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검찰총장이 대선 후보 선호도 조사 2위에 올랐다는 세계일보 여론조사 결과가 여론에 큰 주목을 받았다. 어떻게 윤 총장은 단숨에 2위자리까지 올랐을까.

이번 조사결과 문항을 보면, 응답자가 주관식으로 윤 총장 이름을 적어낸 것이 아니라 세계일보가 윤 총장을 문항에 13명의 대선 후보 중 한명으로 포함시켰다. 세계일보는 왜 대선후보를 13명으로 정했고, 이 가운데 윤석열 총장을 포함시켰을까. 특히 윤 총장은 현직 검찰총장이며 정치적 중립과 수사기관의 독립성을 수호해야 하는 법적 책무를 지녔다. 그런데도 현실정치의 최종 결과물이라 할 대통령 후보 명단에 넣는 것은 뭔가 부자연스럽다. 그동안 검찰의 수사내용 뿐 아니라 청와대와 갈등을 빚은 과정까지 의심받을 우려가 있다.

세계일보는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선 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윤 총장을 꼽은 응답이 있어 예시했다고 밝혔다.

세계일보는 지난달 31일자 ‘윤석열, 새보수·무당층 지지 업고 급부상…차기 대통령 적합도’에서 “30일 세계일보 창간 31주년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권 후보군으로 윤석열 검찰총장이 급부상했다”며 “하지만 실제 윤 총장을 대선 후보로 평가하기보다는 청와대와 법무부에 맞서서 정권을 수사하는 검찰에 중도층이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봐야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라고 썼다. 이 신문은 자사가 여론조사기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지난달 26~28일 3일간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남녀 1007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차기 대통령 적합도 조사에서 윤 총장은 10.8%의 지지율을 받아 2위에 이름을 올렸다고 전했다. 이밖에도 여러 언론사이 이 조사결과를 인용 보도했다.

세계일보 의뢰를 받아 문항을 작성한 리서치앤리서치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세계일보 창간기념 조사 보고서(2020. 1.29)’를 보면, 설문지 원본의 14번에 대선후보 질문이 나온다. 설문 문항은 ‘다음 거론되는 인물들 중 차기 대통령 감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이며, 답변은 13명의 대선후보 명단이 선택지로 나와있다. 윤석열 총장은 아래와 같이 13명 가운데 13번째로 포함돼 있다.

-답안 선택지 : 1. 김경수 2. 박원순 3. 심상정 4. 안철수 5. 오세훈 6. 원희룡 7. 유승민 8. 이낙연 9. 이재명 10. 정세균 11. 홍준표 12. 황교안 13. 윤석열 14 기타( ) 15. 적합한 인물 없음 16. 잘 모르겠다


리서치앤리서치는 대선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윤 총장을 이번에 처음 포함시켰고, 세계일보 의뢰로 넣었다고 밝혔다.

정치적 중립과 독립성을 지켜야 하는 현직 검찰총장을 대선 후보 명단에 넣었다. 수사과정에서 청와대와 갈등을 빚고 있는데 아예 현실정치로 불러내 현 집권세력과 더욱 각을 세우도록 내몰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든다. 자칫 지금까지 검찰 수사 신뢰도조차 훼손할 우려도 있다.

이에 조남규 세계일보 정치부장은 3일 저녁 미디어오늘에 보낸 문자메시지 답변에서 “최근 일부 여론조사에서 대선 주자 선호도를 묻는 질문에 윤석열 검찰총장을 꼽은 답변이 나온 바, 그 부분에 대한 여론을 확인하기 위해 윤 총장을 예시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국갤럽이 지난 17일 발표한 여론조사 조사에서 대선후보로 윤석열 검찰총장을 꼽은 결과가 있다. 윤 총장을 지목한 비율은 1%였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24%),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9%), 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공동대표(4%), 이재명 경기도지사(3%), 박원순 서울시장(2%),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2%)에 이어 윤 총장은 유승민 새로운보수당 의원과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함께 1%를 얻었다. 49%는 특정인을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갤럽 조사는 응답자들이 자유롭게 이름을 적어낸 주관식 답변을 받은 반면, 세계일보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한 방법은 대선후보 명단 13명을 보여주고 그 중에 한 명을 고르라고 한 객관식 답변을 받았다.

출처 :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5026

*결과적으로 윤석열 총장은 2022년 3월 대선에 뛰어들었고, 국민의힘 경선에 참여해 후보로 최종 선출됐다. 아래는 한겨레 신문 2022년 1월8일자에 실린 성한용 정치 선임기자의 기사.

‘잘못된 만남’ 윤석열의 운명은?

국민의힘이 자중지란에 빠졌습니다. 선거를 두 달 앞두고 대선 후보가 선거대책위원회를 해산시키고 위원장을 내쫓았습니다. 후보와 의원들이 대표를 몰아내려 했습니다. 상처를 급히 꿰맸지만 언제 다시 터질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국민의힘 사람들은 대부분 이준석 대표가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김종인 전 위원장을 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본질이 아닙니다. 국민의힘이 대선 후보를 잘못 뽑은 것입니다. 제 평가가 가혹하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윤석열 후보는 선대위를 해산시켰습니다. 당무우선권을 활용해 사무총장과 부총장도 바꿨습니다. 후보만 빼고 다 바꾼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여론조사 지지도가 올라갈까요? 그럴 리가요. 문제는 선대위가 아니라 윤석열 후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국민의힘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일을 차분히 복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윤석열 후보를 도대체 누가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만들었을까요?시작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뒤이어 벌어진 검찰의 적폐청산 수사는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권 10년의 파산 절차였습니다. 파산한 기업이나 단체가 회생하려면 뼈를 깎고 살을 베어내는 고통이 불가피합니다.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보수의 재건을 위해서는 2017년 대선 패배 뒤에 차라리 자유한국당을 해산하는 것이 옳았습니다. 하지만 대구·경북에 지역 기반을 두고 60대 이상 고연령층에 세대 기반을 둔 보수 세력에게는 그만한 인내심이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를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 정부 탓으로 돌리며 2022년 3월 대선 승리를 노렸습니다.문제는 마땅한 대선 주자가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홍준표 의원은 보수 세력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유승민 전 의원에게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2019년 12월 한국갤럽 차기 정치 지도자 선호도 조사를 보면, 이낙연 26%, 황교안 13%, 이재명 9%, 안철수 6%, 심상정 5%, 유승민 5%, 박원순 5%, 오세훈 4%, 조국 4%, 홍준표 4%였습니다. 박근혜 정부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한 황교안 대표를 차기 대통령감으로 꼽을 정도로 보수 성향 표심은 방황하고 있었습니다.그 빈 곳을 조국 사태로 유명해진 윤석열 검찰총장이 치고 들어왔습니다. 2020년 1월 <세계일보>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은 10.8%로 황교안 대표를 누르고 2위를 차지한 일이 있습니다. 윤석열 후보가 뒷날 고백했지만, 이 여론조사를 계기로 대선 출마를 결심한 것입니다.

