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트루먼과존F.케네디,린든존슨민주당 후보가 각각승리한1944년,1960년,1964년대선에서도남부는민주당의아성이었다.남부의백인노동자들이‘뉴딜연합’에남아있었다는방증이다. 그런데린든존슨행정부가흑인인권보호를위한민권법제정에 나서면서남부의백인노동자들이공화당으로말을바꿔타게된다. 남북전쟁당시남부연합을공격한공화당은남부백인들의적이나 다름없었다.남부백인들은자신들의노예였던흑인과친구가되느니자신들을공격했던북부의공화당백인들과화해하는편을택한 셈이다.이제1968년대선이후로는남부에서파란색을찾아보기가 쉽지않게됐다.(1976년대선과1992·1996년대선은예외다.민주당이각각남부조지아주출신인지미카터와남부아칸소주출신의빌클린턴을후보로내세웠기때문이다.)
공화당리처드닉슨대통령은베트남전쟁에반대하는학생들의 시위와 사회적 혼란상에불안감을느낀‘조용한다수’ silent majority 를 움직였다.닉슨대통령은정부의징병제연장조치를계기로미전역의 대학에서시위 사태가빚어지자“불량배들이 대학을엉망으로 만들고있다.세계에서가장운이좋은젊은이들은대학교에서책을 불태우고있고다른한편(베트남)에서는또다른젊은이들이의무를 다하고있다”고말했다.징병이유예된대학생들의반전시위는베트남에자식들을보낸 백인 노동자들의마음을움직였다.대학생은 징집이연기됐기때문에베트남정글에는주로 백인 노동자층과흑인청년들이파병됐다.
당시공화당주류는미국동북부를기반으로한중도파당원들이 었다.이들은온건보수성향의넬슨록펠러Nelson Rockefeller 뉴욕주지사를대선후보로밀었다.그는미국의대부호인존D.록펠러의 손주다.유력가문출신에높은인지도,그리고탄탄한당내기반. 누구나 공화당 대선후보는록펠러라고생각했다.공화당은1928년 허버트후버HerbertHoover부터1960년리처드닉슨까지모두중도 성향대선후보를내세웠다.록펠러는이런공화당의전통에도부합하는적임자였다.
정치분석가들은1964년대선이미국보수진영의이념적푯대를 제시한선거였다고평가한다.남부에서는새로운보수 바람이불기 시작했다.
미전역에서수많은골드워터지지자들이골드워터선거운동원으 로뛰었다.1964년샌프란시스코전당대회장을가득채운골드워터 지지자들은새로운유형의공화당원들이었다.무엇보다충성심이 남달랐다.소신이 뚜렷한 비주류일수록응집력은강해지는법이다. 후일공화당원들의‘공적(公敵)1호’가 되는힐러리도당시엔골드워터운동원이었다.골드워터지지자들은공화당핵심으로성장,당내 주도권을거머쥔뒤공화당재건작업을주도하게된다.
뉴욕출신경제학자인밀턴프리드먼 MiltonFriedman은원래케인스주의자였으나60년대초반골드워터와의기투합할때쯤엔반(反) 케인스주의자가돼있었다.그는케인스주의가정부의크기를키우는바람에시장의자유가침해됐다고비판했다.프리드먼은골드워터후보의경제참모역할을했다.프리드먼은대선을거치면서하이예크의뒤를 이은 대표적보수파자유주의경제학자로서입지를굳혔다.레이건은1967년캘리포니아주주지사 시절에 프리드먼을불러주정부슬림화작업을함께추진했다.레이건대통령이1986년 대법원장에지명하는윌리엄렌퀴스트 William Rehnquist도골드워터 사단의일원이었다.
그는1950년리처드닉슨공화당상원의원후보에반대하는선거 운동을했다.레이건은뉴딜의신봉자였다.민주당의‘큰정부론’에 경도됐던레이건은제너럴일렉트릭사(GE)의 TV프로그램인《GE 극장》해설자로활동하던기간에 서서히 민간기업옹호론자로바뀌게된다.그는미전역의GE공장을순회방문하면서 종업원들과 애기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국가경제가발전하기위해서는정부의개입보다기업의자율성을보장하는것이더중요하다는점을알게됐다고술회했다.보수화한레이건은1960년대선에서는리처드닉슨공화당후보를지지했다.당시민주당대선후보였던존F.케네디의아버지가레이건을찾아와케네디후보지지를요청했으나레이건은거절했다.레이건은 자신의 정치적 변신과 관련,“나도변했으나민주당이변한 것만큼 변하지는않았다”고 말했다. 자신이 민주당을떠난것이아니라 민주당이 자신을 떠났다는취지였다.그는1962년공화당원으로 등록했다.그리고 1964년대선에서는배리골드워터공화당 후보의 캘리포니아주선거대책위원장으로활동했다.
