

 희생자들의 이름이 둥둥 떠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들의 영혼이 그토록 동경했던 우주 속에서

 안식처를 찾은 것 처럼 느껴졌습니다.

 팸플릿을 읽어보니 이 추모비는 정부가 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86년 첼린저호 참사 직후

 중부 플로리다 지역 기업인들이 주축이 돼 설립한

 '우주 비행사 추모 재단'이 건립한 것더군요.

 그렇다고 추모 재단의 운영과 이 재단에 부속된 우주 교육센터가

 몇 몇 기업인의 자금 지원에 의존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첼린저호 승무원을 기리는 자동차 번호판을 구입한 플로리다 주민 모두가,

 미 전역에서 추모비를 방문한 수 천 만명의 미국민 모두가

운영의 주체였습니다.

 

 넓은 땅 덩어리와 풍부한 자원,

 과학 기술만이 미국을 강한 나라로 만드는 요인은 아니었습니다.            


 

 

 

 

 

 

 

  

 

 

 

  

 

  

  

 

 

 

 

  

 

 

  

  

 

  

  

  

  

 

 

  

 

  

 

 

 

 

 

  

  

 

 

 

 

 

 

 

 

  

 

 

 

 

 

 

 

 

 

 

 

  

 

 

 

 

  

 

 

 

 

 

  

 

 

  

 

 

 

  

 

 

 

 

 

 

 괴테가 말했던가, 여행은 인생의 지평을 확장시킨다고.
아이들은 이번 여행 기간 몸도 마음도 훌쩍 성장한 것 같더군요.

겨울 방학 기간을 이용한 압축적인 미국 체험. 버지니아에서 출발한 우리는 동부 해안선을 타고 미국의 최 남단인 플로리다 키 웨스트까지 내려 갔다가 북서쪽으로 기수를 돌린 뒤 재즈의 고향 뉴 올리언스, 텍사스주의 오스틴, 엘 파소까지 내처 달렸습니다. 그런 뒤 북상해서 뉴 멕시코주의 산타 페까지 간 뒤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귀로에 올랐지요. 16개 주를 달린 13 14일의 장정, 출발할 때 0으로 조정한 주행 기록계는 6000마일을 넘어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의 여행 루트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좀 비효율적이라고 촌평더군요. 달린 거리에 비해 볼 거리가 별로 없다나. 그래도 저는 산타 페나 엘 파소 같은 생소한 곳이 보고 싶었고 황무지나 사막이 그리웠습니다. 정말 끝이 있을까 싶게 뻗어 있는 길을 한 없이 달려보고 싶었습니다. 꿈꿀 때가 좋았지, 막상 여행 막바지에는 정말이지 그만 달리고 싶어졌습니다.


 미국 속의 유럽 뉴 올리언스
                                                                      ♪
'Jambalaya and a crawfish pie and fillet gumbo....♬'

 카펜터즈의 '잠발라야' 노래가 생각나는 뉴올리언스. 검보와 잠발라야의 고향.  저녁 무렵 도착한 뉴 올리언스의 밤 거리는 쓸쓸했습니다
. 현란한 네온 사인 아래 재즈가 흐르고 거리의 악사들 주위에 관광객들이 모여 장단을 맞추는 그런 낭만적인 밤 거리를 기대했던 탓일까. 추워진 날씨에 비까지 내리는 밤 거리엔 인적마저 드물었습니다. 주로 흑인들이 거리를 점령하고 있었고 어떤 골목에서는 짙게 화장한 여인들이 술집 앞에 서서 손님을 끌고 있었지요.  뭐랄까 약간은 退妓의 분위기를 풍기는 도시, 첫 인상치곤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여관(Historic French Quarter Inn,504-561-5621)에 들어서면서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여관은 옛 프랑스 식민지 도시의 중심부였던 French Quarter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로비 안으로 들어서면 담쟁이 덩굴로 둘러쌓인 유럽풍 정원이 반겨줍니다. 


 

  미시시피강 근처에 위치한 이 여관은 18세기 지어진 것으로 매니저는 1788년과 1794년 도시 전체를 태운 대 화재에서도 살아남은 유서깊은 곳이라고 자랑스레 얘기했습니다. 여관 이름에 'Hostoric'이 첨가된 이유라고 생각했습니다. 유서는 깊은데 주차장은 없더군요. 길 건너 공용 주차장을 이용해야 하는데 하루에 20달러씩 받아 챙깁니다. 밤 늦게까지도 시내 관광을 할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인지 여관측은 주차장 없는 부분에 대해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더군요.