윤석열 후보를 부추긴 사람으로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니스트를 뺄 수 없습니다. 2020년 12월22일치 신문에 ‘윤석열을 주목한다’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2021년 7월13일 ‘문재인 5년을 지울 청소부를’이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국가 경영 능력이 부족해도 문재인 정권을 청산할 사람이라면 대선 후보 자격이 충분하다는 논리였습니다.

김종인 전 위원장의 무리한 욕심도 한몫했습니다. 2021년 3월 윤석열 후보가 검찰총장을 그만두고 여론조사에서 선두로 치고 올라오자, 김종인 전 위원장은 “별의 순간을 잡은 것 같다”고 논평했습니다. 그 뒤 밀고 당기기를 거쳐 국민의힘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습니다. 별의 순간을 잡은 것은 어쩌면 윤석열 후보가 아니라 김종인 전 위원장이었습니다.김종인 전 위원장이 정치에서 은퇴한 상태였던 2020년 3월 <영원한 권력은 없다>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한 일이 있습니다. 에필로그에서 바람직한 권력자와 참모의 관계로 독일의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1세, 미국의 닉슨과 키신저 사례를 들었습니다. 최고 권력자의 절대 신임을 바탕으로 유능한 참모가 전권을 행사한 경우입니다.사실은 김종인 전 위원장 자신이 바로 그런 방식으로 일해 온 사람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근로자재형저축과 의료보험을 도입했고, 전두환 대통령 시절 개헌을 하면서 경제민주화 조항을 넣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을 비롯한 개혁 정책을 관철했습니다. 반대가 많았지만, 최고 권력자의 신임을 바탕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김종인 전 위원장이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돕고, 2016년 총선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도울 때는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전권을 달라고 요구하면서 정당 내부의 기존 세력과 갈등을 빚은 것입니다.결국 박근혜 후보와는 재벌 순환출자 해소를 둘러싸고 마찰을 빚는 바람에 대선 전에 결별했습니다. 문재인 대표와는 갈등을 빚다가 총선이 끝난 직후 결별했습니다.

이번에 윤석열 후보와 결별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종인 전 위원장은 전권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허수아비가 될 것을 우려한 윤석열 후보가 오히려 그를 쫓아냈습니다.어떻게 된 일일까요? 김종인 전 위원장은 왜 매번 전권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독선적이기 때문일까요? 혹시 박근혜 후보, 문재인 대표, 윤석열 후보가 김종인 전 위원장보다 나이가 적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가 이들을 ‘하수’로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원인이 무엇이든 윤석열 후보와 김종인 전 위원장의 이번 결별은 애초에 윤석열 후보가 김종인 전 위원장에게 총괄선대위원장 자리를 맡기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결과가 됐습니다. 윤석열 후보는 물론이고 김종인 전 위원장도 체면을 단단히 구겼습니다.어쩌면 김종인 전 위원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또다시 사람을 잘못 본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번은 몰라도 두번이면 김종인 전 위원장이 사람을 보는 안목에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대안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착각, 김대중 칼럼니스트 같은 보수 논객들의 부추김, 그리고 김종인 전 위원장의 개인적 욕심 등이 합쳐져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탄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본질에서 저는 이른바 보수 세력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대선 후보로 선택한 것은 전략적 판단 착오라고 생각합니다. 윤석열 후보는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보수 세력 전체가 윤석열이라는 정치 아마추어의 허파에 바람을 불어넣어 대선 후보로 밀어 올리는 모험을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양심 불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도 있었습니다. 보수의 혁신을 요구하는 민심에 힘입어 2021년 6·11 전당대회에서 이준석 대표가 당선됐습니다. 대선 후보 경선 막판에는 2030의 지지를 등에 업은 홍준표 의원이 일반 국민 여론조사에서 앞섰습니다.그런데도 국민의힘 의원들과 책임당원들은 민심을 거부하고 윤석열 후보를 선택했습니다. 윤석열 후보 지지도 하락과 국민의힘 자중지란은 의원들과 책임당원들의 자업자득인 셈입니다. 좀 힘들어도 국민의힘이 홍준표·유승민·원희룡 같은 내부 인사들을 대선 후보로 선출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상황이 좋았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이제 관심사는 윤석열 후보와 국민의힘의 앞날입니다. 어떻게 될까요?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는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이 됐습니다. 단일화 없이 이재명 후보를 꺾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수 세력 전체가 나서서 후보 단일화를 압박할 것입니다.첫째, 윤석열 후보가 안철수 후보를 꺾고 그 탄력으로 본선에서 이재명 후보를 이기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일 것입니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처럼 되는 것입니다.둘째, 안철수 후보를 누르고 본선에는 진출하지만, 대선에서 패배하는 경우입니다. 윤석열 후보가 책임을 혼자 뒤집어써야 합니다.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그랬습니다.셋째, 안철수 후보와 단일화 경쟁에서 패배해 장렬히 전사하는 경우입니다. 보수 야권의 불쏘시개로 역사책에 기록될 것입니다.단일화에 실패해 다자구도로 대선을 치러야 할 수도 있습니다. 다자구도에서 득표율이 저조하면 2017년 홍준표 후보, 2007년 정동영 후보처럼 될 것입니다. 다자구도에서 선전하면 1997년·2002년 이회창 후보처럼 아슬아슬하게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다자구도에서 이재명 후보를 꺾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재명 후보가 치명적인 실수를 하거나 새로운 비리 의혹으로 추락해야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윤석열 후보에 앞서 정치에 뛰어든 법조인으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있었습니다. 서울대 법대를 나온 판사 출신 초엘리트였지만, 정치인으로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윤석열 후보는 이회창 총재를 반면교사로 삼아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을까요? 이회창 총재의 길을 엇비슷하게 따라갈까요? 아니면 3월9일 선거 이후 정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될까요? 윤석열의 운명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래는 2023년 11월25일자 한겨레신문의 '성한용의 정치 막전막후' 기사입니다. 한동훈 법무장관이 윤석열의 길을 따라가는지를 짚어보는 기사입니다.