이연설을계기로레이건은단숨에미보수진영의기대주로떠올랐다.미보수진영은레이건을주목했고2년뒤그를캘리포니아 주지사후보로밀었다.레이건은민주당소속의재선주지사인에드 먼드브라운EdmundBrown을 가볍게 이기고공화당대선후보군에이름을올렸다.골드워터지원연설이1980년레이건대통령탄생의시발점이된셈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폴 라이언 하원의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오바마백악관 홈페이지. Photo by Pete Souza
라이언 직전에 하원의장이었던 존 베이너는 협상 과정에서 오바마 행정부에 양보했다는 이유로 공화당 우파에 의해 축출당했다. 미국 의회 권력을 장악한 공화당 우파는 백악관까지 탈환하겠다는 각오로 대선에 임했다. 백악관 탈환을 위한 실행 계획 중 하나가 루비오, 크루즈를 각각 공화당 대선 후보와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내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트럼프의 등장으로 이런 구상은 물거품이 됐다. 루비오는 경선 초반에 전사했고 크루즈도 2위에 그쳤다. '트럼프 반란'은 성공했다. '아웃사이더' 트럼프는 162년 전통의 공화당을 접수했다. 링컨과 레이건의 공화당은 어쩌다 아웃다이더 반란군에 점령하다는 신세가 됐을까.
이코노미스트들은미국경제가금융위기후유증에서벗어나정상 궤도에 진입한 이후에도국가부채는지속적으로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장기적으로미국국가부채문제는국제결제의기본이되는 기축(基軸)통화로서의달러위상을약화시킬것이라고전문가들은 우려했다. 국무장관시절힐러리는미정부의천문학적인규모의부채와재정적자를국가안보문제로다뤄야한다는입장을밝히기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우리는금융위기와중에 정권을 인수했으며금융위기와경기침체여파로내가대통령취임선서를하기도전에 이미 빚더미에올라앉았다”면서국가부채는전임 부시 정부 탓임을 분명히했다.하지만보수진영에서는의료보험개혁등오바마정부의사회주의적정책들이국가부채문제의주범이라고공격했다.
2011년 7월 국가부채 문제의 심각성을 설명하는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 오바마백악관홈페이지.
미정부는2010년에도국가부채한도를12조4000억달러에서현 수준으로높였다.당시만해도정부와공화당이티격태격하긴했지만부채상한선조정은순조로웠다.하지만2010년중간선거로공화당이 하원을장악하면서상황이달라졌다.재정적자에반대하는티 파티계열의원들이대거당선되면서더이상부채상한을올려서는 안된다는기류가강해졌기때문이다.미연방정부부채가법정상한을넘어선것은1962년이후74차례에달했지만그때마다미의회는부채상한을올리는법안을가결시켰다.이제부채상한인상은 공화당의‘정치적핵무기’가됐다.공화당 내보수그룹은 오바마 정부가 정부 빚을 줄이기위한 조치로메디케어와메디케이드정책을 근본적으로수술하고,오바마케어를손질하지않으면디폴트도불사하겠다고배수진을치고나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진보적 사회정책을 추구했지만 재정은보수적으로 운용하려 애썼다.오바마의정무보좌관인데이비드플루프DavidPlouffe는“오바마의몸속에서는‘블루독’ Blue Dog (균형예산을주창하는민주당의원 그룹)의피가흐른다”고말했다.오바마는 집권 기간 동안 진보적어젠다를추진하면서도재정 적자를줄이기 위한노력을병행했다.