 다음 날 아침 날씨가 화창해지자 도시가 제 색깔을 되찾았습다. 프랑스인 드 비에빌이 1718년 도시를 세우고 실권자인 오를레앙公을 기리며 누벨 오를레앙이라고 명명한 뉴 올리언스. 도무지 도시가 세워질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은 미시시피강 유역의 습지에 뉴 올리언스는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미시시피강의 명물인 유람선에서 바라본 뉴올리언스>

  당시 프랑스 식민자들이 프랑스 거리에서 정조 관념이 희박한 여성들을 납치해 뉴 올리언스에 정착시켰다고 합니다. 전날 밤 제가 목도한 거리의 여성들은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군요. 뉴 올리언스 지배권이 스페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뉴 올리언스는 미국의 어느 곳 보다  다채로운 도시로 변모했습니다. 프랑스와 스페인, 아프리카 영향이 뒤섞여 재즈와 케이준(Cajun), 크리오울(Creole) 요리, 마르디 그라(Mardi Gras) 같은 이색적인 혼성 문화를 낳았지요.

 뉴 올리언스를 소개하는 책자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어가 케이준과 크리오울입니. 크리오울은 뉴 올리언스와 미시시피 플랜테이션 농장에 정착한 최초 유럽인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포르투갈 귀족 출신이고 케이준은은 프랑스 서부 해안에서 캐나다 동남부로 이주했다가 영국에 의해 추방된 후 스페인의 배려로 루이지애나에 정착한 이들로 주로 농민 출신이라고 하더군요. 두 단어는 두 집단의 음식과 언어를 지칭하기도 한답니다.

뉴 올리언스의 관광 포인트는 바둑판식으로 거리가 설계된 프렌치 쿼터에 몰려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프렌치 쿼터인데 그 곳의 건물은 대부분 스페인풍이라는 점이지요. 1788년과 1794년 화재 당시 프랑스인들이 지은 건물이 대부분 소실됐고 후에 스페인인들이 새로 지었기 때문이랍니다. 어떻든 聖과 俗, 정통과 파격이 공존하는 곳이 바로 프렌치 쿼터입니다. 이 곳을 걷노라면 18세기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이 듭니다.

 관광의 출발점은 프렌치 쿼터 중심부에 위치한 잭슨 광장으로 잡는 것이 편리합니다

 

   <관광 마차와 뒷편 첨탑 건물 사이가 잭슨 광장>

 스페인인은 Plaza de Armas로, 프랑스인은 Place d
Armes로 불렀던 잭슨 광장은 미-영 전쟁 당시 민병대 출신으로 1812년 영국의 뉴 올리언스 공격을 막아낸 영웅 앤드루 잭슨을 기리기 위해 1848년 개명됐습니다. 광장에 잭슨 동상이 서 있더군요



 




 동상 받침대에 뭐라고 음각돼 있어 자세히 들여다 봤더니 '
The Union must and shall be preserved'(연방은 보존되어야만 하고 반드시 보존시키겠다)는 문구였습니다. 실제 잭슨의 뉴 올리언스 전투 승리를 계기로 영국과의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끈질긴 성격으로 전쟁 중에 '늙은 호두나무'라는 별명을 얻은 잭슨은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고 후에 제7대 미국 대통령이 됩니다. 대부분의 미국 영웅들이 화려한 분칠로 숱한 오점을 은폐하고 있드시 잭슨은 또한 인디언 학살에도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잭슨 광장에 들어서기 전에 디카투르 도로 상에 위치한 전통의 '카페 드 몽드'에 들러 chicory coffee beignets(설탕을 잔뜩 바른 도넛)을 먹어보시길 권합니다. 1862년 문을 연 이래 외장만 조금 바뀌었을 뿐 그대로인 카페입니다.

 

   <초록색 바람막이 안에는 사람들이 바글 바글>


 이 카페는 벼룩 시장
, 청과물 시장, 의류점, 선물 가게, 카페 등이 모여 있는 프렌치 마킷(French Market)의 북단입니다. 프렌치 마켓은 불행히도 내가 갔을 때는 보수 공사 중이었습니다. 카페 드 몽드에서 잭슨 동상을 바라보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세인트 루이스(St. Louis) 성당이 높이 솟아있습니다.

 




  대화재로 불탄 것을 1794년 다시 짓고 1851년 증축했는데 두 번째 증축 당시 첨탑을 세워 당초 스페인풍에 변화를 가한 것을 놓고 근대의 역사학자와 비평가들이 그렇게 애석해 했다는데 건축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첨탑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일부 여행서에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확실치 않고요. 그러나 가장 사진발이 좋은 성당 중 하나라는 평가는 맞는 것 같습니다. 교회 뒷편의정원은 한 때 결투 장소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잭슨 광장 양편에 붉은 벽돌이 특징인 아파트가 두 채 서 있는데 1849년 지어진 퐁탈바(Pontalba) 빌딩입니다.
 퐁탈바라는 이름의 프랑스 부인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데 레이스 양식 발코니가 아름답습니다. 르네상스식 건물로 사업 번창을 기원하면서 지었으나 이 건물 짓고 사업은 망했다고 전해져옵니다.

 

 


 성당 옆에 카빌도(Cabildo) 건물은 스페인 식민자들의 루이지애나 지배를 상징하는 스페인 총독 청사로 1799년 완공됐습니다.