‘윤석열의 길’ 따라하는 한동훈…아직은 ‘메시지 없는 싸움꾼’

성한용 기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24일 오후 울산시 울주군 울산과학기술원(UNIST)에서 지지자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검찰총장이 여론조사에서 ‘차기 정치 지도자’로 등장한 것은 2020년이었습니다. 한국갤럽 2020년 1월 셋째 주 차기 정치 지도자 선호도 조사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은 1%로, 처음 이름을 올렸습니다. 응답자가 정치인의 이름을 말하는 자유 응답 방식이었습니다. 이낙연 24%, 황교안 9%, 안철수 4%, 이재명 3%, 박원순·홍준표 각각 2%, 유승민·윤석열·유시민 각각 1% 차례였습니다.

곧이어 세계일보가 1월31일치 신문에 창간 31주년 여론조사 결과를 실었습니다. 차기 대선주자 적합도 조사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은 10.8%로, 이낙연 전 국무총리(32.2%)에 이어 2위를 차지했습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10.1%였습니다. 윤석열·황교안 중에서 보수 성향 응답자들은 황교안 지지가 많았습니다. 중도 성향 응답자들은 윤석열 지지가 많았습니다. 오차범위 안이었지만 윤석열 검찰총장이 황교안 대표를 따돌렸다는 상징성이 컸습니다. 이 여론조사를 계기로 보수층 여론이 윤석열 검찰총장 지지로 결집하기 시작했습니다.1년여 뒤인 2021년 3월4일 윤석열 검찰총장은 “이 나라를 지탱해온 헌법 정신과 법치 시스템이 파괴되고 있다”며 검찰총장직을 사퇴했습니다. 이어 6월29일 “정권을 교체하는 데 헌신하고 앞장서겠다”며 대선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다음날 국회 기자실을 방문했습니다. 세계일보 부스에서 기자들에게 “그때 그 조사 아니었으면 내가 여기까지도 안 왔다”고 말했습니다. 세계일보 여론조사를 계기로 상승세를 탔고, 그 덕분에 대선에 출마할 수 있었다는 뜻이었습니다.

대선주자 경쟁에서 여론조사의 위력은 이처럼 절대적입니다. 대통령을 아무리 하고 싶어도 여론조사가 받쳐주지 않으면 출마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정치에 별로 뜻이 없던 사람도 여론조사 결과가 좋게 나오면 대통령을 꿈꾸게 됩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여론조사는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여론조사가 갑자기 잘 나오면 멀쩡했던 사람도 판단이 흐려집니다. “어쩌면 내가 바로 하늘이 내린 대통령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여론조사 수치 상승을 믿고 비정치인이 대선에 출마하는 것은 승률이 매우 낮은 도박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물론 성공한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윤석열 대통령입니다. 실패한 사례가 훨씬 더 많습니다. 정주영, 조순, 문국현, 정운찬, 안철수, 반기문 등이 그런 경우입니다.윤 대통령의 성공 사례를 그대로 따라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입니다. 한국갤럽 여론조사 ‘차기 정치 지도자’ 선호도 조사의 질문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귀하는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정치 지도자, 즉 장래 대통령감으로 누가 좋다고 생각하십니까?(특정인을 답하지 않은 경우 재질문) 그럼,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는 인물은 누구입니까?(자유 응답)”올해 11월 둘째 주 조사 결과는 이재명 21%, 한동훈 13%, 오세훈 4%, 홍준표 4%, 이준석 3%, 김동연 2%, 안철수 2%, 이낙연 2%, 원희룡 1% 차례였습니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누리집 참고)여권에서는 한 장관이 오세훈·홍준표·이준석·안철수·원희룡을 밀어내고 가장 높습니다. 그것도 상당한 격차입니다. 2020년 윤석열 검찰총장보다 더 뛰어난 성적입니다. 흐름도 좋습니다. 지난해 6월 4%에서 시작해 9월 9%, 12월 10%로 올라선 뒤, 올해에는 3월 11%, 6월 11%, 9월 12%, 10월 14%, 11월 13%를 기록 중입니다. 무서운 상승세입니다.11월 둘째 주 조사 결과를 지역·연령별 등 조금 자세한 항목으로 나눠서 살펴보겠습니다. 세분하면 표본 수가 적기 때문에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대략의 윤곽은 알 수 있습니다. 지역별로는 서울(18%), 대전·세종·충청(15%), 대구·경북(14%), 부산·울산·경남(15%)이 평균보다 높습니다. 연령별로는 60대(24%)와 70대 이상(22%) 등 고연령층이 평균보다 확실히 높습니다.지지 정당별로는 국민의힘 지지자의 무려 31%가 한동훈 장관을 선택했습니다. 의견을 유보한 40%보다는 낮지만, 오세훈(9%), 홍준표(7%), 이준석(4%), 원희룡(3%), 안철수(1%)보다는 확실히 높습니다.