오바마는메디케어·메디케이드예산삭감과국방예산삭감,부유층 감세 중단 등을 통해 재정적자를줄여나가겠다는타협안을제시했다.하지만오바마대통령의이같은재정적자감축구상은진보·보수양측의반발을샀다.진보진영은사회보장예산삭감을, 보수진영은부유층감세폐지를반대했다.양진영의협공을당한 오바마가돌파구를마련하지못한채허우적거리고있는사이에미국의국가부채는법정상한에도달했다.미정부의자구노력이한계에도달하는2011년8월초까지정치권이연방정부의법정채무한도를올려주지않으면디폴트가현실화하는엄중한상황이도래한것이다.
2011년 7월20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공화당 존 베이너 하원의장과 에릭 캔터 하원 원내대표를 백악관으로 불러 국가채무 법정한도를 높여달라고 설득하고 있다. 왼쪽부터 베이너, 조 바이든 부통령, 오바마, 캔터. -오바마백악관 홈페이지. Photo by Pete Souza
국가부채상한인상협상와중에공화당내에서는2012년선거에서백악관과상원을되찾아올수있기때문에오바마의제안은받아들일필요가없다고생각하는의원들이많았다.베이너는디폴트라는중차대한국가적현안을정치적흥정거리로만든이런인식에동의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베이너가옳았다.2012년선거에서오바마는재선에성공했고민주당은상원다수당을지켰다.
원래미국에는소득세가없었다.자유를찾아신대륙으로건너온 이민자들은연방정부를만들어낸뒤에도 개인의 소득은 정부도 건드리지못하는신성불가침의영역으로생각했다.소득세를신설한 것은공화당창당멤버인에이브러햄링컨AbrahamLincoln 대통령이 었다.링컨은남북전쟁이시작되자군자금을마련하기위해일정소득이상의주민에게소득세를부과하는조치를발동했다.링컨은 여론의반발을고려해시효를정했다.시효만료로없어졌던소득세는다시부활해서정치공방의단골소재가되고있다.
깅리치는선거공약으로제시했던‘미국과의계약’Contract with America 을토대로감세와균형예산,작은정부를이루기위한법안을쏟아내기시작했다.세금을줄이면서재정적자를줄이려면재정 지출,특히복지예산을대폭삭감해야했다.빌은“메디케어와메디 케이드,교육과환경예산은절대줄일수없다”는‘M2E2:Medicare, Medicaid,Education,Environment' 전략으로맞섰다.연방회계연도가끝나는1995년9월30일까지예산안은처리되지않았다.빌은공화당이정부폐쇄를볼모로자신들의입맛에맞게손질한임시예산안에 거부권을행사했다.그해11월14일미연방정부는폐쇄됐다.
경찰과 군,법원,소방서 같은필수서비스 부문을 제외한 상당수 정부업무가중단됐다.80만명에달하는연방공무원은일시해고되거나휴가 처리됐다.박물관과국립공원은문을 닫고 사회보장과 국제통상관련업무도부분적으로이뤄지지않았다.당시뉴욕을방문했던필자는맨해튼배터리공원BatteryPark에서자유의여신상으로출발하는여객선이정부폐쇄여파로운항을중단하는바람에낭패를당했다.
정부폐쇄는해를넘겨27일간지속됐다.깅리치의공화당은중간 선거압승으로자신들의공약이추인받았다고생각했지만다수국민들은정부의서비스를원했다.깅리치의생각과달리메디케어를 지키고싶어했고대학생들은학자금대출이삭감되길원치 않았다. 사실1994년중간선거투표율은38%에 불과했다.국민이백지수표를준것으로착각했던깅리치는대가를치렀다.이념적맹신상태에빠졌던깅리치의공화당은민심을잃었다.1998년중간선거는 빌클린턴과백악관인턴모니카르윈스키의섹스스캔들이불거진 가운데치러졌는데도민주당이의석을보탰다.재선대통령임기중에치러진중간선거에서집권당이승리하는것은매우이례적인일이었다.깅리치는선거패배의책임을지고하원의장직을내놔야했다.
부시는2003년자본이득세세율도20%에서15%로낮춰부자들의지갑을두둑하게만들어줬다.자본이득세는대표적인부자세금이다.부시의 감세조치로 빌클린턴 정부의 호황기 때쌓였던 정부 재정은바닥을드러냈고2001년9·11사태가촉발시킨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비용의 증가로 미국은 빚더미에앉게됐다.미국의 재정악화속도는부시임기말에터진금융위기로가속이붙었고 이는오바마정부의선택지를좁히는주요원인으로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