 



 1803년 미 제퍼슨 대통령은 루이지애나로 불리던 미시시피강 서쪽의 광활한 영토를 프랑스로부터 1500만 달러에 매입, 대륙국가로의 첫 발을 내딛는데 그 역사적 계약이 카빌도에서 체결됐습니다. 카빌도 앞 광장에는 아마추어 화가와 점쟁이, 즉석 공연자들로 북적댑니다. 우리 가족이 지나가자 부랑자로 보이는 흑인들이 우리를 일본인으로 생각하고 '카니시와'(아마도 '곤니치와'의 잘못된 발음인 듯)라고 인사를 건넸더군요. 제가 그냥 '안녕'하고 응답했더니 기대했던 대답이 아닌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대충 여기까지 둘러보고 미시시피강으로 방향을 틀어야 합니다. 오전 11시30분에 출발하는 유람선 나체츠(Natchez) 시간에 맞춰야 하거든요. 미시시피는 '위대한 강'이라는 인디언 말이 어원이라고 합니다. 뉴 멕시코주 산타 페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리노이주 세인트 루이스를 들렀는데 그 도시 옆으로도 미시시피강이 흐르고 있더군요. 인디언들이 이름 하나는 제대로 지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뉴 올리언스 관광 포인트인 나체츠 유람선은 남북 전쟁 이전 흑인 노예의 노동력 위에 꽃핀 플랜테이션(주로 사탕수수) 유역을 그 시대 삶의 속도였을 진양조 가락 정도로 운행합니다. 2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뉴올리언스 명물 요리인 잠발라야(Jambalaya)를 맛보며 천천히 흐르는 강변 풍경을 감상하다보면 깜박 잠이 들기도 합니다. 실제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백인 아줌마 한 분은 여독이 몰려왔는지 식사를 마치자 마자 식탁에 엎드려서 내내 잠만 자더군요.

 



 주변은 악어들의 서식지인 뉴 올리언스의 그 유명한 습지입니다. 보트를 타고 습지를 탐험하는 관광 코스도 있습니다.  미시시피강은 한국의 장마철에 볼 수 있는 황토빛 흙탕물입니다. 매년 엄청난 양의 흙을 하구로 나르며 행로를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유람선 상의
재즈 라이브 공연이 볼 만하다고 해서 잔뜩 기대를 했는데 겨울철엔 공연이 중단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어 여간 실망스럽지 않았습니다.

 


 

 크루즈를 마친 다음엔 다시 잭슨 광장으로 돌아와서 프렌치 쿼터의 노른 자위라 할 수 있는 버번(Bourbon) 스트리트와 로얄(Royal) 스트리트를 돌아다닙니다. 버번 스트리트에는 해산물 요리집과 라이브 바가 즐비하고 로얄 스트리트에서는 골동품점과 갤러리가 볼 만합니다.


 버번 스트리트와 로얄 스트리트 중간에 위치한 프리저베이션 홀(Preservation Hall)은 뉴올리언스에서 가장 유명한 전통 재즈 클럽. 낮에는 창고로 오해하기 십상일 정도로 허름해서 한 참을 헤멘 뒤에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저녁에 가봤더니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이 문 밖에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더군요. 가게는 창고 같더니 내부는 정말 창고였습니다. 음식도 없고 마실 것도 없고 심지어는 테이블도 없습니다. 재즈가 모든 것인 그런 곳이더군요.

 



                                                <전설의 프리저베이션홀>

 버번 스트리트에는 곳곳에 선정적인 가게가 많으니 미성년자를 동반한 부모들은 각별한 주의를 요합니다. 골동품점은 남북 전쟁 이전의 고가구와 보석, 전쟁 당시 사용된 총과 칼, 오래된 화폐와 동전 등 별 희한한 것들을 수집해서 팔고 있는데 가격이 장난이 아니더군요. 보통 천 달러 이상 호가하고 있어 우리 가족은 아이 쇼핑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거리마다 공연가나 행위 예술가들이 관광객의 시선을 끌고있는데 반드시 그들 앞에는 돈 통이 놓여져 있습니다. 돈 안내고 오래 보고있기 민망하겠지요.




  

                                         <거리의 행위 예술가. 추운 날씨였는데 1시간 넘게 꼼짝 안하고 있더군요>

  
 뱀파이어(Vampire) 귀신, 부두(Voodoo)교 등 좀 으시시한 주제에 관심이 많은 관광객이라면 세인트 루이스 성당 앞에서 밤에 출발하는 'Haunted History Tour'나 'A vampire tour' 같은 각종 괴상한 투어들에 참가해 보시지요. 뉴올리언스는 톰 크루즈가 주연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촬영 장소였을 만큼 죽은 이들의 흔적이 도시 곳곳에 살아 숨쉬는 곳이거든요.  도시 북쪽에 입이 벌어질 만큼 넓은 공동 묘지가 있는데 공동 묘지 투어도 있습니다. 뉴올리언스 부두교 여왕으로 알려진 Marie Laveaux의 무덤도 필수 관광 코스라고 하는데 저는 사양했습니다.