여론조사 결과가 한 장관을 부추겼을까요? 한 장관은 지난 11월17일 대구를 방문했습니다. 강력범죄 피해자를 지원하는 ‘대구스마일센터’와 달성 산업단지였습니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발언을 쏟아냈습니다.“대구 시민들을 대단히 깊이 존경해왔다. 대구 시민들이 6·25 전쟁 과정에서 단 한번도 적에게 이 도시를 내주지 않았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싸웠다.”법무부 장관이 아니라 대선주자급 정치인의 발언입니다. 총선 출마 여부를 묻는 기자들에게 “의견은 많을 수 있다. 총선이 국민 삶에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면서도 “범죄 피해자를 잘 보호하고 인구 위기 극복을 위해 외국인 정책과 이민 정책을 잘 정비하는 게 국민께 더 중요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출마와 불출마 양쪽 가능성을 다 열어놓은 발언입니다. 한 장관은 시민들의 사진 촬영 요구에 응하느라 애초 예매한 저녁 7시 서울행 기차표를 취소하고, 밤 10시께 서울행 기차에 올랐습니다. 한 장관 대구 방문에는 ‘데자뷔’(기시감)가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2021년 3월3일 대구를 방문해서 “고향에 온 것 같다”고 말한 뒤, 바로 다음날 검찰총장직을 사퇴했습니다. 대구는 이른바 보수의 심장으로 불리는 지역입니다.한 장관은 사흘 뒤인 11월20일에는 ‘시비에스(CBS) 대한민국 인구포럼’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기자들이 총선 출마 여부를 묻자 “보도나 추측, 관측은 하실 수 있는 것”이라며 “제가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21일에는 대전에 있는 법무부 산하기관 개소식에 참석해 “일부 운동권 정치인들이 재벌 뒷돈 받을 때 저는 어떤 정권에서든 재벌과 사회적 강자에 대해 엄정하게 수사했다”고 말했습니다. 대구 발언 못지않게 정치적 함의가 있는 발언입니다.22일에는 국회에서 열린 ‘지방소멸 위기, 실천적 방향과 대안’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기자들의 민감한 질문을 하나도 회피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24일에는 울산 에이치디(HD)현대중공업 문화관을 방문해 조선업 숙련기능인력 도입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최강욱 전 민주당 의원의 ‘암컷 발언’ 관련해서는 “인종·여성 혐오 발언을 공개적으로 구사하는 사람이나 집단은 민주주의 공론의 장에서 퇴출당하는 것이 세계적인 룰”이라고 했습니다. 또 최 전 의원이 에스엔에스에 쓴 글(It's Democracy, stupid)에 빗대 “이게 민주당이다. 멍청아. 이렇게 하는 게 국민들이 더 잘 이해하실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한 장관의 행보에 대해 여러 언론에서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한겨레는 22일치 신문에 “‘공직 이용한 정치 행보’ 한동훈 장관직부터 내려놔야”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습니다. 동아일보도 “1주일 새 대구 대전 울산…‘정치 행보’는 장관직 내려놓고 하라”는 사설을 썼습니다.

한 장관의 정치 행보에는 두 가지 궁금증이 따라다닙니다. 첫째, 내년 총선에 출마할까요? 국민의힘에서는 한 장관의 총선 출마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입니다. 법무부 장관 후임자 인사 검증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마한다면 어디로 나갈까요? 한 장관 개인적으로는 당선이 중요할 것입니다. 서울 서초나 강남을 노릴 수 있습니다. 국민의힘 사람들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서울 강북의 이른바 험지에 출마하거나, 차라리 비례대표로 출마하고 다른 후보들 지원 유세를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지역구에 출마하려면 선거일 전 90일인 1월11일까지, 비례대표에 출마하려면 선거일 전 30일인 3월11일까지 장관직을 사퇴해야 합니다. 소수 의견이지만 출마하지 않고 장관을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행정부에서 윤 대통령을 도와야 한다는 이유입니다.둘째, 차기 대선주자로 올라설 수 있을까요? 한 장관의 강점은 야당의 공격에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권투로 치면 수비와 공격을 동시에 하는 ‘카운터블로’가 특기입니다. 자신에 대한 민주당의 비판을 ‘이재명 대표 부인 법인카드 사적 유용 논란’, ‘송영길 전 대표 엔에이치케이 술집 논란’, ‘서영교 의원 친인척 보좌진 채용 논란’ 등으로 맞받아쳤습니다.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를 직격하는 전술입니다. 민주당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환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뭔가 허전합니다. 윤 대통령은 어쨌든 공정과 상식이라는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한동훈 장관에게는 그런 게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은 싸움꾼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마무리하겠습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쿠데타 동지였습니다. 군인 출신이 연이어 대통령을 했는데, 검사 출신이라고 못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장관은 정무직 공무원입니다. 한 장관은 이미 정치인입니다. 총선에 출마하든, 대선에 출마하든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한 장관은 ‘강남 엘리트’,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 이미지가 강합니다. 바로 그게 장점이자 약점일 수 있습니다. 지금의 높은 인기는 거품인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내용을 채워가는 것은 한 장관 자신의 몫입니다. 당분간 한 장관 기사를 자주 보게 될 것 같습니다. 한동훈 차기 대통령,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중도 노선은 태생적으로 회색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보수와 진보정책이 뒤섞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기존 진보·보수 정당들도 선거 국면에선 중도층을 끌어안기 위해 위장 중도 전략을 구사한다. 보수가 세금이 들어가는 포퓰리즘성 선심 공약을 발표하고 진보가 우파 인사를 영입하는 식이다. 진보, 보수 정당이 여야로 나뉘어 한국 정치를 사실상 반분하고 있는 구도에서 제3지대 중도 노선은 고사되기 십상이다.

안철수가 다시 중도 깃발을 들고 나섰다. 이 노선은 현실정치에서 쉽지 않은 길이다. 그 스스로도 “실용적 중도정치를 하는 데는 이 길이 옳은 길이라는 신념과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양쪽에서 모두 자기편이 아니라고 비난하고 모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과거 주요 고비마다 정치적으로 ‘철수’한 전력이 있다. 성공 여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완주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언젠가 사석에서 “무슨 일이든 끝을 보는 성격”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안철수가 다시 정치를 시작한 건 한국 정치가 여전히 안철수의 공간을 남겨뒀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국의 진보는 노무현, 문재인정부를 거치면서 당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왔다. 민주당 내에서 중도 노선이 마지막 불꽃을 피운 건 2012년 총선 전후였다. 당시 중도파를 대표했던 한 중진 의원은 “탈이념적 진보의 공간 속에서 새로운 온건 합리 세력이 둥지를 틀고 선수(選數)에 상관없이 온건 합리를 대변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한다”고 고언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이제 진보 진영 내에서 중도파는 사실상 멸종위기종이 됐다. 좌파 정체성을 강화한 진보는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을 내세웠고 그해 대선에서 패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진보를 살린 건 선거에서 승리한 보수정권이었다. 진보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문제를 둘러싸고 분열한 보수를 딛고 정권을 잡은 뒤 진보 노선을 강화하고 있다.

보수는 여전히 탄핵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체성이 뭐냐고 묻는 것조차 사치에 가까운 상황이다. 그래서 ‘영혼이 없는 보수’라는 말이 나온다. 최근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어떤 의원은 ‘좀비 정당’이란 표현까지 사용했다. 유승민의 중도보수도 탄핵 문제에 발목이 잡혀 중도 세력으로서의 정체성을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다. 진보는 더 왼쪽으로 이동하고 보수는 혼란에 빠져 있는 정치 지형이 안철수의 활동 공간이 되고 있다.

중도를 표방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중도 노선으로 승리하는 것이 어렵다. 안철수는 정치를 재개하면서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거론했다. 마크롱은 소속 정당(사회당)의 좌경화에 반기를 들었다. 마크롱은 “나의 정치적 견해는 완고한 이데올로기 신봉자들과는 정반대”라고 말했다. 프랑스 유권자들은 거대 양당의 후보 대신 신생 정당의 마크롱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진짜 중도는 정략이 아니라 국익을 우선하는 정치 노선이다. 보수 또는 진보의 정체성이 다소 훼손되더라도 상대 진영의 가치를 채용하는 결단이다.

서구 선진국에서는 이런 중도 노선이 생기를 잃은 진보의 회생 수단으로 활용되곤 한다. 미국 민주당의 빌 클린턴은 복지 감축과 금융규제 완화 같은 중도 전략으로 보수 공화당의 대통령 독식 시대를 마감시켰다. 클린턴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미국 민주당은 공화당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낙마한 반사이익으로 카터 대통령을 배출했을 뿐 대선에서 연전연패했다. 클린턴의 승리 직후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도 사회민주주의 노선에 보수의 시장경제 요소를 가미한 ‘제3의 길’을 주창하면서 노동당의 체질을 바꿨다. 노동자의 정당에서 국민 정당으로 탈바꿈한 노동당은 재집권에 성공했다.

사실 중도 노선으로 승리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권력을 잡은 뒤에도 중도 정치를 펴나가는 일이다. 핵심 지지층의 이해와 충돌하는 정책을 추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독일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집권 시절 보수의 고용유연성 노선을 받아들이는 노동 개혁을 추진했다. 사민당은 다음 총선에서 정권을 잃었다.

조남규 정치부장

"저희가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SV)는 착한 일, 좋은 일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지속적인 생존과 성장이 목적입니다.”

SK수펙스추구위원회 이형희 SV위원장(사장)은 10일 서울 종로구 SK서린사옥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그 자체가 성장에 관한 개념”이라며 “박수를 받으며 돈을 벌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공의 이익’과 연결되는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겠다는 취지다. SK에서 20년 가까이 대관(CR) 업무를 담당해온 이 위원장은 올해 초 이 같은 최태원 SK 회장의 꿈을 실현할 총괄 책임자로 선택됐다.

이 위원장은 “지금의 글로벌 룰 세터(rule―setter: 규범과 제도를 설계하는 주체)는 세계적 자본”이라면서 “그들이 지금 ‘사회적 가치’, ‘기업 시민’(포스코가 추구하는 경영이념)과 같은 공공 담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위원장은 “누가, 이를테면 최태원 회장이 애기한다고 해서 따르는 게 아니다”며 “세계적인 조류 안에서 우리가 뭘 해야 할지 찾고자 하는 것”이라고 그룹의 변화 배경을 설명했다.

SK는 올해 초 그룹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 안에 있던 ‘사회공헌위원회’를 ‘SV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 위원장이 이끄는 SV위원회는 그룹 내 관계사가 창출하는 SV를 수치화해 평가할 지표를 만들고, 이를 핵심성과지표(KPI)에 50% 이상 반영하겠다고 선언해 재계의 관심을 끌었다.



―‘사회적 가치’란 개념이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기업이 지속적으로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한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보면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돈을 벌려는 그들의 이기심 때문’이란 구절이 있다. 과거엔 싸고 배부른 빵이 선택을 받았지만 이제는 몸에 좋고 환경에도 좋은 빵이 선택받는 시대다. SK는 이런 시대 변화를 전략에 반영해 좀더 지속가능한 사업 방식을 택하려는 것이다.”

―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3만달러 수준이다. 아직은 이윤을 더 투자해서 성장하는 데 집중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많이 다르다. SV를 추구하는 것이 성장이다. 환경문제, 사회문제는 우리한테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대표적인 이슈다. 어느 날 갑자기 큰 규제가 들어올 수 있다. 또 한편으론 남들이 위기이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할 때 거기서 큰 시장, 새로운 사업의 기회가 열릴 수 있다는 입장이다. 기업은 가장 기업다운 방식으로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새로운 돈 버는 방법, 생존전략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SV를 추구하는 것이다.”

―압축성장 시대의 성장전략과는 다른 길이다.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고 지금은 아닌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지금 룰세터가 누구냐. 글로벌 자본들이 큰 권한을 갖고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룰을 만드는 게 아니라 따라야 하는 입장이다. 이제는 이런 것(SV 등)에 세계적인 공감대가 생겨버렸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글로벌 자본의 포식자 행태가 도마 위에 올랐는데 그쪽 생각이 바뀐 것인가.

“많이 바뀌었다. 최근 국제사회에선 자본주의가 주주이익만 좇을 것이 아니라 다양한 대안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인식이 공감대를 넓히고 있다. 애플, 페이스북, JP모건 등 200개 미국기업 CEO 모임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이 지난 8월 ‘포용적 번영’을 강조했다. 이들이 ‘기업의 사명에 대한 성명’을 발표한 것은 가장 상징적인 변화다. 이윤을 극대화하고 주주가치를 높이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 주주 자본주의를 재검토하자는 거다.”

―다른 기업들도 바뀌어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포스코와 많이 소통하는데 우리와 똑같은 생각을 한다. 기관 투자가에게 ESG(환경·사회적 책임·지배구조)는 필수적인 고려사항이 됐다. 이 조류에 대응하지 못하면 자본조달은 점점 어렵고, 더 나아가 소비자의 외면을 받을 것이다. SV는 대세이고, 보편적인 담론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세상은 변하고 있다.”