 

누구나 뉴올리언스하면 부활절 전에 개최되는 마르디 그라 축제를 떠올리는데 정작 나는 기간(2월 중순쯤)을 맞출 수 없었습니다. 후에 여행하실 분은 도전해 보시길.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텍사스. 미국 남부를 동서로 횡단하는 10번 도로를 타고 서부로...

 

 


 


 워싱턴타임스는 워싱턴포스트(이하 포스트)에 익숙해 있는 한국인들에게 생소한 이름이다. 한국인에 의해 미국의 수도를 근거지로 신문사가 창간된 배경이나 신문사들의 도산이 줄을 잇던 시절에 굴지의 포스트에 맞서 20년 넘게 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 워싱턴타임스가 옹호하는 가치 등 수많은 점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의문 부호로 남아있을 것이다. 필자는 1995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워싱턴타임스 교환기자와 방문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워싱턴타임스 창간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은 정부와 국민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출발했다
.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공화국 미국을 설계하면서 언론은 국민들이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야 하며 그 정보는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충분히 다양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미국의 수도가 워싱턴으로 옮겨온 1800년 이래 워싱턴에는 최소 2개 이상의 신문들이 각축했다. 진보 성향의 신문도 존재했고 보수 성향, 중도 성향의 신문들도 있었다. 워싱턴은 미국과 세계의 미래가 결정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1년 여름 129년 전통의 워싱턴스타가 재정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문을 닫게되면서 워싱턴에는 포스트만이 남게됐다.

 

 워싱턴스타는 1957년 포스트에 추월당했으나 타임 재단의 지원 아래 워싱턴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움직여 온 유력지였던 만큼 워싱턴스타의 몰락은 모두에게 뜻밖의 일로 받아들여졌다. 워싱턴스타의 역사성은 링컨 대통령이 게티스버그 연단에서 내려오면서 "아마 자네는 이걸로 큰 기사를 만들 수 있을걸세"라면서 연설 초고를 건넨 기자가 다름아닌 스타 기자였다는 일화에서도 확인된다. 

 

  워싱턴의 단일 신문체제는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당시만 해도 런던에는 9, 파리에는 13, 로마에는 8개의 일간지가 경쟁하고 있었고 서울이나 도쿄,방콕 등도 마찬가지였다. 워싱턴은 매일 아침 포스트로 뒤덮혔고 포스트가 워싱턴 정책결정자들에게 끼친 영향력도 그 만큼 커졌다. 이런 상황은 건전한 여론 형성을 위해 바람직스럽지 않다는 우려가 확산됐다.

 

 워싱턴과 미국은 루퍼드 머독같은 미디어 재벌이나 뉴욕 타임스 같은 언론 그룹, 보수적인 재력가등의 워싱턴 진출을 고대했다. 포스트의 논조가 1977년 포스트 100주년 기념식에서 포스트家 전기 작가인 찰머스 로버트가 자랑스럽게 말했듯이 '진보적인 미국 민주주의의 강력한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워싱턴타임스 칼럼리스트인 아놀드 바이흐만(후버 연구소 연구원)은 "미국인의 3부의 1이 자신을 보수주의자로 규정하고 단지 17% 만이 자신을 진보주의자로 주장하는 시대에 워싱턴에는 보수주의를 위한 목소리가 사라진 셈이었다. 1980년대는 민주주의의 미래를 비관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소련의 팽창주의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에 방송들은 무기력한 분위기만을 양산해내고 있었다. 가정의 가치와 희생 정신과 자기 절제, 고된 노동과 믿음으로 특징지워지는 민주주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징후였다"고 회고했다. 후에 등장한 보수 성향의 FOX 뉴스 채널은 당시만 해도 루퍼드 머독의 머리 속에 점으로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신문을 창간하기에 좋은 시점이 아니었다. 타임 재단이 소유했던 워싱턴스타마저 쓰러지던 상황에, 그 것도 1877년 창간된 전통의 포스트에 맞서 싸워야하는 부담감이 너무 커서 어느 누구도 선뜻 워싱턴 언론계에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워싱턴타임스 창간(1982 517)은 이런 상황에서 "워싱턴 언론계에 진보의 목소리는 만연한 반면 보수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많은 보수주의자들의 목소리에 응답한"(창간 사설) 것이었다. 신문의 논조는 보수를 지향했지만 편집국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정치 성향을 지닌 기자들로 채워졌다. 기자 중에는 공화당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다 레이건 행정부에 몸담았던 이도 있었지만 스스로 모택동주의자를 자처한 기자도 있었다.