―그런 사업이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나.

“SK 사업 모델이 과연 미래에도 안정적일까. 정유나 석유화학, 정보통신기술(ICT)은 모두 수십년 전 모델이다. ICT만 해도 망을 깔고 트래픽 많이 일으켜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사업 모델이었다. 이젠 아니다. 구글 같은 곳이 더 많은 돈을 번다. 그들이 망을 까나, 아니다. 그들은 데이터를 이용해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고 있다. T맵과 동부화재가 협업한 연계상품 보험을 예로 들겠다. SK는 운전자 습관을 알게 되고, 소비자들은 할인 혜택을 받는다. 동부화재는 소비자로부터 이익을 얻고, 국가적으로 보면 사고율이 15% 정도 떨어진다. 어느 지점에 과속, 사고가 많은지 데이터가 쌓인다. 안전은 높아지고 비용은 떨어진다. 모든 이해관계자에게 좋은 일이 생기는 데서 돈을 번다면, 우리가 돈을 많이 버는 것에 어느 누가 반대할 것인가. 여기에 들어가는 기술이 인공지능(AI), IoT(사물인터넷), 센싱, 데이터 처리 등이다. 이런 연구개발(R&D) 지출이 많아지겠지만 이것을 비용으로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투자를 할 때 어디에 해야 박수를 받을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납세, 고용 등은 기업 본연의 활동이다. 이를 SV로 평가한다는 게 옳은 접근인가.

“SK가 납세, 고용을 SV로 규정한 이유는 이들 가치를 다른 고객 가치와 동일하게 관리하겠다는 의미다. 즉 경제적 가치만 측정하는 ‘싱글 보텀 라인’(Single Bottom Line) 관점에서 납세, 고용은 줄여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더블 보텀 라인’(Double Bottom Line)에서는 납세, 고용을 늘릴 경우 SV가 높아진다.”

―그래서 일자리를 늘렸나. 고용의 질도 중요하다.

“고용은 경직성이 바탕에 깔리기 때문에 부담되는 게 사실이다. 우리 그룹의 채용 통계를 보면 정규직 비중이 확대됐다. 전체 채용 면에서도 삼성그룹 다음으로 많이 늘렸다.”

―기업에는 부정적인 요인이 아닌가.

“지금까지는 매출은 맥시마이즈(Maximize), 비용은 미니마이즈(Minimize), 그래야 이익이 맥스마이징(Maximizing)된다고 하는 판단이 주류였다. 저는 요즘 옵티마이즈(Optimize), 즉 최적화가 맞다는 말을 많이 한다. 매출을 맥시마이즈에 집중하면 부작용이 많다. 주주에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니 단기 실적을 올리고 투자를 줄인다. 장기적 관점을 가진다면 올해 이익이 줄더라도 내년 이익을 더 크게 하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임기가 정해진 최고경영자(CEO)들이 그러기는 쉽지 않다. 우리 이익을 늘리는 것과 사회적 압력에 따른 비용의 상관관계를 볼 줄 아는 게 CEO의 능력이라고 본다.”

―서울에서 부산을 간다고 보면 SK의 SV 경영은 어디쯤 와 있는가.

“이제 서울을 빠져나가는 톨게이트 근처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4월 SK가 출연한 비영리 연구재단이 출범해 공기업 28곳과 평가 지표와 기준을 표준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8월엔 독일 바스프와 손을 잡고 글로벌 기업이 참여하는 비영리법인을 출범했다. SV 계량화 연구와 글로벌 표준화 작업이 목적이다. 중국 국유자산 관리감독위원회 및 산하 국영기업과도 같은 작업을 하고 있다.”

―여태 거기 밖에 못 갔나.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는 거다. 이제 계획 수립 단계다. 실행이 됐구나 하려면 최소 3∼4년, 길게는 5∼10년은 걸릴 것이다. 물론 단기간에 작은 건 많이 바뀔 거다. 하지만 그 정도 하려고 회장이 그렇게 얘기하고 그룹에서 이런 조직을 만든 게 아니다. 사업만 놓고 보면 에너지 쪽이 제일 SV와 역행한다. 전환돼야 할 에너지원을 다룬다. 그런 부문을 변화시키기가 가장 힘들 것 같다. 전기차 배터리 같은 걸 하는 게 결국 선제적으로 준비하자는 취지다.”

―SK CR(대관) 업무를 오래 담당했다. 본인 역할은 뭐라고 보는가.

“SK에서 CR는 ‘이해관계자의 기대와 요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들에게 우리가 뜻하는 바를 올바르게 알려 경영에 도움이 되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오해하기 쉽고 이해하기 어려운 SK의 사회적 가치를 제대로 알려 신뢰와 지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제 스스로의 미션이자 회장께서 바라는 바가 아닐까 생각한다.”

 

대담=조남규 산업부장, 정리=조현일 기자

 

이 위원장은 ●1962년 경북 안동 ●신일고등학교●고려대학교 산업공학과 학사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SK텔레콤 사업총괄 ●SK브로드밴드 대표이사 ●SK 수펙스추구협의회 SV위원장

 

필리핀 대통령실 차관을 지낸 데일 카브레라가 농구 선수 신동파 얘기를 꺼냈을 때 속으로 뜨끔했다. 지난 20일 세계일보 주최로 열린 ‘2019 세계아세안포럼’에서다. 패널로 나선 카브레라 전 차관은 “신동파 선수는 지금도 필리핀에서 인기가 있다”면서 올해로 수교 70년을 맞는 한·필리핀 우호·협력의 상징으로 그를 내세웠다. 신동파는 1969년 필리핀에서 개최된 아시아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혼자 50득점을 하며 당시 아시아 농구 최강이던 필리핀을 무너뜨린 주역이다. 이를 계기로 필리핀에서는 신동파 이름을 붙인 상점들이 대거 생겨났다. 자국 팀의 우승을 좌절시킨 상대국 선수가 영웅 대접을 받은 셈이다. 농구를 잘했다고 그런 대접을 받았을까. 언젠가 신동파가 언론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내비친 적이 있다. “내가 치고 들어가다가 필리핀 선수가 파울을 해서 걸려 넘어지면 관중들이 난리가 났다.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프리드로라인으로 갔다. 심판한테는 꼭 인사를 했다. 그러면 필리핀 기자들이 항상 신문에 ‘필리핀 농구 선수들이여, 신동파의 매너를 배워라’ 하는 식의 기사를 썼다.” 카브레라 전 차관은 신동파를 띄우면서 한·아세안 관계가 앞으로 ‘신사다운’ 방식으로 발전하길 원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일본, 중국보다 아세안 진출이 늦은 후발 주자다. 일본과 중국은 수십년 전부터 경제 지원과 화교(華僑) 등을 활용하며 아세안 공략을 본격화했다. 일본과 한국의 자동차 시장 점유 비율(2017년 기준)은 인도네시아 99대 1, 태국 87대 1이다. 베트남은 47대 32로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전체적으로 아세안은 일본의 텃밭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아세안 국가들의 정서는 일본이나 중국보다는 한국에 우호적이다. 신동파나 박항서, 한류(韓流) 스타들의 활약이 컸다. 더 깊은 곳에는 식민지로 전락했던 아픔을 공유한 한국과 아세안 국가들의 동류 의식이 깔려 있을 것이다. 아세안을 사로잡은 한국의 또 다른 매력은 우리의 성공 경험이다. 한국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낀 지정학적 숙명을 극복하고 전쟁의 폐허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내는 저력을 보였다. 한국은 아세안 국가들의 롤 모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아세안 진출은 중국이나 일본의 아세안 공략과는 달라야 한다. 그간 일본과 중국은 자국에서 경쟁력을 잃은 산업을 아세안으로 이동시켜왔다. 이런 방식은 더 이상 아세안의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게 본지 포럼에 참여한 아세안 현지 패널들의 지적이었다. 아세안 국가들은 일본과 중국의 아세안 진출이 자신들과의 상생으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본지 인터뷰에서 “아세안 국가들에 ‘너희는 글로벌 가치 사슬의 끝에서 우리를 따라와라’는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중국, 일본과 차별성을 갖기 어렵다”고 말했다. 우리의 아세안 진출이 값싼 노동력을 찾아 중국에서 아세안으로 공장을 옮긴다는 차원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세안과 4차 산업혁명시대를 함께 열어가겠다는 열린 자세, 경제협력 사업을 통해 상생하겠다는 동반자 정신이 필요하다.

우리 국민의 노력도 필요하다. 최근 주형철 신남방정책특위 위원장과 만난 베트남 부총리는 “매년 한국인과 결혼하는 3000명의 베트남 여성들이 다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고 한다. 필자는 그 사실을 전해듣고 카브레라 전 차관이 신동파를 언급했을 때처럼 부끄러웠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아세안 이주 여성들의 인권이 유린되고 있다. 매년 2명꼴로 낯선 한국 땅에서 살해되고 있다. 지금 부산에서는 한·아세안 정상들이 아시아의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있다. 정상회의만으론 부족하다. 이주여성 출신 국회의원도 필요하지만 우리 사회가 아세안 이주민들을 포용해야 한다. 그래야 아세안에서 한국의 국격(國格)이 높아지고 아세안에 진출한 우리 국민이 대우받게된다. ‘Do ut Des’(도 우트 데스)라는 법언이 있다. ‘네가 주기 때문에 내가 준다’는 뜻이다. 근대 국제법의 상호주의 원칙이 이 법언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아세안의 미래 모습도 이 원칙 위에서 만들어져 갈 것이다.

조남규 산업부장

成 장관 “먼저 진출한 日·中 이길 수 있도록 ‘정교한 전략’ 추진” [아세안을 기회의 땅으로]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왼쪽),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미·중 무역분쟁과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규제 등으로 통상환경의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서 기존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중심 외교에 머물지 않고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지역과의 외교와 교역관계를 도약시키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세계일보가 20일 개최하는 ‘2019 세계아세안포럼’ 관련 특별 대담에서 “자금이나 인력 등 가용 자원이 경쟁국에 비해 제한되어 있지만 우리보다 앞서 아세안에 진출한 일본, 중국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정교한 전략을 수립, 추진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성 장관과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의 특별 대담은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외빈접견실에서 조남규 세계일보 산업부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가운데)과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왼쪽)가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외빈접견실에서 한·아세안 경제협력 방안 등을 주제로 대담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아세안 국가들에는 중국과 일본이 오랜 시간 공을 들여왔다. 일본은 1970년대에 아세안 프로젝트를 가동했고 90년대에는 일·아세안 특별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중국도 90년대부터 화교 등을 지렛대로 아세안에 진출했다. 아세안 진출 후발주자인 한국의 전략은 무엇인가.

(성 장관) “아세안이 일본의 텃밭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베트남에서는 현대기아차가 일본 도요타와 대등하게 경쟁하고 있다. 삼성전자 베트남 공장에는 10만명이 넘는 베트남 청년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아세안을 비롯한 신남방 지역은 중동 지역을 제치고 우리 기업이 해외 인프라 사업을 가장 많이 수주한 지역이 됐다. 우리 금융기관이 가장 많이 진출한 지역이기도 한다. 최근에는 말레이시아 신재생에너지 융복합 실증사업, 베트남 티바이 LNG 터미널 사업 같은 핵심 인프라를 따내는 성과가 나오고 있다. 더욱이 아세안 국민들은 한국을 일본이나 중국보다 더 가깝게 느낀다. 베트남 청년 70%는 한국 문화에 동질감을 느낀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아세안 국가 입장에서는 중국이나 일본이 진출한 이후 20, 30년 동안 자기들이 크게 나아진 게 없다는 인식도 하고 있다. 그런 만큼 우리의 강점과 상대국의 특성을 세밀히 분석하고 정교한 전략을 수립해나가면 아세안은 우리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아세안 국가에 일방적으로 ODA(공적개발원조)를 주면서 끌고가는 것이 아니라 개발 프로젝트 등에 참여해 함께 발전해나가야 한다.”