 

워싱턴타임스 웨슬리 푸르동 주필은 "우리는 신중하게 의견과 뉴스를 구별해 왔다. 사설과 칼럼을 통해서는 공격적이고 분명한 관점을 견지하는 대신 뉴스 칼럼은 최대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노력해 왔다"고 말했다.

 

 워싱턴타임스는 발행 첫날부터 워싱턴포스트와 경쟁할 만한 규모의 신문사와 인원으로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독자들은 최고가 아닌 신문, 뉴스 보도와 분석, 논평에서 깊이가 없는 신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워싱턴타임스는 세속적인 신문을 지향했다. 서구 사회의 오랜 전통인 聖俗 분리 원칙에 충실하기로 한 것이다. 편집국은 기존 언론계에서 활약한 언론인들로 채웠졌고 창간 사설을 통해 "워싱턴타임스에 투자한 이들은 신문이 자유롭고 독립적이지 않는 한 생존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잘 알고 있다"고 천명했다.

 

 그럼에도 창간 초기에는 숱한 편견과 맞서 싸워야 했다.

기존 언론계의 반응 역시 냉담했다. 이코노미스트는 " 'Moonie(Rev. Sun Myung Moon의 추종자)  paper'가 워싱턴스타같은 훌륭한 신문도 실패한 포스트와의 경쟁에 뛰어들었다"고 보도했다. 포스트는 "새로운 신문은  Rev. Moon과 그의 교회를 위한 선전지에 불과할 것"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주장을 보도하며 견제에 나섰다.
워싱턴타임스 주필을 역임한 아놀드 보슈그레이브
의 회고.


<Arnaud de Borchgrave>

 

"첫 3년 동안 워싱턴타임스는 'Moonie'라는 형용사와 싸워야 했다. 그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벤 브래들리(당시 포스트 편집국장)는 편집국에서 워싱턴타임스를 보지 못하도록 금지했다.(포스트 역시 워싱턴 지역의 5개 신문중 꼴찌로 시작해 오랫동안 뉴욕타임스로부터 무시당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워싱턴 실력자들이 모이는 오찬 장소인 메트로폴리탄 클럽이나 코스모스 클럽에서는 워싱턴타임스이 반입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인식을 타파하기 위해 개인적인 캠페인을 펼쳤다. 뉴욕타임스가 항상 우리를 'Moonie-owned Washington Times'라고 지칭했기 때문에, 나는 20년동안 알고 지내던 아브라함 로젠탈 편집국장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나는 '우리가 뉴욕 타임스를 지칭할 때 그 소유자의 종교와 함께 논한다면 합당한 일이냐'고 물었다. 얼마 후 그가 'You win'이라고 쓴 답신을 보내왔다. 워싱턴 클럽의 신문 반입에는 24개월이 걸렸고 지금은 포스트나 뉴욕타임스보다 더 많이 찾는 신문이 됐다"


 창간 멤버인 테드 에이그래스 편집 부국장도 비슷한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

 

 " 무엇보다 다른 미디어부터 신뢰도를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창간 초기 뉴스 메이커들이 워싱턴타임스의 편집진과 오찬을 하곤했다. 정부 관료도 있었고 의회 지도자도 있었다. 종종 그 자리에서 특종감인 중대 발언이 나오곤 했다. 내 임무는 워싱턴타임스의 특종 기사가 인용 보도될 수 있도록 통신사 등에 알리는 일이었다.  82년 말인가, 83년 초의 일이다. 레이건 행정부의 고위 관료가 워싱턴타임스를 방문, 편집진과 오찬하면서 새 정책을 발표했다. 빅 스토리였다. 기사 요약본을 AP 통신사에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보도하기를 거부했다. 그 관료가 워싱턴타임스에 있었는지, 있었더라도 그런 발언을 했는지를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기존 언론계의 불신과 오만이 나를 화나게 했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공증인을 고용해서 오찬 도중 오고간 대화들을 모두 기록해서 문건으로 만들어 보냈다. 우리 기사를 못믿겠거든 함께 보낸 대화록을 직접 찾아서 기사를 작성하라는 메모와 함께. 그 때부터 AP는 워싱턴타임스 기사를 인용 보도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는 '이제 기사만 보내도 도 된다'고 말했다. 워싱턴타임스가 신뢰를 획득해 가는 과정에서 거둔 조그만 승리였다


 
혹자는 6개월을, 어떤 이는 6주를 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런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워싱턴타임스는 살아 남았고, 나아가 영향력을 획득했다. 독자들이 호응했기 때문이었다. 월 스트리트 미디어 분석가들은  워싱턴타임스 유가 부수가 2 5000부를 넘지못할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그해 첫 해에 7 5000부에 이르자 당혹스러워했다.  


 워싱턴포스트 성장의 이면에 브래들리가 있었다면 워싱턴타임스에는 보슈그레이브가 있었다. 브래들리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한 밥 우드워드"포스트가 터트린 최대 사건인 워터게이트조차도 편집국을 통괄하던 브래들리가 포스트에 끼친 영향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던 인물로, 65 44세의 나이로 편집국장 대우에 임명된 이래 포스트를 유력지로 성장시킨 장본인이다.