(안 교수) “이미 일본, 중국의 기업들은 대규모 투자를 통해 상당수 아세안 국가들의 국내 제도까지 자국 기업들에 유리한 방식으로 구축해둔 상황이다. 현재 아세안 국가에서 유행하는 한류(韓流)는 한국 기업들과 제품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데, 민관 차원의 노력으로 이를 활용하는 게 중요하다. 정부 차원의 개발협력사업과 민간 차원의 사회적 책임활동 강화로 아세안 국가들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함께 발전하겠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오른쪽)과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외빈접견실에서 한·아세안 경제협력 방안 등을 주제로 대담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최근 전 세계 인구 4위 국가인 인도네시아와 CEPA(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협상이 타결됐다. 사실상 한·인도네시아 FTA(자유무역협정) 타결이다. 이제 말레이시아, 필리핀과의 FTA가 남아 있다. 기존 한·아세안 FTA와 아세안 국가들의 양자 FTA는 어떻게 차별되나.



(성 장관) “2007년 발효된 한·아세안 FTA는 참여 국가들의 민감한 부분이 서로 달라서 우리의 이익을 모두 반영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한·베트남 FTA(2015년 발효) 같은 양자 FTA를 통해 서로의 관심 사항을 추가로 반영하고 양국 간 교역과 협력을 확대시켜왔다. 인도네시아는 한·아세안 FTA에서 자국 시장의 80%를 우리에게 열었고 이번 CEPA에서는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 철강, 석유화학제품 등 우리의 주력 수출품목 시장도 개방했다. 시장 개방 비율이 93%까지 높아졌다.”



(안 교수) “아세안 국가와의 FTA는 시장개방뿐 아니라 무역 및 투자 관련 규제 조화를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실질적인 경제 통합을 진전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공산품, 가공식품 부문의 관세 인하뿐 아니라 기술표준과 위생기준 상호인증을 활성화해 비관세 장벽을 실효성 있게 제거해야 한다.”

―글로벌 통상 환경이 상당히 복잡하게 흐르고 있다. G2(미국·중국)의 무역 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지난해 12월에는 미국이 빠진 채로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가 발효됐다. 이달 초에는 아세안 10개국과 한국, 중국, 호주, 뉴질랜드, 일본 등이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협정문 타결을 선언했다.

(성 장관) “RCEP는 세계인구 절반, 전 세계 GDP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세계 최대의 FTA이며, 우리가 참여하는 최초의 메가 FTA다. 젊고 성장 잠재력이 풍부한 국가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는 만큼 새로운 기회 창출과 G2를 넘어선 교역 다변화가 기대된다. RCEP는 신남방정책을 더욱 본격화해 역내 교류·협력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투자 여건이 개선되고, 원산지 기준을 통일해 역내 무역·투자가 확대되는 등 신남방 국가와의 경제 협력 전반이 활성화될 것이다. 이번에 도입된 전자상거래 같은 새로운 통상 규범을 통해 한류를 더욱 확산하는 계기도 되고, 4차 산업혁명 분야의 협력도 기대된다.”

(안 교수) “RCEP는 미국이 포함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이 포함된 메가 FTA다. 현 시점의 미·중 대치 국면에서 의미가 크다. 무엇보다도 한·일, 한·중·일이 하나의 경제통합 틀 속에 묶인 부분이 주목할 점이다. 최종적인 협상 결과를 봐야겠지만 향후 이를 어떻게 발전시킬지 여부에 따라 동아시아 경제통합에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일본 주도로 한·중·일과 아세안 국가가 참여하는 EAC(동아시아공동체)가 추진됐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EU(유럽연합)가 모델이었는데 그때도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참여하지 않았다. 지금도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펴며 중국의 세력 확산을 견제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이 참여하는 동아시아 경제공동체가 가능하기는 한가. 미국과 밀월관계인 일본이 중국 주도의 RCEP에 참여한 배경이 궁금하다.

(성 장관) “EU 같은 경제통합 형태는 매우 이상적이지만 아시아 지역에서 그런 모델이 실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 경제통합협력체를 만든다기보다는 역내에 새로운 협력의 유형과 공동체 유형을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과거처럼 선진국의 제조업이 후진국으로 이전되는 산업발전 전략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중국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과거 세계의 생산 기지에서 세계의 시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제조도 단순 제품 생산만이 아니라 고부가가치 상품이 생산되는 나라가 됐다. 중국의 변화를 직시하면서 중국과의 협력 형태와 유형을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안 교수) “일본 아베 정부는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타결 이후부터 매우 적극적으로 미국과 경제협력에 나서고 있다. 미·일 무역협정 타결은 물론이고 WTO(세계무역기구)를 개편하려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면서 유럽연합과 함께 개편안 준비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RCEP 합의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입장과는 다소 배치되는 측면이 있다. 좀 의아한 부분이다. 아베 정부가 TPP 타결 시 대외개방정책을 전방위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RCEP 협정문 타결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

(성 장관) “RCEP에서도 WTO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상품 교역을 위해 수량제한조치를 일반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봤을 때 참여국들이 RCEP의 틀 내에서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수출규제 조치 등을 공동으로 논의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안 교수)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는 한·일 청구권협정 문제와 얽혀 있고 이 사안에 대한 아베 정부의 입장이 확고하다. 단기적으로는 RCEP 합의가 일본 정부의 입장을 변화시킬 것으로 예상되지 않는다.”

―아세안과의 경제협력을 성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안 교수) “FTA 확대로 아세안과의 무역, 투자는 지속적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무역흑자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아직 경제개발 수준이 낮은 아세안 국가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다. 그런 만큼 비경제 분야에서 한국의 이미지와 인식을 제고할 수 있는 경제개발 관련 협력이나 문화협력사업을 지속적으로 확대해나가야 한다. 통상교섭의 성과를 보다 폭넓은 경제외교의 발판으로 만드는 작업이 추진됐으면 한다.”

정리=김수미 기자 leolo@segye.com, 사회=조남규 산업부장

 

성윤모 산업부 장관은… ●1963년 대전, 대전 대성고, 서울대 경제학과, 서울대 행정대학원 정책학 석사, 미국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행시 32회, 국무조정실 경제조정실장, 특허청장

안덕근 서울대 교수는… ●1968년 대구, 대구 덕원고,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미국 미시간대 경제학 박사·법무박사, 국민경제자문회의 자문위원, 무역구제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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