 <Ben Bradlee>

 

 보슈그레이브 25년 동안 뉴스위크에서 경력을 쌓은(브래들리는 뉴스위크 재직 시절 그 밑에서 활동했다) 국제 관계 전문가로 워싱턴타임스는 그가 주필로 재직한 85년부터 91년 사이 주류 언론계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의 임명은 많은 국내외 미디어의 관심을 모았고 그의 재임 기간 유력 언론들은 하나씩 워싱턴타임스를 일원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미디어 관련 잡지들도


"좋아하든 싫어하든 워싱턴 타임스는 유력지 반열에 올랐다"(미디어 위크)
"워싱턴은
다양성을 제공하고 정치권 거물들이 처신을 조심하도록 하기 위해 워싱턴타임스를 필요로 하게됐다"(콜럼비아 저널리즘 리뷰)라고 보도하며 호의적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가 채택한 방식은 '포스트 찌르기'였다. 
그에 따르면, 그들이(포스트) 원하는 기사를 우리가 먼저 우리 신문에 게재하는 방식이다. 브래들리 1996 보슈그레이브 70회 생일에 워싱턴타임스 사옥을 처음으로 방문, "초창기 워싱턴타임스가 어려웠던 시절, 교수형을 앞둔 사람의 집중력이 강해지듯이 그런 자극을 준 인물"이라고 소개됐다.

 

 보슈그레이브가 편집국장에 취임한 첫 해에 워싱턴타임스는 AP통신에 의해 포스트와 뉴욕타임스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신문이 됐다. 포츈지는 1986년 "워싱턴 타임스는 대통령이 오전 9시 첫 회의 전에 읽는 5개 신문 중 하나"라고 보도했다.


 

 보슈그레이브의 유쾌한 두가지 회상.

"한 번은 워싱턴포스트 그룹 회장인 캐서린 그래엄이 만찬 석상에서 다가와 말했다. '아노드, 나는 당신에게 꼭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신문이 정말 좋아보인다'"


<Katharine Graham>

 

"85년 3월 주필에 취임했을 때다. 취임 첫 날 레이건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뭐 도와줄 일 없을까' 그가 짓궂게 물었다. 나는 '누설된 정보 속에 흠뻑 젖어들도록 만들어주십시요'라고 대답했다. 물론 우리는 결코 그가 흘려준 정보에 젖어본 일이 없다. 모든 특종들은 우리 스스로 땀흘려 일궈낸 것이었다"

 워싱턴타임스의 첫 10년은 냉전의 시대였다. 워싱턴타임스는 이 기간에 언론계 지형을 바꾸고 국가적 아젠다에 영향을 미쳤다. 2004년 선거에서 낙마한 민주당 지도자 탐 대슐(전 상원의원.사우스 다코타) "토론은 민주주의의 소리다. 그것이 내가 워싱턴타임스를 평가하는 이유다. 워싱턴타임스는 창간 이래 워싱턴을 더욱 시끄럽게 만들었고 국가적 토론을 더욱 활성화시켰으며 우리의 민주주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대슐의 평가대로 워싱턴타임스는 보수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1981년 출범한 레이건 행정부는 군사력 증강을 통한 소련과의 정면 대결 정책을 채택했다. 워싱턴타임스는 출발부터 진보적 언론과 분명한 선을 그었다.  창간 직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가 숨지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그 뒤를 이었다. 워싱턴타임스는 안드로포프를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언론의 태도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아놀드 바이흐만의 말을 들어보자.


 "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에 의해 안드로포프는 스카치를 마시고 미국 소설을 탐독하는 유쾌한 친구로 묘사됐다. 평화는 곧 실현될 것이라는 분위기가 두 신문에 의해 조성됐다. 그가 오랫동안 KGB 수장으로 있었다는 사실은 무시되었다. 그러한 난센스는 워싱턴타임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1983 91일 소련이 사할린 상공에서 대한항공 민간 여객기를 격추시켰을 때 워싱턴타임스의 안드로포프에 대한 평가는 비극적으로 확인됐다"


 워싱턴타임스는 시종 일관 반소비에트,
반 공산주의의 길을 걸었다.

미국 의회와 백악관, 정부 기관에 매일 아침 배달되는 워싱턴타임스의 존재는 미국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워싱턴타임스의 사설과 칼럼은 미국 대통령과 의원을 비롯한 영향력있는 인사의 입을 통해 반복적으로 재생산됐고 그간 묻혀 있었던 보수의 목소리가 분출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시대적으로 타임스는 세계 역사상
중대한 국면에 미국의 수도에 나타났다. 소련의 팽창주의가 그 정점에 달했던 그 시점에 워싱턴타임스는 독자란과 코멘터리란을 작가와 지식인,학자,언론인들에게 개방했다. 독자들은 지금까지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 새로운 관점, 새로운 의견들을 접할 기회를 얻게됐다.


 다음은 역사학자인 폴 존슨의 진단.


"워싱턴 타임스가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었던 배경엔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임, 1979년 영국 마거렛 대처 수상 집권,
1980년 미국 레이건 대통령 당선이라는 3가지 역사적 사실이 절묘하게 놓여있었다. 역사는 위대한 인물의 의지에 의해 움직여진다. 이들 세 사람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은채 소련을 무너뜨리고 독일을 통일시키고 동유럽을 공산 독재의 사슬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2001 3 체니 부통령이 그의 취임 이후 첫 인터뷰를 워싱턴포스트가 아닌 워싱턴타임스와 가졌고 부시 대통령은 그 달 초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유에스에이 투데이,워싱턴타임스 백악관 출입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공화당 대통령과 워싱턴타임스의 연대감은, 작고한 레이건 전 대통령이 1992년 워싱턴타임스 10주년 행사 때 보낸 축하 메세지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미 국민은 진실을 알고있다. 워싱턴타임스의 내 친구들, 당신들은 그 것을 그들에게 말했다. 그 것은 항상 환영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신들의 목소리는 크고 힘이 있었다. 나 처럼, 당신들도 세기의 가장 중요한 고비에 워싱턴에 도착했다. 우리는 함께 팔을 걷어 붙였고 일했다. 그리고 오 예스, 우리는 냉전에서 승리했다"

 

 민주당 클린턴 대통령과 공화당 원내총무인 뉴트 깅그리치가 워싱턴타임스 보도로 궁지에 몰렸고 레이건 대통령의 핵심 측근은 워싱턴타임스 보도로 사임 후 기소돼 처벌 받았다.

 

 워싱턴타임스의 대표적 탐사 보도는 클린턴 대통령의 아칸소 주지사 시절 부동산 매매 의혹을 파헤친 'White water 사건'이다.

워싱턴타임스 탐사보도 전문기자인 제리 세퍼는  1993 12,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이던 포스터(클린턴 부부의 아칸소 부동산 매매 당시 법률 자문)가 자살하던 그날 밤 클린턴 대통령 측근이 포스터 사무실에서 화이트워터 사건 관련 문건을 빼돌렸다는 사실을 특종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언론들이 이 기사를 받아 의혹을 제기하자 백악관은 마침내 특별 검사를 임명해 조사하라는 의회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된다. 이 조사가 후일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으로 이어져 그의 탄핵으로까지 비약됐던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후일 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그녀의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Living History)에서

워싱턴타임스 보도에 관해 상세히 해명하며 강한 반감을 표시한다.

 중국이 미사일 기술을 시리아와 이란에, 핵무기 기술을 파키스탄에 수출하고 있다는 특종 보도는 1996년 나왔다. 국방 정보 분야 전문기자인 빌 거츠의 보도를 계기로 계기로 클린턴 행정부와 의회는 중국의 대량살상무기 기술 확산 문제에 현미경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거츠에 관해서는 제임스 울시 당시 CIA 국장의 "거츠의 보도가 어디서 흘러나갔는지 알 수 없어 미칠 지경이다. 이제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기 위해 그의 기사를 읽을 수 밖에 없다"는 발언이면 족할 듯 싶다.
 
가 안보가 우선이냐, 독자의 알 권리가 우선이냐는 오랜 논쟁에 대해서는 별도의 고찰이 필요하겠지만, 체니 부통령이 워싱턴타임스 주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거츠의 기사 수위를 낮춰주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워싱턴타임스가 미 언론계에 기여한 또 다른 공로는 전통과 가정, 믿음, 인종 평등, 미국의 기독교 유산을 옹호하는 이들에게 합당한 공간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1991년 부터 타임스는 사설과 칼럼, 기사를 통해 적극적으로 이런 주제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푸루동 주필은 "우리는 다른 신문들이 꺼려하는 주제들을 기꺼이 다룬다. 많은 유력 신문들이 미국의 주류 흐름으로부터 떨어져 있고 그런 탓에 주류에 속한 이들이 누구인지,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단적인 예가 동성연애자들의 군 복무 허용 문제에 대한 보도 태도다. 재선을 노리던 민주당 클린턴 대통령의 이같은 대선 공약과 관련, 타임스는 그의 취임 전부터 이 정책이 군내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게이 병사도 다른 병사와 다를 게 없다는 전제 하에서 클린턴 공약에 동조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2004.12.6

 

 

 


1995년 워싱턴타임스 교환기자 시절

                                                                                     2005~2006년 워싱턴타임스 연수 시절

 

 

*아래는 밴 브래들리 사망 소식을 다룬 조선일보의 2014년 10월23일자 보도.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대통령을 하야시킨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을 지휘했던 벤저민 브래들리(Benjamin C. Bradlee) 전 워싱턴포스트(WP) 편집인이 21일 워싱턴DC 자택에서 93세로 별세했다. 로이터통신 등은 그가 수년 전부터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도널드 그레이엄 전 발행인이 "미국의 당대 최고 편집자"라고 추도하는 내용 등을 포함, 10개 면에 걸쳐 추모 기사를 게재했다. 경쟁지인 뉴욕타임스(NYT) 등 주요 언론도 그가 '신문 편집인의 표본' '용기와 카리스마를 가진 위대한 언론인' '저널리즘의 신화'였다고 애도했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을 하야시킨‘워터게이트 사건’특종을 지휘했던 고(故) 벤저민 브래들리(오른쪽 끝) 워싱턴포스트 편집인이 1973년 동료들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 왼쪽부터 캐서린 그레이엄 발행인,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의 두 주인공인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 기자, 하워드 사이먼즈 편집국장.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을 하야시킨‘워터게이트 사건’특종을 지휘했던 고(故) 벤저민 브래들리(오른쪽 끝) 워싱턴포스트 편집인이 1973년 동료들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 왼쪽부터 캐서린 그레이엄 발행인,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의 두 주인공인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 기자, 하워드 사이먼즈 편집국장. /워싱턴포스트
그가 편집인(1968~1991년)을 맡았던 23년간은 WP의 중흥기였다. '워터게이트'를 비롯한 역사적 특종으로 지역 언론에 불과했던 WP를 미국 대표지로 만들었고, 미국사와 언론사를 다시 쓰게 했다. 특히 1972년 민주당 전국위원회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던 괴한 5명이 체포된 사건을 당시 20대였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기자가 심층 취재해 세계적 특종으로 만든 워터게이트는 "사건을 단순하게 보지 말고 깊숙하게 취재하라"는 브래들리의 철학이 낳은 성과였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위한 음모를 파헤쳐 결국 대통령을 물러나게 했다. 두 기자의 특종은 "탐사 보도의 새 장(章)을 열었다"는 극찬 속에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에 앞서 WP의 입지를 다진 사건은 미국 정부의 베트남전 개입 과정을 담은 1급 비밀 '펜타곤 문건' 보도였다. 특종은 NYT가 했지만 국가 안보를 이유로 닉슨 행정부가 게재를 금지하는 동안 WP가 오히려 앞서갔다. 캐서린 그레이엄 발행인과 브래들리는 워싱턴포스트의 주식 상장으로 권력의 입김에 취약할 때였지만 의기투합해 '원칙을 지키는 언론'이란 인식을 심었다. 브래들리는 조선일보와의 생전 인터뷰에서 "언론과 정부가 너무 사이가 좋으면 뭔가 크게 잘못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그가 재임하는 동안 WP는 퓰리처상을 17번 받았다. 줄무늬 셔츠에 흰색 칼라, 걷어붙인 소매가 트레이드마크인 그는 기자들에게 공격적인 기사를 요구하면서도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고 로버트 카이저 전 WP 부국장은 회고했다.

WP의 형식 파괴도 그의 업적이다. 일간지에 잡지 개념을 도입한 섹션면 발행은 거의 모든 세계 신문들이 따라오게 만들었다. 패션과 유행을 다룬 '스타일'이 대표적이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WP의 발행 부수는 두 배인 80만부로 늘었다.


	1971년 무렵의 벤저민 브래들리(오른쪽) 워싱턴포스트 편집인과 캐서린 그레이엄 발행인.
1971년 무렵의 벤저민 브래들리(오른쪽) 워싱턴포스트 편집인과 캐서린 그레이엄 발행인. /뉴시스
위기도 있었다. 1981년 퓰리처상까지 받은 '8세 아동의 헤로인 중독'을 다룬 '지미의 세계'가 허구임이 드러났을 때였다. 브래들리는 퓰리처상을 바로 반납하고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철저하게 조사해 기사화했다.

1921년 보스턴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브래들리는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해군 장교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뒤 뉴햄프셔 선데이뉴스에서 기자 일을 시작했고, 1948년 WP에 입사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 때문에 3년 만에 파리 주재 미국 대사관의 공보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활자의 매력을 잊지 못했던 그는 2년반 뒤 뉴스위크 유럽 특파원으로 언론계에 복귀했다. 이후 뉴스위크를 WP가 인수하는 과정에 관여하면서 WP로 돌아왔다.

브래들리는 조지타운 저택촌의 '이웃사촌'이던 존 F 케네디와 막역했다. 케네디가 암살당한 뒤 재클린 여사를 데려간 사람이 바로 그였다. 케네디가 대통령일 때 여러 특종을 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케네디와의 관계는 저서 '케네디와의 대화'로 이어졌다.

1991년 은퇴하고 WP 부사장으로 있던 브래들리는 2013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 영예인 '대통령 자유메달'을 받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브래들리는 진정한 언론인이었고, WP를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신문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세번의 결혼으로 자녀 4명, 손자 10명, 증손자 1명을 뒀다. 워싱턴=윤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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